마누일 1세 콤니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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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누일 1세 콤니노스는 1143년부터 1180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다.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의 아들로, 제위에 오른 후 제2차 십자군을 맞이하고 룸 술탄국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서방과의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패배하며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그는 헝가리, 세르비아 등 발칸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십자군 국가들에 대한 종주권을 확립하며 제국의 번영을 이끌었으나, 말년에는 건강 악화와 내외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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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일 1세 콤니노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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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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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누엘 1세 콤네노스 |
로마자 표기 | Manouēl Komnēnós |
그리스어 표기 | Μανουήλ Κομνηνός |
별칭 | ὁ Μέγας (대제) |
직책 | 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 |
재위 기간 | 1143년 4월 8일 – 1180년 9월 24일 |
이전 황제 |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
다음 황제 | 알렉시오스 2세 콤니노스 |
배우자 | 베르타 폰 슐츠바흐 마리아 오브 안티오크 |
자녀 | 마리아 콤네네 알렉시오스 2세 콤네노스 |
왕조 | 콤네노스 왕조 |
아버지 |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
어머니 | 이리니 오브 헝가리 |
출생일 | 1118년 11월 28일 |
사망일 | 1180년 9월 24일 |
종교 | 동방 정교회 |
추가 정보 | |
출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
사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
매장지 | 판토크라토르 수도원 |
2. 생애
마누일 1세 콤니노스는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와 황후 헝가리의 이리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143년 아버지 요안니스 2세가 킬리키아 원정 중 사망하면서 후계자로 지명되었다.[3][4]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형 이사키오스를 제치고 황제로 추대된 마누일은, 궁정 비서관 요안니스 악수크를 섭정으로 임명해 수도로 보내 형과 삼촌을 체포하게 했다. 그해 8월, 마누일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황제 대관식을 치렀고,[5] 지위가 안정되자 형 이사키오스를 석방했다.[5]
1144년 에데사 백국이 이마드 앗 딘 장기에게 점령당하자, 안티오키아 공국의 레몽은 마누일 1세에게 도움을 청했고, 마누일은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다.[12] 제2차 십자군이 결성되어, 1147년 마누일 1세는 독일 왕 콘라트 3세와 프랑스의 루이 7세가 이끄는 제2차 십자군에게 영토 통과를 허가했다.[12] 비잔티움인들은 십자군을 두려워했고, 마누일 1세는 시벽을 수리하고 두 왕에게 영토 안전 보장을 요구했다.[13]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밖에서 비잔티움 군대와 콘라트 3세 군대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고, 비잔티움은 독일군을 물리쳤다.[13][14] 이후 마누일 1세는 콘라트 3세와 동맹을 맺었다.[15]
1147년 시칠리아 왕국의 루지에로 2세가 코르푸를 함락하고 그리스 해안을 약탈하자, 마누일 1세는 1148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1149년 코르푸를 되찾았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3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1152년 콘라트 3세가 죽고 프리드리히 1세가 즉위하면서 동맹이 단절되었다.[15] 1155년 마누일 1세는 군대를 남부 이탈리아로 파견하여 반란군을 지원했으나, 1156년 브린디시 전투에서 패배하여 영토를 빼앗겼다.[24] 1157년 굴리엘모 1세와 평화 조약을 맺어 비잔티움 제국은 이탈리아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했다.[35] 마누일 1세는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연합을 대가로 로마 제국의 부흥을 꿈꿨고, 1157년 교황 하드리아노 4세와 동맹을 맺었다.[27] 그러나 비잔티움 사령관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동맹군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1156년 브린디시 전투에서 노르만족에게 패배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이탈리아 통치는 막을 내렸다.[34]
1156년 안티오키아 공국의 레날드가 키프로스를 침공해 약탈하자, 마누일 1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방으로 원정하여 킬리키아의 모든 도시를 다시 비잔티움의 수중에 넣었다. 레날드는 맨발로 황제에게 엎드려 복종했다.[17][18][19][20][21][22][23] 1159년 마누일 1세는 안티오키아에 입성하여 보두앵 3세와 우호관계를 맺고 십자군 국가들의 맹주임을 확인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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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국가 예루살렘 왕국의 아말릭 1세는 이집트 지배를 위해 마누엘 1세와 동맹을 맺었다. 1169년 가을, 마누일 1세는 아말릭 1세와 함께 이집트로 공동 원정대를 파견했으나,[55][56] 1169년 10월 27일 다미에타(Damietta) 포위 공격은 실패했다.[58] 1171년, 아말리크 1세는 직접 콘스탄티노플로 와서 마누엘 1세의 환영을 받았다. 아말리크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예루살렘은 비잔틴 제국의 위성 국가가 되었다.[62]

1158년에서 1162년 사이, 비잔티움 제국은 룸 술탄국의 셀주크 터키에 대한 군사 원정을 수행하여 제국에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였다.[40][64] 1176년 9월 17일, 마누엘 1세는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셀주크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2세에게 저지당했는데, 그의 군대는 좁은 산길을 행군하는 동안 매복을 당했다.[40][70] 마누엘 1세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72]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의 패배는 마누엘 1세 개인과 제국 모두에게 큰 굴욕이었다.[70] 그러나 비잔티움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감소시키지는 않았다.[70] 비잔티움 정규군의 제한된 손실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 이듬해 마누엘 1세의 군대는 터키군을 격파했다.[67] 요한 콤네누스 바타체스는 히엘리온과 레이모케이르 전투에서 터키군을 전투력으로서 효과적으로 섬멸했다.[76]
1161년 헝가리의 왕 게저 2세가 죽자 마누엘은 헝가리의 후계 문제에 개입했다. 1164년부터 3년 동안 도나우 강을 건너 헝가리와 전쟁을 벌여 달마티아, 보스니아, 시르미아, 크로아티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48] 1172년 이슈트반 3세가 죽자 마누엘과 행동을 같이 했던 벨러 3세가 헝가리의 왕위에 올랐고, 마누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마누엘은 이탈리아 원정 중, 그리고 그 이후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투쟁 중에 교황들을 설득하려 했다. 1155년 교황 아드리아노 4세는 교회 재통합을 추진하려는 열의를 표명했지만, 지속적인 교황-비잔티움 동맹은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다.[30]
1158년 이후, 마누엘 1세는 프리드리히 1세의 이탈리아 직접 병합 목표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프리드리히 1세와 북부 이탈리아 코뮌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자, 마누엘 1세는 롬바르디아 동맹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40] 1176년 5월 29일 레냐노 전투에서 프레데리크 1세의 패배는 오히려 이탈리아에서 마누엘 1세의 입지를 개선한 것으로 보였다. 1171년 3월 마누엘 1세는 갑자기 베네치아와 관계를 끊고, 제국 영토 내에 있는 베네치아인 2만 명을 모두 체포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명령했다.[44] 분노한 베네치아는 120척의 함대를 비잔티움에 보냈다. 전염병과 150척의 비잔티움 함선의 추격으로 함대는 큰 성공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45]
마누엘 1세는 전쟁은 외교를 활용하여 다른 세력에게 싸움을 맡기고,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장기전을 피해 강화로 이끄는 군사적 특징을 보였다. 마누엘 1세는 영토 확장보다 주변국에 대한 권위를 행사하는 데 힘을 쏟았고, 봉건제를 주변에 적용하는 데 힘썼다.
