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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 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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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 남작은 스코틀랜드, 독일, 라트비아 혈통의 군인으로, 러시아 제국군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오스트리아 군에서 활약했다. 그는 7년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고,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에서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는 등 성공적인 지휘를 보였다. 라우돈은 오스트리아 군 역사상 가장 유능한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군사적 업적은 유럽의 세력 균형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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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 남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라우돈의 초상화 (빈 군사사 박물관 소장)
존칭 접두사남작
이름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
원어 이름Ernst Gideon Freiherr von Laudon (독일어)
출생일1717년 2월 13일
출생지스웨덴령 리보니아, 토체 영지 (현재 라트비아, 마도나 지방, 토체)
사망일1790년 7월 14일
사망지신성 로마 제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노비이친
매장지, 하더스도르프
군사 복무
소속
(1742년부터)
군대제국군
복무 기간1732년–1790년
최종 계급원수
주요 참전 전투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단치히 공방전
러시아-튀르크 전쟁 (1735년~1739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조르 전투
7년 전쟁
돔슈테트 전투
호크키르히 전투
글라츠 공방전
란츠후트 전투
쿠너스도르프 전투
리그니츠 전투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788년~1791년)
베오그라드 공방전
주요 지휘 경력보헤미아-모라비아-슐레지엔 방면 총사령관, 이후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
훈장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기사십자장 및 대십자장, 예카테리나 2세 여제로부터 러시아 명예 검 (1760년), 발할라 흉상

2. 배경 및 초기 경력

라우돈 가문은 스코틀랜드독일, 라트갈레인계 혈통으로, 1432년 이전부터 동 라트비아의 라우도나 근처 투첸에 영지를 소유했다. 아버지 오토 게른하르트 폰 라우돈은 스웨덴군에서 중령으로 복무 후 은퇴하여 연금을 받았다. 1732년, 라우돈은 러시아 제국군 사관후보생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734년 그단스크 공성전에 참전했고, 1735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라인강까지 진격했으며, 러시아-투르크 전쟁에도 참전했다.

1741년, 러시아군에서의 불만족스러운 장래 때문에 군에서 사임하고 다른 국가에서 군사적 고용을 찾았다.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2세에게 거절당한 후, 에서 프란츠 폰 데어 트렌크 남작의 자유군 지휘관으로 고용되었다. 알자스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후, 주요 오스트리아 군으로 전보되었다.

3. 7년 전쟁 (슐레지엔 전쟁)

1745년 슐레지엔 산맥에서 트렌크의 지휘 아래 경장부대를 이끌며 뛰어난 활약을 보였고, 조르 전투에도 참전했다. 비정규군 동료들의 무법적인 성향에 혐오감을 느껴 잠시 은퇴를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를로바츠 지구에서 국경 연대 지휘관으로 10년간 반군사적, 반행정적 업무를 맡았다. 부닉에 교회와 공장을 세우고 오크 숲을 심었는데, 이들은 현재 그의 이름으로 불린다.

7년 전쟁 발발 후 중령으로 복귀하여 1757년 Generalfeldwachtmeister(기병대의 소장)으로 승진하고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을 수여받았다. 1758년 돔마소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올로모우츠 공성전을 포기하고 보헤미아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호크키르히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으로 중급 육군 원수(lieutenant-field-marshal)로 승진했다. 마리아 테레지아프란츠 1세에게서 신성로마제국 및 오스트리아 귀족 작위(프라이헤르)를 받고, 쿠트나호라 근처 영지를 하사받았다.

쿠너스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지휘하여 프로이센에 대승을 거두고, Feldzeugmeister로 승진하여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지아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1760년 란츠후트그라츠의 중요한 요새를 급습하고, 하인리히 오귀스트 데 라 모테 푸케 휘하의 프로이센 군단을 격파했다. 리그니츠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패배하고, 다운 및 라시와의 불화가 심화되었다. 1761년 슈바이드니츠를 급습하여 점령하는 등 뛰어난 공적을 세웠으나, 러시아 동맹군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다운 및 라시와의 전략적 차이로 인해 갈등이 지속되었다.

4. 이후 경력

7년 전쟁 이후, 다운이 군 총사령관이 되면서 라우돈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아졌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라우돈에게 자신의 휘하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했지만, 라우돈은 이를 거절했다. 비록 라우돈은 라시로부터 보병 감시총감 직위를 받았지만, 둘 사이의 불화는 계속되었다. 요제프 2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라우돈은 쿠트나호라 근처 자신의 영지로 은퇴했다.

1769년, 마리아 테레지아와 카우니츠는 라우돈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총사령관으로 복귀시켰다. 3년 후, 라우돈은 다시 은퇴하여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다시 한번 그에게 군에 남아있을 것을 설득했고, 1776년에는 그의 영지를 후한 조건으로 재매입했다. 라우돈은 빈 근처 하데르스도르프에 정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군 원수로 승진했다. 칼라일에 따르면, 1776년 프리드리히 대왕은 라우돈을 만났을 때, 황제가 참석한 자리에서 "Herr Feldmarschall"(안녕 원수님)이라고 일부러 인사말을 건넸다고 한다.

1778년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요제프 2세와 라시는 라우돈과 화해했고, 라우돈과 라시는 각각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라우돈은 이 전쟁에서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2년 후, 라우돈은 하데르스도르프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1787년 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이 발발하자, 상황이 악화되면서 라우돈이 다시 총사령관으로 복귀했다. 비록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라우돈은 1789년 3주 만에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는 등 마지막 성공을 거두었다.

라우돈은 1790년 모라비아의 노비이친에서 사망했다. 그는 레오폴트 2세에 의해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라우돈은 하데르스도르프에 묻혔으며, 요제프 2세는 전쟁 평의회 회의실에 그의 대리석 흉상을 세웠다.

5. 가족 및 개인사

라우돈은 뵈징에서 크로아티아 장교의 딸이자 살비아티 가문의 친척인 클라라 폰 하겐과 결혼했다. 결혼 전 클라라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총독인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폰 자일른 운트 아스팡 백작(1717-1801)의 아내인 솔름스-존네발데의 샤를로테 백작부인(1725–1783)의 하녀로 일했다. 그는 가족들이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에 미래의 아내를 납치해야 했다.[1] 이 결혼에서는 자녀가 없었다.[2]

6. 평가 및 영향

요제프 하이든이 작곡한 교향곡 69번은 라우돈에게 헌정되었으며, '''라우돈 장군'''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빈 펜칭에는 라우돈이 구입한 라우돈 궁전이 현존하며, 그의 기념비가 있다.[1]

참조

[1] 웹사이트 Loudon, Baron Ernst Gideon - Project Seven Years War https://www.kronoska[...]
[2] 웹사이트 Biographische Skizzen berühmter Feldherren des k. K. österreichischen Heeres von den ältesten bis auf die neuesten Zeiten ... Als Text zu den in 18 Heften enthaltenen 72 Abbildungen der k. K. österreichischen Generalität https://books.google[...] 1831
[3] 서적 Baltisches Wappenbuch https://personen.dig[...] Stockholm 2019-04-15
[4] 문서 de:Fix Lau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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