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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포에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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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149년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로마 공화국과 카르타고 간에 벌어진 세 번째 포에니 전쟁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의 경제 회복과 로마 내부의 강경파의 주장, 누미디아와의 분쟁이 배경이 되어 발발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무기 반환과 도시 파괴 및 이주를 요구했고, 카르타고는 이를 거부하며 저항했다. 3년간의 공방전 끝에 카르타고는 멸망하고, 생존자는 노예로 팔렸다. 전쟁 이후 로마는 카르타고를 파괴하고 아프리카 속주를 건설했으며, 카르타고 유적은 현재 튀니지에 남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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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포에니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전쟁 개요
분쟁 명칭제3차 포에니 전쟁
전쟁의 부분포에니 전쟁
카르타고 시의 방어
카르타고 시의 방어
발발 일자기원전 149년 - 기원전 146년
장소튀니지 내 카르타고 영토
전쟁 명분카르타고의 누미디아와의 조약 위반 전쟁
결과로마 공화정의 승리
카르타고의 멸망
카르타고 시가지 파괴
교전 세력
교전국 1로마 공화정
교전국 2카르타고
지휘관 및 지도자
로마 공화정 지휘관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마니우스 마닐리우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호스티리우스 만키누스
카르타고 지휘관하스드루발
디오게네스
병력 규모
로마 공화정 병력보병 36,000–46,000명
기병 4,000명
카르타고 병력20,000명 이상의 군인
무장한 시민
사상자
로마 공화정 사상자불명
카르타고 사상자최대 750,000명 사망 (민간인 포함)
50,000명 생존자 노예화
관련 전투
주요 전투오로스코파
투니스 호수
제1차 네페리스
카르타고 항구
제2차 네페리스
카르타고

2. 배경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공화국은 동쪽으로는 마케도니아 왕국, 일리리아, 시리아로 영토를 넓혀갔고, 히스파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반면,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한 카르타고시칠리아와 히스파니아 영토를 빼앗기고, 매년 200 탈란트씩 50년간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부담에 시달렸다.[9]

로마 내부에서는 대 카토와 같은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카르타고가 지중해 해상 무역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빠르게 국력을 회복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카르타고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었다.

기원전 2세기 중반, 로마는 지중해 지역의 지배적인 세력이었고, 카르타고는 현재 튀니지 북동부에 위치한 큰 도시 국가였다.[9] 카르타고인들은 로마인들에게 라틴어로 "Punicus"(또는 "Poenicus")라고 불렸는데, 이는 카르타고의 페니키아 기원을 나타낸다.[9]

로마와 카르타고는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241년, 23년간)과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년-201년, 17년간)을 치렀고, 두 전쟁 모두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카르타고 남서쪽 160km 떨어진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을 격파하면서 막을 내렸다.[9] 아프리카누스는 카르타고에 평화 조약을 강요하여 해외 영토와 아프리카 영토 일부를 빼앗고, 10,000 탈렌트고대에는 여러 종류의 "탈렌트"가 알려져 있다. 이 기사에서 언급된 것은 모두 에우보이아 (또는 에우보이아) 탈렌트이다.[9]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10,000 탈렌트는 약 265lt의 은에 해당했다.의 배상금을 50년에 걸쳐 지불하도록 했다.[9] 또한 카르타고는 인질을 잡히고, 아프리카 밖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아프리카 내에서 전쟁을 하려면 로마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한니발의 강력한 지지로 기원전 201년 봄에 조약이 체결되었고,[9] 이후 카르타고는 로마에 정치적으로 종속되었다.[9]

기원전 150년경 누미디아, 카르타고, 로마 영토


전쟁이 끝날 무렵, 로마의 동맹국인 마시니사는 현재의 알제리와 튀니지의 대부분을 통치하는 누미디아인들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로 떠올랐다.[9] 이후 50년 동안 마시니사는 카르타고가 자국 영토를 지킬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영토를 침략하고 약탈했다. 카르타고가 로마에 배상을 요구하거나 군사 행동 허가를 요청할 때마다 로마는 마시니사를 지지하며 거절했다.[9]

카르타고는 기원전 151년에 배상금 지불을 완료했고[9] 경제적으로 번영했지만,[9] 로마에게 군사적 위협은 되지 않았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원로원 내에는 카르타고에 대한 추가 군사 행동을 원하는 세력이 오랫동안 존재했다.[9]

