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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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올드 펌(Old Firm)은 스코틀랜드의 두 주요 축구 클럽인 셀틱 FC와 레인저스 FC 간의 라이벌 관계를 일컫는 용어이다. 명칭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1904년 스포츠 신문 만화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두 팀의 상업적 이익을 강조하는 광고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이 두 팀은 역사적,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종종 폭력 사태로 이어지기도 한다. 셀틱과 레인저스는 스코틀랜드 축구에서 가장 성공적인 클럽으로, 수많은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두 팀의 경기는 스코틀랜드 축구 리그의 흥행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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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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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 | |
경기장 위치 | 글래스고, 스코틀랜드 |
셀틱 파크 | 지도 |
아이브록스 (레인저스) | 지도 |
햄던 파크 | 지도 |
지도 설명 | 두 팀의 경기장이 위치한 글래스고와 두 팀 간 컵 준결승 및 결승전이 주로 열리는 햄던 파크의 위치 |
기본 정보 | |
이름 | 올드 펌 |
다른 이름 | 글래스고 더비 |
첫 경기 | 1888년 5월 28일 친선 경기 셀틱 5–2 레인저스 |
최근 경기 | 2024년 12월 15일 스코틀랜드 리그컵 결승전 셀틱 3-3 레인저스 |
다음 경기 | 2025년 1월 2일 스코틀랜드 프리미어십 레인저스 대 셀틱 |
총 경기 수 | 443 |
최다 승리 팀 | 셀틱 (170승) |
최다 점수차 승리 | 셀틱 7–1 레인저스 (1957년 10월 19일) |
최다 출전 선수 | 알렉스 스미스 (87회, 1894–1913) - 레인저스 |
최다 득점자 | 앨리 매코이스트 (27골) - 레인저스 |
팀 정보 | |
팀 1 | 셀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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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2 | 레인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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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 | |
총 챔피언십 우승 횟수 | 셀틱 (53회), 레인저스 (55회) |
총 스코틀랜드 컵 우승 횟수 | 셀틱 (41회), 레인저스 (34회) |
총 스코틀랜드 리그 컵 우승 횟수 | 셀틱 (21회), 레인저스 (28회) |
기타 정보 | |
중요성 | 양 팀의 경기는 세계에서 가장 큰 더비 중 하나로 간주된다. 이 경기는 스코틀랜드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
종교적/정치적 의미 | 이 경기는 가톨릭 신자들을 지지하는 셀틱과 개신교 신자들을 지지하는 레인저스 사이의 종교적, 정치적 분열을 반영한다. 이러한 분열은 사회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
2. 명칭의 기원
"올드 펌"이라는 용어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두 클럽의 첫 경기에서 해설자들이 두 팀을 "마치 오래된 끈끈한 친구들 같다"라고 언급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9] 또 다른 설은 1904년 스코틀랜드 컵 결승전 이전에 '더 스코티시 레퍼리'라는 스포츠 신문에 실린 풍자만화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10][11][12] 이 만화는 "올드 펌(Old Firm)을 후원하세요: 레인저스, 셀틱 유한회사"라고 적힌 광고판을 들고 있는 노인을 묘사하여, 두 팀의 만남이 가져오는 상호간의 상업적 이익을 강조했다.
셀틱과 레인저스는 역사, 정치, 민족, 종교적인 이유로 매우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다. 셀틱 서포터들은 주로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들이고, 레인저스 서포터들은 주로 스코틀랜드계 개신교 신자들이다. 이러한 종교적, 민족적 차이는 양 팀 서포터들 사이에 잦은 폭력 사태를 유발하기도 한다. 셀틱 서포터들은 경기 때마다 아일랜드의 국기를 흔드는 반면, 레인저스 서포터들은 영국의 국기를 흔든다.[33]
21세기 초, 두 클럽은 공동으로 영국 지적 재산청에 'Old Firm'이라는 용어를 상표 등록했고, 2021년에도 여전히 상표권이 갱신되고 있다고 확인되었다.[14]
3. 라이벌 의식과 종파주의
Neil McGarvey영어는 2012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제가 자랄 때는 가톨릭 학교에 다녔는데, 학교 전체에 레인저스 팬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훨씬 더 혼합되어 있습니다. 제 아들은 가톨릭 학교에 다니는데, 레인저스 팬이 약 5% 정도 됩니다."라고 덧붙였다.[100]
이러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언급한다.
