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교도 음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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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교도 음모 사건은 1678년부터 1681년까지 잉글랜드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으로, 가톨릭교도들이 찰스 2세를 암살하고 개신교 통치를 전복하려 한다는 거짓 혐의가 제기되면서 사회 전체에 광범위한 공포와 반가톨릭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 종교 개혁 이후 지속된 반가톨릭 감정을 배경으로, 타이투스 오츠의 허위 증언과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의 의문사, 에드워드 콜먼의 편지 등이 겹쳐지면서 시작되었다. 무고한 가톨릭 신자들이 처형되고, 의회에서 가톨릭 배제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급기야 모방 범죄까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 사회, 정치,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종교적 관용과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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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교도 음모 사건 | |
---|---|
개요 | |
이름 | 구교도 음모 사건 |
다른 이름 | 포피시 플롯 (Popish Plot) |
시기 | 1678년 - 1681년 |
지역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
원인 | 가상의 가톨릭 음모 |
목표 | 잉글랜드의 찰스 2세 암살, 개신교 박해, 가톨릭으로의 권력 장악 |
결과 | 반 가톨릭 히스테리 확산 다수의 무고한 사람들의 처형 휘그당의 성장 |
배경 | |
종교적 긴장 | 잉글랜드는 잉글랜드 국교회를 국교로 함 가톨릭은 소수 종교 찰스 2세는 가톨릭에 대한 관용 정책을 추진 대중은 가톨릭 세력 확장에 대한 두려움 |
정치적 상황 | 왕정복고 이후 왕권 강화 시도 의회와 왕실 간의 갈등 심화 찰스 2세의 후계 문제 불확실 |
주요 인물 | |
주동자 | 티투스 오츠 |
희생자 |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경 (사망의 진실은 아직도 논쟁 중) 윌리엄 스타플턴 경 에드워드 콜먼 윌리엄 하워드, 스태퍼드 백작 1세 |
사건 전개 | |
티투스 오츠의 폭로 | 1678년, 티투스 오츠는 가톨릭 음모를 폭로하며 사회적 파장 발생 |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경의 죽음 | 고드프리 경은 오츠의 증언을 기록한 치안판사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음모의 증거로 여겨짐 반 가톨릭 히스테리 심화 |
의회의 대응 | 음모 조사 특별위원회 구성 가톨릭교도에 대한 탄압 강화 무고한 사람들의 체포 및 처형 |
영향 | |
정치적 영향 | 휘그당의 부상과 토리당의 약화 왕실의 권위 실추 배제 법안 추진 (가톨릭 신자의 왕위 계승권 박탈 시도) |
사회적 영향 | 반 가톨릭 정서 심화 사회 분열 심화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 |
평가 | |
역사적 평가 | 조작된 음모 정치적 목적에 이용됨 반 가톨릭 히스테리의 대표적인 사례 |
기타 | |
관련 사건 | 라이 하우스 음모 사건 몬머스 반란 |
참고 | |
관련 법령 | 신앙 자유 선언 |
2. 역사적 배경
청교도 혁명의 기억이 생생했던 1670년대 잉글랜드에는 반가톨릭 감정이 깊이 남아 있었다. 국왕 찰스 2세의 왕비 카타리나와 국왕의 동생 제임스 2세가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젠트리와 런던 시민들을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고, 긴장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구교도 음모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연루되었다.