1174년 모술의 누레딘이 죽자 다니슈멘드는 방패막을 잃어버리고 킬리지 아르슬란 2세의 침공을 받았다. 1176년 여름 마누일은 군대를 이끌고 이코니움으로 진격하였는데 전략적 실수를 범하여 미리오케팔룸 전투에서 패배했고, 더 이상 동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아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하지 못했다. 미리오케팔룸 전투 패배 이후 마누일은 계속 건강이 좋지 않았다. 1180년 9월 24일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06]

2. 1. 제위에 오르다
마누일은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와 황후 헝가리의 이리니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이었다. 위로 두 형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셋째 아들 이사키오스와 마누일만 남았는데, 이사키오스는 성질이 급한 반면에 마누일은 부드러운 성격이었다. 1143년 4월 8일 킬리키아에서 안티오키아 원정 중이던 요안니스 황제가 죽으면서, 함께 원정에 나섰던 막내아들 마누일을 후계자로 삼았다.[3][4]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형 이사키오스가 있었고, 자신은 수도에서 먼 킬리키아에서 추대된 황제였기 때문에 제위가 불안했던 마누엘은 재빨리 궁정 비서관 요안니스 악수크를 섭정으로 임명해 수도로 보내어 형과 삼촌을 체포하게 했다.악수크가 수도에서 미리 애써준 결과, 마누일은 그해 8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무사히 황제의 대관식을 치렀다.[5] 며칠 후, 황제로서의 지위가 안전해지자 마누일은 이사키오스를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5] 그런 다음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모든 가구주에게 두 개의 금화를, 비잔티움 교회에는 약 90.72kg의 금(연간 200개의 은화 포함)을 주도록 명령했다.[6]
2. 2. 제2차 십자군
1144년 말, 이마드 앗 딘 장기는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였다. 장기의 위협에 안티오키아의 레몽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적대 행위를 버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서 마누일 1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누일은 안티오키아 공국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다.[12] 에데사 백국의 멸망은 유럽에서 다시 한번 십자군의 기치를 들게 만들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선동했고,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 왕 콘라트 3세를 중심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출정하였다.1147년 마누일 1세는 독일의 콘라트 3세와 프랑스의 루이 7세가 지휘하는 제2차 십자군 두 군대에게 그의 영토를 통과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12] 비잔티움 제국 궁정에는 제1차 십자군의 통과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는데, 이는 마누일 1세의 고모인 안나 콤네나가 주목했던 시대의 중요한 사건이었다.[12]
많은 비잔티움인들은 십자군을 두려워했고, 이는 비잔티움 영토를 통과하면서 무질서한 군대가 저지른 수많은 파괴와 절도 행위로 확인되었다. 비잔티움 군대는 십자군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행동을 감시하려 했고, 수많은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집결하여 수도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준비를 했다.[13] 마누일 1세는 시벽을 수리했고, 그의 영토의 안보에 관한 보장을 두 왕에게 요구했다.[13] 콘라트 3세의 군대는 1147년 여름에 가장 먼저 비잔티움 영토에 진입했고, 비잔티움 자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13] 당대 비잔티움 역사가인 킨나모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밖에서 비잔티움 군대와 콘라트 3세 군대 일부 사이에 전면적인 충돌을 묘사하고 있다. 비잔티움인들은 독일군을 물리쳤고, 콘라트 3세는 그의 군대를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해안에 있는 다말리스로 신속하게 수송했다.[13][14]
1147년 이후 두 지도자 사이의 관계는 더욱 우호적으로 변했다. 1148년 마누일 1세는 그의 처남의 누이인 베르타 폰 줄츠바흐의 남편인 콘라트 3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독일 왕을 설득하여 시칠리아의 로제르 2세에 맞서 동맹을 갱신했다.[15]
2. 3. 이탈리아 원정
1147년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가 코르푸를 함락하고 그리스 해안을 약탈하자, 마누일 1세는 1148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1149년 코르푸를 되찾았다. 마누일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3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1152년 콘라트 3세가 죽고 프리드리히 1세가 즉위하면서 동맹이 단절되었다.[15]1154년 루지에로 2세가 사망하고 굴리엘모 1세가 즉위하자, 아풀리아 귀족들이 마누일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누일 1세는 1155년 미하일 팔레올로고스와 요한 두카스를 남부 이탈리아로 파견하여 반란군을 지원했다. 비잔티움 군은 빠르게 남부 이탈리아를 평정했으나, 1156년 브린디시 전투에서 굴리엘모 1세에게 패배하여 영토를 빼앗겼다.[24]