3. 1. 역사적 배경
셀틱과 레인저스는 역사, 정치, 민족, 종교적인 이유로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 셀틱 서포터는 주로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이고, 레인저스 서포터는 스코틀랜드계 개신교 신자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이유로 양 팀 서포터 간에는 폭력 사태가 자주 발생한다. 셀틱 서포터는 경기 때마다 아일랜드의 국기를 흔들지만, 레인저스 서포터는 영국의 국기를 흔든다.[100]
두 클럽의 경쟁은 단순한 스포츠 라이벌 그 이상이다.[3] 이는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북아일랜드와도 관련이 있으며, 두 클럽의 깃발, 문화적 상징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15] 때로는 종교(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북아일랜드-관련 정치(로열리스트와 공화주의자), 국가 정체성(영국 또는 아일랜드계 스코틀랜드인), 사회 이데올로기(보수주의와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복잡한 분쟁을 겪었다.[16]
스코틀랜드 서부 지역에서 라이벌 관계가 심해진 또 다른 이유는 레인저스 서포터가 역사적으로 원주민 스코틀랜드인과 얼스터 스코틀랜드인인 반면, 셀틱 서포터는 역사적으로 아일랜드계 스코틀랜드인이었기 때문이다. 두 서포터 그룹 간의 대립은 종종 '종파 갈등'으로 불렸지만, '원주민-이민자 간의 긴장' 역시 스코틀랜드 두 팀 서포터 간의 적대감을 일으킨 중요한 요인이었다. 레인저스는 전통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공동체의 지지를 받았으며, 수십 년 동안 가톨릭 신자를 의도적으로 영입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17] 이 정책은 그레이엄 수네스 감독 시절 전 셀틱 공격수 모 존스턴을 영입하면서 공개적으로 바뀌었고,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18][19][20][28] 셀틱은 주로 아일랜드 로마 가톨릭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프로테스탄트를 배제하지 않고 많은 프로테스탄트 선수를 영입했지만, 일부 직원들 사이에는 친가톨릭적인 사고방식이 있었다.[21] 그 결과, 두 서포터 그룹 모두에서 스코틀랜드 국기는 예상보다 보기 드물다. 셀틱 팬은 아일랜드 삼색기를, 레인저스 팬은 유니언 잭을 흔드는 경향이 있다.[33]
셀틱은 1887년에 설립되었으며,[22] 글래스고 동부의 빈곤한 아일랜드 가톨릭 인구에게 필요한 돈과 자원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이 수입의 대부분은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109] 셀틱은 빠르게 많은 관중을 끌어모았고,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 소외된 지역 인구의 상징이 되었으며,[28] 이전에는 새롭게 등장하는 스포츠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109][25] 레인저스는 15년 전인 1872년에 설립되었으며 초기에는 특별한 종교적 성향이 없었고, 20세기 초 경기 보고서에서는 셀틱의 친구로 언급되기도 했다.[29][25] 당시 레인저스는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고 경기장을 확장했지만, 1902년 4월 스코틀랜드 대 잉글랜드 경기 중 새로운 목조 스탠드 중 하나가 붕괴되어 2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23][24] 이 참사로 클럽은 아이브록스를 재건해야 했고, 최고 선수들을 팔아 자금을 조달했다. 셀틱은 이 약점을 이용하여 1905년부터 1910년까지 6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레인저스는 이전의 강점으로 돌아왔다.[25][24] 라이벌 관계는 1904년 스코틀랜드컵 결승전(이는 '올드 펌'이라는 용어의 기원으로 보인다)[11][29]과 1909년 두 번의 무승부 후 추가 재경기가 명령되었을 때 더욱 심화되었다. 두 팀 서포터는 결과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조작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폭동을 일으켰고, 햄프든 파크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트로피는 보류되었다.[12][47][29][26]
1912년 벨파스트 조선소인 하를랜드 앤 울프(이미 반가톨릭 채용 관행을 가진 회사)[27]가 아일랜드의 불안정으로 인해 글래스고에 새로운 조선소를 설립하면서 적대감의 정치적 측면이 발전했다. 수백 명의 얼스터 프로테스탄트 노동자, 특히 스코틀랜드 출신들이 이주했고, 그들은 고반 조선소에 가장 가까운 클럽인 레인저스를 새로운 팀으로 삼았다.[28][29][30] 제1차 세계 대전과 부활절 봉기와 같은 사건은 레인저스가 스코틀랜드 기득권층과 셀틱의 성공으로 대표되는 아일랜드 가톨릭 반란에 맞서 영국 연합주의의 상징으로 채택되는 데 기여했다.[32][28][29] 그 이후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전역(그리고 영국, 북미 및 기타 지역에 있는 공동체의 디아스포라)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종교적 성향에 따라 지역 팀보다 레인저스 또는 셀틱을 지지하게 되었으며, '대혼란'에 대한 극단적인 태도를 포함했다.[30][22]