인물 | 설명 |
---|---|
![]() | 사건의 주요 인물. 침례교 집안 출신으로 잉글랜드 국교회 성직자였으나 스캔들로 쫓겨났다. 이후 예수회 사제가 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예수회에 대한 적대감을 품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
이즈레이얼 텅 | 국교회 성직자이자 오츠의 후원자. 예수회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망상을 품고 있었으며, 가톨릭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가졌다. |
댄비 백작 | 재무 장관이자 국왕의 측근 정치인. 명예 혁명 전후 정계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후에 리즈 공작에 서임되었다. |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 켄트주 출신 젠트리이자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출신. 뇌물 수수로 무죄인 국왕 주치의를 처벌한 적도 있었지만, 사건 당시 런던의 치안 판사를 맡고 있었다. |
에드워드 콜먼 | 요크 공(훗날 제임스 2세)의 비서. 가톨릭 신자로 프랑스 왕실과 친밀한 교류가 있었다. 콜먼이 프랑스와 주고받은 문서가 음모에 신빙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
샤프츠베리 백작 | 사건 당시 휘그당의 주도적인 정치인. 1640년 단기 의회에서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재무부 장관, 대법관, 상무 장관을 역임했고, 1672년에 샤프츠베리 백작에 서임되었다. 반가톨릭의 거물이었다. |
2. 1. 잉글랜드 종교 개혁과 반가톨릭 정서
영국 종교 개혁은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려 하면서 시작되었다.[1] 교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헨리 8세는 로마와 결별하고 잉글랜드 교회를 장악했다. 이후 그는 수도원을 해산하여, 여전히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던 국가에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잉글랜드 교회는 엄격한 개신교 단체로 변모했으며, 가톨릭의 많은 잔재가 억압되었다.에드워드의 뒤를 이어 헨리 8세와 캐서린의 딸인 이복 누이 메리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녀는 가톨릭 신자였으며 잉글랜드 교회를 성좌와 재결합시켰다. 메리는 사촌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결혼했는데, 당시 스페인에서는 스페인 종교 재판이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메리 1세는 300명의 개신교도를 화형에 처하여, 많은 영국인들이 가톨릭을 외세의 개입 및 종교적 박해와 연관시키도록 했다.
메리 1세의 뒤를 이어 그녀의 개신교 이복 누이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여 다시 로마와 결별하고 가톨릭을 억압했다. 엘리자베스 1세와 그 후의 개신교 군주들은 수백 명의 가톨릭 사제와 평신도를 교수형에 처하고 신체를 훼손했다. 이는 엘리자베스 1세의 의심스러운 정통성(그녀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딸이었다)과 더불어, 가톨릭 세력이 그녀를 여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녀의 다음 친척인 가톨릭 신자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선호하도록 만들었다. 엘리자베스 치세에는 북부 봉기 (1569)와 같은 가톨릭 반란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를 살해하고 스페인의 침략으로 메리를 대신하려는 의도를 가진 리돌피 음모 (1571)와 배빙턴 음모 (1586)와 같은 책략이 있었다. 세 명의 교황이 엘리자베스를 심판하는 교황 칙서를 발행하여 영국 가톨릭 신자들의 충성심을 의심할 근거를 제공했다. 배빙턴 음모 이후 1587년 메리는 참수되었다. 이는 엘리자베스 1세의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의 네덜란드 반란 지원과 함께, 스페인 무적함대 (1588)를 동원한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침공 시도를 촉발했다. 이는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분노를 더욱 심화시켰으며, 무적함대의 실패는 많은 영국인들이 신이 개신교 편이라고 확신하게 했다.
반가톨릭 정서는 1605년 실패한 화약 음모 이후 새로운 정점에 달했다. 가톨릭 음모자들은 의회 개회식에서 폭탄을 터뜨려 제임스 1세의 개신교 통치를 전복하려 했다. 폭발물을 담당한 가이 포크스가 전날 밤 발견되면서 음모는 좌절되었다. 이 음모의 규모는 주요 정부 인사를 한 번에 죽이려는 것이었으며, 많은 영국인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뜻을 이루려는 살인적인 음모자들이라고 확신하게 하여, 이후 의혹의 토대를 마련했다.
2. 2. 17세기 잉글랜드의 정치적 상황
청교도 혁명의 기억이 생생했던 1670년대 잉글랜드에는 반가톨릭 감정이 깊이 남아 있었다. 30년 전쟁 (1618–1648)에서 가톨릭 합스부르크가가 독일의 개신교를 근절하려는 시도로 여겨졌던 것처럼, 초기 스튜어트 왕가 통치 아래에서는 가톨릭 음모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했다.[1] 특히 찰스 1세의 교회 정책은 고교회 성향을 띠었기에 친가톨릭적으로 보였으며, 그의 가톨릭 여왕인 프랑스의 헨리에타 마리아가 주도하는 가톨릭 음모에 의해 유도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1641년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가톨릭의 잔혹 행위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잉글랜드 내전 (1642–1649)을 촉발하는 데 일조했고, 군주제의 폐지와 10년간의 청교도 통치로 이어졌다.1660년 찰스 2세 치하에서 왕정이 복고되면서 국교인 잉글랜드 교회를 제외한 모든 종교적 반대 세력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났다. 가톨릭 신자들은 여전히 대중의 적대감과 법적 차별을 겪었다. 찰스 2세 치세 동안 런던 대역병 (1665)과 런던 대화재 (1666)와 같은 재앙이 발생하면서 반가톨릭 히스테리가 약간 격화되었다. 막연한 소문은 가톨릭 신자, 특히 예수회에 의한 방화로 화재의 원인을 돌렸다.