마누일 1세는 이탈리아 정책을 바꾸어 반란을 조장하는 한편, 1157년 굴리엘모 1세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비잔티움 제국은 이탈리아에 대한 종주권을 완전히 상실했다.[35]
마누엘 1세는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연합을 대가로 로마 제국의 부흥을 꿈꿨는데, 이러한 전망은 동맹 협상 중에 교황에게 자주 제시되었다. 당시 교황청은 시칠리아의 노르만족보다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를 더 선호했기에,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마누엘 1세와의 협상에 적극적이었다. 마누엘 1세는 교황에게 많은 돈과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고, 1157년 두 세력은 동맹을 맺었다.[27]
"알렉시오스 코므네노스와 두카스는… 노르만 영주의 포로가 되었고 다시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들이 이미 시칠리아인들에게 황제가 원하지 않는 많은 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인들을 매우 크고 고귀한 업적에서 빼앗았다. [그들은] … 아마도 로마인들을 너무 일찍 도시에서 빼앗았을 것이다." |
'요한 킨나모스'[32] |
그러나 비잔티움 사령관 미하일 팔레올로고스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동맹군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미하일이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면서 전투는 탄력을 잃었다. 1156년 브린디시 전투에서 노르만족이 반격해오자, 마누엘 1세가 고용한 용병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탈영했고, 현지 귀족들도 흩어졌다. 알렉시오스 콤네노스 브리에니오스가 함대를 이끌고 왔지만 전세를 뒤집지 못했고, 결국 해전에서 패배하여 요한 두카스와 알렉시오스 브리에니오스는 포로로 잡혔다.[33] 마누엘 1세는 알렉시오스 악수흐를 보내 군대를 재편하려 했으나, 이미 윌리엄 1세는 아풀리아에서 비잔티움의 점령지를 모두 탈환한 뒤였다. 결국 브린디시에서의 패배로 비잔티움 제국의 이탈리아 통치는 막을 내렸고, 1158년 비잔티움 군대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34]
2. 4. 동방 문제
1156년 안티오키아 공국의 공작 레날드는 키프로스를 침공해 약탈했다. 마누일 1세는 이에 격분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방으로 원정, 킬리키아의 모든 도시를 다시 비잔티움의 수중에 넣었다. 레날드는 맨발로 황제에게 엎드려 복종했다.[17][18][19][20][21][22][23]1159년 마누일 1세는 안티오키아에 입성, 보두앵 3세와 우호관계를 맺고 십자군 국가들의 맹주임을 확인했다. 알레포의 누르 앗 딘과 강화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24] 같은 해 셀주크의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2세와 싸웠고 3년 후 강화 조약을 맺었다. 황후 술츠바흐의 베르타 사후, 마리아를 새 아내로 맞이했다.[77]
- -]마누엘 1세의 관심은 다시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1156년, 안티오키아의 새로운 공작인 르날드 드 샤티용은 비잔티움령 키프로스를 공격했다.[17] 르날드는 섬을 약탈하고 모든 부를 약탈한 후, 생존자들을 잔혹하게 학대했다.[19][20]
마누엘 1세는 1158년에서 1159년 겨울,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킬리키아로 진군했다.[21] 킬리키아는 빠르게 마누엘 1세의 손에 넘어갔다.[22] 레날드는 굴욕적인 항복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결정하고, 목에 밧줄을 맨 자루옷을 입고 나타나 용서를 구했다. 마누엘 1세는 레날드가 제국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그를 용서했다.[77]
평화가 회복되자, 1159년 4월 12일 비잔티움 군대의 개선 입성을 위한 성대한 의식 행렬이 펼쳐졌다. 마누엘 1세는 말을 타고 거리를 행진했으며, 안티오크 공작과 예루살렘 왕은 도보로 뒤따랐다. 마누엘 1세는 군중을 위해 게임과 토너먼트를 주재했다. 5월에 그는 연합된 기독교 군대를 이끌고 에데사로 향했지만, 누르 앗딘이 6,000명의 기독교 포로들을 석방시키자 이 원정을 포기했다.[24] 만족한 마누엘 1세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그의 군대는 터키군의 기습을 받았지만,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25]
십자군 왕국 예루살렘 왕국의 아말릭 1세는 이집트 지배를 위해 마누엘 1세와 동맹을 맺었다. 1168년 정식 동맹이 체결되었고, 두 통치자는 이집트 정복과 분할에 합의했다. 마누엘 1세는 해안 지역을, 아말릭 1세는 내륙 지역을 차지하기로 했다. 1169년 가을, 마누엘 1세는 아말릭 1세와 함께 이집트로 공동 원정대를 파견했다.[55][56]
마누엘 1세와 아말리크 1세의 연합군은 1169년 10월 27일 다미에타(Damietta)를 포위 공격했지만, 십자군과 비잔틴 군의 완전한 협력 실패로 인해 공격은 실패했다.[58]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비잔틴 함대의 절반이 침몰했다.[60]
1171년, 이집트가 살라딘에게 함락된 후 아말리크 1세는 직접 콘스탄티노플로 왔다. 마누엘 1세는 아말리크 1세를 예우하고 그의 의존성을 강조하는 성대한 의식을 통해 환영했다. 아말리크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예루살렘은 비잔틴 제국의 위성 국가가 되었다.[62] 1177년, 마누엘 1세가 이집트 침공을 위해 150척의 함대를 파견했지만,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와 예루살렘 왕국의 많은 귀족들이 지원을 거부함에 따라 귀환했다.[63]
