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코스 11세 에피파네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안티오코스 11세 에피파네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으로, 안티오코스 8세와 프톨레마이오스 공주 트리파이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셀레우코스 6세, 필리포스 1세, 데메트리오스 3세, 안티오코스 12세의 형제였으며, 기원전 94년경 형제 필리포스 1세와 함께 왕위를 주장했다. 안티오코스 11세는 '에피파네스'와 '필라델푸스'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형제와 함께 연합 동전을 주조하여 공동 통치를 시사했다. 그는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통치했으나, 기원전 93년 안티오코스 10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오론테스 강에서 익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시리아의 쌍둥이 - 필리포스 1세 필라델포스
필리포스 1세 필라델포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으로, 형 안티오코스 11세와 함께 안티오코스 10세에 맞서 싸웠으며 데메트리오스 3세와 동맹하여 안티오키아를 탈환했으나,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의 침공으로 킬리키아로 도망쳐 사망했다. - 기원전 93년 사망 - 유팽조
유팽조는 경제의 아들로, 광천나라 왕으로 봉해졌다가 조나라 왕으로 옮겨가 63년간 재위하며 폭정을 일삼았고, 추은령에 따라 아들들에게 후국을 나누어주었으며 사후에는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 기원전 93년 사망 - 동방삭
전한 무제 시기 태중대부 동방삭은 뛰어난 외모와 익살, 해학으로 황제의 신임을 얻었으며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전설과 함께 한국 설화에서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 쌍둥이 - 로물루스와 레무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로마 건국 신화 속 쌍둥이 형제로,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 아물리우스를 죽이고 로마 건설 위치 다툼 중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살해한 후 로마의 초대 왕이 되었으며, 이 신화는 로마의 기원과 정체성을 설명하는 핵심 이야기로서 예술, 문학,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쌍둥이 - 에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야곱의 쌍둥이 형이자 장자인 에서는 붉은 죽으로 장자권을 팔아넘긴 일화로 유명하며, 에돔 족속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안티오코스 11세 에피파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그리스어) | Ἀντίοχος Ἐπιφανής Φιλάδελφος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필라델포스) |
왕조 | 셀레우코스 왕조 |
아버지 | 안티오코스 8세 |
어머니 | 트리파이나 |
출생 | 기원전 124년 ~ 기원전 109년 사이 |
사망 | 기원전 93년, 안티오키아 (현재의 튀르키예 하타이 주 안타키아) |
통치 정보 | |
칭호 | 시리아의 왕 (셀레우코스 제국) |
통치 기간 | 기원전 94년 ~ 기원전 93년 |
선임자 | 셀레우코스 6세, 데메트리오스 3세, 안티오코스 10세 |
후임자 | 데메트리오스 3세, 안티오코스 10세, 필리포스 1세 |
공동 통치자 | 필리포스 1세 |
경쟁자 | 안티오코스 10세, 데메트리오스 3세 |
2. 이름, 가계 및 초기 생애
"안티오코스"라는 이름은 "논쟁에서 결연한"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1] 이 이름은 셀레우코스 1세(기원전 305-281년 재위)가 자신의 아버지 안티오코스의 이름을 따서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크를 명명하면서 왕조의 이름이 되었고, 많은 셀레우코스 왕들이 이 이름을 사용했다.[2][3][4]
안티오코스 8세와 트리파이나 사이에는 셀레우코스 6세, 안티오코스 11세, 필리포스 1세, 데메트리오스 3세, 안티오코스 12세 등 여러 자녀가 있었다. 유세비우스는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가 쌍둥이였다고 언급했다. 안티오코스 11세는 왕위에 올랐을 때 적어도 20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티오코스 11세는 안티오코스 8세와 프톨레마이오스 공주 트리파이나 사이에서 태어났다.[5][6] 그의 형제로는 셀레우코스 6세, 필리포스 1세, 데메트리오스 3세, 안티오코스 12세가 있었다.[7][8] 4세기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필리포스 1세가 안티오코스 11세의 쌍둥이 형제라고 기록했다. 안티오코스 11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왕위에 올랐을 때는 적어도 20대였다.
3. 즉위 과정
기원전 113년, 안티오코스 9세는 스스로 왕이라 선언하고 안티오코스 8세에 대항하여 내전을 시작했다. 이 내전은 15년 동안 지속되었고, 기원전 96년에 안티오코스 8세가 베로이아의 헤라클레온에게 암살되는 것으로 끝났다. 그 후 안티오코스 9세는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결혼했다. 이에 안티오코스 8세의 아들들이 대응했는데, 데메트리오스 3세는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여 통치했고, 셀레우코스 6세는 기원전 95년에 안티오코스 9세를 살해하고 안티오크를 점령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6세는 안티오코스 10세에게 패배하여 수도를 빼앗겼다. 셀레우코스 6세는 킬리키아의 몹수에스티아로 도망쳤으나, 기원전 94년에 반란군에게 살해당했다.
