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리스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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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드리스코스는 아나톨리아 출신의 직물업자로,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페르세우스의 아들을 자칭하며 마케도니아 왕위를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필리포스 6세'를 칭하며 로마 공화정과 싸웠으나, 기원전 148년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에게 패배하여 트라키아로 도망쳤다. 이후 트라키아의 배신으로 로마에 넘겨져 처형당했으며, 그의 통치 이후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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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리스코스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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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칭호 | 바실레우스 (마케도니아) |
통치 기간 | 기원전 149년–기원전 148년 |
왕위 계승 | 전임: 페르세우스 (왕으로서) 로마의 마케도니아 보호 공화국 (실질) |
후임 | 로마 정복 (알렉산더 6세) |
출생일 | 알 수 없음 |
출생지 | 아이올리스의 아드라미티온 (현재의 튀르키예 발리케시르 주 에드레미트로 추정) |
사망일 | 기원전 146년 |
사망지 | 로마, 로마 이탈리아 |
민족 | 고대 그리스인 |
이름 | |
그리스어 | Ἀνδρίσκος (Andrískos) |
왕명 | Φίλιππος (Philippos) |
별칭 | 가짜 필리포스 |
가문 | |
왕조 | 안티고노스 왕조 (주장) |
아버지 | 페르세우스 (주장) |
2. 배경
아나톨리아의 아이올리스 지방에 있던 아드라미티온(현재의 Edremit|에드레미트tr) 출신의 직물업자였다.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지막 바실레우스였던 페르세우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필리포스 6세'''(Philip VI)를 자칭했다.
마케도니아에서 지지를 얻지 못하자 셀레우코스 제국의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로마 공화정과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하였다. 이후 트라키아 군대를 이끌고 다시 마케도니아에 나타나 기원전 148년에 법무관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를 격파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테살리아 정복과 카르타고와의 동맹은 상황을 악화시켰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안드리스코스는 아나톨리아의 아이올리스 지방에 있던 아드라미티온(현재의 Edremit|에드레미트tr) 출신의 직물업자였다.[1]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지막 바실레우스인 페르세우스의 아들이라고 참칭하며 필리포스 6세라고 자칭했다.[1]
그의 출생에 대한 세부 사항은 모호하고 때로는 상반되지만, 일반적으로 서부 아나톨리아 아이올리스의 아드라미티움 출신의 풀러였다고 여겨진다.[1]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기원전 154년에 왕위를 주장했을 때 "성년"이었고 아드라미티움에서 크레타인에 의해 길러졌다고 한다.[1]
그의 주장에 따르면, 청소년기까지 아드라미티움에서 교육받았고, 크레타인이 죽은 후 양어머니와 함께 자랐다. 성년이 되자 그의 어머니(또는 양어머니)는 암피폴리스와 테살로니카에 숨겨진 두 개의 보물 위치와 페르세우스가 직접 썼다고 하는 봉인된 양피지를 주었다. 그는 나중에 이것을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데 사용했다.[2] 고대 자료들은 그를 사기꾼이라고 부르며 이 이야기를 거짓으로 일축했다. 니에세는 그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지만, 일반적으로는 그가 사칭자였다는 데 동의한다. 그의 주장에서 주요한 점은 페르세우스와 매우 닮았다는 것이다.
기원전 154/153년경, 페르가몬 왕국을 떠나 시리아로 가서 첩에게서 태어난 페르세우스의 사생아라고 주장했다.[3][4]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친로마파 에우메네스 2세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페르가몬을 떠나라는 어머니(또는 양어머니)의 권고 때문이었다.[5]
2. 2. 왕위 주장
아나톨리아의 아이올리스 지방에 있던 아드라뮈티온(현재의 Edremit|에드레미트tr)의 직물업자였다. 그는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지막 바실레우스인 페르세우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필리포스 6세라고 칭했다.[12]
안드리스코스는 마케도니아에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로마 공화정과 맞서 싸웠으나(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패배하였다. 이후 트라키아 군대를 이끌고 다시 마케도니아에 나타나 기원전 148년 법무관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를 물리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테살리아 정복과 카르타고와의 동맹은 상황을 악화시켰고, 결국 기원전 148년 제2차 피드나 전투에서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에게 패배하여 트라키아로 도망쳤다. 하지만 트라키아 왕자에게 배신당해 로마로 압송되었다.