1158년에서 1162년 사이, 비잔티움 제국은 룸 술탄국의 셀주크 터키에 대한 일련의 군사 원정을 수행하여 제국에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였다.[40][64] 마누엘 1세는 셀주크의 수도 이코니움(코니아)으로 진군했다.[40] 마누엘 1세의 전략은 도뤼라이움(Dorylaeum)과 케치보를루(Sublaeum)에 기지를 마련한 후 이를 이용하여 이코니움을 신속하게 공격하는 것이었다.[67]
그러나 마누엘 1세의 군대는 크고 다루기 어려웠다. 마누엘 1세는 미리오케팔론 고개 입구에서 터키 사절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관대한 조건으로 평화를 제안했다. 마누엘 1세는 공격을 계속했다.[24]
마누엘 1세는 앞길을 제대로 정찰하지 않는 등 심각한 전술적 실수를 저질렀다.[69] 1176년 9월 17일, 마누엘 1세는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셀주크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2세에게 저지당했는데, 그의 군대는 좁은 산길을 행군하는 동안 매복을 당했다.[40][70] 군대의 공성 병기는 곧 파괴되었고, 마누엘 1세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공성 병기가 없으면 이코니움 정복은 불가능했다.[72]
킬리즈 아르슬란 2세가 마누엘 1세와 그의 군대에게 철수를 허용한 조건은 그가 도뤼라이움과 수블라이움의 국경 요새와 수비대를 철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누엘 1세는 수블라이움의 요새화만 해체하도록 명령했을 뿐 도뤼라이움의 요새화는 해체하지 않았다.[74]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의 패배는 마누엘 1세 개인과 제국 모두에게 큰 굴욕이었다. 마누엘 1세는 지나친 자신감 때문에 비잔티움이 여전히 셀주크를 결정적으로 물리칠 수 없음을 세계에 보여주었다.[70]
미리오케팔론 전투의 패배는 종종 비잔티움 군대 전체가 궤멸된 대재앙으로 묘사되어 왔다. 마누엘 1세 자신도 이 패배를 만지케르트 전투에 비유했다. 그러나 패배였지만, 큰 손실은 아니었고 비잔티움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감소시키지도 않았다.[70]
비잔티움 정규군의 제한된 손실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 이듬해 마누엘 1세의 군대는 "정예 터키군"을 격파했다.[67] 요한 콤네누스 바타체스는 터키군이 메안데르 강을 건너는 것을 매복하여 잡았고, 그 후의 히엘리온과 레이모케이르 전투에서 터키군을 전투력으로서 효과적으로 섬멸했다. 이는 비잔티움 군대가 여전히 강력했음을 나타낸다.[76] 메안데르 강에서의 승리 후, 마누엘 1세는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코티아이움 남쪽의 파나시움에서 터키군을 몰아냈다.[74]
그러나 1178년 비잔티움 군대는 헤레케에서 터키군을 만난 후 후퇴하여 터키군이 많은 가축을 포획하도록 허용했다.[77] 비티니아의 클라우디오폴리스는 1179년 터키군에 의해 포위되어 마누엘 1세가 소규모 기병대를 이끌고 도시를 구출해야 했다.[77]
끊임없는 전쟁은 마누엘 1세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1180년 서서히 진행되는 열병으로 사망했다. 만지케르트 전투와 마찬가지로 두 세력 간의 균형은 점차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누엘 1세는 다시는 터키를 공격하지 않았고, 그의 사망 후 터키는 더 서쪽으로, 비잔티움 영토 깊숙이 이동하기 시작했다.[78]
1158년 가을, 마누엘 1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키리키아(Κιλικία)·시리아(Syria) 원정에 나섰다.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었던 아르메니아인 키리키아 영주 토로스 2세가 1152년 반란을 일으켰고, 안티오키아 공 루노 드 샤티용이 제국령 키프로스 섬에서 약탈과 학살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또한 안티오키아를 제국의 종주권 하에 두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셀레우케이아에 진입한 후 키리키아 평야 지대에 진격하자, 갑작스러운 침공에 놀란 토로스 2세는 산간 지대로 도망쳤고, 제국군은 키리키아 평야 지대를 탈환했다. 몹수에스티아에 진영을 설치한 마누엘 1세는 이곳에서 십자군 국가와 무슬림 국가의 사절을 맞이하는 동안, 제국군과 누르 앗딘에게 영토를 압박받아 고립된 루노가 황제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 출두했고, 황제는 루노에게 소유지 보장과 맞바꾸어 충성과 군사 봉사를 맹세하게 했다. 예루살렘 왕 보두앵 3세의 중재로 출두한 토로스 2세에게도 같은 처분을 내리고 원정의 목표를 달성했다. 보두앵 3세와의 동맹 관계도 확인한 후, 1159년 4월 부활절을 몹수에스티아에서 축하하고, 루노와 보두앵 3세 등 여러 봉신을 거느린 군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에 입성하여 도시에 대한 최고 지배권이 황제에게 있음을 내외에 과시했다. 예루살렘 왕국과의 동맹도 계속되었고, 보두앵 3세의 동생인 아모리 1세는 마누엘 1세의 외조카 Maria Komnene, Queen of Jerusalem|마리아 콤네나영어를 왕비로 맞이하여, 1169년 황제와 함께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 원정을 계획했지만(실현되지 않음), 117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황제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했다.
