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운
1. 개요
양운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춘추와 사기를 읽고 배다른 형 양충의 임자로 낭이 되었으며, 곽우 일당의 모반을 선제에게 알린 공로로 평통후에 봉해졌다. 그는 낭관의 부조리한 관행을 개선하고 청렴함을 실천했으나, 자신의 공적을 뽐내고 타인의 약점을 잡아 원한을 샀다. 이후 태복 대장락의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고, 재산을 불리며 오락으로 시간을 보내다 정치에 대한 비관적인 발언으로 인해 요참형에 처해졌다. 그의 가족과 양담 등은 유배되거나 관작을 박탈당했다.
-
기원전 54년 사망 -
카툴루스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는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정 시대의 시인으로, 헬레니즘 시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운율과 주제로 시를 썼으며, 레즈비아와의 연애를 다룬 시로 유명하다. -
기원전 54년 사망 -
아리오비스투스
아리오비스투스는 기원전 71년경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에 침입한 수에비족 출신의 게르만족 왕으로, 로마와 대립하다가 카이사르에게 패배하여 사망했다. -
전한의 공신후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전한의 공신후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한나라의 정치인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한나라의 정치인 -
석편
석편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기원전 138년에 내사에 임명되어 석경의 뒤를 이어 내사를 지냈으며, 정당시가 그의 후임자이다.
2. 생애
양운은 사마천의 외손자로, 《사기》와 《춘추》를 읽고 학문에 정진했다. 이복형 양충의 천거로 낭(郞)이 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 상시기(常侍騎)를 거쳐 좌조(左曹)로 발탁되었다. 지절 4년(기원전 66년)에는 김안상을 통해 선제에게 곽우 일당의 모반을 알려 평통후(平通侯)에 봉해지고 중랑장이 되었다. 이후 아버지와 계모의 유산을 친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재물보다 의리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2.1. 관행 타파와 비리 근절
당시 관행으로, 낭관은 자비로 소모품을 해결하지 못하면 휴가를 얻을 수 없었다. 때문에 가난한 이는 병에 걸려도 정기 휴가밖에 쓰지 못했고, 부자는 돈을 써가며 일도 하지 않고 좋은 부서에 발령되려고만 하였다. 양운은 이러한 관행을 타파하여 대사농에게서 소모품을 타 가도록 하였고, 휴가 또한 법에 정해진 대로만 보내주었다. 또 낭과 알자(謁者)가 죄를 지으면 파면시키고, 유능하면 천거하도록 하여, 청탁과 비리가 사라졌다. 이 공적으로 양운은 제리광록훈(諸吏光祿勳)으로 승진하였고, 선제의 측근으로 중용되었다.
2.2. 오만과 몰락
지절 4년(기원전 66년), 김안상을 통하여 선제에게 곽우 일당의 모반을 알렸고, 반란 진압 후 공로를 인정받아 평통후(平通侯)에 봉해지고 중랑장이 되었다.
열후가 된 양운은 아버지의 유산을 친족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계모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자 이 또한 계모의 집안에 나누어주는 등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리를 소중히 하였다.
당시의 관행으로, 낭관은 자비로 소모품을 해결하지 못하면 휴가를 얻을 수 없었다. 때문에 가난한 이는 병에 걸려도 정기 휴가밖에 쓰려 하지 않았고, 부자는 돈을 써가며 일도 하지 않고 좋은 부서에 발령되려고만 하였다. 양운은 이 관행을 타파하여 대사농에게서 소모품을 타 가도록 하였고, 휴가 또한 법에 정해진 대로만 보내주었다. 또 낭과 알자(謁者)가 죄를 지으면 파면시키고, 유능하면 천거하도록 하여, 청탁과 비리가 사라졌다. 이 공적으로 제리광록훈(諸吏光祿勳)으로 승진하였고, 선제의 측근으로 중용되었다. 양운은 청렴하여 낭관들의 칭송을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공적과 능력을 뽐냈고, 또 사람들의 비밀을 멋대로 캐내어 약점을 잡기도 하여 원한을 많이 샀다.