2. 1. 카토의 연설

대 카토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의 실력을 두려워하여 로마가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카르타고를 멸망시켜야 한다고 연설했다.[8]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주경철 교수에 따르면, 대 카토는 직접 카르타고를 방문하여 전쟁에서 패했음에도 상업이 활발한 카르타고의 국력에 상당한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카르타고에서 가져온 무화과원로원 의원들에게 보여주며 "이 과일이 나는 땅이 로마에서 겨우 3일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카르타고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것이 내 의견입니다."라고 연설했다.[9]

원로원 의원이었던 카토는 카르타고를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18세기 이후 그는 모든 연설을 Carthago delenda est|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한다la로 끝맺는 것으로 알려졌다.[9] 카토에 반대하는 파벌에는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있었는데, 그는 카르타고와 같은 강력한 적에 대한 두려움이 평민들을 억제하고 사회적 분열을 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9] 카토는 기원전 153년에 카르타고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었으며, 카르타고의 경제 성장과 힘을 주목했다.[9]

2. 2. 누미디아와의 분쟁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에서는 카르타고의 저력을 두려워한 강경파 정치인 대 카토가 "(로마 공화정이 카르타고와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카르타고를 멸망시켜야 합니다."라고 연설할 정도였다.[8]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주경철 교수가 쓴 《바다 인류》에 따르면, 대 카토는 직접 카르타고를 둘러보고는, 카르타고가 전쟁에서 진 국가임에도 상업이 활발한 것에 상당한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카르타고에서 가져온 무화과를 보여주며 "원로원 의원들이여. 이 무화과를 보시니 어떠합니까?"라고 묻자, "크고 아름다운 무화과이군요."라고 감탄하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이 과일이 나는 땅이 로마에서 겨우 3일밖에 걸리지 않는 땅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카르타고를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9]

카르타고는 기원전 156년 이후 불과 5년 만에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고 예전 못지않은 강한 국력으로 성장했다. 당황한 로마는 카르타고의 국력을 약화시키고 침략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이웃 나라 누미디아에게 카르타고의 선박과 영토를 주기적으로 약탈하라는 은밀한 제안을 했다. 누미디아는 로마의 후원에 힘입어 주기적으로 카르타고 영토를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다. 이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의 모든 영토 분쟁은 로마 원로원의 중재를 받아야 한다는 조약 때문이었다. 따라서 누미디아와의 영토 분쟁에서 로마 원로원은 언제나 누미디아에 유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의 계속된 침입에 대해 로마에 제재를 요청했지만, 로마는 누미디아의 일방적인 방문이라는 결정을 내리며 거절했다. 결국 카르타고는 계속된 누미디아의 침입으로 경제적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고, 누미디아와 침입을 정당화하는 로마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갖게 되었다.

3. 전쟁의 경과

기원전 151년부터 누미디아의 침입이 계속되자 카르타고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에 맞서기 위해 약 6만 명의 용병을 조직했고, 누미디아가 침공하자 역공을 가해 누미디아 영토로 진입했다. 로마 원로원카토를 중심으로 하는 카르타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는데, 때마침 그리스에서 일어난 反로마 세력의 발호로 인해 원로원의 주류는 강경파로 돌아섰다.

로마는 이를 조약 위반으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항의하며 조사단을 파견했다. 카르타고에서는 이 사태에 대해 온건파와 강경파가 대립했다. 강경파는 국력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로마와 전면전을 해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고, 온건파는 누미디아의 습격으로 경제적 타격이 크므로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카르타고는 온건 정책을 선택했고, 누미디아를 공격한 장수를 처형하고 로마에 사죄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냈으나, 로마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에 맞서 승리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파견하여 카르타고와 강화 협상을 진행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카르타고 대표단에게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첫 번째 조건을 제시했다.

3. 1. 로마의 최후통첩

기원전 151년부터 누미디아가 카르타고를 침입하자, 카르타고는 로마 원로원에 사절단을 보냈으나 로마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상대로 승리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파견하여 카르타고에 다음 조건을 제시했다.

  • 카르타고의 모든 무기를 로마에 넘길 것


카르타고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에 이 조건을 수락하여 10만 개가 넘는 무기를 로마에 넘겼다. 그러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카르타고를 멸망시킬 속셈으로 다음과 같은 두 번째 최후통첩을 보냈다.