찰스 2세의 종교적 충성에 대한 의구심은 반가톨릭주의를 더욱 심화시켰다. 찰스 2세는 망명 기간 동안 가톨릭 세력의 지원을 받았고, 포르투갈 가톨릭 공주 브라간사 여왕 캐서린과 결혼했으며, 개신교 네덜란드에 대항하여 가톨릭 강대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게다가 찰스의 형제이자 추정 상속자인 요크 공작 제임스는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1672년 찰스 2세는 가톨릭 신자와 기타 종교적 반대 세력에 대한 모든 영국의 형벌법을 정지하는 왕립 관용 선언을 발표했다.[1] 이는 잉글랜드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개신교의 두려움을 부채질했고, 1670년대에 의회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국왕 찰스 2세의 왕비 카타리나와 국왕의 동생 제임스가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젠트리와 런던 시민들을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고, 긴장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사건과 혼란에 연루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타이투스 오츠: 침례교 집안 출신으로 잉글랜드 국교회 성직자였으나 스캔들로 쫓겨났다. 이후 예수회 사제가 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예수회에 대한 적대감을 품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 이즈레이얼 텅: 국교회 성직자이자 오츠의 후원자. 예수회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망상을 품고 있었으며, 가톨릭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가졌다.
- 댄비 백작: 재무 장관이자 국왕의 측근 정치인. 명예 혁명 전후 정계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후에 리즈 공작에 서임되었다.
-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켄트주 출신 젠트리이자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출신. 뇌물 수수로 무죄인 국왕 주치의를 처벌한 적도 있었지만, 사건 당시 런던의 치안 판사를 맡고 있었다.
- 에드워드 콜먼: 요크 공(훗날 제임스 2세)의 비서. 가톨릭 신자로 프랑스 왕실과 친밀한 교류가 있었다. 콜먼이 프랑스와 주고받은 문서가 음모에 신빙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 샤프츠베리 백작: 사건 당시 휘그당의 주도적인 정치인. 1640년 단기 의회에서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재무부 장관, 대법관, 상무 장관을 역임했고, 1672년에 샤프츠베리 백작에 서임되었다. 반가톨릭의 거물이었다.
3. 주요 인물
청교도 혁명의 기억이 생생했던 1670년대 잉글랜드에는 반가톨릭 감정이 깊이 남아 있었다. 국왕 찰스 2세의 왕비 카타리나와 국왕의 동생 제임스가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젠트리와 런던 시민들을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고, 긴장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 가운데, 다음 인물들이 이 사건과 혼란에 연루되었다.
- 타이투스 오츠: 이 사건의 주요 인물이다. (자세한 내용은 #타이투스 오츠 하위 섹션 참조)
- 이즈레이얼 텅: 오츠의 후원자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즈레이얼 통 하위 섹션 참조)
- 댄비 백작: 재무 장관으로, 사건 당시 국왕의 측근이었던 정치인. 명예 혁명 전후의 정계에서 다양한 요직을 맡았으며, 후에 리즈 공작에 서임되었다.
