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퍼드 FC는 1881년에 창단된 잉글랜드의 축구 클럽으로, 1982-83 시즌 1부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다. 1976년부터 1987년까지 엘튼 존이 구단주를 맡았으며, 2012년부터 이탈리아의 포초 가문이 구단을 소유하고 있다. 왓퍼드는 루턴 타운 FC와 라이벌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1984년 FA컵 준우승, 1999년과 2006년 풋볼 리그 챔피언십 플레이오프 우승을 기록했다. 2024년 8월 현재, 톰 클레벌리가 감독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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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풀백으로 클럽에서 선수로 활약했던 헨리 그로버가 왓퍼드 로버스를 창단하면서 클럽의 기원이 시작되었다.[4][5] 로버스는 처음에는 아마추어 선수들로 구성되었으며, 왓퍼드 타운의 여러 장소에서 홈 경기를 치렀다.[5][6] 팀은 처음으로 FA컵에 1886–87 시즌에 참가했으며, 1889년에는 왓퍼드가 처음으로 카운티 컵에서 우승했다. 1891년 "웨스트 허트퍼드셔 클럽 앤 그라운드"의 축구 부문이 되었고, 그 결과 카시오 로드의 구장으로 이동했다. 1893년 왓퍼드 로버스는 "웨스트 허츠"로 이름을 변경했고, 1896년에는 사우스턴 풋볼 리그에 합류했다. 1897–98 시즌 초반에 웨스트 허츠의 운명은 하락하여 관중 수가 200명 미만이었다. 그들은 프로로 전환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했고 그들의 운명은 다시 살아났다. 왓퍼드 세인트 메리는 1894–95년 허트퍼드셔 시니어 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웨스트 허츠가 홈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400명에서 500명의 관중을 끌어모았다. 두 클럽은 합병에 대해 논의했으며, 결국 1898년 4월 15일에 합병되었다. 이는 1898년 5월 7일자 ''왓퍼드 옵저버''에 보도되었다. 두 클럽이 시즌의 남은 경기를 완료하기로 합의했다. 새로운 클럽의 이름은 왓퍼드 FC였다.[6]
오랫동안 활약한 스킬리 윌리엄스는 1914년부터 1926년까지 왓퍼드의 첫 번째 골키퍼였다.1903년 사우스턴 리그 세컨드 디비전으로의 강등 이후, 왓퍼드는 첫 번째 감독을 임명했는데, 그는 전 잉글랜드 국가대표이자 퍼스트 디비전 득점왕이었던 존 굿올이었다. 그는 왓퍼드를 승격으로 이끌었고, 1910년 그가 떠날 때까지 팀을 리그에 유지했다.[110] 재정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왓퍼드는 그의 후임자인 해리 켄트 감독 하에 1914–15 시즌에 사우스턴 리그 타이틀을 획득했다. 왓퍼드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사우스턴 리그가 중단된 후 5년 동안 타이틀을 유지했는데, 1919–20 시즌에 골 득실차로 준우승을 차지한 후, 클럽은 새로운 풋볼 리그 서드 디비전에 합류하기 위해 사우스턴 리그에서 탈퇴했다.[7]
1921–22년부터 풋볼 리그의 3부 리그는 22개 클럽으로 구성된 두 개의 병렬 섹션으로 구성되었으며, 세컨드 디비전으로의 승격을 위해 경쟁하는 동시에 리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경쟁했다.[8] 각 두 디비전의 하위 두 팀은 리그 재선거를 신청해야 하는 재선거 시스템이 있었다.[9] 왓퍼드는 1922년에서 1934년 사이에 매 시즌 상위 6위 안에 들지 못했다. 1926년 켄트가 떠난 후, 그들은 1926–27년에 22개 클럽 중 21위를 기록했지만, 풋볼 리그의 상위 두 디비전에 있는 클럽들의 투표를 통해 만장일치로 리그에 재선출되었다.[10] 반면에, 닐 맥베인과 그 후임자인 빌 핀들레이 감독 하에 팀은 1934–35년에서 1938–39년 사이에 5년 연속 상위 6위 안에 들었고, 1937년에는 풋볼 리그 서드 디비전 사우스 컵에서 우승했다.[11] 풋볼 리그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1939년에 중단되었다.
