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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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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무는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899년 군인이 되어 국경 지대에서 교련관으로 근무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동간도로 망명하여 항일 운동에 참여, 1919년 3·1 운동 이후 대한국민회군 사령관을 맡아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1924년 용정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사망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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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 (독립운동가)
기본 정보
안무의 초상
안무의 초상
본관순흥(順興)
경수(景修)
초산(楚山)
독립운동
서훈건국훈장 독립장 (1990년)
생애
출생1883년 2월 14일
출생지황해도 해주시
사망1925년 4월 28일 (42세)
사망 장소중국 헤이룽장성
가족
배우자김씨
자녀2남 3녀
안태순(安泰淳)
해주 최씨

2. 생애

안무는 함경북도 경성 출신의 무인 집안에서 태어나 1899년 대한제국 군인이 되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는 함경북도 무산 등 국경 지대에서 육군 군사 훈련을 담당하는 교련관으로 근무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함북 지방에서 체육 교사로 일하다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계기로 동간도로 망명하여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북간도에서 이동휘, 김약연 등과 함께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국민회군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독립군 양성과 무장에 힘을 기울였다. 1920년 최진동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대한군북로독군부(총사령관 홍범도)를 조직,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청산리 대첩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했다가 자유시 참변 이후 북간도로 돌아와 독립군 조직 재건에 힘썼다. 1923년 베이징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 국민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24년 용정(龍井)에서 일본 경찰의 습격으로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그는 일본의 치료를 거부하고 곧 사망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1]

2. 1. 대한제국 군인

함경북도 경성의 무인 집안 출신으로 1899년 대한제국 군인이 되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는 함경북도 무산 등 국경 지대에서 육군 군사 훈련을 담당하는 교련관으로 근무했다.[1]

2. 2. 항일 독립운동 투신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뒤 함북 지방에서 체육 교사로 일하다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계기로 동간도로 망명하면서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1]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북간도에서 이동휘, 김약연 등과 함께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국민회군 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1] 그는 구한국군 출신의 경험을 살려 국민회군의 훈련을 맡았으며 독립군 양성과 무장에 힘을 기울였다.[1]

1920년에는 최진동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대한군북로독군부(총사령관 홍범도)를 조직하고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성과를 올렸다.[1] 일본은 정규군이 섬멸당한 봉오동 전투의 치욕 이후 이 지역에 토벌군을 대거 투입했고, 안무는 그해 10월 21일부터 김좌진, 홍범도와 함께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하여 일본군 토벌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1]

2. 3. 대한국민회군 사령관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북간도에서 이동휘, 김약연 등과 함께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국민회군 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안무는 구한국군 출신으로 군사 훈련 경험을 살려 국민회군의 훈련을 맡았으며, 독립군 양성과 무장에 힘을 기울였다.[1]

1920년에는 최진동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대한군북로독군부(총사령관 홍범도)를 조직하고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일본은 정규군이 섬멸당한 봉오동 전투 이후 이 지역에 토벌군을 대거 투입했고, 안무는 그해 10월 21일부터 김좌진, 홍범도와 함께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 토벌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1]

2. 4.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1920년 최진동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대한군북로독군부(총사령관 홍범도)를 조직하고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했다.[1] 일본은 정규군이 섬멸당한 봉오동 전투 이후 토벌군을 대거 투입했고, 그해 10월 21일부터 김좌진, 홍범도와 함께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 토벌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1]

2. 5. 독립군 재건과 순국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북간도에서 이동휘, 김약연 등과 함께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국민회군 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안무는 구한국군 출신 경험을 바탕으로 국민회군의 훈련을 맡아 독립군 양성과 무장에 힘을 기울였다.

1920년에는 최진동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대한군북로독군부(총사령관 홍범도)를 조직하고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일본은 정규군이 섬멸당한 봉오동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이 지역에 토벌군을 대거 투입했고, 안무는 그해 10월 21일부터 김좌진, 홍범도와 함께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 토벌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 대첩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했으며,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다시 북간도로 돌아와 와해된 독립군 조직 재건을 위해 힘썼다.

1923년 베이징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여 국민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24년 용정(龍井)에서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아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그는 일본의 치료를 거부하고 곧바로 사망했다.

3. 서훈

안무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1]

4. 평가

안무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1] 1994년 9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안무를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1]

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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