-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런던의 치안 판사였다. (자세한 내용은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하위 섹션 참조)
- 에드워드 콜먼: 요크 공(훗날 제임스 2세)의 비서였다. (자세한 내용은 #에드워드 콜먼 하위 섹션 참조)
- 샤프츠베리 백작: 사건 당시 휘그당의 주도적인 정치인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앤서니 애슐리 쿠퍼 (샤프츠베리 백작) 하위 섹션 참조)
3. 1. 타이투스 오츠
타이투스 오츠(Titus Oates영어)는 침례교 집안에서 태어나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직책을 얻었지만, 스캔들을 일으켜 국교회에서 쫓겨났다. 그 후 예수회 사제가 되기 위해 스페인의 바야돌리드와 프랑스의 생토메르에서 공부했다. 결국 오츠는 예수회에서 거부당했고, 예수회에 대한 적대감을 안고 런던으로 돌아왔다.[1]3. 2. 이즈레이얼 통
타이투스 오츠의 후원자이자 국교회 성직자였다. 인품은 나쁘지 않았지만, 정신 착란자였다고도 한다. 예수회가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이라는 망상을 품고 있었으며, 가톨릭에 대해 남다른 적대감을 불태웠다.3. 3.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경(Sir Edmund Berry Godfrey)은 런던의 치안 판사이자 개신교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1678년 10월 12일, 그가 실종되었고 5일 후인 10월 17일에 시신이 훼손된 채로 발견되었다. 그는 목이 졸려 살해되었고, 자신의 칼에 찔린 상태였다. 이 사건은 개신교 신자들을 격분시켰고, 많은 이들이 가톨릭교도들을 살해의 배후로 지목했다.고드프리의 죽음은 이미 가톨릭교도들의 소행으로 여겨지고 있었으며, 의회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귀족들은 찰스 2세 국왕에게 런던 반경 약 32.19km 이내의 모든 가톨릭교도들을 추방할 것을 요청했고, 찰스 2세는 이를 허락했다. 그러나 런던은 이미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고, 이 사건은 오랫동안 "고드프리의 가을"로 기억되었다.
타이투스 오츠는 고드프리의 살해 사건을 음모가 사실임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았다. 고드프리의 죽음과 에드워드 콜먼의 편지 발견은 오츠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거짓 주장에 대한 확실한 사실적 근거를 제공했다.
오늘날까지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경을 살해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미스터리로 여기고 있다. 오츠의 동료인 윌리엄 베드로(William Bedloe)는 은세공인 마일스 프랜스(Miles Prance)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프랜스는 다시 세 명의 노동자 베리, 그린, 힐을 지목했다. 이들은 1679년 2월에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지만, 곧 이들이 무죄라는 것이 밝혀졌다. 고문(torture)을 받은 프랜스는 단지 자유를 얻기 위해 그들을 지목했을 뿐이었다.
고드프리는 켄트주 출생으로,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출신의 젠트리였다. 뇌물 수수로 무죄인 국왕 주치의를 체포하여 처벌한 적도 있었지만, 사건 당시 런던의 치안 판사를 맡고 있던 엘리트였다.
3. 4. 앤서니 애슐리 쿠퍼 (샤프츠베리 백작)
샤프츠베리 백작은 1640년 단기 의회에서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재무부 장관, 대법관, 상무 장관을 역임했고, 1672년에 샤프츠베리 백작에 서임되었다. 청교도 혁명의 기억이 생생했던 1670년대 잉글랜드에서 반가톨릭 세력의 거물이었다.3. 5. 에드워드 콜먼
에드워드 콜먼은 요크 공작(훗날 제임스 2세)의 비서였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 프랑스 왕실과 긴밀하게 교류하였다. 콜먼이 프랑스와 주고받은 서신은 음모에 신빙성을 부여하게 되었다.4. 가톨릭 음모 사건의 전개
