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대공은 키예프 루스 시기 키예프를 다스린 군주를 의미한다. 862년 아스코르드와 디르가 키예프를 통치한 것을 시작으로, 류리크 왕조, 몽골-타타르의 지배,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기를 거치며 여러 인물들이 키예프 대공 자리에 올랐다. 1240년 몽골의 침략으로 키예프가 파괴된 이후, 키예프 대공의 지위는 명목상으로 변했으며, 1362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병합된 이후 1471년까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공작들이 키예프를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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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 류리크 류리크는 9세기경 노브고로드 루스를 건국한 인물로, 슬라브족의 요청으로 바랑인 부족을 이끌고 노브고로드를 다스렸으며, 그의 후손들은 류리크 왕조를 이루어 키예프 루스와 러시아 차르국을 통치했다는 《원초 연대기》의 기록이 전해진다.
키예프 루스 - 키예프 루스의 기독교화 키예프 루스의 기독교화는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키예프 루스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과정으로, 블라디미르 1세에 의해 988년 공식적인 기독교 국교화로 절정에 달해 키예프 루스의 문화, 정치, 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키예프 대공 - 키예프 루스 키예프 루스는 9세기부터 13세기 동유럽에 존재했던 동슬라브족의 중세 국가로, 키예프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블라디미르 1세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몽골 침략으로 멸망, 현재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공통된 역사적 기반으로 여겨진다.
키예프 대공 - 야로폴크 2세 야로폴크 2세는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의 아들로, 1132년부터 1139년까지 키예프 대공으로 재위했으나, 모노마흐 가문 내부 갈등과 스뱌토슬라프 가문의 도전, 그리고 폴로츠크 공국의 부흥으로 인해 불안정한 통치를 이어가며 키예프 대공국의 쇠퇴를 막지 못했다.
류리크 왕조 - 키예프 루스 키예프 루스는 9세기부터 13세기 동유럽에 존재했던 동슬라브족의 중세 국가로, 키예프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블라디미르 1세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몽골 침략으로 멸망, 현재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공통된 역사적 기반으로 여겨진다.
류리크 왕조 - 바실리 3세 바실리 3세는 이반 3세의 아들로서 영토 확장 정책을 펼쳐 프스코프 공화국 등을 병합하고 스몰렌스크를 점령했으며, 차르 칭호와 이중두상 독수리를 채택하고 후계자를 얻기 위해 재혼 후 이반 4세를 낳았으며, 승천 교회를 건립하고 농양으로 사망하기 전 수도승이 되었다.
1240년 키예프 약탈 이후 류리크 왕조의 대공들은 몽골 제국의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골든 호드의 칸들은 "실질적으로 키예프의 ''velikiy knyaz''의 직위를 종식시키고, 블라디미르에 있는 그들의 꼭두각시에게 정치적 최고 권위를 부여했다."
