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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크 스뱌토슬라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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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올레크 스뱌토슬라비치는 키예프 대공국의 스뱌토슬라프 2세의 아들로, 1050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볼로디미르볼린스키 공작, 티무타라칸 공작, 체르니히우 공작, 노우호로드시베르스키 공작을 역임하며 루스 지역의 지배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의 후손들과 대립했다. 1096년 노우호로드시베르스키 공작이 되었으며, 1115년에 사망했다. 그의 후손들은 올고비치 가문으로 불렸으며, 체르니히우 공국과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공국을 다스리며 류리크 왕조 내 다른 가문들과 권력 투쟁을 벌였다. 그는 비잔틴 귀족 테오파니아 무자로니사와 킵차크족 칸 오셀루크의 딸과 결혼하여 브세볼로트 2세, 이고리 2세 등을 자녀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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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크 스뱌토슬라비치
기본 정보
올레크 스뱌토슬라비치의 동전 이미지
올레크 스뱌토슬라비치 공의 동전 이미지
이름올레크 스뱌토슬라비치
전체 이름올레크 스뱌토슬라비치
출생일대략 1052년
사망일1115년 8월 1일 (62세 또는 63세)
가문올고비치 가문
아버지스뱌토슬라프 야로슬라비치
어머니킬리키야
배우자1. 테오파노 무잘로니사
2. 마리야 유리예브나 (유리 1세 블라디미로비치 돌고루키의 딸), 아에포브나, 쿠만족 공주 (쿠만족 칸 아에파 2세 오체네비치의 딸)
자녀키예프의 프세볼로트 2세
키예프의 이고르 2세
마리야
글레프
스뱌토슬라프 올고비치
작위
작위체르니고프 공작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공작
체르니고프 공작 즉위1094년 ~ 1097년
체르니고프 공작 선임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
체르니고프 공작 후임다비드 스뱌토슬라비치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공작 즉위1097년 ~ 1115년
통치
볼린 공작1073년 - 1078년
므타라칸 공작1083년 - 1094년
체르니고프 공작1094년 - 1097년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공작1097년 - 1115년
매장
매장지체르니고프 구세주 대성당

2. 생애

올레크 스뱌토슬라비치는 키예프 대공국의 스뱌토슬라프 2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킬리키야 사이에서 태어났다. 1073년부터 1076년까지 볼로디미르볼린스키 공작을, 1083년부터 1094년까지 티무타라칸 공작을 역임했다.

1094년 킵차크인의 지원을 받아 체르니히우 원정에 나섰다.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와 대립했으나, 1096년 그의 아들들이 반격하면서 불리해졌다. 같은 해 평화 협상을 통해 노우호로드시베르스키를 획득했고, 1096년부터 1115년까지 노우호로드시베르스키 공작을 지냈다.

1094년, 올레크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체르니고프 공국을 차지하기 위해 포로베츠족과 손을 잡고 체르니고프로 원정을 떠났다. 당시 체르니고프 공은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였고, 올레크는 모노마흐가 머물고 있는 체르니고프를 8일 동안 포위했다. 체르니고프는 전란에 휩싸였고, 결국 모노마흐는 체르니고프를 포기하고 페레야슬라프로 철수했다. 포로베츠족은 체르니고프에서 약탈을 자행했고, 올레크도 이를 허락했다. 『이고르 원정기』에서는 올레크를 '고리스라비치'(슬픔의 아들)라고 부르며 루스 땅에 포로베츠족을 끌어들인 원흉으로 비난하고 있으며,[9] 『이파티예프 연대기』에서는 올레크가 루스 땅에 이교도를 불러들여 많은 기독교인의 피가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1095년, 루스 공후들이 포로베츠족에 대한 원정군을 계획했지만, 올레크는 이에 참여하지 않고 무롬을 공격했다. 1096년, 모노마흐와 키예프 대공 스뱌토폴크 2세는 루스 땅을 이교도(포로베츠족)로부터 지키기 위해 협상을 원했고, 올레크에게 사자를 보냈지만, 올레크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모노마흐와 스뱌토폴크는 체르니고프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올레크는 체르니고프 공국 영토 북부 도시 스타로두브로 이동하여 33일간 방어전을 펼친 후, 모노마흐 등에게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모노마흐 등은 올레크에게 올레크의 형제인 스몰렌스크 공작다비드와 함께 키예프로 와서 협상에 임할 것을 요청했지만, 올레크는 이에 반하여 스몰렌스크로 가서 다비드의 연대를 이끌고 다시 무롬을 공격하여 무롬 공작 이쟈슬라프를 전사시켰다.[10] 게다가 수즈달, 로스토프를 함락시키고, 무롬 공국·로스토프 공국 영토 전체를 손에 넣은 후, 포사드니크를 배치하여 다니를 부과했다. 그러나 노브고로드 공작므스티슬라프 (모노마흐의 장남)에게 전황이 역전되었고, 올레크는 모노마흐 등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1097년, 류베치 회의에서 공후들이 자치령을 세습 영지(아버지의 땅, 보트치나)로 하는 원칙이 정해졌고, 체르니히우 공국 영토가 올레크 등 형제의 보트치나로 인정되었다. 올레크는 체르니고프 공국 영토의 도시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와 쿠르스크를 얻어[11]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공국을 통치했다.