잉글랜드 축구 리그에서 왓퍼드의 연간 순위 차트 1946년에 축구가 재개되었고, 왓퍼드는 여전히 3부 사우스에 있었다. 1950-51 시즌에 23위로 마감하면서 클럽은 다시 한번 리그 재선거를 신청해야 했지만, 1부와 2부 팀들은 다시 한번 왓퍼드가 리그에 잔류하는 것에 만장일치로 투표했다.[12] 맥베인은 1956년에 복귀했고,[110] 팀은 1958년까지 그 디비전에 머물렀다. 리그는 1958-59 시즌에 4개의 전국 디비전으로 재편되었고, 왓퍼드는 4부에 배치되었다. 론 버지스는 그 시즌 동안 맥베인을 대신했고, 다음 시즌에 버지스는 왓퍼드의 첫 번째 풋볼 리그 승격을 지휘했다. 이 팀에는 시즌에 클럽 기록인 42골을 기록한 클리프 홀튼이 포함되어 있었다.[13] 홀튼은 34골을 더 넣은 후 다음 해에 노샘프턴으로 팔렸고, 이는 서포터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14] 버지스는 빌 맥게리로 교체되었고, 그는 찰리 리브시와 론 손더스와 같은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했으며, 클럽에서의 유일한 시즌에 팀을 3부 리그에서 3위라는 당시 역대 최고 리그 순위로 이끌었다.[15] 18세의 북아일랜드 골키퍼 팻 제닝스도 맥게리 감독 하에서 활약했고, 3부 리그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 데뷔를 했다.[16]
맥게리는 1964년 입스위치로 이적했고, 워킹턴 출신의 선수 겸 감독인 켄 퍼피로 교체되었다.[15] 퍼피는 키스 에디와 데니스 본드와 같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재건했지만, FA컵에서 리버풀과 무승부를 기록하고 1966-67 시즌에 승격에 실패한 후, 본드는 당시 왓퍼드의 최고 이적료인 30000GBP에 토트넘 홋스퍼로 팔렸다.[17] 퍼피의 재건은 1969년 배리 엔디언을 영입하면서 결실을 맺었고, 그의 합류는 크리스마스 이후 무패 행진의 시작을 알렸다.[18] 왓퍼드는 4월에 플리머스 아길과의 홈 경기에서 3부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1년 후 왓퍼드는 FA컵 준결승에 처음 진출하여 1부 팀인 스토크 시티와 리버풀을 꺾었다.[19]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인해 퍼피는 결국 블랙번 로버스로 이적했고, 조지 커비가 그의 뒤를 이었다. 생존을 위해 선수를 팔 수밖에 없었던 왓퍼드는 1972년에 3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팀은 3부에서 계속 고전했고, 감독 교체에도 불구하고 왓퍼드는 1975년에 다시 강등되었다.[110][20]
2. 2. 엘튼 존 시대 (1976-1987)
음악가이자 평생 왓퍼드 팬이었던 엘튼 존은 1976년 클럽 회장이 되었다. 그는 팀을 1부 리그로 이끌겠다는 포부를 밝혔다.[22] 그레이엄 테일러가 감독으로 임명되었을 때, 클럽은 여전히 4부 리그에 있었다.[23] 테일러는 1977-78 왓퍼드 FC 시즌에 승격을 달성했다. 왓퍼드는 풋볼 리그 4부 리그에서 우승하여 승리, 최소 패배, 최다 골 득점 및 최소 실점을 기록했다.[24] 1978-79년 잉글랜드 축구에 풋볼 리그 2부 리그로 승격했고, 로스 젠킨스(1951년생 축구 선수)는 29골로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왓퍼드는 그 다음 두 시즌 동안 18위와 9위로 입지를 다졌고, 1981-82년 잉글랜드 축구에 풋볼 리그 1부 리그로 처음 승격하여 라이벌 루턴 타운 FC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23][25]
왓퍼드는 1982-83 왓퍼드 FC 시즌에 처음 다섯 경기에서 4번의 리그 승리를 거두며 시즌을 시작했다. 7년 만에 클럽은 풋볼 리그 최하위 리그의 최하위에서 최고 리그의 1위까지 올라섰다.[26][27] 왓퍼드는 우승 경쟁을 유지할 수 없었지만 결국 리버풀에 이어 2위를 기록하여 다음 시즌 UEFA 유로파 리그 진출을 확정했다. 루터 블리셋은 시즌이 끝나기 전 이탈리아 세리에 A 팀 AC 밀란으로 100만파운드에 이적하기 전에 잉글랜드 축구 선수권자 목록에서 1부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28] 1984 FA컵 결승에서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에버턴 FC에 패했다.[21] 왓퍼드를 1986-87년 잉글랜드 축구에서 9위로 이끈 후, 테일러는 아스톤 빌라 FC를 감독하기 위해 클럽을 떠났다.[23]
2. 3. 1987-2012
에이디 부스로이드 감독은 첫 번째 정규 시즌에 왓퍼드를 리그 3위로 이끌었고,[103]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 리즈 유나이티드를 3-0으로 꺾고 프리미어 리그 승격을 달성했다.[125] 그러나 팀은 11월까지 프리미어 리그 승리를 기록하지 못했고, 애슐리 영은 2007년 1월에 구단 최고 이적료인 965만파운드에 아스톤 빌라로 이적했다.[126][40] 왓퍼드는 프리미어리그 2006-07 시즌에 단 5승만을 거두며 최하위를 기록했지만,[103]FA컵 준결승에 진출했다.[41] 부스로이드 감독은 계속해서 감독직을 수행했고, 네이선 엘링턴과 같은 선수들에게 당시 구단 최고액인 325만파운드을 포함하여 많은 투자를 했다.[42] 왓퍼드는 2007-08 시즌 초반에 챔피언십에서 여러 점수 차로 선두를 달렸지만, 최종 6위로 마감했다.[103] 부스로이드 감독의 팀은 플레이오프 준결승에서 헐 시티에게 합계 6-1로 패했다.[43] 부스로이드 감독은 2008-09 시즌 시작 3개월 만에 챔피언십 순위 21위로 왓퍼드를 떠났다.[44]
부스로이드 감독의 후임인 브렌든 로저스 감독 아래에서 왓퍼드는 13위를 기록했다. 로저스는 시즌 말에 레딩의 감독으로 떠났고,[45] 이전 임시 감독이었던 말키 매케이가 그의 후임이 되었다.[46] 토미 스미스와 제이 데메릿을 포함한 여러 핵심 선수들의 이탈과 구단의 관리 임박 속에서,[47] 왓퍼드는 2009-10 시즌에 16위, 다음 시즌에 14위를 기록했다.[48] 매케이는 2011년 6월 카디프 시티의 감독으로 떠났고, 그의 후임은 숀 다이치였다.[49] 다이치는 4년 만에 왓퍼드의 최고 리그 순위인 11위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2012년 7월 왓퍼드 감독에서 해임되었다.[50]
나이런 노스워시가 2011-12 시즌에 카디프 시티를 상대로 골을 넣고 세레머니를 하고 있다.
