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누엘 펠라에스
1. 개요
엠마누엘 펠라에스는 필리핀의 정치인으로, 하원 의원, 상원 의원, 부통령, 외무 장관을 역임했다. 1938년 변호사 시험 수석 합격 후 법조계에 몸담았으며, 1949년 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1953년 상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61년 부통령으로 선출되어 외무 장관을 겸임했으나, 마카파갈 행정부와의 갈등으로 사임했다. 이후 하원과 상원을 거쳐, 1978년 임시 바타상 팜반사 국회의원을 지냈다. 펠라에스는 필리핀 전력화에 기여하여 "전력화의 아버지"로 불리며, 다양한 국제 회의에 참여하고 시민 운동에도 헌신했다. 2003년 사망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부통령 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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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부통령 -
조셉 에스트라다
필리핀의 배우 출신 정치인인 조셉 에스트라다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필리핀 제13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부정부패 혐의로 인해 사임했으며, 이후 마닐라 시장을 역임했다. -
필리핀의 부통령 -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는 필리핀의 정치인으로,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필리핀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2년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98년 부통령에 당선되어 2001년 에드사 혁명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2004년 재선에 성공했다. -
2003년 사망 -
윤석중
윤석중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로서, 아동문학 운동을 이끌고 수많은 동요와 동시집을 발표하며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
2003년 사망 -
에드워드 텔러
헝가리 출신 이론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는 수소폭탄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논쟁적인 활동으로 인해 과학 기술 발전과 윤리적 책임에 대한 논쟁을 야기한 인물이다. -
1915년 출생 -
안수산
안수산은 안창호와 이혜련의 장녀이자 미국 해군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 장교 및 여성 포술 장교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해군에서 복무하고 종전 후 해군 정보국, 미국 의회도서관, 국가안보국 등에서 근무하며 인종 및 성차별을 극복하고 활약한 인물이다. -
1915년 출생 -
장준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정치인인 장준하는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 후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활동, 해방 후 김구의 비서를 지냈고, 《사상계》를 창간하여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나 의문사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2. 초기 생애 및 경력
엠마누엘 펠라에스는 1915년 11월 30일 필리핀 미사미스 오리엔탈주 메디나에서 그레고리오 아귈라 펠라에스 시니어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펠리파 비센테 네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8명의 자녀 중 넷째였다. 카가얀 데 미사미스(카가얀데오로의 이전 이름) 초등학교를 최우수상으로 졸업하고, 아테네오 데 마닐라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세부 UP 주니어 칼리지에서 문학 준학사 학위를 받았다.
1938년 마닐라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으며, 같은 해 변호사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그는 법학 학위 취득 전후로 다양한 공직을 경험했다.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상원 사무처 저널 부서에서 일했고, 1935년부터 1937년까지는 토론 담당 기자로 활동했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는 법원 통역관으로 근무했으며, 1939년부터 1940년까지는 항소 법원 보조 법원 속기사로 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5년부터 1946년까지는 인민 법원 특별 검사로 활동했다.
1946년부터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활동은 1963년까지 이어졌다. 동시에 그는 모교인 마닐라 대학교에서 법학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3. 정치 경력
1949년 필리핀 하원 선거에서 미사미스 오리엔탈 주를 대표하여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상원의원, 부통령 겸 외무장관 등을 역임하며 필리핀 정치계에서 활동했다.
3.1. 하원의원 (1949-1953)
1949년 필리핀 하원 선거에서 고향인 미사미스 오리엔탈 주를 대표하여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원의원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뛰어난 의정 활동으로 여러 언론 및 단체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국회 기자 클럽은 그를 '10대 우수 국회의원' 중 한 명으로 선정했고, 필리핀 프리 프레스지는 '10대 유용한 국회의원' 중 한 명으로, 필리핀 여성 유권자 연맹은 '2대 우수 국회의원'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3.2. 상원의원 (1953-1959)
하원의원으로서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1953년 필리핀 상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상원의원으로 재임하는 동안 필리핀 여성 유권자 연맹과 상원 기자 클럽으로부터 만장일치로 '최우수 상원의원'으로 선정되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1959년 필리핀 상원 선거에서는 8석을 뽑는 선거에 출마하여 10위를 기록하며 재선에 실패했다.