올레크는 키예프 대공국 시대에 키예프 대공위에 오르지 못했던 가장 저명한 공작 중 한 명이었다.[1] 1115년 8월 1일에 사망하여 체르니히우의 구세주 대성당에 묻혔다.[1]

2. 1. 초기 생애와 가계

올레크는 키예프 대공국의 스뱌토슬라프 2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킬리키야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뱌토슬라프 2세와 킬리키야 사이의 4명의 아들 중 둘째 혹은 넷째였을 수 있는데, 그들의 장자 서열은 불확실하다.[1] 1075년 아버지 스뱌토슬라프가 살아있을 때, 올레크는 아버지의 나메스트니크로서 볼로디미르볼린스키로 파견되어 볼히니아 공국을 통치했다.

1076년, 올레크는 사촌 블라디미르와 함께 폴란드 국왕 볼레스와프 2세의 원군으로 향했다. 이들은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와 싸웠다. 당시 아버지 스뱌토슬라프는 키예프 대공위를 놓고 형 이샤슬라프 1세와 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샤슬라프는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망명 중이었다.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와 하인리히 4세는 동맹 관계였지만, 폴란드 국왕 볼레스와프 2세는 이샤슬라프에게 보호를 제공하고 있었다.

같은 해, 아버지 스뱌토슬라프가 죽자 볼레스와프 2세의 지원을 받은 이샤슬라프가 키예프 대공위에 올랐다. 올레크는 볼로디미르볼린스키에서 쫓겨나 잠시 숙부인 체르니고프 공작 브세볼로드 1세에게 의탁했다. 1078년, 북코카서스에 있던 루스 영토의 도시 툼타라칸(ru)으로 도망갔다. 같은 해 8월 25일, 올레크와 툼타라칸 공작 보리스(ru), 폴로베츠 연합군은 소지차 강 전투에서 체르니고프 공작 브세볼로드를 격파했다. 이어서 10월 3일 니바 평원 전투(ru)에서 이샤슬라프를 전사시켰지만, 툼타라칸 공작 보리스도 사망했고, 올레크는 다시 툼타라칸으로 철수했다.[7]

1079년, 이샤슬라프의 뒤를 이어 키예프 대공이 된 브세볼로드는 올레크를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올레크는 로도스 섬으로 유배되었지만, 여기서 파트리키의 딸 테오파니아와 결혼했고, 2년 후 툼타라칸으로 귀환하는 것을 승인받았다.[8] 툼타라칸으로 돌아온 올레크는 1083년, 다비드, 볼로다르를 추방하고, 툼타라칸 공작위에 복위했다.

2. 1. 1. 가계

키예프 대공국의 스뱌토슬라프 2세 대공과 그의 첫 번째 아내인 킬리키야 사이에서 태어났다. 역사학자 마틴 딤닉에 따르면, 올레크는 1050년경에 태어났다고 한다.[1] 올레크는 삼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세례명은 미하일이었다.[2]

《이고리 원정기》에서는 그를 "고리슬라비치"라고 칭하는데, 이는 그의 부칭을 슬픔을 뜻하는 러시아어 단어에서 시적으로 파생시킨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올고비치라고 알려졌으며,[1]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의 후손들(모노마호비치)과 루스 지배권을 두고 다툰 숙적이었다.