1160년대에는 외교를 통해 여러 나라와의 우호·동맹 관계 구축에 힘썼다. 1161년 룸 셀주크 왕조의 술탄 킬리치 아르슬란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했을 때, 이교도를 싫어하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퍼레이드로 환영하며 호화로운 장식품으로 치장하고, 아낌없는 선물로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며 군사 원조와 황제와의 합의 없이 제3자와의 협정 체결 금지 등을 약속하는 한편, 술탄과의 신분 차이를 주변에 보여주었다.
그러나 동쪽에서는 룸 셀주크 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양국의 국경 지대에 거주하며 동로마 제국에서 약탈 행위를 일삼는 튀르크계 유목민족 투르크멘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1161년 킬리치 아르슬란 2세의 방문에서 보이듯이 양국은 잠재적인 대립을 안고 있으면서도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다. 또한 킬리치 아르슬란 2세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보다 일족이나 다니쉬멘드 왕조 등 주변의 무슬림 국가 토벌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양국에서 정쟁에 패한 왕족이나 귀족이 망명하는 현상이 자주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발전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1164년에 상황이 급변했다. 킬리치 아르슬란 2세가 동생 샤한샤와 다니쉬멘드 왕조의 술탄 둑카를 몰아내고 그들의 영토를 빼앗자, 망명한 그들의 요청으로 마누엘 1세는 1175년에 룸 셀주크 제국의 수도 코니아(이코니움) 원정 준비를 시작하여, 전선 기지로서 드뤼라이온과 스브리온 요새를 재건하고, 1176년 봄에 출병할 계획을 세우며 군비를 갖추었다.
동맹국인 헝가리인·세르비아인의 도착이 늦어져 예정보다 늦어진 1176년 여름에 동로마군은 원정을 시작했다(셀주크-동로마 전쟁). 그러나 공성 병기와 비전투원 등을 거느렸기 때문에 군의 이동이 느렸고, 소아시아에서는 적의 게릴라와 scorched-earth 전술로 인해 기근에 시달리며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군을 계속했으나, 9월 17일 중간의 협로에서 룸 셀주크군의 매복에 걸려 참패했다(뮈리오케팔론 전투). 황제는 적의 포위에서 탈출하여 고난의 후퇴를 강요받았지만, 룸 셀주크군도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적측에서 제시한 화의를 받아들여 전장에서 간신히 귀환했다. 전후 마누엘 1세는 이 전투를 말라즈기르트 전투에 비유하며 자신에게 닥친 재난을 한탄하면서도, 화의 조건에 따라 스브리온을 파괴하는 한편 드뤼라이움은 파괴하지 않고, 분노한 킬리치 아르슬란 2세가 파견한 보복군을 격퇴하는 기개를 보였으며, 양국은 교전을 반복하는 가운데 전쟁 상태에서 국경 분쟁 상태로 진정되었다.
2. 5. 헝가리 문제
1161년 헝가리의 왕 게저 2세가 죽자 마누일은 헝가리의 후계 문제에 개입했다. 독일의 콘라트 3세 사후 헝가리는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를 두고 비잔티움과 적대 관계에 있었고, 1156년 마누일은 남이탈리아 문제에 전념하기 위해 게저 2세와 평화 조약을 맺은 바 있었다. 마누일은 새로운 왕으로 게저 2세의 동생을 밀었으나 게저 2세의 아들이 이슈트반 3세로 왕이 되었다. 마누엘은 1164년부터 3년 동안 도나우 강을 건너 헝가리와 전쟁을 벌여 달마티아, 보스니아, 시르미아, 크로아티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48]1172년 이슈트반 3세가 죽자 마누일과 행동을 같이 했던 벨러 3세가 헝가리의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마누일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이 성공은 세르비아에서도 영향을 미쳐 그해 여름 마누일은 세르비아도 완전히 복속시켰다. 마누엘 1세는 북쪽 국경에서 100년도 더 전에 바실리우스 2세가 정복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때로는 불안정하게나마 그 영토를 유지해 왔다.
마누엘 1세는 사바 강을 따라 헝가리 영토를 합병하기 위해 헝가리에 반복적으로 공격을 가했다. 1151~1153년과 1163~1168년의 전쟁에서 마누엘 1세는 그의 군대를 헝가리로 이끌었고, 적의 영토 깊숙이 벌인 눈부신 기습 작전으로 상당한 전리품을 얻었다. 1167년 마누엘 1세는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의 지휘 아래 1만 5천 명의 병력을 헝가리에 보냈고,[47] 시르미움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제국이 헝가리 왕국과 매우 유리한 평화 조약을 맺을 수 있게 했다. 이 조약에 따라 시르미아, 보스니아와 달마티아가 할양되었다. 1168년까지 거의 모든 아드리아 해 동부 해안이 마누엘 1세의 손에 들어왔다.[48]
헝가리를 외교적으로 합병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3세의 동생이자 헝가리의 왕위 계승자인 벨라는 황제의 궁정에서 교육을 받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졌다. 마누엘 1세는 벨라가 자신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하고 자신의 상속자가 되어 헝가리와 제국을 통합하려고 했다. 궁정에서 벨라는 알렉시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이전에는 황제 자신에게만 적용되었던 ''데스포트''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예측하지 못한 두 가지 왕조 사건으로 상황이 급격히 바뀌었다. 1169년 마누엘 1세의 젊은 아내가 아들을 낳아 벨라가 비잔티움 황위 계승자의 지위를 잃게 되었지만(비록 마누엘 1세는 헝가리로부터 빼앗은 크로아티아 땅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1172년 이슈트반 3세가 자식 없이 죽자 벨라는 고국으로 돌아가 왕위에 올랐다. 콘스탄티노플을 떠나기 전에 그는 마누엘 1세에게 항상 "황제와 로마인들의 이익을 염두에 두겠다"는 엄숙한 맹세를 했다. 벨라 3세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마누엘 1세가 살아있는 동안 그는 크로아티아의 상속 재산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이후에야 비로소 헝가리에 재통합했다.[48]
2. 6. 서방과의 관계
베네치아 공화국은 달마티아를 노리고 있었기에 마누일 1세가 이 지역을 복속하자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1170년 8월, 콘스탄티노폴리스 내 갈라타에서 제노바 조계가 공격받자 제국 정부는 이를 베네치아인들의 소행으로 간주했다. 1171년 3월 12일, 마누일은 제국 내 모든 베네치아인을 구금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조치를 단행했다.[113]이에 베네치아의 도제 비탈레 미키엘 2세는 1171년 9월 갤리선 100척과 수송선 20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출항했으나, 역병으로 인해 실패했다는 기록이 베네치아 측 사료에 전해진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요안니스 킨나모스는 베네치아 함대가 히오스 섬에서 비잔티움 함대에 저지되었고, 이후 비잔티움 함대가 말레아 곶까지 추격했다고 기록했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와 테오도로스 스쿠타리오테스는 킨나모스의 기록을 따라 마누일이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에게 150척의 삼단노선(triereis)을 주어 베네치아 함대를 추격하게 했다고 기록했다.[113]
한편, 마누일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교황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음을 기회로 삼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동맹을 꾀했으나, 양측의 입장 차이로 인해 실패했다.