14세기부터 키예프 공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기 시작했다. 1321년 이르핀 강 전투 이후 게디미나스는 올샤니 가문 출신인 자신의 신하 중 한 명인 민도가우가스를 설치했는데, 그는 비잔틴 제국으로 추방된 폴로츠크의 브세슬라프 가문의 후손이었다. 1331년 키예프는 다시 한번 시베르스키 가문(올고비치 분파)의 일원인 푸티블 공이 차지했다. 알기르다스 대공이 1362년 청수 전투에서 금장 칸국을 격파한 후, 그는 키예프와 그 주변 지역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합병했다.[10]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키이, 셰크, 호리브와 그들의 여동생 리비드는 키예프를 함께 건국했으며, 맏형 키이는 "그의 종족의 우두머리"였다.[2] 일부 서방 역사학자들은 키예프가 하자르인이나 마자르인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추측한다. 키예프는 튀르크어 지명이다(''Küi'' = 강둑 + ''ev'' = 정착지).[3] 최소한 8세기와 9세기 동안 키예프는 하자르 제국의 전초 기지(언덕 요새, 고대 튀르크어로 "높은 곳"이라는 뜻의 ''삼바트''라고 불림)로 기능했다. 오멜리안 프리차크, 콘스탄틴 주커먼 및 다른 학자들에 따르면, 하자르인들은 10세기 초에 키예프를 잃었다.[4][5]
바랑기아인 공작 류리크는 862년에 "바랑기아인의 소환"을 통해 "류리크 왕조"를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현대 학자들은 그를 전설적이고 신화적이며 심지어 완전히 허구적인 인물로 간주한다.[6] ''원초 연대기''는 류리크를 키예프의 공작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올레그가 "키예프에 앉았다"는 구절에는 류리크에 대한 언급이 없어, 저자가 '왕조의 창시자보다 키예프에 거주한 최초의 루스 통치자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7]
키예프는 아스콜드와 디르에게 점령되었는데, 그들의 존재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그들은 "보야르"였고 "류리크의 가문에 속하지 않았다".[8] 일부 러시아 역사학자(예: 글레브 S. 레베데프)에 따르면 디르는 루스 카간의 ''chacanus''였다.[9] 토마스 S. 누난은 루스의 "해상 왕" 중 한 명인 "대왕"이 9세기 초에 카간 칭호를 채택했다고 주장한다.[10] 피터 벤자민 골든은 루스가 하자르 연맹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들의 통치자는 공식적으로 일틸의 하자르 카간의 종속 카간으로 인정받았다고 주장했다.
15세기 중반 이전에는 류리크가 왕조를 세웠다고 주장하는 역사적 자료가 없었다. 1425년의 이파티예프 연대기는 키예프의 ''크냐지'' 목록을 "디르와 아스콜드", "올레그", "이고르"로 시작하여 1240년까지 이어지며, 류리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흐레브니코프 문서''는 통치자 목록을 "키예프에서 처음으로 공동으로 통치하기 시작한 사람은 디나르와 아스콜드였고, 그 다음은 올가였으며, 올가 다음은 이고르, 이고르 다음은 스비아토슬라프..."로 시작한다.[1] "류리크"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대신 목록은 "디나르와 아스콜드"로 시작한다. 이파티예프와 달리 올가(키예프 공작)가 그들의 뒤를 이었고, 그녀의 남편 이고리(키예프 공작)보다 먼저 통치했음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2. 2. 류리크 왕조 (912년 ~ 1240년)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키이, 셰크, 호리브와 그들의 여동생 리비드는 키예프를 공동으로 건국했으며, 맏형 키이는 "그의 종족의 우두머리"였다. 일부 서방 역사학자들은 키예프가 하자르인이나 마자르인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추측한다. 키예프는 튀르크어 지명이다(''Küi'' = 강둑 + ''ev'' = 정착지).[1] 최소한 8세기와 9세기 동안 키예프는 하자르 제국의 전초 기지(언덕 요새, 고대 튀르크어로 "높은 곳"이라는 뜻의 ''삼바트''라고 불림)로 기능했다. 오멜리안 프리차크, 콘스탄틴 주커먼 및 다른 학자들에 따르면, 하자르인들은 10세기 초에 키예프를 잃었다.[2][3]
