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뱌토폴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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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뱌토폴크 2세는 이자슬라프 1세의 아들로, 1078년부터 1088년까지 노브고로드 공작, 1088년부터 1093년까지 투라우 공작을 역임했다. 1093년 키예프 대공이 되었으나, 루리크 왕조 공작들 사이의 내전을 조장하고 킵차크인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불안정한 시기를 보냈다. 1111년에는 살니차 강 전투에서 쿠만족을 격파했으며, 키예프에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을 건립했다. 그는 세 번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1113년 사망하여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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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뱌토폴크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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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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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키예프 대공 |
재위 기간 | 1093년–1113년 |
전임 | 프세볼로트 1세 |
후임 | 블라디미르 2세 |
칭호2 | 노브고로드 공작 |
재위 기간2 | 1078년–1088년 |
칭호3 | 투로프 공작 |
재위 기간3 | 1088년–1093년 |
본명 | 스뱌토폴크 이자슬라비치 (미하일) |
왕가 | 류리크 가문 |
아버지 | 이자슬라프 1세 |
출생일 | 1050년 11월 8일 |
사망일 | 1113년 4월 16일 |
사망 장소 | 비슈고로드 |
매장 장소 | 키예프, 성 미하이일 대성당 |
배우자 | |
배우자1 | 바르바라(?), 보헤미아 공주 (스피티흐네프 2세의 딸?) |
배우자2 | 쿠만 공주 올레나 (투고르칸의 딸) |
자녀 | "사생아:" 므스티슬라프 "첫 번째 부인 소생:" 야로슬라프 즈비스라바 프레드슬라바 "두 번째 부인 소생:" 안나 마리아 브랴치슬라프 이자슬라프 |
2. 생애
이자슬라프 1세 대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1078년부터 1088년까지 노브고로드 공작을, 1088년부터 1093년까지 투라우 공작을 역임했다.
1093년 프세볼로트 1세가 사망하자, 스뱌토폴크는 다른 공작들에게 대공의 맏아들로 인정받아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했다. 그는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조직한 공작 회의에 참여했지만, 루리크 왕조 공작들 사이의 내전을 조장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사촌 볼히니아의 다비드, 사위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와 손을 잡고 할리치 공작 중 한 명을 사로잡아 눈을 멀게 했다.
1093년 스투그나 강 전투에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와 함께 킵차크인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다. 그 해 말, 스뱌토폴크는 킵차크족과 다시 마주했을 때 패배했고, 그 후 킵차크족은 오구즈 투르크 정착지인 토르체스크를 파괴했다.
1096년, 스뱌토폴크는 체르니고프의 올레크 1세를 루스 조약에 강제로 참여시키기 위해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지 않았다. 그의 장인 투고르칸은 페레야슬라우를 습격했고, 쿠만족 칸인 보니악은 키예프까지 습격하여 베레스트보를 파괴하고 클로프, 비두비치, 키예프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의 세 수도원을 약탈했다. 투고르칸은 페레야슬라우 습격 중 사망했고, 스뱌토폴크는 그를 키예프에 묻었다.
1111년, 스뱌토폴크는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2세와 함께 살니차 강 전투/Битва на Сальниціru에서 군대를 이끌고 강에서 쿠만족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의 장소는 오늘날의 이줌으로 추정된다.[2]
키예프 대공을 역임하던 동안에는 키예프에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을 건립했다. 그의 세례명은 미하일이었고, 그래서 그는 키예프의 성 미하일 수도원 장식을 장려했으며, 이 수도원은 현재까지 ''황금 지붕''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원초 연대기''로 알려진 역사는 스뱌토폴크의 통치 기간 동안 수도사 네스토르에 의해 편찬되었다.
1113년 4월 16일에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2. 1. 초기 생애
스뱌토폴크는 키예프의 이쟉슬라프 야로슬라비치와 첩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인 야로폴크가 살아있는 동안, 스뱌토폴크는 키예프 왕위 계승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1069년 그는 그의 아버지에 의해 잠시 점령되었던 도시 폴로츠크로 보내졌고, 그 후 10년(1078-1088) 동안 노브고로드를 통치했다. 형이 죽자 그는 투로프를 계승했는데, 이곳은 17세기까지 그의 후손들의 소유로 남게 된다.2. 2. 키예프 대공
이자슬라프 1세 대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1078년부터 1088년까지 노브고로드 공작을, 1088년부터 1093년까지 투라우 공작을 역임했다.1093년 프세볼로트 1세가 사망하자, 스뱌토폴크는 다른 공작들에게 대공의 맏아들로 인정받아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했다. 그는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조직한 공작 회의에 참여했지만, 루리크 왕조 공작들 사이의 내전을 조장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사촌 볼히니아의 다비드, 사위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와 손을 잡고 할리치 공작 중 한 명을 사로잡아 눈을 멀게 했다.
1093년 스투그나 강 전투에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와 함께 킵차크인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다. 그 해 말, 스뱌토폴크는 킵차크족과 다시 마주했을 때 패배했고, 그 후 킵차크족은 오구즈 투르크 정착지인 토르체스크를 파괴했다.
