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플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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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올리버 플런켓은 1625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이다. 그는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아일랜드 주교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1669년 아르마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플런켓은 아일랜드 내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1670년에는 예수회 대학을 설립하여 가톨릭과 개신교 학생들을 함께 교육했다. 1670년대 후반, 구교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681년 런던에서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그는 1920년 복자, 1975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아일랜드의 평화와 화해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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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플런켓 | |
---|---|
기본 정보 | |
![]() | |
존칭 접두사 | 성인 |
이름 | 올리버 플런켓 |
출생일 | 1625년 11월 1일 |
사망일 | 1681년 7월 1일 (55세) |
축일 | 7월 1일 |
숭배 대상 | 가톨릭교회 |
출생지 | 라우크루, 미스 주, 아일랜드 |
사망지 | 티번, 런던, 잉글랜드 |
칭호 | 순교자, 대주교 및 아일랜드 전체의 수석 주교 |
시복일 | 1920년 5월 23일 |
시복 장소 | 로마, 이탈리아 |
시복자 | 교황 베네딕토 15세 |
시성일 | 1975년 10월 12일 |
시성 장소 | 로마, 바티칸 시국 |
시성자 | 교황 바오로 6세 |
수호 성인 | 아일랜드의 평화와 화해 |
주요 성지 | 다운사이드 수도원 세인트 피터 로마 가톨릭 교회, 드로이다, 아일랜드 |
2. 생애
올리버 플런켓은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자 아르마 대주교로서, 17세기 후반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를 재건하고 이끌었던 인물이다.
1673년 스튜어트 왕정 복고 시대에 심사법으로 알려진 형벌법이 제정되자, 플런켓은 교리적 이유로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 결과 드라허다에 설립했던 예수회 대학은 폐쇄되고 철거되었다. 플런켓은 은신 생활을 하며 변장한 채 여행해야 했고, 추방을 위한 정부의 칙령도 거부했다. 이후 몇 년간 그는 런던의 영국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지 않는 한, 더블린 정부가 가톨릭 주교들을 내버려두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비교적 평화롭게 지냈다.
1678년, 성직자 타이터스 오츠가 영국에서 조작한 이른바 교황 음모 사건은 반가톨릭 조치를 더욱 강화시켰다. 더블린의 피터 탤벗 대주교가 체포되었고, 플런켓은 다시 은신했다. 잉글랜드 추밀원은 플런켓이 프랑스 침략을 계획했다고 들었다. 이 캠페인의 배후에는 1672년부터 1677년까지 아일랜드 총독이었던 아서 카펠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공작을 실추시켜 총독 직위를 되찾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카펠은 평소 무자비하거나 원칙 없는 사람이 아니었고, 나중에 자비를 구하는 탄원을 통해 그가 실제로 플런켓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음을 시사했다.[2]
플런켓은 도망자 신세로 현상금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는 라우스 주 클로거헤드 교구의 킬라트리 마을에 있던 교회에 피신했다가, 1679년 12월 6일 더블린에서 체포되어 더블린 성에 투옥되었다. 플런켓은 던독에서 2만 명의 프랑스 군인을 아일랜드로 불러들이고, 반란을 위해 7만 명의 군인을 지원하기 위해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이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정부 내 일부 인사들은 1641년 아일랜드 반란이 재발할 가능성을 우려했고, 이는 플런켓을 기소하는 편리한 핑계가 되었다. 오먼드 공작은 에식스 백작이 위기를 이용하여 자신을 깎아내리려는 것을 알고 플런켓을 공개적으로 변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적으로 그는 플런켓의 무죄와 그를 고발한 밀고자들에 대한 경멸을 분명히 했다.[2]
플런켓은 모든 개신교 배심원 앞에서 재판받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검찰 측 증인들이 수배 중이어서 법정에 출두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재판은 곧 붕괴되었다. 샤프츠베리 백작은 플런켓이 아일랜드에서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을 것을 알고, 그를 뉴게이트 감옥에서 웨스트민스터 홀로 이송시켜 재판을 받게 했다. 첫 번째 대배심은 진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지만, 플런켓은 석방되지 않았다. 두 번째 재판은 심각한 사법 왜곡으로 여겨진다. 플런켓은 변호사 선임이나 증인 소환 시간을 허락받지 못했고, 증인들의 범죄 기록을 얻으려는 시도도 좌절되었다. 그의 하인 제임스 맥케나와 친척 존 플런켓은 아일랜드로 돌아가 증거를 가져올 시간이 부족했다. 재판 과정에서 플런켓은 영국 법원의 재판 권한에 이의를 제기하고 증인들의 범죄 과거를 지적했지만 소용없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대법원장 프랜시스 펨버턴 경은 플런켓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경고했다.[2]
스코틀랜드 성직자이자 훗날 솔즈베리 주교가 되는 길버트 버넷은 음모 재판의 목격자로서 플런켓의 무죄를 의심하지 않았고, 그를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며 평화롭게 신자들을 돌보기를 바랐던 인물로 칭찬했다.[2] 존 캠벨 경은 19세기에 판사 펨버턴에 대해 그 재판이 자신과 나라에 수치라고 말했다. 더 최근에는 고등 법원 판사 제임스 코민 경이 이를 심각한 실수라고 불렀다. 플런켓은 "가톨릭 신앙을 증진"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프랑스와 관계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가 왕의 생명을 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증거는 없었다.[1]
플런켓은 1681년 6월 "로마 신앙을 옹호한 죄"로 반역죄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2] 대법원장은 "당신은 하느님을 모욕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고, 당신의 반역은 거짓 종교를 세우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2] 배심원단은 15분 만에 유죄 평결을 내렸고, 플런켓은 "Deo Gratiasla" (하느님께 감사)라고 답했다.