류리크는 862년에 "바랑기아인의 소환"을 통해 "류리크 왕조"를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현대 학자들은 그를 전설적이고 신화적인 인물로 간주한다. ''원초 연대기''는 류리크를 키예프의 공작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올레그가 "키예프에 앉았다"는 구절에는 류리크에 대한 언급이 없어, 저자가 '왕조의 창시자보다 키예프에 거주한 최초의 루스 통치자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키예프는 아스콜드와 디르에게 점령되었는데, 그들의 존재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그들은 "보야르"였고 "류리크의 가문에 속하지 않았다". 일부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디르가 루스 카간의 ''chacanus''였다고 주장한다.[4] 토마스 S. 누난은 루스의 "해상 왕" 중 한 명인 "대왕"이 9세기 초에 카간 칭호를 채택했다고 주장한다.[5] 피터 벤자민 골든은 루스가 하자르 연맹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들의 통치자는 공식적으로 일틸의 하자르 카간의 종속 카간으로 인정받았다고 주장했다.[6]
15세기 중반 이전에는 류리크가 왕조를 세웠다고 주장하는 역사적 자료가 없었다. 1425년의 이파티예프 연대기는 키예프의 ''크냐지'' 목록을 "디르와 아스콜드", "올레그", "이고르"로 시작하여 1240년까지 이어진다. ''흐레브니코프 문서''는 통치자 목록을 "키예프에서 처음으로 공동으로 통치하기 시작한 사람은 디나르와 아스콜드였고, 그 다음은 올가였으며, 올가 다음은 이고르, 이고르 다음은 스비아토슬라프..."로 시작한다. "류리크"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대신 목록은 "디나르와 아스콜드"로 시작한다. 이파티예프와 달리 흐레브니코프는 올가(키예프 공작)가 그들의 뒤를 이었고, 그녀의 남편 이고리(키예프 공작)보다 먼저 통치했음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스코우드와 디르는 882년에 올레그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사람은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키예프의 첫 번째 "공작" (''크냐즈'')이었지만 아직 "대공" (''velikiy knyaz'')은 아니었다. 그는 류리크와의 관계가 논쟁의 여지가 있다. 비록 나중에 모스크바 연대기 작가들이 올레그를 "대공"이라고 부르고 키예프를 "대공국"이라고 부르겠지만, 초기 자료는 그렇지 않다. 루스-비잔틴 조약 (907)의 재구성된 원래 그리스어 텍스트는 올레그를 μεγας ἄρχων 즉 "위대한 아르콘" ("통치자")이라고 부르지만, 고대 동슬라브어 번역본은 라브렌티안 문서와 이파티예프 문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비잔틴 황제 레오 6세, 알렉산드로스, 콘스탄티누스 7세가 "대제"라고 불릴 때만 올레그도 "대제"라고 불린다. 따라서 이를 "루스 공작 올레그 대제"로 읽어야 하며 "루스의 대공 올레그"로 읽어서는 안 된다. 키예프의 이고르가 『원초 연대기』에서 ''velikiy knyaz''로 불린 유일한 경우(6번)는 모두 루스-비잔틴 조약 (945)에서 발견되며, 여기서 그리스 황제도 ''k velikiy tsesarem Grech'-skim'' ("위대한 그리스 카이사르에게")라고 불린다. 스뱌토슬라프의 불가리아 침공 이후 971년 평화 조약이 기록될 때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원초 연대기』에서 스뱌토슬라프 1세가 ''velikiy knyaz''로 명명된 유일한 부분이다. 『Nachal'nyy svod』 (『노브고로드 최초 연대기』에서만 발견됨)는 이러한 평화 조약 중 어느 것도 언급하지 않으며, 올레그, 이고르 또는 스뱌토슬라프를 ''velikiy knyaz''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 필사자들이 공작의 칭호에 "위대한"이라는 단어를 추가했지만, 루스인들은 슬라브어로 이 세 조약을 번역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키예프의 야로폴크 1세와 키예프의 볼로디미르 1세는 모두 『노브고로드 최초 연대기』와 라브렌티안 및 이파티예프 문서에서 ''크냐즈''로 꾸준히 언급된다. 