21세기 글래스고에서는 이러한 분열이 모호해 보인다. 종교적 신앙은 감소하고 있고,[31][30]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결혼은 그 어느 때보다 많으며, 레인저스 서포터는 보수당에 투표하고 셀틱 서포터는 노동당에 투표한다는 오래된 믿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32][33] 2005년 셀틱과 레인저스는 스포츠에서의 편견과 종파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34] 팬들의 행동과 그에 따른 기소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대부분의 레인저스와 셀틱 서포터는 종파 갈등에 연루되지 않지만,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고 소수의 행동이 헤드라인을 장악하는 경향이 있다.[34][15] 올드 펌 라이벌 관계는 더비 날에 많은 폭행을 야기했고, 과거 일부 사망 사건은 올드 펌 경기 후유증과 직접 관련이 있다.[35] 글래스고에서 종파 활동을 감시하는 활동가 그룹은 올드 펌 주말에 폭력적인 공격이 평소보다 9배 증가했다고 보고했다.[36] 가정 폭력의 증가도 올드 펌 경기와 관련이 있다.[37]
3. 2. 종교 및 민족 갈등
셀틱과 레인저스는 역사적,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인 이유로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 셀틱 서포터들은 주로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들이고, 레인저스 서포터들은 스코틀랜드계 개신교 신자들이 많다. 이러한 갈등 때문에 양 팀 서포터들 사이에 폭력 사태가 자주 발생한다. 셀틱 서포터들은 경기 때마다 아일랜드의 국기를 흔들지만, 레인저스 서포터들은 영국의 국기를 흔든다.[33]
두 클럽 간의 경쟁은 단순한 스포츠 라이벌 이상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3] 이것은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북아일랜드와도 관련이 있으며, 두 클럽의 깃발, 문화적 상징 등에서 볼 수 있다.[15] 때로는 종교(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북아일랜드 관련 정치 (로열리스트와 공화주의자), 국가 정체성 (영국 또는 아일랜드계 스코틀랜드인), 사회 이데올로기 (보수주의와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복잡한 분쟁으로 가득 차 있었다.[16]
스코틀랜드 서부 지역에서 라이벌 관계가 격화된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레인저스 서포터들이 역사적으로 원주민 스코틀랜드인과 얼스터 스코틀랜드인이었고,[109] 셀틱 서포터들은 역사적으로 아일랜드계 스코틀랜드인이었기 때문이다. 두 서포터 그룹 간의 대립은 종종 '종파 갈등'으로 불렸지만, '원주민-이민자 간의 긴장' 또한 스코틀랜드 두 팀 서포터들 간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요인이었다. 레인저스는 전통적으로 주로 프로테스탄트 공동체의 지지를 받았으며, 수십 년 동안 가톨릭 신앙을 가진 선수를 영입하지 않는다는 묵시적인 규칙이 있었다.[17] 이 정책은 그레이엄 수네스 감독이 전 셀틱 공격수 모 존스턴을 클럽에 데려오면서 바뀌었고, 이 관행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18][19][20][28] 셀틱은 주로 아일랜드 로마 가톨릭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프로테스탄트를 배제하지 않고 많은 프로테스탄트 선수들을 영입했지만, 일부 직원들 사이에는 친가톨릭적인 사고방식이 있었다.[21]
셀틱은 1887년에 설립되었으며,[22] 클럽은 글래스고 동부의 빈곤한 아일랜드 가톨릭 인구에게 꼭 필요한 돈과 자원을 제공할 것이라고 약속했다.[109] 그리고 경기에서 빠르게 많은 관중을 끌어들여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 소외된 지역 인구의 상징이 되었다.[28] 레인저스는 15년 전인 1872년에 설립되었으며 초기 수십 년 동안 특별한 종교적 성향이 없었고, 실제로 20세기 초 경기 보고서에서 셀틱의 친구로 언급되었다.[29][25]
1912년 벨파스트 조선소인 하를랜드 앤 울프(이미 반가톨릭 채용 관행을 가진 회사)[27]가 아일랜드의 불안정으로 인해 글래스고에 새로운 조선소를 설립했을 때, 수백 명의 얼스터 프로테스탄트 노동자들이 이주했고, 그들은 고반 조선소에 가장 가까운 대형 클럽인 레인저스를 새로운 팀으로 삼았다.[28][29][30] 제1차 세계 대전과 부활절 봉기와 같은 사건들은 클럽이 스코틀랜드 기득권층과 셀틱의 성공으로 대표되는 아일랜드 가톨릭 반란에 맞서 영국 연합주의의 상징으로 채택되는 데 기여했다.[32][28][29]