많은 자비로운 탄원이 있었지만, 찰스 2세는 자신이 은밀한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3] 플런켓을 살려주는 것은 정치적으로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2] 영국 주재 프랑스 대사 폴 바리옹은 루이 14세의 자비로운 탄원을 전달했지만, 찰스는 플런켓이 무죄라는 것을 알지만 사면은 너무 대담한 조치라고 말했다.[2] 에식스 백작은 자신의 음모가 무고한 사람의 유죄 판결로 이어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자비를 탄원했지만, 찰스 2세는 분노하며 "그의 피는 네 머리에 닿을 것이다. 네가 그를 구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 나는 그를 구하고 싶지만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2]
플런켓은 1681년 7월 1일(11일 NS), 55세의 나이로 타이버른에서 교수형, 거열형을 당했으며, 잉글랜드에서 죽은 마지막 가톨릭 순교자였다.[2] 그의 시신은 처음에 세인트 자일스 인 더 필즈 교회 뜰에 묻혔다가, 1683년 독일 힐데스하임 근처 람스프링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머리는 로마를 거쳐 아마로, 결국 드로헤다로 옮겨져 1921년 6월 29일부터 세인트 피터 교회에 안치되어 있다. 시신의 대부분은 잉글랜드 다운사이드 수도원으로 옮겨졌으며, 오늘날 그곳에 대부분이 있고 일부는 람스프링에 남아 있다. 1975년 시성식 때 그의 관이 열렸고, 시신의 일부는 아일랜드 드로헤다의 세인트 피터 교회와 1975년 7월 13일에 축성된 새로운 워스 수도원 교회에 주어졌다.
2. 1. 초기 생애와 사제 서품
올리버 플런켓은 1625년 11월 1일 아일랜드 미스 주 러크루에서 부유한 히베르노-노르만 가문에서 태어났다.[1] 그의 가문은 제임스 플런켓, 제7대 킬린 남작 (1595년 사망)의 후손으로, 로스커먼 백작을 비롯하여 핑갈 백작, 로스 남작, 던서니 남작 등 여러 지주 가문과 혈연 관계였다.
16세까지 플런켓의 교육은 그의 사촌이자 아르다 주교와 미스 주교를 역임한 루크 플런켓의 형제인 더블린 성 마리아 수도원장 패트릭 플런켓이 맡았다. 그는 사제 지망생으로 1647년 로마 오라토리오의 피에르프란체스코 스카람피 신부의 보살핌 아래 로마로 갔다.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아일랜드 연맹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는 아일랜드 원주민 가톨릭 신자, 잉글랜드 및 아일랜드 성공회 신자, 비국교도 사이의 갈등이었다. 스카람피는 아일랜드 연맹으로 알려진 가톨릭 운동에 대한 교황 특사였으며, 플런켓의 친척 중 다수가 이 조직에 참여했다.