1096년, 스뱌토폴크는 체르니고프의 올레크 1세를 루스 조약에 강제로 참여시키기 위해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지 않았다. 그의 장인 투고르칸은 페레야슬라우를 습격했고, 쿠만족 칸인 보니악은 키예프까지 습격하여 베레스트보를 파괴하고 클로프, 비두비치, 키예프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의 세 수도원을 약탈했다. 투고르칸은 페레야슬라우 습격 중 사망했고, 스뱌토폴크는 그를 키예프에 묻었다.
1111년, 스뱌토폴크는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2세와 함께 살니차 강 전투/Битва на Сальниціru에서 군대를 이끌고 강에서 쿠만족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의 장소는 오늘날의 이줌으로 추정된다.[2]
키예프 대공을 역임하던 동안에는 키예프에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을 건립했다. 그의 세례명은 미하일이었고, 그래서 그는 키예프의 성 미하일 수도원 장식을 장려했으며, 이 수도원은 현재까지 ''황금 지붕''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원초 연대기''로 알려진 역사는 스뱌토폴크의 통치 기간 동안 수도사 네스토르에 의해 편찬되었다.
1113년 4월 16일에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3. 혼인과 자녀
스뱌토폴크 2세는 첫 번째로 보헤미아 공주(프르셰미슬 왕조)와 결혼했는데, 아마도 스피티흐네프 2세 공작의 딸로 추정된다. 이들 사이에서는 세 자녀가 태어났다.
- 즈비슬라바는 1102년 11월 15일에 폴란드 왕 볼레스와프 3세와 결혼했다.
- 프레드슬라바는 1104년 8월 21일에 헝가리의 알모스 공작과 결혼했다.
- 야로슬라프 (1123년 사망)는 볼리니아와 투로프의 공작이었으며, 세 번 결혼했다. 야로슬라프의 요절로 인해 그의 후손들은 키예프 왕위에 대한 권리를 잃었다.
1094년에 스뱌토폴크는 킵차크의 투고르칸의 딸인 올레나와 두번째 결혼했다. 이 둘 사이에서는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 안나 (1136년 사망)는 체르니히우의 스뱌토슬라프 다비디치와 결혼했다. 안나는 남편이 죽은 후 수도사가 되었으며, 나중에 체르니히우의 성 니콜라이 스뱌토슬라프 다비디치가 되었다.
- 마리아는 브로츠와프의 성주이자 폴란드 팔라틴이었던 피오트르 브워스토비치와 결혼했다.
- 브랴치슬라프 (1104–1127)는 1118년에 야로슬라프를 투로프 공작에서 폐위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 이지아슬라프 (1127년 사망)는 1123년에 투로프 공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1104년에 스뱌토폴크는 바르바라 콤네나와 세번째 결혼했다.
일부 자료에서는 스뱌토폴크가 혼외 아들인 므스티슬라프가 있었고, 그가 1095–1097년에는 노브고로드-세베르스크를, 이후 1097–1099년에는 볼린을 통치했다고 주장한다. 므스티슬라프는 나중에 볼로디미르-볼린스키에서 살해되었다.
3. 1. 첫 번째 부인
스뱌토폴크 2세는 첫 번째로 보헤미아 공주(프르셰미슬 왕조)와 결혼했는데, 아마도 스피티흐네프 2세 공작의 딸로 추정된다. 이들 사이에서는 세 자녀가 태어났다.- 즈비슬라바는 1102년 11월 15일에 폴란드 왕 볼레스와프 3세와 결혼했다.
- 프레드슬라바는 1104년 8월 21일에 헝가리의 알모스 공작과 결혼했다.
- 야로슬라프 (1123년 사망)는 볼리니아와 투로프의 공작이었으며, 세 번 결혼했다. 야로슬라프의 요절로 인해 그의 후손들은 키예프 왕위에 대한 권리를 잃었다.
3. 2. 두 번째 부인
스뱌토폴크는 1094년에 킵차크의 투고르칸의 딸인 올레나와 결혼했다. 이 둘 사이에서는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안나 (1136년 사망)는 체르니히우의 스뱌토슬라프 다비디치와 결혼했다. 안나는 남편이 죽은 후 수도사가 되었으며, 나중에 체르니히우의 성 니콜라이 스뱌토슬라프 다비디치가 되었다.
- 마리아는 브로츠와프의 성주이자 폴란드 팔라틴이었던 피오트르 브워스토비치와 결혼했다.
- 브랴치슬라프 (1104–1127)는 1118년에 야로슬라프를 투로프 공작에서 폐위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 이지아슬라프 (1127년 사망)는 1123년에 투로프 공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3. 3. 세 번째 부인
1104년에 스뱌토폴크는 바르바라 콤네나와 결혼했다.3. 4. 혼외 자녀
스뱌토폴크 2세는 여러 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혼외 자녀도 있었다.[3]일부 자료에 따르면, 스뱌토폴크는 혼외 아들 므스티슬라프를 두었는데, 그는 1095년부터 1097년까지 노브고로드-세베르스크를, 1097년부터 1099년까지는 볼린을 통치했다.[3] 므스티슬라프는 이후 볼로디미르-볼린스키에서 살해되었다.[3] 므스티슬라프는 베레스트 공과 볼린 공을 역임했다.[3]
4. 평가
참조
[1]
서적
Dynasties of the world: a chronological and genealogical handbook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2]
웹사이트
Ізюм, Ізюмський район, Харківська область
https://ukrssr.com.u[...]
2023-10-25
[3]
간행물
Молитовний надпис Брячислава Святополковича з Софії Київської
http://epigraphica.r[...]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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