올레크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

이름
키예프 대공 브세볼로트 2세
키예프 대공 이고리 2세
마리아
글레프
스뱌토슬라프 올고비치


2. 2. 군사 경력

올레크는 1076년 아버지 스뱌토슬라프 2세가 키예프 대공위를 놓고 형 이쟈슬라프와 투쟁을 벌일 때, 사촌 블라디미르와 함께 폴란드 국왕 볼레스와프 2세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어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와 전투를 벌였다.

1078년 8월 25일, 올레크는 트무타라칸에서 폴로베츠족과 연합하여 소지차 강 전투에서 체르니고프 공작 브세볼로드를 격파했다. 이어서 10월 3일에는 니바 평원 전투에서 이쟈슬라프를 전사시켰지만, 동맹이었던 보리스도 사망하여 올레크는 다시 트무타라칸으로 후퇴했다.[7]

1094년, 올레크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체르니고프 공국을 차지하기 위해 포로베츠족과 연합하여 체르니고프를 공격했다. 당시 체르니고프 공작은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였고, 올레크는 8일 동안 체르니고프를 포위하여 결국 모노마흐는 체르니고프를 포기하고 페레야슬라블로 후퇴했다.

1095년, 루스 공후들이 포로베츠족에 대한 원정을 계획했지만, 올레크는 참여하지 않고 무롬을 공격했다. 1096년, 모노마흐와 키예프 대공 스뱌토폴크 2세는 올레크에게 협상을 제안했지만, 올레크는 응하지 않았다. 이에 모노마흐와 스뱌토폴크는 체르니고프를 공격했고, 올레크는 스타로두브에서 33일간 방어전을 펼친 후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올레크는 모노마흐 등의 요청을 거부하고 스몰렌스크로 가서 다비드의 지원을 받아 무롬을 공격하여 이자슬라프를 전사시켰다.[10] 또한 수즈달, 로스토프를 함락시키고 무롬 공국과 로스토프 공국 영토 전체를 장악하여 다니를 부과했다. 그러나 노브고로드 공작 므스티슬라프 (모노마흐의 장남)에게 전세가 역전되어 올레크는 모노마흐 등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1097년, 류베치 공후 회의에서 공후들의 영지 세습 원칙이 확립되면서 체르니고프 공국 영토는 올레크 형제의 보트치나(세습 영지)로 인정되었다. 올레크는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와 쿠르스크를 획득했다.[11]

2. 2. 1. 초기 군사 활동

1075년에 올레크 스뱌토슬라비치는 연대기에 처음 등장한다.[6]。 아버지 스뱌토슬라프가 살아있을 때, 올레크는 아버지의 대리인(나메스트니크)으로서 볼로디미르볼린스키로 파견되어 볼히니아 공국을 통치했다. 1076년, 아버지 스뱌토슬라프가 키예프 대공 자리를 놓고 형 이쟈슬라프와 싸울 때, 올레크는 사촌 블라디미르와 함께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와 맞서 싸우는 폴란드 국왕 볼레스와프 2세를 돕기 위해 파견되었다.。

당시, 아버지 스뱌토슬라프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이쟈슬라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망명 중이었다.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와 하인리히 4세는 동맹 관계였지만, 폴란드 국왕 볼레스와프 2세는 이쟈슬라프에게 보호를 제공하고 있었다.

2. 2. 2. 트무타라칸 통치와 귀환

삼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올레크는 1077년 4월 10일 트무타라칸을 통치하던 로만에게 도망쳤다.[6] 올레크는 트무타라칸에 정착한 사촌 보리스 비체슬라비치와 함께 쿠만족을 동맹으로 삼아 1078년 여름 루스로 침공했다.[7] 그들은 삼촌 블세볼로트를 소시 강에서 격파하고 8월 25일 체르니히우에 입성했다.[7]원초 연대기》는 올레크와 보리스가 "이교도들을 루스 땅으로 침략하도록 이끈" 최초의 인물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자신의 《교훈》에서 자신과 그의 아버지 블세볼로트가 전 해에 폴로츠크를 공격할 때 쿠만족을 고용했음을 밝힌다.