타이투스 오츠와 이즈레이얼 통이 꾸민 조작 음모 사건은 처음에는 거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경의 의문사와 에드워드 콜먼의 편지가 공개되면서 대중들 사이에 히스테리가 확산되어, 일시에 신빙성을 얻어 처음에는 런던, 다음에는 잉글랜드 전역에 집단 히스테리를 불러일으켰다.[1] 무고한 가톨릭 신자들이 처형당하고, 의회에서도 가톨릭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으며, 급기야 모방범까지 나타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고드프리 경은 개신교의 강력한 지지자였는데, 1678년 10월 12일 실종되었다가 5일 후 훼손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미해결 상태로 남았지만, 많은 이들은 가톨릭교도들의 소행으로 여겼다.[1] 오츠는 고드프리의 죽음을 음모의 증거로 이용했고, 콜먼의 편지는 음모에 대한 신빙성을 더했다. 1678년 10월 23일, 오츠는 의회에서 예수회 총장의 서명이 담긴 계약서를 보았다고 증언했는데, 이 계약서에는 찰스 2세를 암살하고 가톨릭 군주를 세우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
고드프리 살해 사건의 범인으로 마일스 프랜스가 지목되었고, 프랜스는 다시 베리, 그린, 힐을 지목했다. 이들은 1679년 2월 처형되었지만, 곧 무고함이 밝혀졌다. 프랜스는 고문을 받아 거짓 자백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1]
1678년 11월 24일, 오츠는 여왕이 국왕을 독살하려 한다고 주장했고, 의회는 오츠를 석방했다. 히스테리는 계속되었고, 가택 수색과 가톨릭 신자 추방이 이어졌다. 가톨릭 은행가 윌리엄 스테일리는 반역 음모 혐의로 처형되었다.[2] 오츠는 화이트홀에 아파트를 배정받고 연금을 받았으며, 암살자들이 은탄환으로 왕을 쏘려 한다는 등의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 토마스 데인저필드와 같은 범죄자들뿐만 아니라 스티븐 더글데일, 로버트 제니슨, 에드워드 터버빌과 같은 사회적 지위가 좋은 사람들도 무고한 희생자를 비난했다.[2]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잉글랜드 전역에 집단 히스테리를 불러일으켰고, 무고한 가톨릭 신자들이 처형되는 결과를 낳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츠의 주장은 신뢰성을 잃었고, 최소 22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처형된 후, 잉글랜드와 웨일스 대법원장인 윌리엄 스크로그스는 무죄를 선언하기 시작했고, 찰스 2세는 대책을 강구했다. 1681년 8월 31일, 오츠는 화이트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를 떠나라는 통보를 받았지만, 국왕과 요크 공작을 비난하다 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100000GBP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4. 1. 음모의 시작
타이투스 오츠와 이즈레이얼 통은 가톨릭 교회가 찰스 2세 암살을 승인했다는 내용의 방대한 원고를 작성했다. 이들은 잉글랜드의 예수회가 이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주장했다.[1] 원고에는 암살 음모에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는 100명 가까운 예수회 회원과 그 지지자들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으나, 문서에는 진실로 입증된 내용은 없었다.오츠는 이 원고 사본을 통이 살고 있던 의사인 리처드 바커 경의 집에 있는 갤러리의 벽판에 끼워 넣었다. 다음 날 통은 그 원고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지인인 크리스토퍼 커크비에게 보여주었고, 커크비는 국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로 결정했다. 1678년 8월 13일, 찰스 2세가 세인트 제임스 공원을 산책하고 있을 때, 커크비는 그에게 음모에 대해 알렸다. 찰스는 무시했지만, 커크비는 국왕을 암살하려는 자들의 이름을 알고 있으며, 실패할 경우 여왕의 의사인 조지 웨이크먼 경이 독살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왕은 커크비와 통을 만나 면담했지만 회의적이었다. 찰스는 커크비에게 통을 댄비 경에게 데려가라고 했고, 댄비 경은 통에게 거짓말을 하며 원고를 발견했지만 저자는 모른다고 말했다.
1678년 9월 6일, 오츠는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경에게 소환되어 선서를 했다. 오츠는 같은 해 4월 24일 런던 스트랜드의 화이트 호스 선술집에서 열린 예수회 회의에 참석했다고 주장했다. 오츠에 따르면, 그 회의에서는 아일랜드 폭력배에게 칼로 찔리게 하거나, 두 명의 예수회 병사에게 총을 맞거나, 왕비의 주치의 조지 웨이크먼 경에게 독살당하는 등 다양한 암살 방법이 논의되었다.
오츠와 통은 추밀원으로 불려가 심문을 받았다. 오츠는 541명의 예수회를 포함한 다양한 가톨릭 수도회 회원과 수많은 가톨릭 귀족에 대해 43가지 혐의를 제기했다. 그는 조지 웨이크먼 경과 모데나의 메리 요크 공작 부인의 비서인 에드워드 콜먼 (순교자)을 암살 계획 혐의로 기소했다. 콜먼은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웨이크먼은 나중에 무죄로 풀려났다. 오츠는 가짜로 의심되는 음모의 세부 사항을 담은 편지들을 보여주었고, 의회는 음모에 더 큰 신뢰를 주기 시작했다.