안드리스코스의 마케도니아 통치는 학대와 착취로 얼룩졌으며, 이 사건 이후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2. 2. 1. 시리아에서
안드리스코스는 시리아에서 자신의 주장을 처음 펼쳤다. 리비우스와 카시우스 디오는 그가 페르가몬에서 시리아로 건너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 앞에서 직접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고 기록하고 있다.[6][7]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다른 설명을 제공하는데, 안드리스코스는 이미 데메트리우스의 군대에서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과거 마케도니아 왕과 닮았다는 이유로 동료들이 농담 삼아 "페르세우스의 아들"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이 점차 심각한 의혹으로 번져 안드리스코스 스스로 기회를 잡고 자신이 페르세우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고 한다.[8] 니에세는 두 설명을 조화시키려 시도하며, 그가 시리아로 여행을 간 후 용병으로 입대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쳤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그는 "선조"의 왕위를 되찾도록 도와달라고 왕에게 간청했고, 셀레우코스 백성들 사이에서 큰 지지를 얻어 수도인 안티오크에서 폭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셀레우코스 인구의 상당 부분이 마케도니아계였으며,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이후 강력한 반로마 감정을 품고 있었기에, 그들은 안드리스코스를 도우려는 열의를 보였다. 심지어 왕이 사칭자를 돕지 않으면 왕을 폐위하라는 요구까지 했다. 데메트리우스는 이에 감동하지 않았거나, 두려워하여 안드리스코스를 체포해 로마로 보냈다.
2. 2. 2. 로마에서
안드리스코스는 로마 원로원 앞에 불려갔는데, 디오는 그가 평범한 모습과 뻔뻔스러운 거짓 주장을 하여 "전반적인 경멸"을 받았다고 기록했다.[11] 로마인들은 진짜 필리포스가 그의 아버지 페르세우스가 죽은 뒤 2년 후 알바 푸첸스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믿었다. 로마는 그를 해로운 존재로 여기지 않고 단순히 이탈리아의 도시로 추방했지만, 안드리스코스는 탈출에 성공하여 그리스 세계로 가서 밀레투스 시로 갔다.2. 2. 3. 지지 확보
아나톨리아의 아이올리스 지방에 있던 아도라 뮤티온(현재의 Edremit|에드레미트tr)의 직물업자였다. 마케도니아 왕위를 노리고, 안티고노스 왕조 마지막 바실레우스인 페르세우스의 아들이라고 참칭하며 필리포스 6세 (Philip VI)라고 자칭했다.[12]밀레토스에서 그는 자신의 주장을 더욱 발전시키려 했고, 상당한 관심과 동정을 받았다. 밀레토스의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그를 체포하여 로마 사절단의 조언을 구했는데, 사절단은 그 사칭자를 경멸하며 밀레토스인들에게 그를 풀어줘도 안전하다고 말했다.[12] 그는 이오니아를 여행하며 페르세우스의 옛 지인들을 만나고, 페르세우스의 옛 첩이었고 이제 페르가몬의 왕 아탈루스 2세 필라델푸스의 형제인 아테나이오스와 결혼한 칼리파와 만났다.[13] 그는 출생이 마케도니아인이고 안티고노스 왕조와 예전부터 연이 있었기에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를 돕기로 동의하고 돈과 노예를 주었으며, 그가 추종자를 찾을 수 있는 트라키아로 가도록 권유했을 것이다.
그는 또한 비잔티움에서 호의적인 대접을 받았다. 그는 마침내 트라키아에 도착하여, 페르세우스의 손녀와 결혼했고 한때 페르세우스의 동맹이었던 코티스 4세의 아들인 테레스 3세를 만났다. 테레스와 다른 트라키아 족장들, 특히 바르사바스라는 자는 그를 열렬히 환영했고, 그는 테레스의 궁정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수백 명의 트라키아 군대를 받아 군사 활동을 시작했다.[13]
3. 마케도니아 정복
안드리스코스는 아이올리스 지방(현재의 에드레미트)의 직물업자 출신으로,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지막 바실레우스인 페르세우스의 아들이라 자칭하며 필리포스 6세로 행세했다.
마케도니아에서 지지를 얻지 못하자 시리아의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에게 의탁하여 로마 공화정과 맞섰다.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초기에는 패주했으나, 이후 트라키아인 군대를 이끌고 기원전 148년 마케도니아에 나타나 법무관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Publius Juventius)를 격파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테살리아 정복과 카르타고와의 동맹은 상황을 악화시켰고, 결국 기원전 148년 피드나 전투에서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에게 패배했다. 트라키아로 도망쳤으나, 트라키아 왕자에게 배신당해 로마로 압송되었다.