21세기 글래스고에서는 종교적 신앙이 감소하고 있고,[31][30]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결혼이 늘고 있으며, 레인저스 서포터는 보수당에 투표하고 셀틱 서포터는 노동당에 투표한다는 오래된 확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32][33] 2005년 셀틱과 레인저스 모두 스포츠에서의 편견과 종파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34] 팬들의 행동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대부분의 레인저스와 셀틱 서포터들은 종파 갈등에 연루되지 않지만,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고 소수의 행동이 헤드라인을 장악하는 경향이 있다.[34][15] 올드 펌 라이벌리는 더비 날에 많은 폭행을 야기했고, 과거 일부 사망 사건은 올드 펌 경기 후유증과 직접 관련이 있다.[35] 글래스고에서 종파 활동을 감시하는 활동가 그룹은 올드 펌 주말에 폭력적인 공격이 평소보다 9배 증가했다고 보고했다.[36] 가정 폭력의 증가도 올드 펌 경기와 관련이 있다.[37]
3. 3. 사회적, 정치적 갈등
셀틱과 레인저스는 역사적,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인 이유로 매우 강한 라이벌 관계를 가지고 있다. 셀틱 서포터들은 주로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들이고, 레인저스 서포터들은 주로 스코틀랜드계 개신교 신자들이다. 이러한 종교적, 민족적 차이는 양 팀 서포터들 사이에 잦은 폭력 사태를 유발하기도 한다. 셀틱 서포터들은 경기 때마다 아일랜드의 국기를 흔드는 반면, 레인저스 서포터들은 영국의 국기를 흔든다.[33]
두 클럽 간의 경쟁은 단순한 스포츠 라이벌 관계를 넘어선다.[3] 이는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북아일랜드와도 관련이 있으며, 양 팀의 깃발, 문화적 상징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15] 이들의 관계는 종교(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북아일랜드 관련 정치 (로열리스트와 공화주의자), 국가 정체성 (영국 또는 아일랜드계 스코틀랜드인), 사회 이데올로기 (보수주의와 사회주의) 등 복잡한 갈등으로 얽혀 있다.[16]
스코틀랜드 서부 지역에서 라이벌 관계가 심화된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레인저스 서포터들이 역사적으로 원주민 스코틀랜드인과 얼스터 스코틀랜드인이었던 반면,[109] 셀틱 서포터들은 역사적으로 아일랜드계 스코틀랜드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은 종종 '종파 갈등'으로 불리지만, '원주민-이민자 간의 긴장'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레인저스는 전통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공동체의 지지를 받았으며, 수십 년 동안 가톨릭 신자를 의도적으로 영입하지 않는다는 묵시적인 규칙이 있었다.[17] 그러나 그레이엄 수네스 감독이 전 셀틱 공격수 모 존스턴을 영입하면서 이 관행은 공개적으로 깨졌고,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18][19][20][28] 셀틱은 주로 아일랜드 로마 가톨릭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프로테스탄트를 배제하지 않았고 많은 프로테스탄트 선수들을 영입했다.[21]
1912년 벨파스트 조선소 하를랜드 앤 울프가 글래스고에 새로운 조선소를 설립하면서 정치적 측면의 적대감이 심화되었다.[27] 수백 명의 얼스터 프로테스탄트 노동자들이 이주했고, 그들은 고반 조선소에 가장 가까운 레인저스를 새로운 팀으로 삼았다.[28][29][30] 제1차 세계 대전과 부활절 봉기와 같은 사건들은 레인저스가 스코틀랜드 기득권층과 영국 연합주의의 상징으로, 셀틱은 아일랜드 가톨릭 반란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만들었다.[32][28][29]
21세기 글래스고에서는 종교적 신앙이 감소하고,[31][30]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결혼이 증가하는 등 분열선이 모호해지고 있다.[32][33] 또한 레인저스 서포터는 보수당에, 셀틱 서포터는 노동당에 투표한다는 인식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32][33] 2005년 셀틱과 레인저스는 스포츠에서의 편견과 종파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34] 팬들의 행동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대부분의 레인저스와 셀틱 서포터들은 종파 갈등에 연루되지 않지만,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면 소수의 행동이 주목받는 경향이 있다.[34][15] 올드 펌 라이벌 관계는 더비 날에 많은 폭행 사건을 유발하며, 과거 일부 사망 사건은 올드 펌 경기 후유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35] 글래스고에서 종파 활동을 감시하는 한 단체는 올드 펌 주말에 폭력적인 공격이 평소보다 9배 증가했다고 보고했다.[36] 가정 폭력 증가 역시 올드 펌 경기와 관련이 있다.[37]