체르니고프에서 쫓겨난 블세볼로트는 키예프로 도망쳐 형 이쟈슬라프의 도움을 구했다. 그들은 군대를 통합하여 체르니고프를 향해 진군했다. 삼촌들이 도착했을 때 올레크와 보리스는 마을에 없었지만, 시민들은 저항하기로 결정했다. 올레크는 삼촌들과 협상을 시작하려 했지만, 보리스는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결정적인 전투는 10월 3일 네자타 초원 마을 근처에서 벌어졌다.

전투에서 패배한 올레크는 트무타라칸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하자르족에게 투옥되어 사슬에 묶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다. 블세볼로트의 친척이자 동맹이었던 황제는 그를 로도스로 추방했다. 그곳에서 그는 귀족 부인 테오파노 무잘로니사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낳았다.[8] 1083년, 트무타라칸으로 돌아온 올레크는 다비드, 볼로다르를 추방하고 트무타라칸 공작위에 복위했다.

2. 3. 체르니히우 계승 전쟁

1094년 올레크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체르니히우 공국을 차지하기 위해 포로베츠족과 손을 잡고 체르니고프로 원정을 떠났다. 당시 체르니고프 공은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였고, 올레크는 모노마흐가 머물고 있는 체르니고프를 8일 동안 포위했다. 체르니고프는 전란에 휩싸였고, 아마도 최종적으로 모노마흐는 체르니고프를 포기하고 페레야슬라프로 철수했을 것이다. 포로베츠족은 체르니고프에서 약탈을 자행했고, 올레크도 이를 허락했다. 『이고르 원정기』에서는 올레크를 고리스라비치(슬픔의 아들)라고 부르며 루스 땅에 포로베츠족을 끌어들인 원흉으로 비난하고 있으며,[9] 『이파티예프 연대기』에서는 올레크가 루스 땅에 이교도를 불러들여 많은 기독교인의 피가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1095년 루스 공후들이 포로베츠족에 대한 원정군을 계획했지만, 올레크는 이에 참여하지 않고 무롬을 공격했다. 1096년 모노마흐와 키예프 대공 스뱌토폴크 2세는 루스 땅을 이교도(포로베츠족)로부터 지키기 위해 협상을 원했으나, 올레크는 응하지 않았다. 모노마흐와 스뱌토폴크는 체르니고프로 군대를 진격시켰고, 올레크는 체르니고프 공국 북부 도시 스타로두브에서 33일간 방어전을 펼친 후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모노마흐 등은 올레크에게 그의 형제 스몰렌스크 공작다비드와 함께 키예프에서 협상할 것을 요청했지만, 올레크는 스몰렌스크로 가서 다비드의 군대와 함께 무롬을 공격하여 무롬 공작 이쟈슬라프를 전사시켰다.[10] 수즈달, 로스토프를 함락시키고, 무롬 공국·로스토프 공국 영토 전체를 차지한 후 포사드니크를 배치하여 다니를 부과했다. 그러나 노브고로드 공작므스티슬라프(모노마흐의 장남)에게 전황이 역전되었고, 올레크는 모노마흐 등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전쟁은 1097년 류베치 회의에서 타협안에 합의하면서 끝났다.

2. 3. 1. 전쟁의 배경

1093년 브세볼로트 1세 키예프 대공이 사망하면서 키예프 대공국은 권력 투쟁에 휩싸였다. 브세볼로트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조카인 스뱌토폴크 2세 이자슬라비치가 키예프 대공위를 계승했지만, 후계 구도를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었다.

야로슬라프 현명공의 세 아들로부터 비롯된 세 분파가 권력을 다투었다.