안드리스코스는 마케도니아 통치 기간 동안 학정과 착취를 일삼았고, 이로 인해 마케도니아는 결국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3. 1. 대중의 지지
마케도니아인들의 초기 반응은 미온적이었지만, 안드리스코스의 성공은 마케도니아에서 그에게 인기를 가져다주었고 널리 지지를 받게 했다. 마케도니아에서는 반(反)로마 감정이 흔했으며, 주민들은 구체제를 전복하는 데 협조적이었다.[1] 안드리스코스에 대한 지지는 획일적이지 않았다. 지주 계급과 상류층 사이에서는 망설임이 훨씬 더 컸고, 하류층 사이에서는 다소 더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대중의 분위기는 대체로 그에게 유리했다.[1] 그의 주장은 그가 두 개의 보물 위치를 정확히 예측한 것으로 뒷받침되었는데, 그는 페르세우스가 자신의 보호자에게 넘겨주고 나중에 자신에게 전달된 "봉인된 문서"에 명시되어 있다고 주장했다.[1] 니에는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믿고 싶어했고, 마케도니아의 재건은 로마 통치의 부담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부담을 더 오래 견딜수록, 그들[마케도니아인]은 옛 혈통에서 복원된 왕 아래의 마케도니아의 전망에 더 행복해했다"고 언급하며 그의 주장의 진실성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2]그러나 그의 지지 범위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광범위하지 않았을 수 있으며, 상당수의 마케도니아 인구가 친(親)공화국적이고 친(親)로마적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같은 시기에 코린토스와 카르타고가 파괴된 것에 비해, 그의 패배 이후 마케도니아에 대한 보복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이 이 이론의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3]
4. 통치
아나톨리아의 아이올리스 지방에 있던 아도라 뮤티온(현재의 에드레미트tr) 출신의 직물업자였다. 안티고노스 왕조 마지막 바실레우스인 페르세우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필리포스 6세로 자칭했다.
안드리스쿠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의 지원을 받아 로마 공화정과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였다. 처음에는 마케도니아에서 지지를 얻지 못해 패주했지만, 이후 트라키아 대군을 이끌고 마케도니아에 나타나 기원전 148년에 법무관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를 격파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테살리아 정복과 카르타고와의 동맹은 상황을 악화시켰고, 기원전 148년 피드나 전투에서 퀸투스 카아이킬리우스 메텔루스에게 패배했다. 결국 트라키아로 도망쳤으나, 트라키아 왕자에게 배신당해 로마로 압송되었다.[15]
안드리스쿠스는 마케도니아 통치 기간 동안 학대와 착취를 일삼고 마케도니아 도시들을 불태우는 등 폭정을 펼쳤다고 알려져 있다.
4. 1. 군사 작전

안드리스코스의 치세는 로마 공화정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그의 군사 작전에 의해 상당 부분 규정되었다. 왕국을 정복한 후 그는 군대를 증강하고 옛 안티고노스 왕조의 핵심 영토인 테살리아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14] 초기 저항은 그리스에 주둔한 로마 동맹군, 이 지역의 소수의 로마 부대와 레가투스, 그리고 그의 치세 동안 얼마 동안 살아남은 것으로 보이는 마케도니아에 있는 로마의 속국 공화국의 잔존 세력으로 구성된 임시 부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곧 로마는 사칭자를 격파하기 위해 프라에토르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 탈나가 이끄는 군단을 파견했다.[15]
하지만 탈나는 안드리스코스의 힘을 과소평가했고, 왕의 즉위 이후 왕의 군대가 급격히 성장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4] 안드리스코스는 테살리아의 불특정 장소(디오는 "마케도니아의 국경 근처"라고 언급함)에서 그를 공격하여 교전했다. 교전에 대한 세부 사항은 거의 없지만, 탈나는 전사했고 그의 군대는 거의 전멸했다.[15] 이는 로마가 마케도니아인들에게 당한 최악의 패배였으며, 플로루스는 "실제 왕들에게는 무적이었던 그들이 이 가상의, 자칭 왕에게 패배했다"는 아이러니함을 언급했다.[16][17] 이 승리는 왕의 위상을 크게 높였고,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으며, 그의 국내적 인기는 극적으로 상승하여 공화국 저항을 분쇄하고 테살리아를 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제국 (시리아)의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의 지원을 받아 로마 공화정과 싸웠으나(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패주하였다.[15] 다시 트라키아인의 대군을 이끌고 마케도니아에 나타나 기원전 148년에 프라이토르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를 격파하고 바실레우스를 자칭했다. 그러나 테살리아 정복과 카르타고와의 동맹은 상황을 악화시켰고, 기원전 148년에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에게 패배하여[15] 트라키아로 도망쳤지만, 트라키아의 왕자에 의해 로마에 인도되었다.[15]
4. 2. 외교 정책
안드리스코스는 처음에는 로마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로마가 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자 강력한 반(反)로마 정책을 시작했다.[18] 그는 자신의 왕위를 가능하게 해준 트라키아 동맹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으며, 이들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상당한 군사력을 제공했다.[18]탈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에 대한 외국의 관심이 급증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의 공격을 받고 있었던 카르타고는 그와 동맹을 맺어 돈과 배를 약속했지만, 최종 패배 전에 보내질 수 없었다.[19] 그리스에서는 그에 대한 상당한 공감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아카이아 동맹은 친(親)로마 성향을 유지하며 그에게 저항하고 싸움을 계속했다. 페르가몬의 아탈루스 2세 필라델푸스 왕은 확고하게 친로마적 입장을 유지했다. 페르가몬인들은 부활하고 강력해진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들 문앞에 나타날 가능성에 두려움을 느꼈다.[19]