1147년, 마누엘 1세는 제2차 십자군의 독일 콘라트 3세와 프랑스 루이 7세의 군대에게 영토 통과를 허가했다. 당시 비잔티움 궁정에는 제1차 십자군의 통과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많은 비잔티움인들은 십자군을 두려워했다.[12] 비잔티움 군대는 십자군의 행동을 감시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외부 공격에 대비했다. 마누엘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수리하고 두 왕에게 영토 안전 보장을 요구했다. 콘라트 3세의 군대는 1147년 여름 비잔티움 영토에 먼저 진입했고, 비잔티움 자료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킨나모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밖에서 비잔티움 군대와 콘라트 3세 군대 일부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비잔티움군은 독일군을 물리쳤고, 콘라트 3세는 군대를 다말리스로 신속하게 수송하는 데 동의했다.[13][14]
1148년 마누엘 1세는 콘라트 3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콘라트 3세에게 시칠리아의 로제르 2세에 맞서 동맹을 갱신하도록 설득했다.[15] 그러나 콘라트 3세는 1152년 사망했고, 마누엘 1세는 그의 후계자 프리드리히 1세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마누엘은 이탈리아 원정 중, 그리고 그 이후 교황청과 프리드리히의 투쟁 중에 교황들을 설득하려 했다. 1155년 교황 아드리아노 4세는 교회 재통합을 추진하려는 열의를 표명했지만, 지속적인 교황-비잔티움 동맹은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다.[30] 아드리아노 4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종교적 권위를 인정받고 비잔티움 황제에 대한 우월성을 추구했다.[30] 반면 마누엘은 동서 양쪽에 대한 세속적 권위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을 원했다.[36] 마누엘은 교황 알렉산더 3세에게 두 번(1167년과 1169년) 사절을 보냈지만, 알렉산더는 통합으로 인한 문제를 구실로 거절했다.[37]
이탈리아 원정의 결과는 제국이 얻은 이점 측면에서 제한적이었다. 안코나 시는 이탈리아에서 비잔티움의 기지가 되었고, 마누엘을 군주로 받아들였다. 시칠리아의 노르만족은 타격을 입었고 제국과 타협하여 평화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에 쏟아 부은 막대한 양의 금을 고려할 때, 돈과 외교만으로 달성할 수 있는 한계도 보여주었다. 마누엘의 이탈리아 개입 비용은 국고에 큰 손실을 입혔을 것이며(아마도 히페르피라 또는 약 13607.76kg의 금 이상), 그러나 제한적인 실질적 이득만을 가져왔다.[38][39]
1158년 이후, 마누엘 1세는 프리드리히 1세의 이탈리아 직접 병합 목표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프리드리히 1세와 북부 이탈리아 코뮌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자, 마누엘 1세는 롬바르디아 동맹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40] 밀라노의 성벽은 마누엘 1세의 지원으로 복구되었다.[41] 안코나는 이탈리아 내 비잔티움의 영향력 중심지로서 중요성을 유지했다. 안코나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마누엘 1세에게 복종했고, 비잔티움은 그 도시에 대표들을 유지했다.[42] 1176년 5월 29일 레냐노 전투에서 프레데리크 1세의 패배는 오히려 이탈리아에서 마누엘 1세의 입지를 개선한 것으로 보였다. 킨나모스에 따르면, 크레모나, 파비아 그리고 여러 다른 "리구리아" 도시들이 마누엘 1세에게 넘어갔다.[43] 제노바와 피사와는 관계가 우호적이었지만, 베네치아와는 그렇지 않았다. 1171년 3월 마누엘 1세는 갑자기 베네치아와 관계를 끊고, 제국 영토 내에 있는 베네치아인 2만 명을 모두 체포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명령했다.[44] 분노한 베네치아는 120척의 함대를 비잔티움에 보냈다. 전염병과 150척의 비잔티움 함선의 추격으로 함대는 큰 성공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45] 아마도 비잔티움과 베네치아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는 마누엘 1세 재위 기간 동안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다.[30]
동로마 제국의 군대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혼성군이었다. 마누엘 1세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을 세웠다. 전쟁은 외교를 활용하여 다른 세력에게 싸움을 맡기고,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장기전을 피해 강화로 이끄는 것이 당시 동로마 제국의 군사적 특징이었다. 마누엘 1세는 영토 확장보다 주변국에 대한 권위를 행사하는 데 힘을 쏟았고, 봉건제를 주변에 적용하는 데 힘썼다.