오츠가 기소한 다른 사람으로는 윌리엄 포가티 박사, 더블린의 피터 탤벗 대주교, 사무엘 페피스, 존 벨라시스 제1대 벨라시스 남작 등이 있었다. 혐의 목록은 81개로 늘어났다.
통은 예수회에 불만을 품은 오츠에게 출처 불명의 팸플릿을 보여주었다. 그 팸플릿에는 잉글랜드 내전과 찰스 1세 처형(1649년), 런던 대화재(1666년)까지 모두 예수회의 소행이라는 근거 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이를 바탕으로, 가톨릭의 예수회와 장로교(단, 장로교는 프로테스탄트에 속한다)가 손을 잡고 국왕 찰스 2세를 암살하고, 가톨릭 왕제 제임스를 왕위에 앉히고, 프로테스탄트를 몰살하며, 루이 14세가 군대를 파견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4. 2. 두 가지 사건과 히스테리의 확산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경의 의문사와 에드워드 콜먼의 편지가 공개되면서 대중들 사이에 히스테리가 확산되었다. 고드프리 경은 개신교의 강력한 지지자였는데, 1678년 10월 12일 실종되었다가 5일 후 훼손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미해결 상태로 남았지만, 많은 이들은 가톨릭교도들의 소행으로 여겼다.[1]오츠는 고드프리의 죽음을 음모의 증거로 이용했고, 콜먼의 편지는 음모에 대한 신빙성을 더했다. 오츠는 1678년 10월 23일 의회에서 예수회 총장의 서명이 담긴 계약서를 보았다고 증언했는데, 이 계약서에는 찰스 2세를 암살하고 가톨릭 군주를 세우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
고드프리 살해 사건의 범인으로 마일스 프랜스가 지목되었고, 프랜스는 다시 베리, 그린, 힐을 지목했다. 이들은 1679년 2월 처형되었지만, 곧 무고함이 밝혀졌다. 프랜스는 고문을 받아 거짓 자백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1]
찰스 2세는 의회를 소집했지만, 의회와 여론은 음모가 실제라고 믿었다. 1678년 10월 25일, 의회는 증언을 요청했고, 11월 1일에는 조사를 명령했다.[1]
1678년 11월 24일, 오츠는 여왕이 국왕을 독살하려 한다고 주장했고, 의회는 오츠를 석방했다. 히스테리는 계속되었고, 가택 수색과 가톨릭 신자 추방이 이어졌다. 가톨릭 은행가 윌리엄 스테일리는 반역 음모 혐의로 처형되었다.[2]
오츠는 화이트홀에 아파트를 배정받고 연금을 받았으며, 암살자들이 은탄환으로 왕을 쏘려 한다는 등의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 토마스 데인저필드와 같은 범죄자들뿐만 아니라 스티븐 더글데일, 로버트 제니슨, 에드워드 터버빌과 같은 사회적 지위가 좋은 사람들도 무고한 희생자를 비난했다.[2]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잉글랜드 전역에 집단 히스테리를 불러일으켰고, 무고한 가톨릭 신자들이 처형되는 결과를 낳았다.
4. 3. 의회의 대응과 정치적 갈등
찰스 2세는 런던으로 돌아와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이 음모가 실제라고 믿고 "가톨릭교도들이 국왕을 암살하고 제거하기 위해 고안하고 수행한 지옥 같은 음모가 있었고 지금도 존재한다"고 선언했다.[1] 1678년 10월 25일, 의회는 증언을 요청했고, 11월 1일에는 조사를 명령했다.앤서니 애슐리 쿠퍼 제1대 샤프츠베리 백작은 반가톨릭 정서를 이용하여 국왕의 동생 제임스를 왕위 계승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요구했고, 이는 배제 위기를 촉발시켰다. 1678년 11월 5일, 사람들은 가이 포크스 대신 교황의 허수아비를 불태웠다.[2] 그해 말, 의회는 두 번째 심사법을 통과시켜 가톨릭 신자들이 양원 의원이 되는 것을 배제했다(이 법은 1829년까지 폐지되지 않았다).