  • 수도 카르타고를 파괴하고 주민은 해안에서 80스타디온(15~20km) 떨어진 곳으로 모두 이주할 것


이에 카르타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로마와의 결전을 준비했다. 카르타고는 잘 만들어진 방어 시설, 항구, 선박을 이용했고, 여자들까지 머리카락을 잘라 석궁의 밧줄로 사용하는 등 필사적으로 저항했다.[1]

3. 2. 카르타고 공방전

기원전 149년부터 시작된 제3차 포에니 전쟁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예상과 달리 기원전 146년까지 3년이나 이어졌다.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포위 공격했는데, 카르타고는 3년간 격렬하게 저항했다.[3]

로마군은 카르타고 성벽을 넘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공성전을 위해 자리를 잡았다. 켄소리누스의 진영은 해변에 정박한 로마 선박을 보호했고, 마닐리우스의 진영은 로마 군단을 수용했다. 하스드루발은 로마의 보급로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켰고, 로마군은 다시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는 자신의 병사들을 뒤로 물리고 카르타고인들을 격퇴하여 큰 피해를 막았다.[3]

a colourful oil painting showing men hauling on a large siege engine


켄소리누스의 진영은 위치가 좋지 않아 초여름에 유해해져 더 건강한 곳으로 옮겨졌으나, 방어력이 떨어져 카르타고인들이 화공선으로 로마 함대에 피해를 입혔다. 로마인들은 추가 요새를 건설했지만, 카르타고인들은 계속해서 진영을 공격했다. 스키피오는 이러한 공격을 막는 데 기여하여 더욱 두각을 나타냈다.[3]

마닐리우스는 네페리스 근처의 카르타고인들의 주요 진영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로마인들은 견딜 수 없는 지경으로 진격했다가 카르타고인들의 반격으로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스키피오는 3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카르타고인들을 주춤하게 하여 보병 대부분이 후퇴할 수 있게 했다. 그날 밤 스키피오는 갇힌 로마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기병대를 이끌고 돌아갔다.[3]

로마군은 카르타고 근처의 진영으로 후퇴했고, 원로원 위원회가 스키피오와 마닐리우스의 진척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도착했다. 스키피오의 활약은 그들의 보고서에서 두드러졌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누미디아 기병대의 지도자 몇몇과 접촉한 후, 마닐리우스가 이끄는 네페리스에서 하스드루발을 상대로 한 두 번째 원정에 합류했다. 누미디아인 중 한 명이 2,200명의 병력과 함께 로마군으로 귀순했다. 로마인들의 식량이 떨어지자 마닐리우스는 후퇴했고, 스키피오는 로마의 새로운 동맹군을 이끌고 성공적인 식량 조달 원정을 지휘했다.[3]

로마는 기원전 148년에 두 명의 새로운 집정관을 선출했지만,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에소니누스만이 아프리카로 파견되었다.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는 그의 부관으로서 해군을 지휘했다. 그는 카르타고에 대한 좁은 포위를 더 느슨한 봉쇄로 물러나게 했고, 그 지역의 다른 카르타고 지원 도시들을 소탕하려 했다. 그는 실패했다. 나불이 항복하여 이후 약탈되었지만, 켈리비아는 로마 육군과 해군의 공격을 모두 견뎌냈고, 비제르테는 헛되이 포위되었다. 비제르테에서 카르타고 군의 출격으로 로마의 공성 무기가 파괴되었고, 로마인들은 작전을 중단하고 겨울 주둔지로 들어갔다.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의 민간 지도부를 전복하고 스스로 지휘권을 잡았다. 카르타고는 안드리스쿠스와 동맹을 맺었는데, 안드리스쿠스는 마케도니아 왕위 찬탈자로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일으켰다.[3]

a glass display case containing stones and a pot
화살촉, 단검의 잔해, 투석용 돌 등이 카르타고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기원전 147년, 스키피오는 조영관 선거에 출마할 의향을 보였다. 36세 또는 37세였던 그는 빌리우스 법에 따르면 최소 연령이 41세였기 때문에 집정관에 출마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스키피오와 그의 지지자들은 지난 2년간의 그의 성공과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승리를 확정지었던 사람이 그의 양할아버지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그를 집정관으로 임명하여 아프리카 전쟁을 지휘하게 해달라는 여론의 요구가 너무나 강력하여 원로원은 그 해 모든 직위에 대한 연령 요건을 제쳐두었다. 스키피오는 집정관으로 선출되었고 아프리카에서의 단독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그는 그곳의 군대의 수를 채우기에 충분한 병력을 징집할 수 있는 통상적인 권한과 자원병을 모집할 수 있는 이례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다.[3]

