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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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도는 원래 절영도로 불렸으며,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고려 시대에는 절영도 총마로 불렸고, 이후 공식적으로 절영도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목도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했으나 절영도라는 지명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영도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게 중요한 항구였으며, 1937년 국내 최초의 철강 조선소인 조선 중공업이 세워져 조선 사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대한조선공사, 한진중공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영도다리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가족을 기다리던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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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이름 | 영도 |
위치 | 동해 |
행정 구역 | 부산광역시 |
행정 구역 1 | 영도구 |
최고점 | 봉래산 |
높이 | 395m |
인구 | 약 11만 |
기타 |
2. 역사
영도는 원래 절영도라고 불렸으며,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할 때는 절영산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절영산은 그림자가 끊어진 섬이라는 뜻으로, 현재의 봉래산을 가리킨다. 고려사에는 '절영도 총마'로 나타나며, 절영산이 있는 섬이라는 뜻으로 절영도라고 불렸고 이후 공식 명칭이 되었다. 1601년 설치된 절영도왜관, 1881년 설치된 절영도진 등에서도 절영도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일제강점기에는 '목도'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했지만, 절영도라는 지명은 계속 사용되었다. 세 글자 지명을 줄일 때 앞글자를 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절영도는 '절도'라고 부르지 않고 '영도'라고 불렀다. 이는 '절도'가 도둑을 연상시키기 때문으로 추정된다.[4]
일제강점기, 항구를 낀 영도는 일본에게 중요한 지역이었다. 1910년 제국주의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조선의 물자가 배를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영도는 배들의 교차로 역할을 하며 조선소를 짓기에 좋은 위치였다.[5] 1937년에는 국내 최초의 철강 조선소인 조선 중공업이 영도에 세워져 조선 사업의 중심지가 되었다.[5]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물러나고 남은 시설들은 대한민국 소유가 되어, 대한민국이 직접 배를 건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가 만든 영도의 조선소는 목선에서 철선을 만드는 조선소로 바뀌었고, 대한민국 사람이 이 조선소를 인수하여 대한조선공사, 후에 한진중공업으로 이름을 바꾸었다.[5] 한국전쟁 당시 영도다리는 부산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만남을 약속했던 장소로,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이 가족을 기다리던 랜드마크였다.[6]
2. 1. 지명 유래
영도는 원래 절영도로 불렸다. 절영도가 역사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이다. 여기서는 절영도가 아닌 절영산으로 나온다. 절영산이란 그림자가 끊어진 섬이란 의미이다. 여기서 절영산이 지금의 봉래산이다.고려사에는 '절영도 총마'로 나타나며, 절영산이 있는 섬이라는 뜻으로 절영도라고 불렸고 이후 공식적으로 절영도로 불렸다. 1601년 설치된 절영도왜관, 1881년 설치된 절영도진 등 절영도가 나타난다.
일제강점기에는 '목도'를 공식 명칭으로 썼지만 절영도라는 지명은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세 글자의 지명을 줄일 때는 앞글자를 따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절영도는 절도라 부르지 않고 영도라고 부른다. 절도는 도둑을 연상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4]
2. 2. 일제강점기
1910년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이 극심할 때, 항구를 낀 영도는 당시 일본에게 황금의 땅이었다. 조선의 물자는 배를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오가는 배들의 교차로였던 영도는 조선소를 짓기에 최고의 요충지였다.[5]1937년 국내 최초 철강 조선소인 조선 중공업이 영도에 세워져 영도는 조선 사업의 시작점이자 중심지가 되었다.[5]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모두 물러나고 그 시설들이 대한민국에 돌아와 대한민국이 직접 배를 건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가 만든 영도의 조선소는 목선에서 철선을 만드는 조선소로 바뀌고, 이 조선소를 대한민국 사람이 인수하여 대한조선공사, 나중에는 한진중공업으로 이름을 바꾸었다.[5]
2. 3. 해방 이후
제공된 소스 자료에는 해방 이후 영도에 대한 내용이 없어, 해당 섹션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2. 4. 랜드마크
영도다리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서로 만나기로 약속했던 장소였다. 당시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이 가족을 기다리던 랜드마크였다.[6]참조
[1]
웹인용
120417(조간)_2012년도_지적통계연보_발간(지적기획과1)
http://www.mltm.go.k[...]
2012-04-16
[2]
웹인용
영도
https://terms.naver.[...]
2021-06-05
[3]
일반텍스트
[4]
뉴스
영도는 언제부터 영도였을까?
https://www.busan.go[...]
2023-04-11
[5]
뉴스
영도 알쓸신잡
http://www.kmoumedia[...]
한국해양대학교 언론시
2023-04-11
[6]
뉴스
한때 피란민들의 아픔과 희망이 서렸던 그곳...이제는 '지역감정'에 아리다.
https://m.khan.co.kr[...]
2022-12-16
[7]
일반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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