2. 4. 포초 가문 시대 (2012-)
2012년 6월, 로렌스 바시니는 구단을 포초 가문(지노 포초와 그의 아버지)에게 매각했다.[51] 새 구단주들은 잔프랑코 졸라를 감독으로 영입했다.[51] 2012-13 시즌에 왓퍼드는 챔피언십에서 3위를 기록했고, 플레이오프 결승에 진출했으나 연장전에서 크리스탈 팰리스에게 케빈 필립스의 골로 1-0으로 패했다. 다음 시즌, 주세페 사니노가 졸라를 대신하여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고, 팀은 13위로 시즌을 마쳤다. 사니노는 2014-15 시즌 초에 사임했고, "건강상의 이유"로 얼마 지나지 않아 팀을 떠난 오스카 가르시아가 그를 대신했다.
빌리 맥킨레이가 가르시아를 대신했지만, 8일 만에 슬라비샤 요카노비치로 교체되었다. 요카노비치가 팀을 지휘하면서 왓퍼드는 2014-15시즌 챔피언십에서 2위를 차지하며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했다.[52][53]
왓퍼드는 요카노비치와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고, 2015-16 시즌을 앞두고 스페인 출신 키케 산체스 플로레스로 교체했다.[54] 산체스 플로레스 감독 아래에서 왓퍼드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13위를 기록했고,[55] FA컵 준결승에 진출하여 아스날의 3연속 우승을 저지했지만,[56] 크리스탈 팰리스에게 2-1로 패했다. 2016년 5월, 산체스 플로레스와 구단은 계약 해지 조항을 발동했고, 발터 마차리가 3년 계약을 맺고 그를 대신했다.[57]다음 시즌이 끝나는 2017년 5월, 왓퍼드는 17위를 기록했고 마차리는 사임했으며,[58] 마르코 실바가 그를 대신했다.[59] 실바는 에버튼의 관심을 받은 후 약 6개월 만인 2018년 1월에 해고되었고, 구단은 하비 그라시아를 고용했다.[60] 2019년 4월, 왓퍼드는 울버햄튼 원더러스를 상대로 2-0으로 뒤지다 승리하여 역사상 두 번째로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으며, 제라르 데울로페우가 두 골을 넣고 트로이 디니가 94분에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연장전으로 경기를 끌고 갔다.[61]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시티에게 6-0으로 패했는데, 이는 FA컵 결승전 역대 최다 점수차 기록과 동률이었다. 리그에서 왓퍼드는 11위를 기록하며 승점 50점을 획득했는데, 이는 프리미어 리그 시대의 클럽 기록이었다.[62]
2019-20 시즌, 그라시아는 4경기 만에 리그 부진으로 해고되었다. 그가 해고된 지 30분 만에, 전 감독 키케 산체스 플로레스가 다시 임명되었다. 그는 9월에 임명된 이후 단 한 번의 승리만을 거두며 2019년 12월 1일까지 재직했다. 임시 감독이 한 경기를 지휘한 후, 나이젤 피어슨이 감독으로 부임했다. 왓퍼드는 2020년 2월에 리버풀의 44경기 무패 행진을 끝냈지만,[63] 피어슨은 시즌 종료 2경기 전에 해고되었고,[64] 구단은 19위로 강등되었다.[65] 왓퍼드는 2020-21 챔피언십 시즌에서 2위를 기록하며 곧바로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했지만, 다음 시즌에는 다시 19위를 기록하며 챔피언십으로 강등되었다.[66] 2024년 6월 4일, 포초 가문은 구단 자금 조달을 위해 팬 소유 방식으로 구단 지분 10%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67]
왓퍼드 로버스는 19세기 후반 캐시오버리 공원, 비커리지 메도우, 왓퍼드 마켓 스트리트를 포함한 여러 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렀다. 1890년, 팀은 캐시오 로드로 이전하여 32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고, 1922년 현재 왓퍼드의 경기장인 비커리지 로드로 이전했다.[6] 처음에는 벤스킨스 양조장 소유였던 새 경기장을 구단은 2001년까지 임대하다가 소유권을 완전히 매입했다. 그러나 구단의 재정 상황 악화로, 2002년 왓퍼드는 향후 700만파운드에 경기장을 다시 구매할 수 있는 조건으로 600만파운드에 경기장을 매각했다. 왓퍼드는 팬들의 지원과 자금 지원을 받은 "렛츠 바이 백 더 빅(Lets buy back the Vic)" 캠페인을 통해 2004년에 이 옵션을 실행했다.[84]
비커리지 로드는 4면으로 된 경기장으로 21,577명의 수용 능력을 갖추고 있다.[85] 1922년에 건설된 동쪽 스탠드는 2008년 안전상의 이유로 일반 대중에게 폐쇄되었지만, 탈의실과 경기 당일 프레스 구역은 계속 수용했다.[86] 2013년 11월, 동쪽 스탠드는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강철 프레임의 3,500석 규모의 스탠드가 건설되었다. 2014년 박싱 데이에 완전히 개장한 이 스탠드는 구단의 오랜 회장인 엘튼 존의 이름을 따서 엘튼 존 스탠드(The Elton John Stand)로 명명되었다.[87] 1986년에 건설된 그레이엄 테일러 스탠드[88] (이전의 로스 스탠드)는 2층으로 되어 있으며, 경기장 전체 길이를 따라 뻗어 있고, 상부에는 구단의 기업 환대 시설이 있다. 경기장 양쪽 끝에는 비커리지 로드 스탠드가 구단의 가족 구역과 원정 서포터로 나뉘어 있으며, 루커리 스탠드는 홈 서포터만을 위한 곳이다. 두 스탠드 모두 선수 매각 수익으로 1990년대에 건설되었다.[89][90] 2015년 여름, 엘튼 존 스탠드는 700석을 추가로 수용하기 위해 개조되었다.[91] 이 숫자는 북동쪽 코너의 확장을 발표한 후 다음 날 약 1,000석이 추가되면서 수정되었다.[85]