플런켓은 로마 아일랜드 대학에 입학하여 뛰어난 학생임을 입증했고, 165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아일랜드 주교들의 요청으로 로마에서 그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편, 아일랜드의 크롬웰 정복 (1649–53)으로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은 쇠퇴했고, 가톨릭 공개 활동 금지와 가톨릭 성직자 처형으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플런켓은 오랫동안 아일랜드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로마에 머물기를 청원했고, 1657년에 신학 교수가 되었다. 잉글랜드 연방 기간과 찰스 2세 통치 초기, 그는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를 옹호하고 로마 대학에서 신학 교수로 봉사했다. 1669년 7월 9일 선교성 회의에서 그는 아일랜드 수좌 주교인 아르마 주교로 임명되었고, 11월 30일 겐트에서 겐트 주교인 외겐-알베르 백작에 의해 주교로 서임되었다. 그는 1660년 영국 왕정 복고 이후 관용 정책 덕분에 1670년 3월 7일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팔리움은 1670년 7월 28일 교황 회의에서 그에게 수여되었다.
2. 2. 아르마 대주교 임명과 활동
1669년 7월 9일 선교성 회의에서 아일랜드 수좌 주교인 아르마 주교로 임명되었고,[1] 그해 11월 30일 겐트에서 겐트 주교인 외겐-알베르 백작에 의해 서임되었다. 1670년 7월 28일 교황 회의에서 팔리움을 받았다. 1660년 영국 왕정 복고가 관용을 바탕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1670년 3월 7일 아일랜드 땅을 다시 밟았다.아일랜드로 돌아온 그는 성직자들의 음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아일랜드 성직자에게서 이 결점을 제거하면 그는 성인이 될 것입니다."라고 썼다. 1660년 브레다 선언에 따라 아일랜드 가톨릭에 대한 형벌법이 완화되었고,[1] 1670년 드라허다에 예수회 대학을 설립할 수 있었다. 이 대학은 1년 후 150명의 학생이 다녔는데, 그중 40명 이상이 개신교도였으며 아일랜드 최초의 통합 학교가 되었다. 그의 사역은 성공적이었고, 4년 동안 48,000명의 가톨릭 신자에게 견진성사를 주었다고 한다. 더블린의 정부는 특히 아일랜드 총독인 오몬드 공작 (가톨릭 부모를 둔 개신교도)의 지휘 아래 1670년대 중반까지 가톨릭 계층에게 관대한 관용 정책을 펼쳤다.
3. 구교도 음모 사건과 체포
1673년 심사율이 제정되었지만, 올리버 플런켓은 교리에 동의하지 않아 학교는 문을 닫고 건물을 철거해야 했다. 플런켓은 위장한 채 잠적했고, 망명 통관을 기다리기 위해 항구에 등록하라는 정부의 칙령을 거부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런던의 영국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더블린 정부가 가톨릭 주교들을 내버려두는 것을 선호했기에 대체로 평화롭게 지냈다.
1678년에 발생한 소위 구교도 음모 사건은 영국의 성직자인 티투스 오티스에 의해 날조되어 반 가톨릭 분위기를 야기시켰다. 더블린의 피터 탤벗 대주교가 체포되었고, 올리버는 또 다시 도망길에 올랐다. 영국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추밀원은 올리버가 프랑스 침략을 모의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1672~77년 아일랜드의 중위로 지냈고 오먼드 공작의 신임을 깎아내리며 재직을 희망했던 에식스 백작 아서 카펠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에식스 백작은 무자비하거나 절조없는 사람이 아니었고, 나중에 자비를 간청한 것은 그가 플런켓이 실제로 죽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의도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현상금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플런켓은 신자들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는 1679년 12월 6일 더블린에서 체포되어 더블린 성에 투옥되었고, 그곳에서 죽어가는 탈보트에게 사면을 주었다. 플런켓은 20,000명의 프랑스 군인을 이 나라로 불러들이는 음모를 꾸미고, 반란을 위해 70,000명의 군인을 지원하기 위해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한 혐의로 던독에서 국가에 반하는 음모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2] 이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정부 내 일부 인사들은 1641년 아일랜드 반란의 재발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고, 어쨌든 이것은 플런켓을 기소하는 편리한 핑계가 되었다. 오먼드 공작은 에식스 백작이 위기를 이용하여 그를 깎아내리려는 것을 알고 플런켓을 공개적으로 변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적으로 그는 플런켓의 무죄와 그를 고발한 밀고자들에 대한 경멸을 분명히 했다.