3. 1. 왕위 주장 및 근거지
안티오코스 11세와 그의 쌍둥이 형제는 셀레우코스 6세의 통치 기간 동안 킬리키아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 셀레우코스 6세가 사망한 기원전 94년, 안티오코스 11세는 필리포스 1세와 함께 공동으로 왕위를 주장했다.
역사학자 알프레드 벨린저는 그들의 근거지가 안티오크 북쪽의 해안 도시였을 것으로 추정했다.[2] 반면 아서 호튼은 베로이아를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이 도시의 통치자들이 필리포스 1세의 동맹이었기 때문이다.[3][4] 그러나 타르수스가 주요 작전 기지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5] 이는 두 왕이 함께 주조한 연합 동전이 킬리키아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6]
2008년 기준으로, 세 개의 연합 동전 시리즈가 알려져 있으며, 그중 한 시리즈는 6개의 현존하는 표본을 가지고 있다.[7] 이 동전들에는 두 왕 모두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8] 이 동전들의 뛰어난 솜씨는 주조 시설이 문화 중심지였던 타르수스에 위치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른 두 동전 시리즈는 현존하는 표본이 적고 안티오코스 11세의 옆머리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주요 기지로 가는 길에 거쳐간 도시에서 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안티오코스 11세는 본부에 도착했을 때 수염을 완전히 기른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모든 연합 동전에서 안티오코스 11세는 필리포스 1세보다 앞에 묘사되었고, 그의 이름이 우선시되어 그가 선임 군주임을 보여주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11세가 필리포스 1세보다 먼저 왕이 되었지만, 화폐 증거는 두 형제가 공동으로 통치했음을 보여준다.
4. 통치
후기 셀레우코스 왕들의 통치는 고대 문헌에 단편적으로만 기록되어 있어, 화폐 증거가 주요 자료로 활용된다.[6] 셀레우코스 6세 통치 기간 동안 안티오코스 11세와 그의 쌍둥이 형제는 아마도 킬리키아에 거주했을 것이다.[7] 셀레우코스 6세 사후,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는 기원전 94년에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했다. 알프레드 벨린저는 그들의 근거지가 안티오크 북쪽의 해안 도시라고 제안했고,[8] 아서 호튼은 베로이아를 그들의 근거지로 추정했는데, 그 이유는 이 도시의 통치자들이 필리포스 1세의 동맹이었기 때문이다.
타르수스가 주요 작전 기지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의 초상이 그들이 주조한 연합 동전의 앞면에 나타나 있으며, 모든 연합 동전은 킬리키아에서 주조되었다. 세 개의 연합 동전 시리즈가 알려져 있는데, 2008년 기준으로 한 시리즈는 6개의 알려진 생존 표본이 있으며, 두 왕 모두 수염을 기른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6개의 표본 시리즈 동전에 묘사된 초상의 뛰어난 솜씨는 주조 시설이 문화 중심지였던 도시에 위치해 있었음을 나타내며, 타르수스를 주조 장소이자 작전 기지로 추정하게 한다.
다른 두 개의 동전 시리즈는 생존 표본이 적고 안티오코스 11세의 옆머리를 묘사하고 있다. 이 동전들은 타르수스에서 주조되지 않았으며, 옆머리는 이들이 주요 기지로 가는 길에 왕이 거쳐간 도시에서 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안티오코스 11세가 본부에 도착했을 때는 수염을 완전히 기른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모든 연합 동전에서 안티오코스 11세는 필리포스 1세 앞에 묘사되었고, 그의 이름이 우선시되어 그가 선임 군주임을 보여주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11세는 필리포스 1세보다 먼저 왕이 되었지만, 화폐 증거는 그 반대를 시사하며, 가장 초기의 동전들은 두 형제가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1. 공동 통치 및 칭호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는 연합 동전을 발행하여 공동 통치를 시사했다. 이 동전들에는 안티오코스 11세가 Ἐπιφανής|에피파네스grc(신현자)와 Φιλάδελφος|필라델포스grc(형제애자)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이 나타나 있다. '에피파네스'는 그의 아버지 안티오코스 8세와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필라델푸스'는 셀레우코스 6세와 필리포스 1세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을 것으로 해석된다.