정보 공개 요청에 따르면, 스트래스클라이드 경찰은 2010-11 시즌 동안 7번의 더비 경기에 2400000GBP의 비용을 지출했으며, 클럽은 그 중 300000GBP만 기여했다.[38]
3. 4. 경기장 내외 폭력
셀틱과 레인저스는 역사, 정치, 민족, 종교적인 이유로 매우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다. 셀틱 서포터는 주로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들이고, 레인저스 서포터는 스코틀랜드계 개신교 신자들이 많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양 팀 서포터 간에는 폭력 사태가 자주 발생한다. 셀틱 서포터는 경기 때 아일랜드의 국기를 흔드는 반면, 레인저스 서포터는 영국의 국기를 흔든다.[33]
두 클럽 간의 경쟁은 단순한 스포츠 라이벌 관계를 넘어,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북아일랜드와도 관련이 깊다.[15] 이는 종교(개신교와 가톨릭), 북아일랜드 관련 정치(왕당파와 공화주의자), 국가 정체성(영국 또는 아일랜드계 스코틀랜드인), 사회 이념(보수주의와 사회주의) 등 복잡한 갈등으로 얽혀 있다.[16]
스코틀랜드 서부 지역에서 라이벌 관계가 심해진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레인저스 서포터들이 역사적으로 원주민 스코틀랜드인과 얼스터 스코틀랜드인이었고,[109] 셀틱 서포터들은 역사적으로 아일랜드계 스코틀랜드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은 종종 '종파 갈등'으로 불리지만, '원주민-이민자 간의 긴장'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레인저스는 전통적으로 개신교 공동체의 지지를 받았으며, 수십 년 동안 가톨릭 신자를 영입하지 않는다는 묵시적인 규칙이 있었다.[17] 이 정책은 그레이엄 수네스 감독이 전 셀틱 공격수 모 존스턴을 영입하면서 공개적으로 바뀌었고,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18][19][20][28] 셀틱은 주로 아일랜드 가톨릭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개신교 선수도 많이 영입했다.[21]
셀틱은 1887년에 설립되어 글래스고 동부의 빈곤한 아일랜드 가톨릭 인구에게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22] 레인저스는 1872년에 설립되었고 초기에는 특별한 종교적 성향이 없었지만,[29] 1912년 하를랜드 앤 울프 조선소가 글래스고에 설립되면서 얼스터 프로테스탄트 노동자들이 이주해왔고, 이들은 레인저스를 지지하게 되었다.[28][29][30] 제1차 세계 대전과 부활절 봉기 등의 사건은 레인저스가 영국 연합주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 데 영향을 주었다.[32][28][29]
21세기 글래스고에서는 종교적 신앙이 감소하고,[31][30]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 간의 결혼이 증가하는 등 분열선이 모호해지고 있다.[32][33] 2005년에는 셀틱과 레인저스 모두 스포츠에서의 편견과 종파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34] 팬들의 행동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대부분의 레인저스와 셀틱 서포터는 종파 갈등에 연루되지 않지만,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34][15] 올드 펌 더비는 많은 폭행 사건을 야기했고, 과거 일부 사망 사건은 올드 펌 경기 후유증과 직접 관련이 있다.[35] 올드 펌 주말에는 폭력적인 공격이 평소보다 9배 증가하고,[36] 가정 폭력도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37]
1980년 스코틀랜드컵 결승전 후, 햄던 파크에서 수백 명의 상대팀 팬들이 난투극을 벌였다.[1][29][43] 이 사건은 축구 경기장 난입 사건 중 최악의 사례 중 하나로, 스코틀랜드 전 축구 경기장에서 알코올 반입 금지라는 결과를 가져왔다.[47][48][49][50]
1999년 5월, 셀틱 파크에서 열린 올드 펌 경기에서 심각한 팬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레인저스가 승리하여 리그 우승을 확정 지을 수 있었기 때문에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셀틱 팬들이 여러 물건을 던져 주심 휴 댈러스가 부상을 입었다.[1][33][50] 이후 올드 펌 리그 경기는 일반적으로 오후 초에 열리고, 올드 펌 우승 결정전 가능성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55]
선수들과 스태프들 역시 여러 사건에 휘말렸다. 1987년 경기에서는 네 명의 선수가 공공질서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50][56][57] 크리스 우즈와 테리 부처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58] 1998년에는 폴 가스코인이 관중석의 야유에 플루트 연주를 흉내 내는 행동으로 논란이 되었다.[50][59][60] 2006년에는 셀틱 골키퍼 아르투르 보루츠가 레인저스 서포터에게 한 제스처로 경찰의 주의를 받았다.[68] 2011년에는 셀틱 감독 닐 레논과 레인저스 수석 코치 앨리 맥코이스트 사이에 격렬한 언쟁이 벌어지기도 했다.[50][75][76]