1155년부터 1157년까지의 이탈리아 원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이 실행되었고, 금전을 뿌려 각 도시를 항복시키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침을 추진했다. 그러나 시칠리아 군이 접근하자 도시는 물론 동맹을 맺은 반란 귀족과 용병들까지 항복하거나 도망치는 연약한 결속력을 드러냈다.
1159년 안티오키아 입성 후 실시한 알레포 원정에서도 직접 싸우지 않고, 누르 앗 딘과 협상하여 인질 석방과 군사 원조를 약속하는 데 그쳤다.
이탈리아 원정은 실패했지만 키리키아-시리아 원정과 헝가리 원정은 성공하여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 헝가리에 종주권을 인정받았지만, 그것은 여러 나라의 세력 균형 위에 서 있는 불안정한 지배였다.
1171년 베네치아와의 전쟁과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실패로 평가되는데, 그 이유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을 포기하고 스스로 앞장섰기 때문에 베네치아가 신성 로마 제국, 시칠리아, 세르비아 등 주변 국가들과 결탁하여 동로마 제국의 고립을 초래했고, 룸 셀주크 왕조도 미리오케팔론 전투 후 신성 로마 제국과 제휴하여 고립이 심화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176년 프리드리히 1세는 마누엘 1세와 동맹을 맺었던 교황과 롬바르디아 동맹과의 전투(레냐노 전투)에서 패했지만, 이듬해 1177년에 교황이 돌연 프리드리히 1세와 화해(베네치아 조약)하여 동로마 제국은 더욱 고립되었고, 1178년에 프리드리히 1세로부터 보낸 편지에서 마누엘 1세는 "그리스인의 왕"이라는 경멸적인 칭호로 불렸다.
2. 7. 말년 통치와 죽음
1174년 모술의 누레딘이 죽자 다니슈멘드는 방패막을 잃어버리고 킬리지 아르슬란 2세의 침공을 받았다. 1176년 여름 마누일은 군대를 이끌고 이코니움으로 진격하였는데 전략적 실수를 범하여 미리오케팔룸 전투에서 패배했고, 더 이상 동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아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하지 못했다.미리오케팔룸 전투 패배 이후 마누일은 계속 건강이 좋지 않았다. 1179년 그는 어린 아들 알렉시오스와 프랑스의 루이 7세의 딸 아녜스 공주를 결혼시켰다. 이것이 그가 거둔 마지막 외교적 성과였다. 곧 그는 중병에 걸렸고 1180년 9월 24일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06]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에 있는 아버지 옆에 안장되었다.[108]
3. 가족 관계
배우자 | 자녀 | 비고 |
---|---|---|
술츠바흐의 베르타 (1146년 결혼, 1159년 사망) | 독일 왕 콘라트 3세의 처형 | |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1161년 결혼) | 알렉시오스 2세 콤니노스 (황제) | 안티오키아의 레몽과 콩스탕스의 딸 |
마누엘 1세는 테오도라 바타치나와의 사이에서 서자 알렉시오스 콤네누스를 두었는데, 그는 황제의 아들로 인정받아 ''세바스토크라토르'' 칭호를 받았다.[87] 그는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누스의 서녀 에이레네 콤네나와 결혼했으나, 장인에 의해 눈이 멀게 되었다.[87]
요한 두카스 콤네누스의 아내인 마리아 타로니티사와의 사이에서는 ''핑케르네스''(술 따르는 사람) 칭호를 받은 알렉시오스 콤네누스를 두었다.[88] 그는 1185년 노르만족의 침략과 테살로니키 공성전의 선봉장이었다.[88]
다른 정부에게서는 1150년경에 태어나 1170년 이전에 테오도로스 마우로조메스와 결혼한 딸과,[89] 1155년경에 태어난, 저자 데메트리오스 토르니케스의 외할머니가 된 딸을 두었다.[90]
4. 평가
마누일 1세는 지중해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우위를 회복하고자 했던 정력적인 황제였다. 그의 낙관적인 전망은 대외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1] 그러나 군사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제국 복원이라는 목표는 부분적으로만 달성되었다. 일부 해설가들은 마누일 1세의 목표 중 일부, 특히 이집트 원정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한다.[90] 그의 가장 큰 군사 원정이었던 셀주크 제국과의 미리오케팔론 전투는 치욕적인 패배로 끝났고, 외교적 노력 또한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와 화해하면서 좌절되었다.[90]
역사가 마크 C. 바르투시스는 마누일 1세의 군사 개혁이 그의 야망과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했다고 평가하며, 미리오케팔론 전투의 패배가 그의 정책의 근본적인 약점을 드러냈다고 지적한다.[90] 에드워드 기번은 마누일 1세의 승리가 영구적이거나 유용한 정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평가했다.[91]
"마누엘의 성격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노동과 나태, 강인함과 나약함의 대조와 변화입니다. 전쟁 중에는 평화를 모르는 것 같았고, 평화 시에는 전쟁을 할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
에드워드 기번[91] |
마누일 1세는 서방 교회 문제에 대한 고문으로 피사 학자 휴 에테리아노를 두었다.[92] 반면, 니케아의 니키포로스는 마누일 1세가 세금을 인상하고 낭비하는 통치를 했다고 비판하며, 시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사치스럽게 돈을 썼다고 지적했다.[25] 그러나 그리스, 라틴, 동방 자료들에서도 마누일 1세가 군대, 해군, 외교, 의례, 궁궐 건설, 코무네노스 가문 등에 막대한 돈을 썼다는 점은 확인된다.[93] 이러한 지출의 상당 부분은 이탈리아와 십자군 국가에 대한 보조금, 그리고 실패한 원정(1155~1156년, 1169년, 1176년)에 사용되어 제국에 재정적 손실을 가져왔다.[93]