스키피오는 로마군의 주둔지를 카르타고 인근으로 옮겼고, 8,000명의 카르타고 분견대가 이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는 군기 강화를 요구하는 연설을 하고, 군기가 해이하거나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병사들을 해고했다. 그 후 그는 야간 기습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4,000명의 병력과 함께 도시에 진입했다. 어둠 속에서 당황한 카르타고 수비군은 처음에는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곧 도망쳤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인들이 해가 뜨면 재정비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이 방어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철수했다.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 방어 시설이 무너진 방식에 경악하여 로마 포로들을 로마군이 보는 앞에서 성벽에서 고문하여 죽였다. 그는 카르타고 시민들의 저항 의지를 강화하고 있었다. 이 시점부터 협상이나 항복의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도시 의회의 일부 구성원들은 그의 행동을 비난했고, 하스드루발은 그들 또한 죽이고 도시를 완전히 장악했다.[3]

A black and white aerial photograph of an urban area by the sea with a water-filled, torus-shaped inlet.


재개된 맹렬한 포위는 육로를 통한 도시 진입을 차단했지만, 당시의 해군 기술로는 해상 차단은 거의 불가능했다. 스키피오는 도시에 운송되는 식량의 양에 좌절하여 방파제를 건설하여 봉쇄 돌파선을 통한 항구 접근을 차단했다. 카르타고인들은 이에 대응하여 항구에서 바다로 가는 새로운 수로를 팠다. 그들은 새로운 함대를 건조했고, 수로가 완성되자 카르타고인들은 출항하여 로마인들을 기습했다. 이어진 카르타고 항구 해전에서 카르타고인들은 선전했지만, 해전이 끝날 무렵 철수하는 과정에서 많은 배들이 도시의 해안 방벽에 갇혀 침몰하거나 나포되었다. 로마인들은 이제 항구 지역의 카르타고 방어 시설을 공격하려 시도하여 마침내 부두를 장악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수개월에 걸쳐 도시 성벽만큼 높은 벽돌 구조물을 건설하여 최대 4,000명의 로마군이 카르타고 성벽에 단거리에서 사격을 가할 수 있도록 했다.[3]

이 시설이 완성되자 스키피오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네페리스에 주둔하고 있던 카르타고 야전군을 공격했다. 디오게네스라는 이름의 그리스인이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은 겨울 주둔지를 위한 요새화된 야영지를 건설했다. 기원전 147년 말, 스키피오는 여러 방향에서 야영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도망치는 카르타고인들은 로마의 누미디아 기병 동맹군에게 추격당했고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그 후 네페리스는 포위되었고 3주 만에 항복했다. 카르타고 배후지에 아직 저항하고 있던 대부분의 요새도 문을 열었다.[3]

기원전 146년, 스키피오의 지휘권이 1년 더 연장되었다.[3] 봄에 그는 항구 지역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하여 성벽을 성공적으로 돌파했다.[3] 6일 동안[3] 로마군은 도시의 주거 지역을 체계적으로 통과하며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죽이고 뒤의 건물에 불을 질렀다.[3] 마지막 날,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군에서 복무하던 900명의 로마 탈영병을 제외한 모든 포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들은 에슈문 신전에서 싸우다가 희망이 사라지자 스스로 불을 질렀다.[3] 이 시점에서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약속받고 스키피오에게 항복했다. 성벽에서 지켜보던 하스드루발의 아내는 스키피오를 축복하고 남편을 저주한 뒤 아이들과 함께 신전으로 들어가 불에 타 죽었다.[3]

4. 결과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카르타고 함락 후 도시를 무자비하고 철저히 파괴했고, 생존자 5만 명은 노예로 팔았다.[2] 훗날 로마가 병사들을 위한 도시로 재건했지만, 700년 동안 무역 국가로서 번성했던 예전의 영광은 되찾지 못했다. 이로써 고대 카르타고의 해상 왕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가래로 갈고 소금을 뿌려 불모지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주경철 교수에 의하면 "문학적인 표현일 뿐 사실이 아니다."[2]

