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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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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 의제는 전국 시대 초나라 왕족의 후손으로, 진나라 멸망 후 항량에 의해 초나라 왕으로 옹립되었으나 실권을 갖지 못했다. 항우에게 소외되어 유방과의 권력 다툼 속에서 결국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유방이 항우를 공격하는 명분이 되어 초한 쟁패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는 반진 세력의 명목상 군주 역할을 했으며, 그의 후손은 유씨 성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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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나라의 황제 - 항우
    항우는 초나라 명문가 출신으로 진나라에 대항하여 봉기하여 서초 패왕이 되었으나, 유방과의 초한전쟁에서 패배하여 자결한 인물이다.
  • 기원전 205년 사망 - 전영 (제왕)
    진나라 말기에 전담, 전횡과 함께 거병하여 제나라 부활을 시도했으나 항우와의 갈등으로 패망하고 살해당한 전영은 유방의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기원전 205년 사망 - 사마앙
    사마앙은 조나라 장군 사마상의 아들로, 진나라 멸망 후 항우에 의해 은왕에 봉해졌으나 유방에게 항복한 뒤 팽성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후손은 사마씨 가문을 이루어 훗날 서진과 동진 황실의 기반이 되었다.
초 의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초 의제
다른 이름초 회왕
웅심 (熊心)
왕조
가문미/웅씨 (羋/熊氏)
생애
출생불명
사망기원전 206년
관직
즉위기원전 208년
폐위기원전 206년
직위초 황제
서초
재위 기간기원전 208년 ~ 기원전 206년
수도펑청 (彭城)
기타 정보
능묘의제릉

2. 생애

초 의제는 초 회왕의 손자 또는 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초나라 왕족의 후손이다.[1] 초나라가 멸망한 이후 양치기로 숨어 지내다가, 기원전 208년 여름 항량과 송의에 의해 초나라를 재건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회왕(懷王)으로 옹립되었다.[1]

회왕은 송의를 통해 항량항우를 견제하려 했다.[1] 유방과 항우에게 진나라 정벌을 명하며, 먼저 관중에 들어가는 자에게 관중왕 지위를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를 '회왕지약'이라 한다.[3] 기원전 207년 겨울, 유방이 먼저 관중에 도착하여 진나라 마지막 왕 자영에게 항복을 받았다.[2] 회왕은 약속대로 유방을 관중왕으로 삼으려 했다.

기원전 206년, 항우는 회왕을 의제(義帝)로 격상시켰으나, 이는 명목상의 지위였고 실권은 여전히 항우에게 있었다.[3] 항우는 의제를 침현(郴城)으로 쫓아냈으며, 이동 중 구강왕 영포, 형산왕 오예, 임강왕 공오를 시켜 암살하도록 명령했다. 의제는 스스로 강에 투신하여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유방은 의제의 복수를 명분으로 항우를 공격하게 된다. 기원전 205년에는 3일 동안 의제를 위한 추모식을 거행하고 항우가 국왕 살해를 저질렀다고 비난하며 항우에 대항하는 대중의 지지를 모았다. 기원전 202년에 초한 쟁패는 유방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그는 중국의 주권자가 되어 한나라를 건국했다.

2. 1. 초나라 왕으로 옹립

초 의제는 초 회왕의 손자 또는 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초나라 왕족의 후손이다.[1] 초나라가 멸망한 이후 양치기로 숨어 지내다가, 기원전 208년 여름 항량과 송의에 의해 초나라를 재건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회왕(懷王)으로 옹립되었다.[1] 이전의 회왕이 진나라에 억류되었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살아있는 의제에게 시호를 붙여 부름으로써 진나라를 격파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2. 2. 진나라 정벌과 권력 투쟁

회왕은 송의를 통해 항량항우를 견제하려 했다.[1] 그리고 유방과 항우에게 진나라 정벌을 명하며, 먼저 관중에 들어가는 자에게 관중왕 지위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회왕지약'이라 한다.[3] 그러나 기원전 207년, 항우는 조나라 구원 문제로 대립하던 송의를 죽이고 군권을 장악했다.[2] 회왕은 마지못해 항우의 지휘를 승인했다.[2]

기원전 207년 겨울, 유방이 먼저 관중에 도착하여 진나라 마지막 왕 자영에게 항복을 받았다.[2] 회왕은 약속대로 유방을 관중왕으로 삼으려 했으나, 항우는 이를 무시하고 스스로 '서초패왕'이라 칭하며 제후들을 봉건했다.[3] 그는 유방을 한왕으로 봉하여 파촉으로 보냈다.[1]