하지만 마누일 1세는 발칸 지역에서 제국의 국경을 확장하고 그리스와 불가리아의 안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94] 헝가리와의 전쟁(1149-1155, 1162-1167)을 통해 달마티아 해안, 시르미움, 다뉴브 강 무역로를 장악했으며, 발칸 원정에서 많은 노예와 가축을 획득했다.[94] 킨나모스는 1167년 전투 후 헝가리군에게서 빼앗은 무기의 양에 감명을 받았다고 기록했다.[95]
이러한 성공 덕분에 서부 지방은 경제 부흥을 누릴 수 있었다. 12세기 비잔티움은 헤라클리우스 통치 시대 이후 어느 때보다 부유하고 번영했으며, 무역도 번창했다.[96] 콘스탄티노플은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kommerkion''(관세)을 통해 매일 2만 ''hyperpyra''를 징수했다.[97] 콘스탄티노플은 확장되었고, 이탈리아 상인과 십자군 덕분에 국제적인 성격이 강화되었다. 베네치아인, 제노바인 등은 에게 해 항구를 개방하여 십자군 국가와 이집트에서 서쪽으로 상품을 운송하고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비잔티움과 무역했다.[99] 이러한 해상 무역은 그리스, 마케도니아 및 그리스 제도 도시들의 수요를 자극했다.[100] 테살로니키는 유명한 여름 박람회를 개최했고, 코린토스는 비단 생산으로 번영했다.[96]
궁정 웅변가들은 마누엘 1세를 "신성한 황제"라고 칭송했다. 사후 1세대 후, 코니아테스는 그를 "황제 중 가장 복된 자"라고 불렀고, 요한 스타브라키오스는 "훌륭한 업적으로 위대한 자"라고 묘사했다. 요한 포카스는 그를 "세계를 구원하는" 황제라고 칭송했다.[101] 마누엘 1세는 프랑스, 이탈리아, 십자군 국가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로 기억되었다.[77] 제노바의 한 분석가는 그의 서거로 "모든 그리스도교 세계가 큰 폐허와 손실을 입었다"고 기록했다.[102] 티르의 빌헬름은 그를 "칭찬받을 만한, 위대한 웅장함을 지닌 현명하고 신중한 군주"이자 "비교할 수 없는 활력을 지닌 위대한 영혼의 사람"이라고 칭송했다.[103] 로베르 드 클라리는 그를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자 "가장 부유하고 관대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103]
베들레헴의 성탄 성당 모자이크는 마누엘 1세가 십자군 국가에 행사했던 영향력을 보여준다. 1160년대에 재장식된 모자이크의 그리스어 비문에는 "위대한 황제 마누엘 포르피로게네토스 콤네누스 치세와 위대한 예루살렘 왕, 아말리크 시대에 완성되었다"라고 적혀 있어, 마누엘 1세의 탁월한 지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04] 마누엘 1세는 성지의 많은 바실리카와 그리스 수도원 건설 및 장식에 참여했으며, 성묘 교회를 포함하여 비잔티움 성직자들이 매일 그리스어 전례를 집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안티오크 공작, 레날과 예루살렘 왕 아말리크와의 합의를 통해 안티오크와 예루살렘에 대한 패권을 확보했다. 마누엘 1세는 발칸 반도에서의 성공 덕분에 "달마티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헝가리의 통치자"라고 자칭할 수 있었다.[105]
마누엘 1세는 외교와 군사 원정으로 제국을 번영시키고 국경을 안전하게 만들었지만, 심각한 문제도 남겼다. 내부적으로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고, 마누엘 1세 사후 안정성이 위협받았다. 아나톨리아의 튀르크인과 시칠리아의 노르만족 등 외적들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베네치아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마누엘 1세의 아들은 미성년자였고, 그의 섭정 정부는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계승은 비잔티움 국가의 힘의 기반을 약화시켰다.[107]
마누엘 1세는 건축에 열정적이었으며, 블라케르나이 궁전을 증개축하고 요새화했다. 그는 자신의 승전을 그린 모자이크로 궁전을 장식하고, 성 엘리야 수도원 수리 자금을 지원했다. 모자이크 벽화는 외교적 퍼포먼스에도 활용되었는데, 스테판 네마냐에게 마누엘 1세에게 패배한 전투를 묘사한 벽화를 보여주었다.
마누엘 1세는 매력적인 외모, 깊은 교양, 뛰어난 무예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과학, 문학, 신학, 점성술, 의학 등에 열중했고, 사냥과 군사적 자질도 뛰어났다. 호색가로서 조카와의 근친상간으로 아들을 낳으면서도 근친혼 규제 강화 법령을 발표하는 등 복잡한 성격을 지녔다. 미리오케팔론 전투 패배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았고, 1180년 9월에 승하하였다.
역사가 요하네스 키나모스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마누엘 1세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내린다. 키나모스는 그를 고결하고 관대한 인물로 묘사하는 반면, 코니아테스는 소심한 인물로 묘사한다. 이는 키나모스가 마누엘 1세의 공적 선전에 영향을 받은 반면, 코니아테스는 제4차 십자군에 의한 동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을 마누엘 1세에게서 찾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마누엘 1세가 호색가, 화려함, 무모함, 음흉함, 집념 등의 특징을 지녔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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