3. 5. 원정 팬 제한
2018년, 레인저스는 팬 설문 조사 결과와 시즌 티켓 판매 증가를 이유로 아이브록스 경기장에서 셀틱 팬들에게 할당되는 티켓을 약 7,000석(브룸론 스탠드 전체)에서 800석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이 좌석은 보통 소규모 원정 응원단에게 배정되는 구석 자리였다.[79] 셀틱도 이에 맞대응하면서, 양 팀이 서로에게 경기장의 상당 부분을 제공하던 오랜 전통이 끝나게 되었다.[79]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일부 전직 선수들은 양 팀 경기 특유의 분위기가 약해질 것이라고 비판했지만,[80][81] 다른 한편에서는 이 변화로 인해 발생할 추가 수입을 칭찬하기도 했다.[82]
새로운 규정에 따라 셀틱 파크에서 처음 열린 경기에서는 홈 팬이 더 많아지고, 소규모 원정 팬들을 위한 분리된 공간을 확보해야 했으며, 새로운 규정에 익숙하지 않아 경기 시작 전 북쪽 스탠드 뒤쪽의 폐쇄된 통로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팬들이 양쪽 끝 스탠드에 도착하기 위해 그 통로를 이용하도록 안내받았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높은 경계벽과 울타리를 넘어 탈출했고, 5명의 팬이 응급 처치를 받아야 했다. 관련자들은 이후 규정과 경찰 대응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고, 셀틱은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83][84][85]
2022-23 시즌 말, 티켓과 팬 안전 문제를 둘러싼 양 구단 간의 분쟁으로 인해 마지막 두 리그 경기에서는 원정 팬이 전혀 없었다. 이는 2023-24 시즌에도 마찬가지였다.[86] 2024년 3월, 교착 상태를 해소하고 각 경기장에서 5%(약 2,500석)의 원정 팬 할당을 허용하기로 합의했지만,[87] 2024-25 시즌에도 이러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셀틱은 아이브록스 경기장 리뉴얼 공사의 예측 불가능성으로 인해 일부 경기가 햄든에서 열리고 다른 경기는 수용 인원이 줄어든 상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었다고 주장했지만, 2025년 1월 2일 관련 날짜까지는 공사가 완료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88]
3. 6. 관련 법규
2012년 축구장 내 모욕적 행위 및 위협적 의사소통(스코틀랜드) 법(Offensive Behaviour at Football and Threatening Communications (Scotland) Act 2012)은 2012년 3월 1일부터 시행되었으며, 축구 경기장에서의 종파적 행위에 대응하기 위해 경찰에게 더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 법은 특히 올드 펌 라이벌 관계에서 종교적 증오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30] 이 법은 축구 경기장 안팎에서의 행위와 전자 또는 우편으로 전송된 게시물과 관련된 두 가지 새로운 범죄를 만들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최대 5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었는데, 이는 이전보다 훨씬 높은 형량이었다.[89]
2013년 3월, 여러 셀틱 팬들은 새로운 법과 이 법 위반으로 여러 팬들이 받은 경기 출전 금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린 브리게이드(Green Brigade)'로 알려진 시위대는 경찰의 허가 없이 행진했고, 13명이 체포되었다. 시위대는 경찰이 이 행진에서 발생한 문제를 선동했다고 주장했다.[90]
제임스 켈리(스코틀랜드 정치인)(James Kelly (Scottish politician)) 노동당 의원은 2017년 6월 ''축구장 내 모욕적 행위 및 위협적 의사소통(폐지)(스코틀랜드) 법안(Offensive Behaviour at Football and Threatening Communications (Repeal) (Scotland) Bill)''을 발의했다. 켈리는 2012년 법안이 "종파주의를 해결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고", "자유주의적이지 않으며 축구 팬들을 불공정하게 겨냥했으며", "법률 전문가, 인권 단체 및 평등 단체의 비난을 받았다"고 말했다.[30][92] 2018년 초 의회 절차를 거친 후,[95][96] 4월 19일 이 법안은 왕실 재가(royal assent)를 받아 2012년 법안을 폐지했다.[97]
4. 2012년 이후의 변화
2012년, 레인저스는 재정 문제로 청산되었다.[105][106] 새로운 회사에 스포츠 관련 자산이 인수되었고,[107] 레인저스는 최하위 리그에 재가입했다.[108] 그 결과, 120년 만에 처음으로 레인저스와 셀틱 간의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
이후 올드 펌의 지위에 대한 논란이 발생했고, 라이벌 관계에 새로운 요소들이 더해졌다.