3.3. 부통령 및 외무장관 (1961-1965)
1961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37.57%(2,394,400표)의 득표율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선 후 마카파갈 행정부에서 외무장관을 겸임했다.
1962년 5월, 미국 하원은 미국 국무부와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등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 대한 전쟁 피해 보상금 잔액 73 지급 법안을 거부했다. 이에 펠라에스는 "미국은 친구들을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초라하게 대한다... 미국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면 미국인들을 협박해야 한다."라고 비판하며 미국의 결정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그러나 마카파갈 행정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1963년 외무장관직에서 사임했다. 같은 해 《익재미너》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고, 이듬해에는 모교인 마닐라 대학교로부터 가장 뛰어난 동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64년 11월 22일 열린 국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노렸으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상원의원에게 패배했다. 마르코스는 이후 1965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3.4. 하원의원 (1965-1969) 및 상원의원 (1969-1972)
1965년 7월 29일, 펠라에스는 필리핀 하원의 미사미스 오리엔탈 단독 선거구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를 선언했다. 같은 해 11월, 그는 다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67년 필리핀 상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계엄령(공포령 1081호)을 선포한 1972년 9월 23일, 펠라에스는 상원의원직을 잃게 되었다.
4. 외교 경력
펠라에스는 여러 국제 회의에서 필리핀 대표단을 이끌거나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1963년에는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에 파견된 필리핀 대표단의 자문 위원을 맡았다.
또한, 미국과의 군사 기지 협상에도 깊이 관여했다. 1956년에는 필리핀-미국 군사 기지 협상에서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1973년에는 마르코스 대통령에 의해 협상 패널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협상은 1975년 워싱턴 D.C.에서 열렸다.
이후 코라손 아키노 행정부 시기에는 주미 필리핀 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펠라에스는 UN의 인가를 받은 비정부 기구인 농업-에너지 라운드테이블(AER)의 명예 위원회에서도 활동했으며, 1987년 5월 마닐라 호텔에서 열린 AER의 ASEAN 농업-산업 지역 회의에 참여했다.
5. 시민 운동 및 사회 활동
펠라에스는 다양한 시민 및 전문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필리핀 카당-카당 연구 재단(Cadang-Cadang Research Foundation of the Philippines, Inc.영어)의 의장을 역임했다. 이 재단은 코코넛 산업을 위협하는 전염성 바이러스 질병인 카당-카당을 근절하기 위해 정부와 민간 부문이 공동으로 자금을 지원한 최초의 필리핀 과학 연구 재단이었다. 그는 또한 필리핀 코코넛 재배자 협회, 민다나오-술루-팔라완 협회 등에서 활동했으며, 1958년에는 민다나오 지역 필리핀 적십자 기금 모금 운동을 이끌었다.
6. 개인사
펠라에스는 에디스 네리 파벨라와 결혼하여 엠마누엘 주니어, 에르네스토, 엘레나, 에스페란사, 엘로이사, 에두아르도, 엔리케, 에드문도, 엘비라 등 9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총 41명의 손주를 보았다.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정치 경력을 마감하고 성경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필리핀 성서 공회의 회장과 이사회 의장을 두 차례 역임했으며, 이후 이 단체로부터 종신 명예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펠라에스는 2003년 7월 27일, 메트로 마닐라 문틴루파에 있는 아시아 병원 및 의료 센터에서 심정지로 사망했다.
7. 업적 및 유산
펠라에스는 필리핀 전력화에 기여한 공로로 "전력화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1969년 당시 필리핀은 메트로 마닐라와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고 가구의 4분의 3 이상이 여전히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기려, 가장 권위 있는 전력 관련 상인 "에마누엘 펠라에스 부통령 상"이 제정되었다. 이 상은 공공 유틸리티로서 전기를 배전하는 최고의 전기 협동조합 또는 회사에 수여된다.
8. 역대 선거 결과
wikitext
| |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 |||||||
|---|---|---|---|---|---|---|---|
| 1961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 | 필리핀의 부통령 | 6대 | 자유당 (필리핀) | 37.57% | 2,394,400표 | 1위 |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