1678년 11월 1일, 하원은 "5명의 교황파 귀족"에 대한 탄핵 절차를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1679년 3월, 양원은 해산이 탄핵에 대한 동의를 무효화하지 않았다는 결정을 내렸다. 탄핵 재판은 1680년 11월 30일까지 연기되었다. 그날 스태퍼드 경에 대한 재판이 먼저 진행되었으며, 그는 12월 7일 사형 선고를 받고 12월 29일 참수되었다.
샤프츠베리 백작 등 반가톨릭 급진파는 의회나 공직에서 가톨릭을 배제하는 심사법 제정을 추진했고, 요크 공작 제임스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는 왕위 배제 법안을 제출했다. 이들 급진파는 나중에 휘그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4. 4. 분통 음모 사건
1679년 분통 음모 사건이라는 모방 범죄가 발생했다. 공황 상태에 빠진 런던에서 장로파 불만 세력들이 제임스의 왕위 계승을 막으려는 음모를 꾸몄고, 음모 증거 서류가 가톨릭 산파 엘리자베스 세리아의 집에 있는 거친 가루를 담는 통에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는 자가 나타났다. 실제로 서류는 발견되었지만, 이를 주장한 토마스 덴저필드의 발언은 의심을 샀다. 덴저필드는 투옥되었고, 분통 음모는 실제 음모인 국왕 암살을 숨기기 위해 퍼뜨린 소문이라는 주장이 나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양치기 소년 보듯 했다.4. 5. 음모의 진정
타이터스 오츠의 주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신뢰성을 잃기 시작했다. 처형된 사람들의 무죄 주장이 대중에게 영향을 미쳤고, 런던 밖에서는 처형된 성직자들이 존경받는 지역 사회 구성원이었기에 그들의 죽음에 대한 대중의 공포가 컸다. 심지어 샤프츠베리 백작도 처형을 후회하며 일부 성직자들의 석방을 조용히 명령했다고 한다. 요크셔에서의 음모 혐의는 프로테스탄트 이웃들이 유죄 판결을 거부하여 실패했고, 웨스트민스터의 대배심은 1681년에 음모 혐의를 기각했다.[2] 재판관들은 점차 공정한 입장을 취하며 가톨릭 신자가 영국을 옛 신앙으로 개종하도록 옹호하거나 수도원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은 반역이 아니라고 판결했다.최소 22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처형된 후, 잉글랜드와 웨일스 대법원장인 윌리엄 스크로그스는 무죄를 선언하기 시작했고, 찰스 2세는 대책을 강구했다. 찰스 2세는 자신이 처형해야 했던 무고한 사람들의 숫자에 분개했다. 1681년 8월 31일, 오츠는 화이트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를 떠나라는 통보를 받았지만, 국왕과 요크 공작을 비난하다 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100000GBP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1685년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오르자 오츠는 위증 혐의로 두 차례 재판을 받았다. 조지 제프리스, 제1대 제프리스 남작이 재판을 주재하여 오츠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오츠는 성직자 복장을 벗고, 런던에서 두 번 채찍질을 당하고, 평생 감옥에 갇히고 매년 형틀에 갇히는 형을 선고받았다. 1689년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즉위하자 사면을 받고 연금을 받았지만, 그의 평판은 회복되지 않았다. 오츠는 1705년에 사망했는데, 한때 그를 영웅이라고 불렀던 대중들에게 완전히 잊혀졌다.
제임스 2세는 다른 정보 제공자들에게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내렸다. 토머스 댄저필드는 오츠와 비슷한 잔혹한 형벌을 받았지만, 형틀에서 돌아오던 중 변호사와의 싸움으로 눈 부상을 입어 사망했고, 변호사는 살인 혐의로 교수형을 당했다.