1997년부터 2013년 초까지 왓퍼드는 럭비 유니언 팀인 사라센스 FC와 비커리지 로드를 공유했다.[92][93] 이 경기장은 잉글랜드 U-21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를 개최했으며,[94] 해외 팀 간의 시니어 국제 축구 경기도 개최했다.[95] 엘튼 존은 또한 비커리지 로드를 콘서트 장소로 사용했다. 그는 1974년 이 경기장에서 처음 공연했으며 2005년과 2010년에 구단을 위한 기금 마련 콘서트를 개최하기 위해 다시 방문했다.[96] 이전 행사로는 말과 마차 쇼[5]와 그레이하운드 경주가 있었다.[97]
왓퍼드 훈련장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연합(UCLU) 쉔리 스포츠 구장, 세인트 앨번스, 허트퍼드셔에 위치해 있다.
4. 라이벌 관계
왓퍼드 팬들은 루턴 타운 팬들과 강한 라이벌 관계를 맺고 있다. 두 팀은 1900년부터 1920년 사이에 서던 리그에서 자주 경기를 치렀으며,[98] 1937년까지 풋볼 리그에서도 경쟁을 이어갔다.[106] 1963년까지 루턴은 왓퍼드보다 상위 리그에 있었다.[99]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두 팀의 경기가 뜸했지만, 1969년 세 명의 선수가 퇴장당한 격렬한 경기 이후 라이벌 의식이 더욱 고조되었다.[99] 1981-82 시즌, 두 팀 모두 1부 리그로 승격했고, 루턴이 왓퍼드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25] 1995-96 시즌에는 두 팀 모두 디비전 1에서 강등되었는데, 왓퍼드는 최하위인 루턴보다 한 단계 높은 23위를 기록했다.[100] 1997-98 시즌 왓퍼드가 디비전 2에서 승격한 후, 2005-06 시즌 루턴이 챔피언십으로 승격할 때까지 두 팀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2002-03 시즌 리그 컵 경기에서는 비커리지 로드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101]
2006년 1월 2일, 왓퍼드는 챔피언십에서 케닐워스 로드에서 루턴을 2-1로 꺾었고, 4월 9일에는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왓퍼드가 챔피언십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왓퍼드는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열린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 3-0으로 승리하며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했다.[102]
이후 14시즌 동안(2006-07 시즌부터 2019-20 시즌까지) 왓퍼드는 루턴보다 상위 리그에서 활동했다. 특히 루턴은 2009-10 시즌부터 2014-15 시즌까지 6시즌 동안 풋볼 리그에서 완전히 탈락하기도 했다.[103][104]
두 팀 간의 라이벌 관계는 2020-21 시즌에 다시 시작되었다. 2020년 9월 26일, 왓퍼드는 비커리지 로드에서 열린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했다.[105] 2021년 4월 17일 케닐워스 로드에서 열린 경기에서는 루턴이 1-0으로 승리했다. 2021-22 시즌 왓퍼드가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하면서 라이벌전은 잠시 중단되었으나, 2022-23 시즌 왓퍼드가 다시 강등되고 루턴이 챔피언십에 잔류하면서 재개되었다. 루턴은 2023-24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했지만 한 시즌 만에 챔피언십으로 강등되었다.
현재까지 두 팀 간의 공식 경기 전적은 루턴이 55승, 왓퍼드가 38승, 29무를 기록하고 있다. 왓퍼드는 1997년 이후 매 시즌이 끝날 때마다 더 높은 순위를 기록했으며 (지난 29시즌 중 28시즌, 1996-97 시즌에만 루턴이 왓퍼드보다 높은 리그 순위를 기록했다), 루턴은 두 팀의 역사에서 더 오랜 기간 동안 더 높은 리그에 있었다.
2024-25 시즌에 왓퍼드에서 1군 선수 번호를 부여받았거나 1군 경기에 출전한 U-21 선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번호
국적
포지션
이름
41
ENG|잉글랜드영어
골키퍼
알피 매리엇
44
ENG|잉글랜드영어
공격수
앨버트 이임스
47
ENG|잉글랜드영어
공격수
자비에 메시아-에드워즈
49
ENG|잉글랜드영어
공격수
마이클 아두-포쿠
50
SWE|스웨덴sv
공격수
조나단 맥컬리
51
WAL|웨일스영어
공격수
조지 애보트
52
ENG|잉글랜드영어
공격수
레오 라미레즈-에스페인
53
AFG|아프가니스탄ps
공격수
아민 나비자다
54
ENG|잉글랜드영어
공격수
토비 아데예모
56
ENG|잉글랜드영어
공격수
제임스 클라리지
57
ENG|잉글랜드영어
공격수
젠센 라이트
6. 역대 감독
그레이엄 테일러는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왓퍼드를 4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이끌었다.
