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마동
1. 개요
여마동은 전한 초기의 인물로, 낭중기장, 사마, 기사마를 역임하며 유방을 섬겼다. 그는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추격하여 오강에서 항우와 대면하였고, 항우 사후에는 그의 시신 일부를 얻어 공을 세워 중수후에 봉해졌다. 이후 문제 9년에 사망하여 시호를 장이라 하였으며, 아들 여가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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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의 귀족 -
장량
장량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초한쟁패기를 거쳐 전한 초기에 활약한 한나라 귀족 출신 인물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우고 유후에 봉해진 뛰어난 지략가이자 책사이다. -
전한의 귀족 -
소하
소하는 전한 초기의 정치가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군수 보급, 내정 담당, 한신 천거, 승상으로서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한 인물이다. -
전한의 열후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전한의 열후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전한의 공신 -
장량
장량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초한쟁패기를 거쳐 전한 초기에 활약한 한나라 귀족 출신 인물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우고 유후에 봉해진 뛰어난 지략가이자 책사이다. -
전한의 공신 -
소하
소하는 전한 초기의 정치가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군수 보급, 내정 담당, 한신 천거, 승상으로서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한 인물이다.
2. 생애
고제 원년(기원전 206년), 여마동은 호치(好畤)에서 낭중기장(郞中騎將)으로 고제를 따랐다. 이후 사마(司馬)로서 초나라 장수 용저를 쳤다.
고제 7년(기원전 200년) 정월 기유일, 여마동은 중수후(中水侯)에 봉해졌으며, 봉읍은 1,500호였다. 문제 9년(기원전 171년)에 사망하여 시호를 장(莊)이라 하였고, 아들 여가(呂假) 혹은 여하(呂瑕)가 뒤를 이었다.
2.1. 해하 전투와 항우의 죽음
고제 5년(기원전 202년), 여마동은 기사마(騎司馬)로서 해하 전투에 참전하여 초패왕 항우를 오강까지 추격했다. 항우는 여마동을 알아보고 "너는 내 옛 사람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여마동은 왕예에게 "저 사람이 항왕입니다."라고 말했다. 항우는 "내 머리를 한왕이 천금과 봉읍 만 호로 산다고 하니, 내가 너에게 얻게 하겠노라."라며 자결했다.
한나라 군대가 항우의 시체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고, 왕예가 머리를 차지한 후, 여마동은 낭중기 양희, 낭중 여승, 양무와 함께 시체의 일부를 얻었다. 다섯 명이 시체를 맞추어보니 항우의 것이 맞았고, 이들은 함께 제후가 되었다.
2.2. 중수후 책봉과 사망
고제 5년(기원전 202년), 기사마(騎司馬)로서 해하 전투에서 진나라 서초패왕 항우를 추격하여 오강에 이른 한나라 군대 속에 있었다. 항우와 대면하여, 항우가 물었다. “너는 내 옛 사람이 아니냐?” 이에 고개를 돌리고 왕예에게 지시하여 말했다. “저 사람이 항왕입니다.” 항우가 말했다. “내 머리를 한왕이 천금과 봉읍 10로 산다 하니, 내가 너에게 얻게 하겠노라.” 그리고 자결했다. 한나라 군대가 서로 죽이기까지 하며 항우의 시체를 다투니, 이미 머리를 취한 왕예 외에 낭중기 양희, 낭중 여승, 양무와 함께 항우의 시체 일부를 얻었다. 다섯 명이서 그 시체를 맞추어보니 맞아서 함께 제후가 되었다. 고제 7년(기원전 200년) 정월 기유일에 중수후(中水侯) 1500호에 봉해졌다. 문제 9년(기원전 171년)에 죽어 시호를 장(莊)이라 하고, 아들 이후(夷侯) 여가(呂假) 혹 여하(呂瑕)가 뒤를 이었다. 이 시호는 항우의 시체를 얻은 다섯 명이 공통으로 받았다.
3. 출전
고제 원년(기원전 206년), 호치에서 몸을 일으켜 낭중기장(郞中騎將)으로 고제를 따랐다. 이후 사마(司馬)로서 초나라 장수 용저를 쳤다.
고제 5년(기원전 202년), 기사마(騎司馬)로서 해하 전투에서 진나라 서초패왕을 추격하여 오강에 이른 한나라 군대 속에 있었다. 항우와 대면하여, 항우가 물었다. “너는 내 옛 사람이 아니냐?” 이에 고개를 돌리고 왕예에게 지시하여 말했다. “저 사람이 항왕입니다.” 항우가 말했다. “내 머리를 한왕이 천금과 봉읍 만 호로 산다 하니, 내가 너에게 얻게 하겠노라.” 그리고 자결했다. 한나라 군대가 서로 죽이기까지 하며 항우의 시체를 다투니, 이미 머리를 취한 왕예 외에 낭중기 양희, 낭중 여승, 양무와 함께 항우의 시체 일부를 얻었다. 다섯 명이서 그 시체를 맞추어보니 맞아서 함께 제후가 되었다. 고제 7년(기원전 200년) 정월 기유일에 중수후(中水侯) 1500호에 봉해졌다. 문제 9년(기원전 171년)에 죽어 시호를 장(莊)이라 하고, 아들 이후(夷侯) 여가(呂假) 혹 여하(呂瑕)가 뒤를 이었다. 이 시호는 항우의 시체를 얻은 다섯 명이 공통으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