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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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준일은 1969년 베트남 사이공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 가수이다. 1991년 1집 앨범 《겨울 나그네》로 데뷔하여 작사, 작곡, 퍼포먼스 등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으나, 비자 문제와 당시 한국 가요계의 정서 차이로 인해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대 후반 미국으로 돌아가 V2라는 프로젝트 그룹으로 활동을 재개했으나, 다시 활동을 중단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2019년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3》 출연을 계기로 18년 만에 방송에 복귀하여 팬미팅, 음반 발매, 광고 모델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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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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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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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양준일 |
예명 | JIY |
출생일 | 1969년 8월 19일 |
출생지 | 사이공, 남베트남 |
국적 | 미국 |
직업 | 가수, 작곡가, 래퍼, 프로듀서, 작가, 모델 |
종교 | 개신교 |
배우자 | 있음 |
자녀 | 아들 |
활동 시기 | 1991년–1993년 2001년 (V2로 활동) 2019년–현재 |
장르 | K-pop 뉴잭스윙 발라드 댄스 팝 테크노 팝 일렉트로팝 |
소속사 | XBe, Production LEE HWANG, 유니버설 뮤직 |
관련 활동 | V2 |
한국어 이름 | |
한글 | 양준일 |
한자 | 梁俊日 |
로마자 표기 | Yang Jun-il |
매큔-라이샤워 표기 | Yang Chun-il |
2. 생애
양준일은 1969년 8월 19일 베트남 전쟁 중 베트남 공화국 사이공(현 베트남 호치민)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을 따라 홍콩과 일본에서 살다가 대한민국으로 귀국, 서울특별시 도봉구[52] 수유동 서울우이초등학교에 다니다가 1978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갔다.[52]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USC)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하던 중, 가요제 심사위원으로 미국을 방문한 작곡가 이범희에게 대한민국 가수 데뷔 및 앨범 제작 제의를 받았다.[53]
1991년부터 2001년까지 한국에서 세 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2006년 첫눈에 반한 여성과 1년간 교제 후 결혼, 2015년 첫 아들이 태어났다.[8]
2. 1. 초기 생애 (1969~1990)
양준일은 1969년 8월 19일 베트남 전쟁 중이던 베트남 공화국 사이공(현 베트남 호치민)에서 태어났다.[52] 아버지의 직업은 미국 여행사 직원이였고, 어머니는 기자였다.[7] 이후 부모님을 따라 홍콩과 일본에서 살다가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서울특별시 도봉구[52] 수유동에 있는 서울우이초등학교에 다니다가, 1978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온 가족이 이민을 떠났다.[52]당시 양준일과 같은 교회를 다녔던 배우 오순택은 양준일의 모친에게 "쟤는 무조건 연예인 될 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52]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USC)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하던 그는 당시 가요제 심사위원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작곡가 이범희로부터 대한민국에서의 가수 데뷔 및 앨범 제작 제의를 받았다.[53] 1990년 한국에서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학교를 중퇴했다. 같은 해 한국에 입국하여 https://www.yskli.com/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했다.[12]
2. 2. 대한민국에서의 솔로 데뷔와 활동 (1991~1993)
1991년 3월, 21세의 나이로 1집 앨범 《겨울 나그네》로 데뷔했다. MBC 음악 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신인 가수 소개 코너'에서 '리베카'를 부르며 데뷔 무대를 가졌고, 두 번째 싱글은 '헬프 미 큐피드(Help Me Cupid)'였다.[4] 데뷔 당시에는 작사, 작곡, 무대 퍼포먼스, 편곡 등 다양한 재능을 갖춘 남성 솔로 뮤지션으로 호평을 받았다.1991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수 활동을 하며 2장의 앨범을 발표했으나, 비자 연장 문제[54]와 대한민국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활동이 어려웠다.
세련된 외모와 의상, 이국적인 퍼포먼스와 강렬한 무대 매너, 개성이 강한 음악으로 활동했지만, 일부 곡들은 당시 대한민국 가요계 정서와 맞지 않아 호불호가 갈렸다. 라이브 공연 중 관객이 던진 돌에 맞을 뻔한 일화도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김건모, 신승훈 등 동시대 인기 가수들에 비해 가요 프로그램 차트 상위권 진입은 어려웠다.
한국어 구사 능력 부족과 재미교포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여러 구설수에 올랐고, 활동 기간도 짧아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시간이 흐른 뒤, 그의 음악은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92년에는 2집 앨범을 발매하여 '댄스 위드 미 미스(Dance with Me Miss)'와 '가나다라마바사' 등의 곡으로 활동했다.[5][6]
1993년에는 철이와 미애의 '뚜벅이 사랑'을 작곡했다. 공연 비자 문제로 2집 활동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13]
2. 3. 미국에서의 삶과 V2 활동 (1993~2019)
1993년 공연비자 문제로 2집 활동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여러 뮤지션들과 함께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자 자택에서 합숙을 하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잠시 대한민국에서 의류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IMF 사태로 사업을 접었다.[54]1990년대 후반에 괌에서 결혼했으나, 이후 이혼했다.