왓퍼드 FC는 1903년까지 위원회에서 선수단을 선발했지만, 그해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였던 존 굿올이 선수 겸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굿올은 왓퍼드를 1903-04 시즌 사우스 리그 1부 리그로 승격시켰고, 1910년 은퇴할 때까지 팀을 이끌었다. 이후 해리 켄트가 감독을 맡아 1926년까지 재정 관리에 힘썼다.[109] 켄트의 뒤를 이은 프레드 파그남, 닐 맥베인, 빌 핀들리는 모두 왓퍼드에서 선수로 뛰었던 경험이 있으며, 핀들리는 1937년에 3부 사우스 컵 우승을 이끌었다.
1947년 핀들리가 떠난 후 1956년까지 6명의 감독이 왓퍼드를 거쳐갔고, 그 중 2명만이 전 왓퍼드 선수였다.[110] 맥베인이 1956년부터 3년간 다시 감독직을 수행한 후, 론 버지스는 1959-60 시즌에 왓퍼드를 4부에서 승격시켰다. 빌 맥게리는 1963-64 시즌 왓퍼드를 3부 3위로 이끌었고, 이는 당시 클럽의 풋볼 리그 최고 성적이었다. 켄 퍼피는 1969년 왓퍼드를 3부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1970년에는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FA컵 준결승에 진출시켰다. 그러나 퍼피가 1971년에 떠난 후, 왓퍼드는 조지 커비와 마이크 킨 감독 아래에서 강등을 겪으며 쇠퇴기에 접어들었다.[110]
그레이엄 테일러는 1977년 왓퍼드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1978년 3부 리그, 1979년 2부 리그, 1982년에는 왓퍼드 역사상 처음으로 1부 리그로 승격시켰다. 1983년 1부 리그에서 2위를 기록한 후, 왓퍼드는 1984 FA컵 결승전에 진출하고 1983-84 시즌 유럽 대회에 참가했다. 테일러가 1987년 팀을 떠난 후, 데이브 바셋, 스티브 해리슨, 콜린 리, 스티브 페리먼, 글렌 로더, 케니 재킷 등 6명의 감독을 거치며 왓퍼드는 1987년 1부 리그 9위에서 1997년 3부 리그 13위까지 하락했다. 테일러는 1997년 감독으로 복귀하여 팀을 연속 승격시켰지만, 1999–2000 시즌 프리미어 리그 강등을 막지는 못했다.
테일러가 2001년 은퇴한 후, 왓퍼드는 12명의 감독을 거쳤다. 에이디 부스로이드는 2006년 왓퍼드를 다시 프리미어 리그로 이끌었으나 2007년에 강등되었고, 2008년에 부스로이드는 팀을 떠났다.[111] 2008-09 시즌에는 브렌던 로저스가 감독을 맡았고, 2009-10 시즌에는 말키 매케이가 감독직을 승계했다. 매케이가 카디프 시티 FC로 자리를 옮긴 2010-11 시즌 이후에는 숀 다이치가 감독을 맡았다.
2012년 왓퍼드가 포초 가문에 인수된 후, 잔프랑코 졸라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48] 졸라는 2012-13 시즌 왓퍼드를 챔피언십 3위로 이끌었지만, 2013년 12월 사임했다. 이후 베페 산니노, 오스카 가르시아, 빌리 맥킨레이가 차례로 감독직을 맡았다. 2014-15 시즌 슬라비샤 요카노비치 감독은 팀을 2위로 이끌며 8년 만에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시켰다.
프리미어 리그 재승격 후 키케 산체스 플로레스, 발테르 마차리, 마르쿠 실바, 하비 그라시아가 차례로 감독을 맡았다. 2019년부터 클럽은 잦은 감독 교체로 악명을 얻었다. 2019-20 시즌 초반 부진으로 하비 그라시아 감독이 해임되고[133]키케 산체스 플로레스가 복귀했지만, 단 1승만을 거둔 채 다시 해임되었다.[134] 2019년 12월 나이젤 피어슨이 시즌 세 번째 감독으로 취임했지만,[134] 2020년 7월 해임되었다.[120]
2020-21 시즌에는 블라디미르 이비치와 시스코 무뇨스 두 명의 감독이 팀을 이끌었고, 무뇨스는 왓퍼드를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2021-22 프리미어 리그 시즌 도중 무뇨스는 해임되고 클라우디오 라니에리가 부임했으나, 2022년 1월까지 팀을 이끌었다. 로이 호지슨이 2022년 2월부터 시즌 말까지 감독을 맡았지만, 왓퍼드는 19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프리미어 리그에서 강등되었다.