분파대표 인물근거지
이자슬라프 1세 계열 (이자슬라비치)스뱌토폴크 2세 이자슬라비치키예프
브세볼로트 1세 계열 (모노마호비치)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페레야슬라블
스뱌토슬라프 2세 계열 (스뱌토슬라비치)올레크 1세 스뱌토슬라비치체르니히우



1073년부터 1076년까지 키예프 대공이었던 스뱌토슬라프 2세의 아들 올레크는 아버지의 통치가 정당하다고 여겼지만,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올레크는 1094년 킵차크족의 지원을 받아 체르니히우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2. 3. 2. 전쟁의 경과

1094년, 올레크는 킵차크족 군대를 이끌고 트무타라칸에서 루스로 돌아와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다스리던 체르니고프를 공격하여 8일 동안 포위했다. 모노마흐는 체르니고프를 포기하고 페레야슬라프로 철수했으며, 킵차크족은 체르니고프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이고르 원정기』는 올레크를 '고리스라비치(슬픔의 아들)'라 부르며 루스 땅에 킵차크족을 끌어들인 원흉으로 비난하고,[9] 『이파티예프 연대기』는 올레크가 루스 땅에 이교도를 불러들여 많은 기독교인의 피를 흘렸다고 기록한다.

1095년, 루스 공후들이 킵차크족에 대한 원정을 계획했지만, 올레크는 참여하지 않고 무롬(무롬 공작은 모노마흐의 아들 이쟈슬라프가 차지)을 공격했다. 1096년, 모노마흐와 키예프 대공 스뱌토폴크 2세는 킵차크족으로부터 루스 땅을 지키기 위한 협상을 제안했으나, 올레크는 응하지 않았다. 모노마흐와 스뱌토폴크는 체르니고프로 진격했고, 올레크는 체르니고프 공국 북부 도시 스타로두브에서 33일간 방어전을 펼친 후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모노마흐 등은 올레크에게 그의 형제 스몰렌스크 공작다비드와 함께 키예프에서 협상할 것을 요청했지만, 올레크는 스몰렌스크로 가서 다비드의 군대와 함께 무롬을 공격하여 이쟈슬라프를 전사시켰다.[10] 수즈달, 로스토프를 함락시키고 무롬 공국·로스토프 공국 영토 전체를 차지한 후 포사드니크를 배치하여 다니를 부과했다. 그러나 노브고로드 공작므스티슬라프(모노마흐의 장남)에게 패배하면서 올레크는 모노마흐 등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1097년 류베치 회의에서 타협안이 합의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2. 3. 3. 류베치 회의

1097년,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키예프 대공 스뱌토폴크 2세는 분쟁 종식을 위한 공후 회의를 제안했고, 올레크도 이에 참여했다. 류베치 회의에서 공후들이 자치령을 세습 영지(아버지의 땅, 보트치나(ru))로 하는 원칙이 정해졌고, 체르니고프 공국 영토가 올레크 등 형제의 보트치나로 인정되었다. 올레크는 체르니고프 공국 영토의 도시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와 쿠르스크를 얻어[11]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공국을 통치했다.

2. 4. 체르니히우 통치

1094년 올레크는 킵차크인의 지원을 받아 체르니히우 원정에 직접 나섰다.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와 대립했으나, 1096년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 대공의 아들들이 반격하면서 불리해졌다.

2. 4. 1. 노브고로드시베르스키 공작

1096년에 열린 평화 협상을 통해 노우호로드시베르스키를 획득했고, 1096년부터 1115년까지 노우호로드시베르스키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자녀로는 아들인 프세볼로트 2세, 이고리 2세가 있다.

올레크는 체르니히우에 대한 그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1094년 킵차크족의 무장 병력을 이끌고 트무타라칸에서 루스로 돌아와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를 몰아내고 체르니고프를 점령했다. 모노마흐는 페레야슬라블로 다시 정착했지만, 그의 아들들은 여전히 오카 강가의 무롬을 포함하여 체르니고프 동부를 통제하며 올레크에게 저항했다. 1096년 올레크의 군사 작전으로 모노마흐의 아들 이자슬라프가 무롬에서 살해되었지만, 그가 블라디미르-수즈달(페레야슬라블 소유)을 침략했을 때 모노마흐의 다른 아들 므스티슬라프 1세에 의해 무롬으로 밀려났다.

1097년 류베치 회의에서 타협안에 합의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키예프 시대를 통틀어 키예프 대공위에 오르지 못했던 가장 저명한 공작 중 한 명인 그는 1115년 8월 1일에 사망하여 체르니히우에 묻혔다.