3. 1. 재판과 처형
플런켓은 개신교 배심원단을 마주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검찰 증인들이 스스로 범법자였고 법정에 나오기를 두려워하면서 재판은 곧 취소되었다. 샤프츠베리 백작은 플런켓이 배심원 구성과 관계없이 아일랜드에서 유죄판결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플런켓을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런던 뉴게이트 교도소로 이동했다. 첫 번째 대배심은 진실된 법안을 찾지 못했지만 그는 석방되지 않았다. 플런켓은 변호인을 변호하는 것을 거절당했고(휴 릴리가 그의 법률 고문 역할을 했지만), 변론 증인들을 모을 시간을 가졌고, 또한 그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시할 사람들의 범죄 기록을 얻으려는 시도에서 좌절되었다. 그의 하인인 제임스 맥케나와 친척인 존 플런켓은 아일랜드로 돌아갔으며, 가능한 시간 내에 피고측을 위한 증인과 증거를 가져오는데 실패했다. 재판 과정에서 플런켓 대주교는 영국에서 그를 재판할 수 있는 법원의 권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고, 또한 증인들의 범죄 과거에도 관심을 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대법원장 프랜시스 펨버튼 대법원장은 플런켓에게 "플런켓씨, 당신이 지금 여기서 말하고 이 연설을 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당신 자신의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십시오. 이런 것들을 경시할수록 방어할 시간이 줄어들 겁니다."라고 말했다.스코틀랜드의 성직자이자 미래의 솔즈베리 주교인 길버트 버넷은 플런켓의 결백함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플런켓은 오직 평화롭게 살기를 바랐고 신도들을 보살피기를 바랐던 현명하고 냉정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캠벨 경은 19세기에 글을 쓰면서 판사인 펨버튼에 대해 그 재판은 자신과 조국의 불명예라고 말했다. 보다 최근에 고등법원 판사 제임스 코미 경은 이것을 중대한 실수라고 불렀다. 플런켓은 그의 직책 덕택에 분명히 "가톨릭 신앙을 조장했다"고 유죄를 받았고, 프랑스인과 약간의 거래를 했을 수도 있지만, 그가 왕의 삶에 대해 음모를 꾸몄다는 증거는 전혀 없었다.
플런켓 대주교는 1681년 6월 "로마 신앙을 고취한 죄"로 대역죄가 인정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대법원장은 판결문에서 "당신은 이 사건에서 신을 모독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습니다. 당신의 반역의 근본은 당신의 거짓 종교를 세운 것이었기 때문이며, 그것은 세상에 하나님을 더 불쾌하게 하거나 인류를 더 해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배심원들은 15분 만에 유죄 평결을 받고 돌아왔고, 플런켓 대주교는 "Deo Gratiasla(라틴어로 신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자비를 바라는 수많은 탄원이 있었고 찰스 2세도 비록 암호화된 가톨릭 신자였지만, 플런켓을 살려주는 것은 정치적으로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영국 주재 프랑스 대사 폴 바릴론은 그의 왕 루이 14세의 자비를 간청했다. 찰스는 그에게 솔직히 자신은 플런켓이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를 용서할 만큼 과감하게 한 걸음 내딛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에식스 경은 자신의 호기심이 무고한 사람을 비난하게 만든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듯, 비슷한 자비를 간청했다. 일반적으로 가장 자기 통제력이 강한 왕은 에식스에게 "그의 피가 네 머리 위에 있다. 네가 그를 구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를 구할 수 없었고 감히 그럴 수 없을 것이다."라며 화를 냈다.
플런켓은 1681년 7월 1일(NS 7월 11일) 타이버른에서 교수형, 거열형을 당했는데, 그는 영국에서 마지막으로 순교한 가톨릭 순교자로 당시 55세였다.
4. 시복과 시성
올리버 플런켓은 1920년에 복자[1]로, 1975년에 성인[2]으로 시성되었으며, 거의 700년 만에 탄생한 최초의 아일랜드 성인이자 아일랜드 순교자 중 처음으로 복자가 된 인물이다. 시성 과정에서 관례적인 두 번째 기적은 면제되었다.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더멋 오헐리 대주교, 마가렛 볼, 웨스퍼드 순교자를 포함한 17명의 다른 아일랜드 순교자들을 복자로 선포하였다.
1920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는 보리스 안렙이 제작한 그의 모자이크가 설치되었다.
런던 클래펌 커먼에서 열린 성 올리버 플런켓을 위한 집회와 미사는 놀라운 성공이었다. 커먼은 플런켓의 순교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로 사실상 점령되었다. 1981년 7월 1일, 토머스 오피아흐 추기경, 20명의 주교, 그리고 여러 명의 수도원장이 비계 덮개 아래 무대에 올랐다. 오피아흐는 플런켓의 머리를 헬리콥터로 운반하여 그곳에 도착했다. 이 행사는 수천 명의 순례자를 공원으로 끌어들였다.