2022–23 시즌에는 롭 에드워즈가 새로운 감독으로 발표되었지만, 11경기 만에 해고되었다.[121]슬라벤 빌리치가 그의 후임으로 발표되었으나,[122] 2023년 3월 해고되었고, 크리스 와일더가 시즌 말까지 단기 계약으로 팀을 맡았다.[123] 2023년 5월, 발레리앙 이스마엘이 2023-24 챔피언십 시즌을 앞두고 감독으로 임명되었다.[124]
1946년 축구가 재개된 후, 왓퍼드는 3부 사우스에 잔류했다. 1950-51 시즌에 23위로 마감하며 재선거를 신청해야 했지만, 1부와 2부 팀들은 왓퍼드의 리그 잔류에 만장일치로 투표했다.[12] 1956년 맥베인이 복귀했고,[110] 팀은 1958년까지 그 디비전에 머물렀다. 1958-59 시즌에 리그는 4개의 전국 디비전으로 재편되었고, 왓퍼드는 4부에 배치되었다. 론 버지스는 그 시즌 동안 맥베인을 대신했고, 다음 시즌에 왓퍼드의 첫 번째 풋볼 리그 승격을 지휘했다. 이 팀에는 시즌에 클럽 기록인 42골을 기록한 클리프 홀튼이 포함되어 있었다.[13] 홀튼은 34골을 더 넣은 후 다음 해에 노샘프턴으로 팔렸는데, 이는 서포터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14] 버지스는 빌 맥게리로 교체되었고, 그는 찰리 리브시와 론 손더스와 같은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했으며, 클럽에서의 유일한 시즌에 팀을 3부 리그에서 3위라는 당시 역대 최고 리그 순위로 이끌었다.[15] 18세의 북아일랜드 골키퍼 팻 제닝스도 맥게리 감독 하에서 활약했고, 3부 리그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 데뷔를 했다.[16]
맥게리는 1964년 입스위치로 이적했고, 워킹턴 출신의 선수 겸 감독인 켄 퍼피로 교체되었다.[15] 퍼피는 키스 에디와 데니스 본드와 같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재건했지만, FA컵에서 리버풀과 무승부를 기록하고 1966-67 시즌에 승격에 실패한 후, 본드는 당시 왓퍼드의 최고 이적료인 30000GBP에 토트넘 홋스퍼로 팔렸다.[17] 퍼피의 재건은 1969년 배리 엔디언을 영입하면서 결실을 맺었고, 그의 합류는 크리스마스 이후 무패 행진의 시작을 알렸다.[18] 왓퍼드는 4월에 플리머스 아길과의 홈 경기에서 3부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1년 후 왓퍼드는 FA컵 준결승에 처음 진출하여 1부 팀인 스토크 시티와 리버풀을 꺾었다.[19]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인해 퍼피는 결국 블랙번 로버스로 이적했고, 조지 커비가 그의 뒤를 이었다. 생존을 위해 선수를 팔 수밖에 없었던 왓퍼드는 1972년에 3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팀은 3부에서 계속 고전했고, 감독 교체에도 불구하고 왓퍼드는 1975년에 다시 강등되었다.[110][20]
음악가이자 평생 왓퍼드 팬이었던 엘튼 존은 1976년 클럽 회장이 되었다. 그는 팀을 1부 리그로 이끌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1977년 4월 키비의 후임인 마이크 킨을 해고했다.[22] 그레이엄 테일러가 킨의 후임으로 임명되었을 때, 클럽은 여전히 4부 리그에 있었다.[23] 테일러는 1977-78 왓퍼드 FC 시즌에 승격을 달성했다. 왓퍼드는 풋볼 리그 4부 리그에서 우승하여 승리, 최소 패배, 최다 골 득점 및 최소 실점을 기록했다.[24] 1978-79년 잉글랜드 축구에 풋볼 리그 2부 리그로 승격했고, 로스 젠킨스(1951년생 축구 선수)는 29골로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왓퍼드는 그 다음 두 시즌 동안 18위와 9위로 입지를 다졌고, 1981-82년 잉글랜드 축구에 풋볼 리그 1부 리그로 처음 승격하여 라이벌 루턴 타운 FC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23][25]
왓퍼드는 1982-83 왓퍼드 FC 시즌에 처음 다섯 경기에서 4번의 리그 승리를 거두며 시즌을 시작했다. 7년 만에 클럽은 풋볼 리그 최하위 리그의 최하위에서 최고 리그의 1위까지 올라섰다.[26][27] 왓퍼드는 우승 경쟁을 유지할 수 없었지만 결국 리버풀에 이어 2위를 기록하여 다음 시즌 UEFA 유로파 리그 진출을 확정했다. 루터 블리셋은 시즌이 끝나기 전 이탈리아 세리에 A 팀 AC 밀란으로 100만파운드에 이적하기 전에 잉글랜드 축구 선수권자 목록에서 1부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28] 1984 FA컵 결승에서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에버턴 FC에 패했다.[21] 왓퍼드를 1986-87년 잉글랜드 축구에서 9위로 이끈 후, 테일러는 아스톤 빌라 FC를 감독하기 위해 클럽을 떠났다.[23]