예외는 하나 있는데, 이파티예프 문서는 후자의 죽음을 보고하면서 ''볼로디미르 크냐즈 벨리키이'' ("대공 볼로디미르")라고 쓴다. 이파티예프 문서는 세 가지 출처 중 가장 늦게 작성된 것( 1425년)이므로 이는 나중에 추가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13세기 초 키예프 페체르스크 라브라의 ''파테리크''도 볼로디미르를 ''velikiy knyaz''라고 부르지만, 그의 죽음 후 2세기가 지나서 쓰였으며, 그가 살아있을 때 어떻게 알려졌는지를 반드시 묘사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출처는 키예프의 힐라리온의 ''법과 은총에 관한 설교'' ( 1040년대)이며, 이는 볼로디미르를 ''카간'' (하자르인의 칭호)으로 부르며 ''크냐즈''라고 부르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키예프 루스가 10세기 초에 하자르인으로부터 독립하여 ''카간'' 칭호를 물려받은 후 나중에 ''크냐즈''로 변경했음을 나타낸다고 제안했다. 볼로디미르 공작의 교회 규정은 "보라, 나는 바실리 공작, 볼로디미르라고 불린다"()로 시작하지만, 텍스트의 뒷부분에서는 그 자신을 ''크냐즈''와 ''velikiy knyaz''로 번갈아 부르며, 이 문서의 가장 초기 사본은 14세기에 작성되었으므로 원본 텍스트가 무엇을 말했는지 알기 어렵다. 연대기 작가들이 볼로디미르를 칭호를 언급하지 않고 ''velikiy''라고 언급했다는 사실—그가 역사상 볼로디미르 "대제"로 알려지게 된 이유—은 이 형용사가 칭호의 일부가 아니라 별칭 또는 애칭임을 시사한다.
스뱌토폴크 1세는 어떤 자료에서도 ''velikiy knyaz'' ("대공")으로 불린 적이 없다. 1015년 볼로디미르의 죽음 이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폭력적으로 권력을 잡아 연대기 작가들에 의해 "저주받은 자"라는 별칭으로 낙인 찍혔다. 슬기공 야로슬라프는 11세기 후반 거의 모든 자료에서 최초로 널리 증명된 ''velikiy knyaz'' ("대공")이다. 야로슬라프 공의 교회 법령의 현존하는 사본들 또한 그가 생전에 스스로 그 칭호를 사용했음을 시사한다. 11세기 3분기에 야로슬라프의 통치가 끝날 무렵, 그가 정기적으로 자신을 키예프의 ''velikiy knyaz''라고 칭했으며, ''카간''과 ''차르''라는 경쟁적인 칭호는 키예프 군주의 선호되는 명칭으로 ''velikiy knyaz''에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velikiy knyaz''는 계보적 연장자 순위에 따라 지정되었으며, 키예프에서 통치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키예프는 영토 내의 다른 모든 공국보다 우월한 대공국이었으며, 야로슬라프의 후손인 다른 모든 공작을 다스렸다. 상속 제도가 항상 야로슬라프가 의도한 대로 작동하지 않은 이유는 일부 공작들이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찬탈했기 때문이다. 1097년 류베치 회의는 고위 공작의 핵심 구성원의 왕조 수도를 대공국으로 승격시켰지만, 여전히 키예프의 우위를 인정했다.
안드레이 보고류브스키가 블라디미르-수즈달에서 키예프 약탈 (1169)을 감행한 이후 블라디미르 대공들이 전체 영토에 대한 우선권을 놓고 키예프 대공들과 경쟁을 시작했다. 그 이후로 "키예프의 ''velikiy knyaz''"라는 문구는 명목상의 것이 되었으며, 연대기 작가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사람에 따라 키예프 또는 클랴지마 강가의 블라디미르에 ''velikiy knyaz''라는 칭호를 적용했다. 거대한 둥지의 브세볼로드 이후 특정 공작의 군사적 우위는 다른 공작들이 그를 "대공"으로 인정할지 여부를 결정했다. 1230년대 후반과 1240년대에 일어난 키예프 루스에 대한 몽골 침략과 키예프 약탈 이후, 골든 호드의 칸들은 "실질적으로 키예프의 ''velikiy knyaz''의 직위를 종식시키고, 블라디미르에 있는 그들의 꼭두각시에게 정치적 최고 권위를 부여했다."