1997년 플런켓은 아일랜드의 평화와 화해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으며, 아일랜드의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기도 단체인 "평화와 화해를 위한 성 올리버 플런켓"에 의해 채택되었다.
2023년, 클리프턴 로마 가톨릭 교구의 사목 구역은 플런켓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
5. 유산
올리버 플런켓은 1920년 복자, 1975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거의 700년 만에 처음으로 아일랜드 출신 성인이자 아일랜드 순교자 중 최초로 복자가 되었다. 1997년에는 아일랜드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고, "평화와 화해를 위한 성 올리버 플런켓"이라는 기도 단체가 그를 기리고 있다.
그의 유산은 종교, 교육, 스포츠 분야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소와 시설물에 그의 이름을 붙이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5. 1. 기념
올리버 플런켓은 1920년에 복자, 1975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거의 700년 만에 처음으로 아일랜드 출신 성인이자 아일랜드 순교자 중 최초로 복자가 되었다. 시성 과정에서 관례적인 두 번째 기적은 면제되었다. 1992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더멋 오헐리 대주교, 마가렛 볼, 웨스퍼드 순교자를 포함한 17명의 다른 아일랜드 순교자들이 복자로 선포되었다.1981년 7월 1일, 런던 클래펌 커먼에서 플런켓 순교 300주년 기념 집회와 미사가 열렸다. 토머스 오피아흐 추기경과 20명의 주교, 다수의 사제들이 참석했으며, 오피아흐 추기경은 플런켓의 머리를 헬리콥터로 운반해 왔다. 이 행사에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모였다.
1997년, 플런켓은 아일랜드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고, "평화와 화해를 위한 성 올리버 플런켓"이라는 기도 단체가 그를 기리고 있다.
'''종교 및 교회 부지'''
종교 및 교회 부지 이름 | 위치 |
---|---|
성 올리버 플런켓 교회 | 앤트림 주 다운 앤 코너 교구 |
성 올리버 플런켓 교회 | [http://limerickdioceseheritage.org/MungretCrecoraRaheen.htm 뭉그렛, 리머릭] |
성 베드로 가톨릭 교회 | 드루에다, 라우스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교회 | 블랙록 (라우스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교회 | 킬클룬, 미스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교회 | 클론멜, 티퍼레리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교회 | 렌모어, 골웨이 주 |
성 브리지드와 성 올리버 플런켓 교회 | 이니시모어, 아란 제도, 골웨이 주 |
로크루의 신사 | 미스 주 |
다운사이드 수도원 | 서머싯 |
성 올리버 플런켓 가톨릭 교회 | 스넬빌, 조지아 |
성 올리버 플런켓 가톨릭 교회 | 스트래스포일, 런던데리 주, 북아일랜드 데리 교구 |
성 올리버 플런켓 교구 (통합) | 프레더릭타운, 펜실베이니아 |
성 올리버 묘지 | 코크 시, 코크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가톨릭 교회 | 달링턴 포인트, 뉴사우스웨일스 호주 |
성 올리버 플런켓 교구 | 캐논 힐, 퀸즐랜드 호주 |
성 올리버 플런켓 교구 | 해리스 파크, 뉴사우스웨일스, 호주 |
![]() | |
성 올리버 플런켓 교구 | 파스코 베일, 빅토리아, 호주 |
우리 레이디 성 메리 오브 글래스톤베리 교회, 서머싯, 영국 | 올리버 플런켓의 유물이 모든 성물함에 보관[6] |
'''학교'''
학교 이름 | 위치 |
---|---|
성 올리버 플런켓 중고등학교 | 올드캐슬, 미스 주 |
스코일 오일리에르 SN | 바일 아타 클리아트 15 |
성 올리버 플런켓 국립학교 | 클론멜, 티퍼레리 주 |
스코일 오일리에르 나오파 | 킬클룬, 미스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초등학교 | 베라, 타이론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국립학교 | 블랙록, 라우스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국립학교 | 뉴캐슬, 아테니 |
성 올리버 플런켓 국립학교 | 킬케린, 골웨이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학교 | 벨파스트, 앤트림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초등학교 | 포크힐, 아르마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초등학교 | 킬모어, 아르마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학교 | 말라하이드, 더블린 주 |