테일러가 떠난 후, 윔블던 FC의 감독인 데이브 바셋이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고, 잉글랜드 윙어 존 반스는 리버풀로 팔렸다. 바셋은 리그 첫 23경기에서 4승을 거둔 후 1988년 1월에 해고되었다. 왓퍼드는 그의 퇴임 당시 1부 리그 최하위였고, 스티브 해리슨(축구 선수)은 시즌 말 강등을 막을 수 없었다. 1988-89년 잉글랜드 축구에서 해리슨의 왓퍼드는 2부 리그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한 후 1부 리그로 복귀하는 데 실패했다. 18세 이하 팀은 연장전 끝에 맨체스터 시티 FC를 2-1로 꺾고 FA 유스컵에서 우승했다.[29] 훗날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데이비드 제임스(1970년생 축구 선수)가 호네츠의 골키퍼였다. 해리슨은 1990년에 떠났고, 그 후 몇 년 동안 왓퍼드가 승격에 가장 근접했던 것은 1994-95년 잉글랜드 축구 시즌에 1부 리그에서 7위를 기록한 것이었다.[103] 그러나 다음 시즌인 글렌 로더가 감독으로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한 왓퍼드는 고전했다. 1996년 2월 그레이엄 테일러가 임시 감독으로 복귀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럽은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110][23]
강등 이후, 테일러는 축구 디렉터가 되었고, 전 왓퍼드 미드필더인 케니 재킷이 감독을 맡았다. 1996-97년 잉글랜드 축구에서 2부 리그에서 중위권을 기록한 후, 재킷은 코치로 강등되었다. 테일러는 감독으로 복귀하여 1997-98년 잉글랜드 축구에서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그의 지휘 아래 왓퍼드의 두 번째 리그 우승이었다. 1998-99 왓퍼드 FC 시즌에는 1999 풋볼 리그 1부 리그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 볼턴 원더러스 FC를 2-0으로 꺾고 두 시즌 연속 승격했다. 왓퍼드의 첫 프리미어십 시즌은 리버풀을 상대로 초반 승리를 거두며 시작했지만, 왓퍼드의 경기력은 곧 시들해졌고, 결국 최하위를 기록하며 강등되었다. 그레이엄 테일러는 2000-01 왓퍼드 FC 시즌이 끝날 때 은퇴했고,[23]잔루카 비알리로 교체되었다.[31] 비알리의 재임 기간 동안 클럽의 임금은 400만파운드 증가했고, 클럽은 2001-02 시즌에 14위를 기록했다. 비알리는 임금 문제로 클럽 이사회와 다툼을 벌인 후 시즌이 끝나고 해고되었다.[32][33] 그는 지난 여름 비알리의 2군 감독으로 클럽에 합류했던 레이 레빙턴으로 교체되었다.[34]
왓퍼드의 열악한 재정 상황은 2002-03 시즌 ITV Digital의 붕괴 이후 드러났다.[35][36] 구단은 행정 처분을 받을 위기에 처했지만, 선수단과 직원의 12% 임금 유예 합의가 구단의 현금 흐름에 도움이 되었고, FA컵 준결승 진출로 중요한 수입을 올렸다.[37][38] 재정적 제약으로 인해 그해 여름 많은 수의 선수들이 방출되었다. 2003-04 시즌에 전력을 보강한 후, 다음 시즌은 구단이 9월 말까지 챔피언십 상위권에 위치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다. 그러나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구단은 강등권으로 떨어졌다. 리그 컵 준결승에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왓퍼드의 리그 경기력은 개선되지 않았고, 2005년 3월에 레밍턴이 해고되었다.[39] 그의 후임은 에이디 부스로이드였고,[44] 그는 구단을 챔피언십 잔류로 이끌었다.[103]
보스로이드 감독의 첫 번째 정규 시즌에 왓퍼드는 리그 3위를 기록했고,[103]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 리즈 유나이티드를 3-0으로 꺾고 프리미어 리그 승격을 달성했다.[125] 그러나 팀은 11월까지 프리미어 리그 승리를 기록하지 못했고, 애슐리 영은 2007년 1월에 구단 최고 이적료인 965만파운드에 아스톤 빌라로 이적했다.[126][40] 왓퍼드는 리그 경기에서 단 5승만을 거두며 최하위를 기록했지만,[103]FA컵 준결승에 진출했다.[41] 보스로이드 감독은 계속해서 감독직을 수행했고, 당시 구단 최고액인 325만파운드을 포함하여 네이선 엘링턴과 같은 선수들에게 많은 투자를 했다.[42] 왓퍼드는 2007-08 시즌 초반에 챔피언십에서 여러 점수 차로 선두를 달렸지만, 최종 6위로 마감했다;[103] 보스로이드 감독의 팀은 플레이오프 준결승에서 헐 시티에게 합계 6-1로 패했다.[43] 보스로이드 감독은 2008-09 시즌 시작 3개월 만에 챔피언십 순위 21위로 왓퍼드를 떠났다.[44]
보스로이드 감독의 후임인 브렌든 로저스 감독 아래에서 왓퍼드는 13위를 기록했다. 로저스는 시즌 말에 레딩의 감독으로 떠났고;[45] 이전 임시 감독이었던 말키 매케이가 그의 후임이 되었다.[46] 토미 스미스와 제이 데메릿을 포함한 여러 핵심 선수들의 이탈과 구단의 관리 임박 속에서,[47] 왓퍼드는 2009-10 시즌에 16위, 다음 시즌에 14위를 기록했다.[48] 매케이는 2011년 6월 카디프 시티의 감독으로 떠났고, 그의 후임은 숀 다이치였다.[49] 다이치는 4년 만에 왓퍼드의 최고 리그 순위인 11위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2012년 7월 왓퍼드 감독에서 해임되었다.[50]
2012년 6월, 로렌스 바시니는 구단을 포초 가문(지노 포초와 그의 아버지)에게 매각하는 절차를 완료했다. 다이치의 경질 이후, 새 구단주들은 전 이탈리아 국가대표 선수 잔프랑코 졸라를 감독으로 영입했다.[51] 2012-13 시즌에 왓퍼드는 챔피언십에서 3위를 기록했고, 플레이오프 결승에 진출했으나 연장전에서 크리스탈 팰리스에게 케빈 필립스의 골로 1-0으로 패했다. 다음 시즌, 주세페 사니노가 졸라를 대신하여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고, 팀은 13위로 시즌을 마쳤다. 사니노는 2014-15 시즌 초에 사임했고, "건강상의 이유"로 얼마 지나지 않아 팀을 떠난 오스카 가르시아가 그를 대신했다.