2005년 고대 카르타고의 일부 유적


로마는 카르타고를 폐허로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원로원은 10인 위원회를 파견했고, 스키피오에게 추가 철거를 명령했다. 그 지역에 재정착하려는 모든 사람에게는 저주가 내려졌다. 도시의 이전 부지는 국유지인 ager publicusla로 몰수되었다. 스키피오는 개선식을 거행했고, 양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그노멘'' "아프리카누스"를 받았다. 하스드루발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영지로 은퇴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항복했다. 이전 카르타고 영토는 로마에 병합되어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로 재구성되었으며, 우티카가 수도가 되었다. 이 속주는 곡물 및 기타 식량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카르타고를 끝까지 지지했던 포에니 도시들은 로마에 ager publicusla로 몰수되거나, 비제르테처럼 파괴되었다. 살아남은 도시들은 전통적인 정부 및 문화 시스템의 최소한의 요소를 유지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현지인들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았고, 포에니 문화, 언어, 종교는 살아남아 현대 학자들에게 "신포에니 문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포에니어는 7세기 AD까지 북아프리카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기원전 123년, 개혁파 로마 지도자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국유지를 포함한 토지 재분배에 힘썼다. 여기에는 카르타고 지역도 포함되었고, 유노니아라는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하도록 명령하는 논란이 많은 법이 통과되었다. 보수파는 그 법에 반대했고, 법안 통과 후 새 정착촌을 구분하는 표식이 늑대에 의해 파헤쳐졌다는 소문(매우 불길한 징조)이 퍼졌다. 이러한 소문과 기타 정치적 술책으로 인해 계획은 폐지되었다. 기원전 111년, 법률은 재정착 금지 명령을 반복했다. 전쟁 1세기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카르타고를 로마 도시로 재건할 계획을 세웠지만, 거의 진척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9년에 이 개념을 되살려 계획을 완료했다. 로마 카르타고는 제국 시대에 로마 아프리카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로마는 여전히 이탈리아의 수도로 존재한다. 카르타고 유적은 현대 튀니스 동쪽 16km 지점 북아프리카 해안에 있다. 1985년 2월 5일, 전쟁 종결 2,131년 후, 로마와 현대 카르타고의 시장인 우고 베테레와 체들리 클리비가 상징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2] 2020년 현재, 현대 카르타고 정착지는 튀니스시의 구역이다.

5. 주요 사료

기원전 167년에 인질로 로마에 보내진 그리스인 역사가 폴리비오스(기원전 200년경 - 기원전 118년경)의 저작이 제3차 포에니 전쟁에 관한 가장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주요 사료이다.[1] 폴리비오스는 전술서 등을 남겼으나 현재는 유실되었고,[2] 기원전 146년 이후 저술된 『역사』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3][4] 그는 제3차 포에니 전쟁 당시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로마 장군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소 스키피오)와 함께 북아프리카를 방문했다.[5][6] 일반적으로 폴리비오스의 기록은 신뢰성이 높다고 평가받지만, 스키피오와의 친분 때문에 그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기술하는 경향이 있었다.[7][8][9] 또한 『역사』 중 제3차 포에니 전쟁 관련 내용은 상당 부분 유실되었다.

폴리비오스


폴리비오스를 참조한 로마 연대기 작가 티투스 리비우스의 저술은 포에니 전쟁 연구에 자주 이용되지만, 기원전 167년 이후 사건에 대해서는 개요 형태의 기록만 남아있다. 플루타르코스, 카시우스 디오, 시켈리아의 디오도로스 등도 제3차 포에니 전쟁이나 관련 인물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나, 이 역시 대부분 유실되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2세기 그리스 역사가 아피아노스의 기록도 참고한다. 베르나르 미네오는 아피아노스의 기록을 "이 전쟁에 관한 유일하게 완전하고 연속적인 설명"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아피아노스의 설명은 대부분 폴리비오스의 기록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며,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에이드리언 골즈워시는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해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 외 화폐, 비문, 고고학적 증거, 각종 구조물의 복원 및 재현을 통한 경험적 증거 등도 참고 자료로 활용된다.