4. 1. 올드 펌 지위 논란
2012년, 레인저스 FC는 재정 문제로 청산되었다.[105][106] 이후 스포츠 관련 자산은 새로운 회사에 인수되었고,[107] 레인저스는 최하위 리그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108] 이로 인해 120년 만에 처음으로 레인저스와 셀틱 간의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이후 올드 펌의 지위에 대한 논란이 발생했다.[109] 레인저스가 2012년 사건으로 '소멸'했기 때문에 라이벌 관계도 종료되었고, 이후의 경기는 셀틱과 '새로운 레인저스' 간의 경기라는 주장이었다.[1][110] 이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레인저스를 '세브코'(2012년 이후 지주회사의 원래 이름)라고 비하하거나,[111] 레인저스 팬들을 '좀비' 또는 '언데드'라고 부르기도 한다.[112] 이러한 의견 차이는 라이벌 관계에 새로운 갈등 요소가 되었다.[110]
일부 셀틱 팬들은 강하게 반발하여, 2015년 1월 신문에 전면 광고를 내어 새로운 레인저스와의 첫 경기를 치를 것이라고 발표했다.[113][114][115]
SPFL 최고경영자 닐 돈캐스터는 이를 동일한 클럽의 연속으로 간주한다.[116] UEFA, 유럽 클럽 협회, FIFA 등은 레인저스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회사가 관리하는 경우 클럽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을 발표한 적이 있다.[117][118][119]
2013년, 레인저스의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성공적인 클럽"이라는 마케팅 문구에 대해 ASA에 여러 건의 불만이 제기되었다. 클럽이 1년밖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ASA는 UEFA의 자문을 포함한 증거를 고려하여 불만을 기각했다.[120]
2012년 7월, 셀틱 파크 경기 중 레인저스를 묘사한 만화 좀비가 무덤에서 일어나 저격수에게 총에 맞는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총잡이가 북아일랜드 분쟁의 준군사 조직원과 닮았다는 이유로 비판받았지만, 셀틱은 공식 처벌을 면했다.[121][122] 셀틱 팬 그룹은 레인저스가 '죽었다'는 현수막을 계속해서 내걸었다.[123]
셀틱과 팬들은 EBT 조사를 포함해 레인저스와 관련된 다른 법적 소송에도 연루되었다.[124][125][126][127][128][129]
4. 2. 경기 재개
2012년, 레인저스는 재정 문제로 청산되었다.[105][106] 스포츠 관련 자산은 새로운 회사에 인수되었고,[107] 레인저스는 최하위 리그에 다시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108] 이로 인해 120년 만에 처음으로 레인저스와 셀틱 간의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올드 펌의 지위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109] 2012년 사건으로 레인저스가 '소멸'했기 때문에 라이벌 관계도 종료되었고, 이후의 경기는 셀틱과 '새로운 레인저스' 간의 경기라는 주장이었다.[1][110] 같은 경기장, 같은 색깔의 유니폼, 같은 팬들, 그리고 일부 같은 선수들이 참가했다.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 클럽을 '세브코'(2012년 이후 지주회사의 원래 이름)라고 비하하고,[111] 레인저스 팬들을 '좀비' 또는 '언데드'라고 불렀다.[112] 이러한 의견 차이는 라이벌 관계에 새로운 요소가 되었다.[110]
일부 셀틱 팬들은 특히 강하게 주장하여, 2015년 1월 신문에 전면 광고를 게재하여 곧 새로운 레인저스와의 첫 경기를 치를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113][114][115]
SPFL 최고경영자 닐 돈캐스터는 이를 동일한 클럽의 연속으로 간주한다.[116] UEFA, 유럽 클럽 협회, FIFA와 같은 외부 기구들은 레인저스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한 적이 없지만, 새로운 회사가 관리하는 경우 클럽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을 발표했다.[117][118][119]
2013년, 레인저스의 공식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에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성공적인 클럽"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ASA에 여러 건의 불만이 제기되었다. 클럽이 1년밖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고소인들은 이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UEFA의 자문을 포함한 증거를 고려한 ASA는 이러한 불만을 기각했다.[120]
2012년 7월, 셀틱 파크에서 열린 경기 중에 레인저스를 묘사한 만화 좀비가 무덤에서 일어나 저격수에게 총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총잡이가 북아일랜드 분쟁의 준군사 조직원과 닮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지만, 셀틱은 공식적인 처벌을 면했다.[121][122] 셀틱 팬 그룹은 레인저스가 '죽었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계속해서 내걸었다.[123]
셀틱과 그 팬들은 레인저스와 관련된 다른 법적 소송에도 연루되었다.[124][125][126] 장기간 진행된 EBT 조사의 결과를 포함한다.[127][128][129]
5. 경기 기록
셀틱과 레인저스는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우승 97회, 스코틀랜드 컵 우승 68회, 스코틀랜드 리그 컵 우승 41회를 합작한 스코틀랜드의 대표적인 축구 클럽이다. 1980년대 초반 애버딘과 던디 유나이티드가 이들의 패권에 도전하기도 했지만, 1985-86 시즌 이후로는 두 팀이 거의 매 시즌 리그 우승과 준우승을 독차지하고 있다.
현재까지 두 팀 간의 경기는 총 400경기 이상 치러졌으며, 레인저스가 169승, 셀틱이 165승, 무승부가 102회로 레인저스가 근소하게 앞서고 있다. 이들은 통상적으로 리그와 컵 대회를 포함하여 한 시즌에 4번 정도 맞붙는다.