빌리 맥킨레이가 그를 대신했지만, 그가 지휘하는 동안 6경기 중 4점을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8일 만에 슬라비샤 요카노비치로 교체되었다. 요카노비치가 팀을 지휘하면서 왓퍼드는 챔피언십에서 2위를 차지했고, 최종일 AFC 본머스에게 밀려 승격되었다.[52][53]
왓퍼드는 요카노비치와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고, 2015-16 시즌을 앞두고 스페인 출신 키케 산체스 플로레스로 교체되었다.[54] 산체스 플로레스 감독 아래에서 왓퍼드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13위를 기록했고,[55] FA컵 준결승에 진출하여 아스날의 3연속 우승을 저지했지만,[56] 크리스탈 팰리스에게 2-1로 패했다. 2016년 5월 시즌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산체스 플로레스와 구단은 계약 해지 조항을 발동했고, 이탈리아 출신 코치 발터 마차리가 3년 계약을 맺고 그를 대신했다.[57] 다음 시즌이 끝나는 2017년 5월, 왓퍼드는 17위를 기록했고 마차리는 사임했으며,[58] 마르코 실바가 그를 대신했다.[59] 새 코치는 에버튼의 관심을 받은 후 약 6개월 만인 2018년 1월에 해고되었고, 구단은 하비 그라시아를 고용했다.[60] 2019년 4월, 왓퍼드는 울버햄튼 원더러스를 상대로 2-0으로 뒤지다 승리하여 역사상 두 번째로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으며, 제라르 데울로페우가 두 골을 넣고 트로이 디니가 94분에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연장전으로 경기를 끌고 갔다.[61] 그들은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만나 6-0으로 패했는데, 이는 FA컵 결승전 역대 최다 점수차 기록과 동률을 이루는 기록이었다. 리그에서 왓퍼드는 11위를 기록하며 승점 50점을 획득했는데, 이는 프리미어 리그 시대의 클럽 기록이었다.[62]
2019-20 시즌, 그라시아는 4경기 만에 리그 부진으로 해고되었다. 그가 해고된 지 30분 만에, 전 감독 키케 산체스 플로레스가 다시 임명되었다. 그는 9월에 임명된 이후 단 한 번의 승리만을 거두며 2019년 12월 1일까지 재직했다. 임시 감독이 한 경기를 지휘한 후, 나이젤 피어슨이 감독으로 부임했다. 왓퍼드는 2020년 2월에 리버풀의 44경기 무패 행진을 끝냈지만,[63] 피어슨은 시즌 종료 2경기 전에 해고되었고,[64] 구단은 강등되어 20개 팀 중 19위를 기록했다.[65] 왓퍼드는 2020-21 챔피언십 시즌에서 2위를 기록하며 곧바로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했지만, 다음 시즌에는 다시 20개 팀 중 19위를 기록하며 챔피언십으로 강등되었다.[66] 2024년 6월 4일, 포초 가문은 구단 자금 조달을 위해 팬 소유 방식으로 구단 지분 10%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67]
루터 블리셋은 1976년부터 1992년까지 모든 대회를 통틀어 503경기에 출전하여 왓퍼드 최다 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같은 기간 동안 풋볼 리그에서 415경기에 출전한 기록 또한 구단 기록이다. 블리셋은 왓퍼드에서 통산 186골, 리그에서 148골을 기록하며 득점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한 시즌 최다 리그 득점 기록은 1959–60 시즌에 42골을 넣은 클리프 홀튼이 가지고 있다. 프로 수준에서 한 선수가 한 경기에서 기록한 최고 골 수는 1903년 9월 위컴 원더러스를 상대로 해리 바튼이 기록한 6골이다.[126]
왓퍼드의 역대 최고 점수차 승리는 1900년에 있었는데, 당시 팀은 메이든헤드를 상대로 서던 리그 2부에서 11–0으로 승리했다.[126] 팀의 풋볼 리그 최고 점수차 승리는 8–0이며, 이 기록은 1924년 뉴포트 카운티와의 3부 리그 사우스 경기에서 처음 나왔고, 1982년 선덜랜드와의 1부 리그 경기에서 다시 한 번 나왔다. 왓퍼드가 참여한 풋볼 리그 경기에서 가장 많은 골이 나온 경기는 1934년, 1937년, 2003년에 각각 스윈던 타운, 토키 유나이티드, 번리를 상대로 왓퍼드가 7–4로 승리한 경기에서 기록된 11골이다.[127] 구단의 최고 홈 관중 수는 1969년 2월 3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FA컵 4라운드 경기에서 기록된 34,099명이다. 홈 리그 최다 관중 기록은 같은 해 8월 퀸즈 파크 레인저스를 상대로 기록된 27,968명이다.[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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