축복받은 올리버 플런켓 남자 국립학교 | 모이트, 웨스트미스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국립학교 | 네번, 미스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초등학교 | 뉴타운해밀턴, 아르마 주 |
다운사이드 학교, 서머셋 | |
올리버 플런켓 초등학교 | 스트래스포일, 런던데리 주 |
메이필드 칼리지, 서식스 | |
성 올리버 초등학교 | 해리스 파크, 뉴사우스웨일스, 호주 |
성 올리버 플런켓 초등학교 | 캐논 힐, 퀸즐랜드, 호주 |
성 올리버 플런켓 초등학교 | 파스코 베일, 빅토리아, 호주 |
성 올리버 플런켓 NS | 몽크스타운, 더블린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NS | 킬리나, 킬데어 주 |
성 올리버 국립학교 | 킬라니, 케리 주 |
성 올리버 커뮤니티 칼리지 | 드루에다, 라우스 주 |
'''스포츠'''
스포츠 시설/단체 이름 | 위치 |
---|---|
성 올리버 플런켓 공원 | 크로스마글렌, 아르마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공원 | 에미베일, 모나한 주 |
올리버 플런케츠 GFC | 드루에다, 라우스 주. |
올리버 플런케츠 GAA | 아히오힐, 코크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에오간 루아 GAA | 더블린, 더블린 주 |
그린로프 GAC | 클라디, 런던데리 주 |
캐번 시니어 풋볼 챔피언십의 올리버 플런켓 컵 | |
성 올리버 GAA | 워터포드, 워터포드 주 |
'''기타'''
기타 시설/장소 이름 | 위치 |
---|---|
올리버 플런켓 거리 | 코크 시, 코크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광장 | 도네릴, 코크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도로 | 레터케니, 도네갈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로드 | 발리모어 유스타스. 킬데어 주 |
성 올리버 플런켓 다리 | 오팔리 주 |
올리버 플런켓 거리 | 멀린가, 웨스트미스 주 |
올리버 플런켓 도로 | 몽크스타운, 더블린 주 |
올리버 플런켓 애비뉴 | 몽크스타운, 더블린 주 |
EI-FCY, 에어 링구스 기단에 있는 비행기 | 성 올리버 플런켓 / 오일리에르 플룬시드로 명명[7] |
플런켓 거리 | 킬라니, 케리 주 |
플런켓 애비뉴 | 메르뷰, 골웨이 시. |
5. 2. 대중문화
- 해럴드 핀터의 희곡 ''생일 파티''에서 맥캔은 스탠리에게 "복된 올리버 플런켓은 어때?"라고 묻는다.
- J. P. 돈레비의 소설 ''생강 인간''에서 세바스찬 데인저필드는 반복적으로 "복된 올리버"의 이름을 외치고, 책의 후반부에는 성인의 머리 조각상을 받는다.
- 데이비드 캐프리의 2001년 영화 ''온 더 노즈''에서 프랜시스 버크가 연기한 나나는 큰 표본 병에 담긴 호주 원주민의 머리를 "올리버 플런켓"이라고 지칭한다.
- 콜린 베이트먼의 2004년 소설 ''올리버 플런켓의 머리를 내게''에서 올리버 플런켓의 머리가 성 베드로 성당에서 도난당한다.
- 투 머치 조이의 2021년 앨범 ''실수 연발''에는 "올리버 플런켓의 머리"라는 곡이 수록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Earlier biographers gave his date of birth as 1 November four years later, but since the discovery of an ancient reference to Oliver Plunkett’s birth in the Bodleian Library, Ashmolean, MS.436, which stated "He was born on 1st. November 1625", biographers of Plunkett since the 1930s agree on 1625. These include Hanly, O'Fiaich, Forristal, Curtis, O'Higgins, Walsh, Bennett, Stokes, Concannon, Carty, Matthews, Murphy, Nowak, Burns, Meagher and the St. Oliver web-site.
[2]
서적
History of his Own Time
Everyman Abridgment
1991
[3]
서적
England's Wars of Religion Revisited
Ashgate
2013
[4]
서적
Index ac status causarum beatificationis servorum dei et canonizationis beatorum
Typis polyglottis vaticanis
1953-01
[5]
웹사이트
Parishes
https://cliftondioce[...]
2024-02-10
[6]
웹사이트
Opening of the present church - Glastonbury Shrine
http://www.glastonbu[...]
2021-09-18
[7]
웹사이트
EI-FCY
https://www.airhis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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