4. 2. 왕의 이미지
안티오코스 11세는 동전에 아버지 안티오코스 8세처럼 과장된 매부리코를 가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는 아버지로부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였다.[1] 이러한 초상화는 '트뤼페'(사치와 웅장함) 전통을 따랐는데,[2] 이는 헬레니즘 시대에 부와 풍요를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로마인들은 이를 타락과 쇠퇴의 증거로 해석했지만, 실제로는 내전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에게 평화와 번영을 약속하는 의도적인 정책이었다.[3]
타르수스에서 발견된 안티오코스 11세의 동전에는 수염을 기른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셀레우코스 6세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복수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4] 안티오크에서 발행된 마지막 동전에는 면도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맹세가 이행되었음을 강조한다.[5]
4. 3. 안티오키아 점령 및 통치
안티오코스 11세는 필리포스 1세를 킬리키아에 남겨두고 안티오크로 진격하여 기원전 93년 초에 안티오코스 10세를 몰아내고 수도를 점령했다.[1] 필리포스 1세는 수도에 거주하지 않았고, 안티오코스 11세는 단독으로 주화를 주조하며 통치했다.[2] 화폐학자 에드워드 테오도르 뉴웰은 안티오코스 11세가 수도에서 몇 주 동안 통치했다고 보았지만, 화폐학자 올리버 후버는 왕의 연간 평균 다이 사용률을 추정하면 몇 달 동안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3]
6세기 비잔틴 수도사이자 역사가인 요한 말랄라스는 안티오크의 로마 시대를 다룬 그의 기록에서 안티오코스 11세의 통치를 언급했다.[4] 말랄라스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필라델푸스 왕(안티오코스 11세)은[5] 다프네에 아폴로와 아르테미스 신전을 짓고, 신들을 묘사하는 두 개의 금 조각상을 세웠으며, 신전에 피신하는 모든 사람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권리를 부여했다.[6] 그러나 이 진술은 안티오코스 3세 시대에 이미 신전이 존재했음이 증명되었으므로, 안티오코스 11세는 신전을 재건 또는 복원했을 가능성이 있다.[7]
5. 몰락과 최후
Ἀντίοχος Ἐπιφανής|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grc는 기원전 93년 가을, 안티오코스 10세의 반격으로 패배하였다. 그는 도주하던 중 오론테스 강에서 익사했다.[1] 고대 기록에는 그의 마지막 전투에 대한 내용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는 안티오코스 11세가 혼자 싸웠다고 기록한 반면, 에우세비오스는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가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1] 에우세비우스는 안티오키아에서 안티오코스 11세의 통치를 언급하지 않고, 마지막 전투가 몹수에스티아 파괴 직후에 일어났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주화 증거와 모순된다.[1] 벨링거는 형제들의 연합군이 배치되었을 것이라고 보았지만, 안티오코스 11세만 사망했으므로, 필리포스 1세는 수도에 머물고 안티오코스 11세가 군대를 이끌고 현장에 나섰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1]
안티오코스 11세의 결혼이나 자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1] 1세기 전기 작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 로마 장군 루쿨루스는 기원전 83년에 시리아를 정복한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가 "셀레우코스의 후계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을 포로로 잡아가도록" 했다고 말했다.[1] 후기 셀레우코스 시대에 대한 고대 자료는 단편적이며 많은 세부 사항을 언급하지 않는다.[1] 따라서 루쿨루스의 진술은 안티오코스 11세의 아내나 딸이 존재했고, 그들이 아르메니아 왕에게 붙잡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1] 안티오코스 11세가 사망한 이후, 안티오코스 10세는 수도를 되찾고 죽을 때까지 통치했다.[1]
6. 유산
안티오코스 11세의 결혼이나 자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세기 전기 작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기원전 83년에 시리아를 정복한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가 "셀레우코스의 후계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을 포로로 잡아가도록" 했다고 말했다.[1] 후기 셀레우코스 시대에 대한 고대 자료는 단편적이며 많은 세부 사항을 언급하지 않는다.[1] 따라서 루쿨루스의 진술은 안티오코스 11세의 아내나 딸이 존재했고, 그들이 아르메니아 왕에게 붙잡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1]
7. 가계도
안티오코스와 셀레우코스 1세의 후손 | ||||||
---|---|---|---|---|---|---|
셀레우코스 4세[1] | 라오디케 4세[1][3] | 프톨레마이오스 5세[2] | 클레오파트라 1세[2] | |||
데메트리오스 1세[3] | 라오디케 5세[3] | 프톨레마이오스 6세[4] | 클레오파트라 2세[4] | |||
데메트리오스 2세[5] | 클레오파트라 테아[6] | 클레오파트라 3세[7] | 프톨레마이오스 8세[7] | |||
안티오코스 8세[8] | 트리파에나[8] | |||||
안티오코스 11세 에피파네스 |
참조
[1]
harvnb
[2]
harvnb
[3]
harvnb
[4]
harvnb
[5]
harvnb
[6]
harvnb
[7]
harvnb
[8]
harvnb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