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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기 (공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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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기(王基)는 위(魏)나라의 장수로, 고구려와의 전쟁, 왜(倭)와의 외교, 촉한(蜀漢) 정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238년 공손연 토벌 이후 현도군 태수가 되었고, 관구검을 도와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실패하기도 했다. 이후 대방 태수로 임명되어 야마타이국과 구노국의 화해를 중재했다. 263년에는 등애의 부장으로 촉 정벌에 참여하여 면죽관을 함락시켰으며, 익주 각 군의 태수로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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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기 (공석)
왕기 (王頎)
생몰년미상 ~ 263년
자(字)숙재(叔載)
출생지동래군
사망지낙양
소속조위
관직옹주자사(雍州刺史)
광록대부(光祿大夫)
봉작만세정후(萬歲亭侯)
가족왕혼(王渾) (아들)
생애
주요 활동촉한 정벌 종군
기타
관련 인물사마소
등애
제갈탄
종회
감택

2. 고구려와의 전쟁

238년 공손연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사마의에게 토벌된 후, 왕기는 궁준(弓遵), 유무(劉茂) 등과 함께 고구려 영토를 침범하여 현도군 태수가 되었다.[2]

242년 관구검을 도와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비류수(沸流水) 양구(梁口)에서 동천왕에게 패하였다. 이후 동부여에서 군량을 지원받아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험한 지형 때문에 실패했다.[2]

244년 관구검과 함께 반격하여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함락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관구검의 명으로 추격대장이 되어 동천왕을 추격했다.[2]

246년 고구려 장수 유유의 계책으로 왕기가 죽임을 당하고 패배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으나,[2] 왕기는 그 이후에도 등장하므로 다른 인물로 추정된다.

2. 1. 동방 원정 (238년 ~ 246년)

238년, 공손연이 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사마의에게 토벌당한 이후, 궁준(弓遵)과 유무(劉茂) 등과 함께 고구려의 영토를 침범하여 현도군 태수가 되었다.[2]

242년, 관구검을 도와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비류수(沸流水) 양구(梁口)에서 동천왕에게 격파당하였고, 동부여에 찾아가 군량을 제공받았다. 이후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지형이 험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2]

244년, 관구검과 함께 반격하여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함락하고 귀환하였다. 다음 해, 관구검의 명으로 추격대장이 되어 동천왕을 추격했다.[2]

246년, 고구려의 충신 유유의 계책으로 죽임을 당하고 패배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유유가 살해한 인물이 왕기라고 하는데, 왕기는 그 후에도 등장하므로 다른 인물이라고 보아야 한다.)[2]

247년, 대방군 태수로서 야마타이국히미코가 구누국(狗奴国)과 불화하여 전쟁을 하고 있었기에 화해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정시 연간에 현토 태수가 되었다. 정시 6년(245년), 관구검의 명을 받아 고구려우위거를 쫓아 옥저를 지나 1000리에 이르러 숙신의 남쪽에 도달하여, 돌에 그 공적을 새겼다.[2]

정시 8년(247년), 왕기는 대방 태수에 부임했다. 새조연사 장정 등을 왜국에 파견하여 야마타이국과 구노국의 화해를 촉구했다.[3]

2. 2. 유유의 계책과 왕기의 죽음?

246년, 고구려의 충신 유유가 계책을 써서 왕기를 죽이고 고구려군이 승리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왕기는 그 후에도 계속 등장하므로, 유유가 죽인 인물은 왕기가 아닌 다른 인물로 보아야 한다.[2]

3. 왜와의 외교 관계

247년, 왕기는 대방군 태수로 야마타이국히미코가 구누국(구노국)과 불화하여 전쟁을 하고 있었기에 장정 등을 왜국에 파견하여 화해를 권유했다.[3]

3. 1. 야마타이국과 구노국 분쟁 중재 (247년)

정시 8년(247년), 왕기는 대방군 태수에 부임했다. 야마타이국히미코가 구노국(구노국)과 불화하여 전쟁을 하고 있었기에, 새조연사 장정 등을 왜국에 파견하여 그들과 화해할 것을 권유했다.[3]

4. 촉한 정벌 (263년)

263년, 촉한 정벌에 참전하여 등애의 명을 받아 답중의 강유 군영을 공격하고[4], 강천에서 강유를 추격하여 격파했다.[5]

4. 1. 면죽관 함락

263년, 등애의 부장으로 촉 정벌전에 참전하여 견홍과 함께 면죽관(綿竹關)을 함락시켰다. 등애가 성도에 입성하였을 때, 견홍 등 등애의 다른 장수들과 함께 익주의 각 군 태수로 봉해졌다.[2]

4. 2. 익주 각 군 태수 임명

263년, 등애의 부장으로 촉 정벌에 참전하여 견홍과 함께 면죽관(綿竹關)을 함락시켰으며, 등애가 성도에 입성하였을 때, 견홍 등 등애의 다른 장수들과 함께 익주 각 군의 태수로 봉해졌다.[2]

5. 기타

정시 연간에 현토 태수가 되었다. 정시 6년(245년) 관구검의 명을 받아 고구려 우위거를 쫓아 옥저를 지나 1000리에 이르러 숙신의 남쪽에 도달하여, 돌에 그 공적을 새겼다[2]

정시 8년(247년), 왕기는 대방 태수에 부임했다. 새조연사 장정 등을 왜국에 파견하여 야마타이국과 구노국의 화해를 촉구했다[3]

경원 연간에 왕기는 천수 태수가 되었다. 경원 4년(263년), 촉한에 대한 정벌에 종군하여 등애의 명을 받아 답중의 강유 군영을 공격했다[4]。강천에서 강유를 추격하여 격파했다[5]

의 무제 때 여남 태수가 되었다.

손자로 왕미가 있었다[6]

6. 《삼국지연의》에서의 왕기

263년, 촉 정벌전에 등애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견홍과 함께 면죽관을 함락시켰으며, 등애가 성도로 입성하였을 때, 견홍과 더불어 등애의 장수로서 익주의 각 군 태수로 임명되었다.

참조

[1] 서적 三国志 魏書毌丘倹伝裴注所引『世語』 1993
[2] 서적 三国志 魏書毌丘倹伝 1993
[3] 서적 三国志 魏書東夷伝倭人条 1993
[4] 서적 三国志 魏書鄧艾伝 1993
[5] 서적 晋書 文帝紀
[6] 서적 晋書 王弥伝
[7] 서적 위진세어 魏晉世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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