두 팀 모두 글래스고 인근에 많은 서포터를 보유하고 있지만, 스코틀랜드 전역과 전 세계 각 도시에도 팬들이 분포해 있다. 이들의 경기에서 발생하는 경제 효과는 1.2억파운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경기 종류 | 첫 경기 | 총 경기 수 | 셀틱 | 레인저스 | 무승부 |
---|---|---|---|---|---|
스코틀랜드 리그 | 1891 | 336[151][152] | 118 | 127 | 91 |
스코틀랜드컵 | 1890 | 55 | 27 | 18 | 10[133][153] |
리그컵 | 1947 | 52 | 25 | 24 | 3 |
합계 | 443 | 170 | 169 | 104 |
5. 1. 통산 전적
5. 2. 리그 순위 비교
셀틱과 레인저스는 1890년 스코틀랜드 축구 리그 창설 이후 가장 성공적인 클럽이었다. 두 팀은 2012년 레인저스가 경제적 이유로 1부 리그에서 제외될 때까지 모든 대회에 참가한 유일한 팀이었다. 레인저스는 2016-17 시즌에 복귀했다.[268][269][270] 팬층과 재정력의 큰 차이 때문에 다른 클럽들은 한 시즌 동안 간헐적인 도전조차 할 수 없었다. 1990년대 이후 TV 중계권료 및 유럽 대회 성적에 따른 상금 대부분이 올드 펌으로 흘러들어가 재투자되면서 더욱 앞서나가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그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2020년대 초, 레인저스는 지난 10년간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셀틱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다른 클럽들보다 훨씬 앞서 다시 자리를 잡았다. 다른 클럽들은 유럽 대회 진출권을 확보하기 위해 상위 리그 순위를 목표로 하거나 녹아웃컵에서 우승하는 것(보통 글래스고 거인 중 적어도 한 팀을 이겨야 함)만 현실적으로 노릴 수 있다.[271] 예측 가능하고 반복적인 성격으로 인해 스코틀랜드 축구의 상업적 가치를 떨어뜨리고 클럽과 궁극적으로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필요한 선수 육성에 장애가 된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272][273][274]총 127회의 우승 중 109회(85.8%)가 올드 펌 중 한 팀이 차지했으며, 레인저스가 55회로 셀틱 54회보다 근소하게 앞서 있다. 나머지 18회는 다른 10개 클럽(레인저스와 덤버튼의 공동 우승 포함)이 차지했다. 다른 팀이 우승을 차지했던 짧은 기간도 있었지만, 각 올드 펌 클럽이 장기간 우승을 독식했던 시기도 있었다. 9연패 기록은 셀틱이 1966년부터 1974년까지 처음 달성했고, 레인저스는 1989년부터 1997년까지, 그리고 셀틱은 2012년부터 2020년까지 다시 한번 달성했다.[141]
1891년 이후 글래스고 양대 클럽이 리그 우승팀이나 준우승팀이 아닌 경우는 단 5번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1964-65년이 포함되는데, 이는 레인저스와 셀틱 모두 상위 3위 안에 들지 못한 유일한 시즌이다.[275] 올드 펌은 총 53번 1위와 2위를 차지했다. 1990년대 중반 셀틱의 부흥과 2012년 레인저스의 청산 사이에 17개의 ''SPL 시대'' 시즌 중 단 한 시즌을 제외하고 모두 '1-2'로 마무리되었는데, 예외는 2005-06년 하츠였다.[276]
올드 펌이 우승하지 못한 가장 긴 기간은 1983년과 1985년 사이의 3년이다.[277][278] 반면, 두 클럽 사이에서 가장 긴 연속 우승 기록은 그 직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6년 이후 38시즌 이상( 1905년과 1931년 사이의 이전 27년 기록을 넘어섬)이다.
''2023-24 시즌 종료 기준. 준우승 (괄호 안)''[279]
결과 | 셀틱 | 레인저스 | 합계 | % |
---|---|---|---|---|
한 팀 1위, 다른 팀 2위 | 29 (25) | 25 (29) | 54 | 42.5% |
한 팀 1위, 다른 팀 2위 이하 | 25 | 30 | 55 | 43.3% |
올드 펌 우승 | 54 | 55 | 109 | 85.8% |
한 팀 2위, 다른 팀 2위 이하 | (7) | (6) | 13 | 10.2% |
두 팀 모두 2위 이하 | 5 | 3.9% | ||
기타 클럽 우승 | 18* | 14.2% | ||
합계 | 54 (32) | 55 (35) | 127 | 100% |
- 계산을 위해 1891년 공동 우승은 중복 계산을 방지하기 위해 여기서는 레인저스에만 귀속된다.
6. 우승 기록
셀틱[147] | 대회 | 레인저스[148] | |
---|---|---|---|
국내 | |||
54 | 스코틀랜드 1부 리그 우승 | 55 | |
42 | 스코티시컵 | 34 | |
22 | 스코티시리그컵 | 28 | |
118 | 합계 | 117 | |
국제 | |||
1 | 유러피언컵/UEFA 챔피언스리그 | — | |
— | UEFA컵 위너스컵 | 1 | |
1 | 합계 | 1 | |
119 | 총 합계 | 118 |
7. 경기장
(명명권 명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