2. 4. 2. 킵차크족과의 관계

1094년 킵차크인의 지원을 받아 체르니히우 원정에 직접 나섰다.[1] 1078년 여름, 트무타라칸에 정착한 사촌 보리스 비체슬라비치와 함께 쿠만(킵차크인)을 동맹으로 삼아 루스로 침공,[6] 삼촌 블세볼로트를 소시 강에서 격파하고 8월 25일 체르니히우에 입성했다.[7]원초 연대기》는 올레크와 보리스가 "이교도들을 루스 땅으로 침략하도록 이끈" 최초의 인물이라고 비난하지만,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자신의 《교훈》에서 자신과 그의 아버지 블세볼로트가 전 해에 폴로츠크를 공격할 때 쿠만을 고용했음을 밝히고 있다.[8]

이후 패배하여 트무타라칸으로 도망친 올레크는 하자르족에게 투옥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고, 로도스로 추방되었다. 그곳에서 귀족 부인 테오파노 무잘로니사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낳았다.[10]

2. 5. 사망과 후손

Олег Святославич|올레크 스뱌토슬라비치ru는 키예프 대공국 시대에 키예프 대공위에 오르지 못했던 가장 저명한 공작 중 한 명이었다.[1] 1115년 8월 1일에 사망하여 체르니히우의 구세주 대성당에 묻혔다.[1] 그의 가문은 올고비치 가문으로, 후손들은 체르니히우 공국과 노우호로드시베르스키 공국에서 활동했다.[1] 아들로는 프세볼로트 2세, 이고리 2세가 있다.[1]

3. 가족 관계

올레크는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 2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킬리키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1] 역사학자 마틴 딤닉에 따르면, 1050년경에 태어났으며[1] 세례명은 미하일이었다.[1]

올레크는 두 번 결혼하였다. 첫 번째 아내는 비잔틴 제국 출신의 테오파니아 무잘로니사이고, 두 번째 아내는 포로베츠족 칸 오셀루크의 딸이다.[12] 자녀 정보는 아래 표와 같다.

이름비고
마리야폴란드의 귀족 피요트르 브워스토비치와 결혼[1]
브세볼로트키예프 대공
이고리키예프 대공
글레프
스뱌토슬라프 올레고비치


3. 1. 아내

올레크 스뱌토슬라비치는 두 번 결혼하였다. 첫 번째 아내는 비잔틴 제국 출신의 테오파니아 무잘로니사이고, 두 번째 아내는 포로베츠족 칸 오셀루크의 딸이다.[12]

3. 2. 자녀


  • 키예프 대공 브세볼로트 2세
  • 키예프 대공 이고리 2세
  • 마리야 - 폴란드의 귀족 피요트르 브워스토비치와 결혼[1]
  • 글레프
  • 스뱌토슬라프 올고비치

4. 평가

올레크 스뱌토슬라비치에 대한 평가는 전해지지 않는다.

5. 대중 문화


  • 라스트 워리어: 최강의 기마 민족 스키타이(2018년, 러시아, 배역: 유리 츠릴로)

참조

[1] 서적 Літопис Руський. Роки 1169 — 1174. http://litopys.org.u[...] litopys.org.ua 2024-06-04
[2] 문서 Russian Primary Chronicle year 6585
[3] 문서 Russian Primary Chronicle year 6586
[4] 문서 Russian Primary Chronicle year 6586
[5] 서적 The Dynasty of Chernigov, 1054–1146 Pontifical Institute of Mediaeval Studies 1994
[6] 백과사전 Олег Святославич, князь черниговский
[7] 백과사전 Олег
[8] 웹사이트 От Руси до России http://gumilevica.ku[...] Айрис-Пресс 2015
[9] 웹사이트 Слово о полку Игореве http://www.bibliotek[...]
[10] 백과사전 Изяслав Владимирович
[11] 웹사이트 Черниговские, князья
[12] 웹사이트 3.6. СВЯТОСЛАВИЧІ. ЧЕРНІГІВСЬКІ, МУРОМСЬКІ І РЯЗАНСЬКІ КНЯЗІ http://litopys.or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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