4. 3. 국내 정책
안드리스코스는 마케도니아 통치 기간 동안 학대와 착취를 일삼고 마케도니아 도시들을 불태우는 등 폭정을 펼쳤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강력하게 반(反)로마, 반(反)공화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고대 역사가들은 이를 그의 잔혹함과 폭정으로 해석했지만, 일각에서는 안드리스코스의 반로마 정책과 친(親)로마 공화주의자를 포함한 반대자들에 대한 박해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일 수 있다는 의견도 제시된다.그가 실제로 폭군이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특히 탈나와에서의 승리 이후 박해가 크게 늘어나면서 인기가 크게 떨어졌고, 이는 훗날 그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4. 4. 주화
안드리스코스의 주화 규모와 성격은 논쟁의 대상이다. 그의 많은 주화가 이전의 안티고노스 왕조, 공화정, 로마 주화를 중복 주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1] 그는 극소량의 은화인 고대 드라크마를 발행했는데, 여기에는 헬레니즘 왕으로 묘사된 자신의 모습과 뒷면에 헤라클레스를 새겨 넣었다. 안드리스코스의 주화는 단 세 개만 알려져 있는데, 그중 두 개는 중복 주조되었으며, 하나는 테살리아 동맹의 드라크마에, 다른 하나는 로마의 데나리우스에 주조되었다. 따라서 그가 탈나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노획한 데나리우스를 자신의 주화를 주조하는 데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2] 이 주화들은 짧은 통치 기간, 오래된 다이의 재사용 필요성, 그리고 전시 주화를 신속하게 생산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품질이 좋지 않다.[3]그의 통치 기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왕실 주화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친로마 공화국의 잔존 세력이 주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왕이 문헌에서 암시하는 것보다 더 관대했으며 어느 정도의 독립적인 주화를 허용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4]
5. 몰락과 죽음
안드리스코스는 마케도니아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시리아로 쫓겨난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의 지원을 받아 로마 공화정과 싸웠다(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그는 이때 패주하였다가 다시 트라키아인 대군을 이끌고 마케도니아에 나타나 기원전 148년에 법무관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를 물리치고, 바실레우스를 참칭했다.[1] 그러나 테살리아의 정복과 카르타고와의 동맹은 상황을 악화시켰고, 기원전 148년에 〈제2차 피드나 전투〉에서 퀸투스 카아이킬리우스 메텔루스에게 패해 트라키아로 패주했다.[1] 트라키아의 왕자는 그를 배신하고, 로마로 이송했다.[1]
안드리스코스는 마케도니아 통치 기간 동안 학대와 착취를 일삼아 마케도니아 도시들을 불태우는 등 폭정을 저질렀다.[1] 이 사건 이후,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1]
메텔루스는 마케도니아의 남은 저항을 진압하고 마케도니아를 속주로 조직했으며, 기원전 146년의 아카이아 전쟁을 해결했다. 기원전 146년, 메텔루스는 로마로 돌아와 그의 승리에 대한 아그노멘인 ''마케도니쿠스''를 받고 로마 개선식을 거행했다. 안드리스코스는 쇠사슬에 묶여 개선 행렬에 참여했고, 이후 처형되었다. 그는 마케도니아를 통치한 마지막 왕이었다.
6. 평가와 유산
고대 자료들은 안드리스코스의 출신과 주장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성격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디오도루스는 그를 "잔혹함, 탐욕, 그리고 모든 비열한 자질로 가득 찬 자"라고 칭했고, 리비우스는 그를 "가장 저급한 인간"이라고 불렀다.[20][21][22] 그들은 또한 그를 잔혹하고 폭군적이라고 묘사했는데, 이러한 폭정 혐의는 아마도 마케도니아에서 친로마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세력에 대한 그의 가혹한 탄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요 유산은 그의 반란 이후 로마인들이 마케도니아에서 발생한 반(反)로마 감정의 강도를 깨달았고, 이전의 행정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철저한 재조직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재조직이 필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안드리스코스의 박해가 많은 친로마 공화주의자들을 죽였고 이전의 행정 구조를 완전히 붕괴시켰기 때문에 이를 재건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로원은 마케도니아를 로마 속주로 만들었고, 메텔루스를 초대 총독으로 임명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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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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