이름
생존 기간
재위 시작
재위 종료
비고
올레그
?–912/922/940년대
881/2 또는 889
912/922/940년대
키예프 최초의 크냐즈(공작). 류리크와 이고르와의 관계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즉위 시기는 원초 연대기에 명확하지 않다. 사망 연도:
1240년 키예프 약탈 이후 류리크 왕조의 대공들은 몽골 제국의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골든 호드의 칸들은 "실질적으로 키예프의 ''velikiy knyaz''의 직위를 종식시키고, 블라디미르에 있는 그들의 꼭두각시에게 정치적 최고 권위를 부여했다."
2. 3. 몽골-타타르의 멍에 시기 (1240년 ~ 1362년)
1240년 몽골 제국의 키예프 루스 침공으로 인해 미하일 2세는 키예프를 떠나 헝가리 국왕 벨라 4세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그 당시 스몰렌스크 공 로스티슬라프가 키예프를 점령했지만 같은 해 갈리치아의 다닐로에게 붙잡혔고, 다닐로는 자신의 보예보다인 드미트로를 할리치에 머물면서 키예프를 통치하도록 했다. 헝가리에서 실패한 미하일은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를 방문했다. 폴란드에서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그는 결국 몽골의 침공으로 인해 갈리치아의 다닐로에게 망명을 요청했다.[4]
14세기부터 키예프 공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기 시작했다. 1299년 키예프의 관구장 막시무스는 관구청을 키예프에서 클랴지마의 블라디미르로 옮겼다. 1321년 이르핀 강 전투 이후 게디미나스는 올샤니 가문 출신인 자신의 신하 중 한 명인 민도가우가스를 설치했는데, 그는 비잔틴 제국으로 추방된 폴로츠크의 브세슬라프 가문의 후손이었다. 1331년 키예프는 다시 한번 시베르스키 가문(올고비치 분파)의 일원인 푸티블 공이 차지했다. 알기르다스 대공이 1362년 청수 전투에서 금장 칸국을 격파한 후, 그는 키예프와 그 주변 지역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합병했다.[10]
1321년 이르핀 강 전투 이후 게디미나스는 올샤니 가문 출신인 자신의 신하 중 한 명인 민도가우가스를 키예프 공작으로 임명했다. 민도가우가스는 비잔틴 제국으로 추방된 폴로츠크의 브세슬라프 가문의 후손이었다.[10] 1324년에는 민도가우가스의 아들 알기만타스가 키예프 공작으로 즉위했다.[10]
이름
가문
생애
통치 시작
통치 종료
비고
민도가우가스 홀샨스키
알셰니시키아이
?–?
1321
1324
홀샤 로마노비치의 아들
알기만타스-미하일
알셰니시키아이
?–?
1324
1331[10]
민도가우가스의 아들
2. 5.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기 (1362년 ~ 1471년)
1362년 청수 전투에서 알기르다스 대공이 금장 칸국을 격파하면서 키예프와 그 주변 지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합병되었다.
[1]
웹사이트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Khazaria
http://www.khazaria.[...] [2]
서적
The origin of Rus
Harvard University Press for the Harvard Ukrainian Research Institute
[3]
간행물
The Khazars and Byzantium – The First Encounter
Brill
[4]
서적
Viking Rus: Studies on the Presence of Scandinavians in Eastern Europe
Koninklijke Brill NV, Leiden, The Netherlands
[5]
간행물
The Khazar Qaghanate and Its Impact on the Early Rus' State: The translatio imperii from Itil to Kiev
Curzon
[6]
간행물
The Question of the Rus' Qaganate
Archivum Eurasiae Medii Aevi
[7]
서적
Narodziny Międzymorza
https://books.google[...]
Bellona
[8]
문서
[9]
웹사이트
Літопис Руський. Роки 1169 — 1174.
http://litopys.org.u[...]
1984
[10]
웹사이트
Розділ 4.1. Леонтій Войтович. Князівські династії Східної Європи.
http://izbornyk.org.[...]
2018-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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