2001년 4월 대한민국 가요계에 컴백하여 2001년 4월 17일 앨범 "Fantasy"를 발표하고, '''V2'''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해 '''쟈이'''(JIY)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V2란 양준일 인생에 버전(Version) 2라는 뜻이다.[14] 당시 소속사의 요청에 따라 양준일의 이름을 쓸 수 없었고, 이는 결국 과거의 자신을 숨겨야 했던 이유가 되었으며, 영문 이니셜을 본뜬 예명으로 활동했다. V2 활동을 준비하면서 이미지 변신을 위해 벌크업을 했고, 출생 연도도 8살 어린 1977년 생이라고 했다. 타이틀곡은 당시 나름 인기를 얻어서 클럽에서 자주 트는 수준으로 지명도는 있었으나, 소속사와의 계약 관련 마찰 등 여러 문제로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다시 가수 생활을 접게 되었다.
그 후 가요계를 완전히 떠나 경기도 일산에서 영어 강사 및 영어교육 프로그램 제작자로 활동했다.[55] 약 15년간 영어 강사 등을 하며 한국에서 살다가 늦은 나이에 재혼한 후 2015년에 미국 플로리다주로 건너갔다.[56] 같은 해에 득남했으며, 이후에는 미국에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2. 4. 슈가맨 출연과 화려한 복귀 (2019~현재)
2018년경부터 온라인상에서 그의 과거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탑골 GD', '시대를 앞서간 천재' 등으로 불리며 재평가받기 시작했다.[57][58] 2019년 12월 6일 노사연의 제보로 《슈가맨 3》에 출연하여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미국으로 떠난 지 4-5년, 마지막 무대 이후 18년 만의 복귀였다. 여전한 무대 매너와 퍼포먼스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15] 방송 출연 이후, 위 엔터테인먼트의 주선으로 2019년 12월 31일에 팬미팅을 개최하고, TV 및 라디오 방송 출연, 광고 모델 발탁, 에세이 출간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36][18]2020년 1월 4일 쇼! 음악중심에 출연하여 데뷔곡 "리베카"로 다시 무대에 섰고, 2020년 3월 14일에는 안무가 리아킴과 함께 "Dance with me 아가씨"로 무대에 섰다. 활동 재개를 선언한 그는 브랜뉴뮤직 등 여러 기획사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계약서만 보아도 트라우마가 온다고 말했을 정도로 수 차례 그의 발목을 잡았던 소속사 문제 때문에 영입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1인 기획사를 세워서 활동하기로 했다.[59] 2020년 1인 기획사 엑스비(XBe)를 설립하여 활동 중이다. 엑스비(XBe)는 과거를 뜻하는 'ex'와 발음이 같고 미지의 존재를 뜻하기도 하는 'X'에, 현재를 뜻하는 'Be'를 합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얘기하는 이름으로, 양준일이 직접 지었다. 2020년 8월 19일, 그의 51번째 생일에 싱글 《Rocking Roll Again》을 발표하며 음악 활동을 재개했다.[31]
3. 논란 및 징계
양준일은 윤종신이 DJ를 맡았던 SBS 라디오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어레스트(arrest)', '인베스티게이션(investigation)' 등 무분별한 외국어를 사용해 방송심의규정을 어겨 1993년 4월 10일 방송위원회로부터 3개월간 해당 프로그램 출연정지 명령을 받았다.[60][61] 또한 2집 수록곡 'Dance With Me 아가씨'는 영어가 많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방송심의 불합격을 받았다.[62]
3. 1. 방송 심의 징계
양준일은 과거 윤종신이 DJ를 맡은 SBS 라디오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어레스트(arrest)', '인베스티게이션(investigation)' 등[60] 무분별한 외국어를 구사했는데, 이것이 방송심의규정을 어기는 원인이 되면서 1993년 4월 10일 방송위원회로부터 '3개월 간 해당 프로그램 출연정지명령' 조치가 내려졌다.[61]또한 2집 수록곡 'Dance With Me 아가씨'는 영어가 많이 들어갔다는 이유로[62] 방송심의 불합격을 받았다.
4. 음악
양준일은 1991년 3월, 21세의 나이로 1집 앨범 《겨울 나그네》를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MBC 음악 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신인 가수 소개 코너에서 '리베카'를 부르며 데뷔 무대를 가졌고, 이후 '헬프 미 큐피드'를 싱글로 발표했다.[4][5][6] 몇 달 후, 2집 작업을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갔다. 1992년에 발매된 두 번째 정규 앨범에서는 '댄스 위드 미 미스'와 '가나다라마바사' 등이 인기를 얻었다.[4][5][6]
또한 철이와 미애의 2집 앨범 대부분의 곡을 작곡했는데, 특히 수록곡 '뚜벅이 사랑'을 작곡했다. 철이와 미애의 2집 앨범 수록곡인 '백 투 더 퓨처'에서는 댄스 팝과 한국 전통 음악을 결합한 혁신적인 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하던 그는 갑작스럽게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져 미국으로 돌아갔다. 2019년 코리아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색적인 외모와 음악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고 밝혔다.[13] 야외 공연 중에는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고, 한 번은 관객이 악수를 가장하여 무대에서 거칠게 끌어내리며 "너는 맞아야 해"라고 말한 적도 있다고 회상했다.[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