2. 3. 의제로 격상과 죽음

기원전 206년, 항우서초를 건국하고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등극하여 섭정하였다. 항우는 회왕을 의제(義帝)로 격상시켰으나, 이는 명목상의 지위였고 실권은 여전히 항우에게 있었다.[3] 항우는 의제를 침성(郴城, 현재의 후난성 침현)으로 쫓아냈으며, 이동 중 구강왕 영포, 형산왕 오예, 임강왕 공오를 시켜 암살하도록 명령했다. 의제는 스스로 강에 투신하여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은 배가 강을 건너던 도중에 전복되어 익사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배에 구멍을 뚫고 침몰시켰다. 그러나 강 건너에서 숨어서 이를 지켜보던 백성들은 눈물을 흘렸고, 한밤중에 몰래 시체를 건져 장사지냈다.[4]

유방은 의제의 복수를 명분으로 항우를 공격하게 된다. 후에 유방은 다시 안장을 하고 제사를 지내며 조의를 표함으로써 항우가 윗사람을 시해한 것을 명분으로 항우를 정벌하였다. 기원전 205년에는 3일 동안 의제를 위한 추모식을 거행하고 항우가 국왕 살해를 저질렀다고 비난하며 항우에 대항하는 대중의 지지를 모았다. 기원전 202년에 초한 쟁패는 유방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그는 중국의 주권자가 되어 한나라를 건국했다. 유방은 제후로 봉해진 장군 주발, 왕릉, 번쾌에게 각자 자신의 제후령에서 의제를 위한 추모식을 거행하라고 명령했다.

3. 평가 및 영향

초 의제는 진나라를 멸망시킨 반진(反秦) 세력의 군주이자, 중국 역사상 세 번째 황제였다.[6][7]

흔히 명분상의 군주라고 평가받지만, 실제로 후초 황제로서 직분을 수행했고 자신만의 세력도 가지고 있었다. 왕으로서 17~18개월, 황제로서 18~19개월 재위했다. 그러나 항우에 비해 세력이 미약하여 기원전 205년에 급사하였다. 후손들은 그가 마지막으로 거처했던 유(柳, 현재 중국 호남성 상덕 지방) 땅을 따라 성씨를 유씨(柳氏)로 삼았고, 현재 중국, 한국, 일본 등지의 유(柳)씨들이 모두 그의 자손들이라고 전해진다.[6][7]

항우는 의제를 유배시키려 했으나, 의제는 병을 핑계로 진현(陳縣)으로의 여행을 연기했다. 하지만 항우는 의제를 강제로 팽성(彭城, 현재의 쑤저우, 장쑤성)에서 진현으로 보냈고, 영포, 오예, 공오에게 암살을 지시했다. 의제는 진현 근처에서 영포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고, 현 서남쪽 언덕에 묻혔다.

기원전 206년부터 기원전 202년까지 항우유방 사이에 권력 투쟁(초한 쟁패)이 벌어졌다. 유방은 의제의 죽음을 항우에 대한 전쟁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선전으로 이용했다. 기원전 205년, 유방은 3일 동안 의제를 위한 추모식을 거행하고 항우가 국왕 살해를 저질렀다고 비난하며 대중의 지지를 모았다. 기원전 202년에 초한 쟁패는 유방의 승리로 끝났고, 유방은 한나라를 건국했다. 유방은 제후로 봉해진 장군 주발, 왕릉, 번쾌에게 각자의 제후령에서 의제를 위한 추모식을 거행하라고 명령했다.

의제의 죽음으로 항우는 정치적 정통성을 상실했다. 유방초한전쟁에서 의제의 복수를 명분으로 삼아 항우를 '윗사람을 시해한 역적'으로 규정하고, 하늘을 대신하여 토벌한다는 대의를 얻었다. 이는 항우의 멸망과 한나라 건국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 기타

조선의 학자 김종직세조의 왕위 찬탈을 항우의 쿠데타에 비유하여 조의제문을 지었다. 이는 세조의 정통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 것으로, 한국 역사에서 초 의제가 간접적으로 언급된 사례이다.

5. 문신

중국의 일부 사찰이나 도교 사당에서는 의제가 문신으로 등장하기도 하며, 주로 진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자영과 함께 나타난다.[1]

참조

[1] 문서 King Huai of Chu was tricked into attending a conference in the Qin (state)|Qin state, where he was captured and kept as a hostage in Qin territory until his death. Xiang Liang suggested to Xiong Xin to use his grandfather's kingly title to evoke a sense of nostalgia and thus enhance his legitimacy, because King Huai's tragic fate was still deeply remembered by the people of Chu. However, "King Huai" was actually a posthumous name and would be inappropriate for a living monarch.
[2] 서적 ''Xiang Yu'' in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怀王)从盱台之彭城,并项羽、吕臣军自将之。
[3] 문서 秦の首都[[咸陽市|咸陽]]に一番乗りを果たした者に秦の本貫の地・関中を与えるというもの。
[4] 서적 『[[史記]]』高祖本紀に「皇帝曰義帝無後」との記載がある。
[5] 웹인용 굴원 그리고 항우 https://huaiyun.pcba[...] 2018-04-13
[6] 웹사이트 주요 자료 리스트 http://www.todayonhi[...]
[7] 웹사이트 주요 자료 리스트 http://www.todayon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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