6. 전쟁의 원인에 대한 논쟁

현대 학자들은 로마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다양한 이론을 제시한다. 카르타고의 상업적 경쟁에 대한 두려움, 영토 확장의 욕망, 정치적 요인 등이 거론된다. 이러한 가설과 다른 가설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카르타고의 상업적 경쟁에 대한 로마의 두려움: 로마는 카르타고가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상업적으로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 영토 확장에 대한 욕망: 로마는 지중해 지역에서 지배적인 세력이었고, 영토 확장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 정치적 요인: 로마 원로원 내에는 오랫동안 카르타고에 대한 추가 군사 행동을 원했던 파벌이 존재했다. 카토는 모든 연설을 Carthago delenda estla ("카르타고는 파괴되어야 한다")로 끝맺는 것으로 알려질 정도로 카르타고를 싫어했다. 반면,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은 카르타고와 같은 강력한 적에 대한 두려움이 평민들을 억제하고 사회적 분열을 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마시니사의 죽음: 당시 89세였던 누미디아마시니사의 죽음으로 인해 더 넓은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 정치 파벌의 행위: 카르타고를 정치적 "허수아비"로 사용하는 정치 파벌의 행위가 있었다.
  • 영광과 전리품에 대한 탐욕: 로마는 영광과 전리품에 대한 탐욕을 가지고 있었다.
  • 정치 체제 분쇄: 로마는 카르타고의 정치 체제를 혐오스럽게 여겨 분쇄하려는 욕망이 있었다.


카르타고 사절단은 로마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로마는 모호하게 반응했다. 기원전 149년, 카르타고에서 북쪽으로 약 55km 떨어진 북아프리카의 큰 항구 도시인 유티카가 로마로 넘어갔다. 유티카의 항구가 카르타고에 대한 모든 공격을 크게 용이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로마의 원로원과 민회는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했다.

7. 전후 상황

로마는 스키피오에게 카르타고를 추가로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지역에 다시 정착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저주를 내렸다.[1] 스키피오는 개선식을 거행하고 '아프리카누스'라는 아그노멘을 받았다.[2][3] 하스드루발은 이탈리아 영지로 은퇴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항복했지만, 그의 운명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4]

기원전 123년, 로마의 개혁파 지도자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카르타고 지역에 유노니아라는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보수파의 반대와 여러 불길한 징조로 인해 이 계획은 폐지되었다.그라쿠스는 아프리카 전쟁 동안 스키피오 아래에서 싸웠으며[5] 그의 토지 개혁 의제를 계속 추진했고 기원전 121년에 3,0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기원전 111년, 법률은 재정착 금지 명령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7]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전쟁 1세기 후, 카르타고를 로마 도시로 재건할 계획을 세웠지만 큰 진전은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9년에 이 계획을 다시 추진하여 완료했고, 로마 카르타고는 제국 시대에 로마 아프리카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8][9]

7. 1. 로마의 아프리카 통치



로마는 카르타고 도시를 폐허로 남기기로 결정했다. 이전 카르타고 영토는 로마에 병합되어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로 재구성되었으며, 우티카가 수도가 되었다.[1] 이 속주는 곡물 및 기타 식량의 주요 공급원이었다.[2]

카르타고를 끝까지 지지했던 포에니 도시들은 로마에 ager publicusla (국유지)로 몰수되거나, 비제르테의 경우처럼 파괴되었다.[3][4] 살아남은 도시들은 전통적인 정부 및 문화 시스템의 최소한의 요소를 유지할 수 있었다.[5][6] 로마인들은 현지인들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았고, 포에니 문화, 언어, 종교는 살아남아 현대 학자들에게 "신포에니 문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7][8] 포에니어는 7세기 AD까지 북아프리카에서 계속 사용되었다.[9]

7. 2. 카르타고 유적



현대 튀니지 동쪽 16km 지점의 북아프리카 해안에는 카르타고 유적이 남아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2] 1985년 2월 5일,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지 2,131년 만에 로마 시장 우고 베테레와 현대 카르타고 시장 체들리 클리비는 상징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2]

참조

[1] 서적 Italy in the Thirteenth Century Kessinger Publishing, LLC 2005
[2] 웹사이트 A PUNIC PEACE TREATY https://www.chicagot[...] 2023-06-30
[3] 서적 歴史
[4] 서적 有名言行録
[5] 서적 歴史叢書
[6] 서적 君主論
[7] 서적 君主論
[8] 서적 과학으로 여는 세계불가사의 1 - 신과 미지의 수수께끼에 도전한 인간들의 이야기 문화유람
[9] 서적 바다 인류 후마니타스 출판그룹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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