오봉 2년(기원전 56년), 태복 대장락이 제사의 예행연습에서 자신이 황제의 대역을 맡은 사실을 부하에게 자랑하였다. 어떤 사람이 대장락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였다며 그를 탄핵하였는데, 대장락은 양운의 소행이라고 지레짐작하여 양운이 황제를 비방하는 말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양운은 사형은 면했지만 대장락과 함께 파면되었고, 작위 또한 빼앗겨 서인이 되었다.
이후 양운은 재산을 불리는 데에 힘쓰고 오락으로 소일하였다. 한 해 남짓 지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친구 손회종은 글을 써 양운을 타일렀으나, 양운은 듣지 않았다. 형의 아들인 전속국(典屬國) 양담은 양운에게 그 동안 쌓은 공이 있으니 다시 쓰임받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위로하였는데, 양운은 도리어 "공이 있는 게 무슨 소용이냐? 지금은 힘써 일할 때가 아니다."라고 답하였다. 양담은 양운의 말에 "옳은 말씀입니다. 갑관요와 한연수는 힘써 일한 자들이었는데, 모두 (지금의 황제에게) 주살되었습니다."라고 동조하였다. 둘의 발언이 문제가 되어 정위가 심리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양운은 요참에 처하였다.
양운의 처자식은 주천으로 유배되었고, 양담 또한 양운의 말에 동조한 죄로 관작이 박탈되었다. 양운의 벗 손회종·위현성·장창 또한 파면되었다.
3. 평가
양운은 청렴하고 공평하다는 평을 받았으나, 자신의 공적과 능력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자신과 대립하는 자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오봉 2년(기원전 56년), 태복 대장락이 탄핵당하자, 대장락은 양운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고 생각하여 양운이 황제를 비방하는 말을 했다고 고발했다. 이로 인해 양운은 사형은 면했지만 대장락과 함께 파면되었고, 작위도 잃고 평민이 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양운은 재산을 모으고 오락에 힘썼지만, 1년쯤 뒤 그의 재능을 아낀 친구 손회종이 편지로 그의 행동을 경계했다. 그러나 양운은 이를 부정하는 답장을 보냈고, 형 양충의 아들인 안평후 양담에게서 "죄가 있던 두연년도 어사대부가 되었으니 다시 등용될 날이 올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자, "지금의 황제는 힘을 다할 상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등 부적절한 언행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언행이 발각되어 정위에 의해 대역부도로 처벌되어 요참형에 처해졌다.
3.1. 긍정적 평가
양운은 재산을 가볍게 여기고 의를 중시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열후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유산을 친족에게 나누어 주고, 계모의 유산을 받자 계모의 일족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낭관의 불합리한 관례를 개선하고 청탁과 부패를 없애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로 신작 원년(기원전 61년)에 광록훈으로 발탁되어 선제의 곁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청렴하고 낭관들에게 공평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3.2. 부정적 평가
양운은 청렴하여 낭관들에게 공평하다고 칭찬받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공적과 능력을 자랑하고, 사람의 숨겨진 일을 폭로하기를 좋아했으며, 자신과 대립하는 자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으므로, 원망하는 자가 많았다. 오봉 2년(기원전 56년), 태복 대장락이 탄핵되었을 때, 대장락은 양운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고 생각하고, 양운이 황제를 비방하는 말을 하고 있다고 고소했다. 사형은 면했지만 양운과 대장락 모두 파면되었고, 작위도 잃고 서인이 되었다.
지위를 잃은 양운은 치산에 힘쓰고 오락에 흥미를 느꼈지만, 1년여 뒤, 그의 재능을 아낀 친구 손회종이 서신을 보내 그의 행동을 경계했다. 그러나 양운은 그것을 부정하는 서신을 보냈고, 또한 형 양충의 아들인 안평후 양담으로부터 "죄가 있던 두연년도 어사대부가 되었으니 다시 쓰이는 날이 올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자 "지금의 황제는 힘을 다할 상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등의 행위가 고발되었다. 정위에 의해 대역부도로 처단되어, 요참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