5. 가톨릭 음모 사건의 영향과 결과
30년 전쟁 (1618–1648) 이후 수십 년 동안 잉글랜드는 가톨릭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30년 전쟁은 가톨릭 합스부르크가가 독일의 개신교를 없애려는 시도로 여겨졌다. 초기 스튜어트 왕가 통치 아래에서는 가톨릭 음모에 대한 두려움이 컸으며, 특히 찰스 1세의 교회 정책은 친가톨릭적으로 보였다. 이는 잉글랜드 내전 (1642–1649)을 일으키는 데 영향을 주었고, 군주제가 폐지되고 개신교는 대부분 용인되었지만 가톨릭은 용인되지 않는 10년간의 청교도 통치가 이어졌다. 1660년 찰스 2세 치하에서 왕정이 복고되면서 국교인 잉글랜드 교회를 제외한 모든 종교적 반대 세력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났다. 가톨릭 신자들은 여전히 대중의 적대감과 법적 차별을 겪었다.[1]
찰스 2세 치세 동안 런던 대역병 (1665)과 런던 대화재 (1666)와 같은 재앙이 발생하면서 반가톨릭 히스테리가 심해졌다. 소문은 가톨릭 신자, 특히 예수회에 의한 방화로 화재의 원인을 돌렸다. 찰스는 개신교 네덜란드에 대항하여 가톨릭 강대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게다가 찰스의 형제이자 추정 상속자인 요크 공작 제임스는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1672년 찰스는 가톨릭 신자와 기타 종교적 반대 세력에 대한 모든 영국의 형벌법을 정지하는 왕립 관용 선언을 발표했다.[1] 이는 잉글랜드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개신교의 두려움을 부채질했고, 1670년대에 의회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예수회는 1678년부터 1681년 사이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이 기간 동안 9명의 예수회원이 처형되었고 12명이 감옥에서 사망했다. 카르멜회, 프란체스코회, 베네딕토회와 같은 다른 가톨릭 수도회들도 피해를 입었다. 존 케년은 많은 유럽 종교 단체들이 영국 가톨릭 공동체의 구호에 의존했기 때문에 대륙 전역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많은 가톨릭 사제들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 사건은 사제뿐만 아니라 일반 영국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1678년 10월 30일, 상인이나 재산 소유자가 아닌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런던과 웨스트민스터를 떠나야 한다는 포고령이 발표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가톨릭 신자들은 벌금, 괴롭힘, 투옥에 시달렸다. 대부분의 반가톨릭 법안은 19세기 초 1829년 로마 가톨릭 구제법에 의해 철폐되었지만, 정치인과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반가톨릭 정서가 훨씬 더 오래 지속되었다.
청교도 혁명의 기억이 생생했던 1670년대 잉글랜드에는 반가톨릭 감정이 깊이 남아 있었다. 국왕 찰스 2세의 왕비 카타리나와 국왕의 동생 제임스가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젠트리와 런던 시민들을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고, 긴장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사건과 혼란에 연루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타이투스 오츠:''' 침례교 집안 출신으로 잉글랜드 국교회 성직자였으나, 스캔들을 일으켜 쫓겨났다. 이후 예수회 사제가 되기 위해 바야돌리드(스페인)와 생토메르(프랑스)에서 공부했으나 예수회에서 거부당했고, 예수회에 대한 적대감을 안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 '''이즈레이얼 텅:''' 국교회 성직자이자 오츠의 후원자. 예수회가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이라는 망상을 품고 있었으며, 가톨릭에 대해 남다른 적대감을 불태웠다.
- '''댄비 백작:''' 재무 장관으로, 사건 당시 국왕의 측근이었던 정치인. 명예 혁명 전후의 정계에서 다양한 요직을 맡았으며, 후에 리즈 공작에 서임되었다.
- '''에드먼드 베리 고드프리:''' 켄트주 출신으로, 옥스퍼드 대학교크라이스트 처치 출신의 젠트리. 사건 당시 런던의 치안 판사를 맡고 있던 엘리트였다.
- '''에드워드 콜먼:''' 요크 공(훗날 제임스 2세)의 비서. 가톨릭 신앙으로, 프랑스 왕실과 친밀한 교류가 있었다. 콜먼이 프랑스와 주고받은 문서가 음모에 신빙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 '''샤프츠베리 백작:''' 사건 당시 휘그당의 주도적인 정치인. 1672년에 샤프츠베리 백작에 서임되었다. 반가톨릭의 거물이었다.
6. 가톨릭 음모 사건의 현대적 의미
(이전 답변에서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수정 또한 원본 소스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원본 소스를 제공해주시면 지침에 맞게 수정해 드리겠습니다.)
참조
[1]
서적
Fraser & Hutton (Pages: 305-308, 284-85)
[2]
웹사이트
Fitzgerald, Sir John
https://www.dib.ie/b[...]
202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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