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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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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채옹은 후한 시대의 학자, 서예가, 문인으로, 현재의 허난성 카이펑 시 기현 주변에서 태어났다. 그는 박학다식하여 호광에게 사사받았으며, 특히 사장, 산술, 천문, 음률에 능했다. 영제 시기에는 육경의 글자를 교정하는 사업에 참여하여 희평 석경을 편찬했으며, 동탁 집권 시기에는 관직에 나아가 동탁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동탁 사후 왕윤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저술과 업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희평 석경, 동관한기, 독단, 여훈 등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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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옹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채옹의 그림, Sancai Tuhui에 수록됨
Sancai Tuhui에 실린 채옹의 삽화
관직좌중랑장
임기 시작189년
임기 종료192년
군주헌제
승상동탁
출생132년
출생지기현, 개봉시, 허난성
사망192년 6월경 (60세)
사망지시안시, 산시성
아버지채릉
친척채희 (할아버지)
채지 (삼촌)
양호 (손자)
경헌황후 (손녀)
채습 (손자)
'최소 두 명의 다른 손자'
자녀채염
'최소 한 명의 다른 딸'
'최소 한 명의 아들'
직업천문학자, 서예가, 역사가, 수학자, 음악가, 정치가, 작가
자 (字)백해 (Bojie)
작위고양향후 (Gaoyang Xiang Hou)
인물 정보 (蔡邕)
병음Cài Yōng
로마자 표기 (웨이드-자일스)Ts'ai4 Yung1
한국어 발음 (간화자)Tsay Iong
광둥어Coi3 Jung1
예일 음역Choi Yūng
민난어 발음 (POJ)Tshuà Iong

2. 생애

채옹은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나 태부 호광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글, 수학, 천문,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능통했으며, 특히 효심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정성껏 간호하고 묘 옆에 초막을 지어 3년간 시묘살이를 한 일화는 널리 알려졌다. 숙부, 종제와 함께 살면서 재산을 나누지 않고 의리를 지켜 주위 사람들에게 칭송받았다.[3]

환제 때에는 고금 연주 실력으로 중상시 등의 추천을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고문 연구에 몰두했다.

영제 시기인 175년, 채옹은 오경의 문자를 바로잡는 사업에 참여하여 고문, 전서, 예서 세 가지 서체로 비석(희평 석경)을 쓰는 중책을 맡았다. 이 비석은 낙양 태학 문 밖에 세워졌는데, 채옹의 글씨를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같은 해, 채옹은 인재 등용을 제한하는 삼호법(三互法)에 대해 비판적인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 178년에는 환관의 전횡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조절 등의 미움을 사 숙부 채질과 함께 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다. 여강의 도움으로 삭방으로 귀양 가는 것으로 감형되었으나, 양구의 암살 시도 등 계속되는 위협에 시달렸다. 179년 여강의 상소로 복권이 논의되었으나 무산되었고, 이후 사면령으로 귀양살이는 끝났지만 오원 태수 왕지의 모함으로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189년, 하진 사후 권력을 잡은 동탁은 채옹의 명성을 듣고 그를 등용했다. 채옹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동탁의 협박에 못 이겨 벼슬길에 올랐다. 동탁은 채옹을 파격적으로 대우하여 3일 만에 시중으로 임명하고, 좌중랑장, 고양향후(高陽鄕侯)에 봉했다.[3] 채옹은 동탁에게 헌제 옹립에 반대하는 노식을 변호하고, 화제 이후 황제들의 묘호를 폐지할 것을 건의하는 등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년에는 동탁을 태공망에 비유하며 상보(尙父)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중단시키기도 했다.[9]

192년, 왕윤이 동탁을 주살했을 때 채옹은 동탁의 죽음을 슬퍼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에 분노한 왕윤은 채옹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 했다. 채옹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한나라 역사 저술을 계속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왕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손서태위 마일제 등 많은 신하들이 채옹을 구명하려 했지만, 왕윤은 끝내 채옹을 처형했다.[10]

2. 1. 초기 생애와 학문

채옹은 현재의 카이펑 시 기현 주변에 위치한 허난성 진류군 위현()의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채씨 가문은 3대 동안 영토가 분할되지 않아 명성이 높았다. 아버지 채능(蔡棱중국어)이 사망하자, 채옹은 숙부 채질(蔡質중국어)과 함께 살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3년간 극진히 간호했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채옹은 어머니의 묘소를 잘 조성한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채옹은 한나라 황실 조정의 고위 관료 중 한 명인 호광() 밑에서 작문, 수학, 천문학, 율관 및 음악을 공부했다.[3]

젊은 시절부터 박학다식하여 태부 호광에게 사사했다. 사장(辞章)·산술·천문을 좋아했으며, 음률에 정통했다.[3]

효심이 돈독한 인품으로, 어머니가 병환에 시달리자 3년 동안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스스로 간호했으며, 어머니가 죽자 묘 옆에 초막을 지었다. 그의 행동은 예에 맞았기에, 토끼가 방 곁에 무리지어 친해졌고, 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 멀고 가까운 사람들이 이를 신기하게 여겨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쳐다보았다. 또한 숙부와 종제와 함께 살며 3대가 재산을 나누어 살았기에, 향당(동포들)으로부터 의리를 높이 샀다.[3]

2. 2. 환제 시기

환제 시대에 채옹은 고금 연주 솜씨로 중상시 등의 추천을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고향에 돌아가 고문을 연구했다.[3] 160년대 초, 채옹은 환제의 북과 고금 연주 실력으로 인해 원로 환관들에게 다시 추천되었으나, 수도로 가는 길에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2. 3. 영제 시기

175년 3월, 영제는 유학자들에게 5경의 문자를 바로잡고 그 내용을 당시 의랑(議郞)이었던 채옹에게 고문(古文), 전서, 예서 세 가지 글씨로 옮겨 쓰게 한 다음 석공에게 그 글씨를 새긴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비석이 처음 세워졌을 때 채옹의 글씨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했다고 한다.

이 해 채옹은 관직에 있는 인척끼리 서로 결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삼호법(三互法)[7] 때문에 유주와 기주에서 관리가 없어도 쉽게 등용하지 못하자, 규제에 구애받지 말고 인재를 뽑을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8년 7월, 푸른 무지개가 궁궐에 나타나자 조정에서는 불길하게 여기고 신하들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대책을 말하게 했다. 이때 채옹은 환관인 중상시(中常侍) 정황(程璜)과 태후궁의 곽옥(霍玉) 등을 물리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다른 환관 조절이 채옹의 글을 보고 정황에게 내용을 알려 주었다. 이 때문에 앙심을 품은 정황은 채옹을 모함하여 내쫓을 궁리를 했다.

마침 채옹의 숙부인 위위 채질(蔡質)이 정황의 양녀와 결혼한 양구(陽球)와 사이가 나빴기에 정황은 두 사람을 한꺼번에 모함하여 옥에 갇히게 하고, 계속 영제에게 아뢰어 처형하려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중상시 여강(呂强)이 채옹의 구명을 위해 애썼기 때문에 머리를 깎인 채 삭방에 귀양 가는 것으로 그쳤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양구는 자객을 보내고 현지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채옹을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자객과 관리가 모두 거절하는 바람에 무사할 수 있었다. 한편 여강은 179년에 상소를 올려 채옹을 다시 등용할 것을 청했으나 영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사면령이 내려져 귀양살이를 끝냈으나 오원 태수 왕지(王智)가 채옹이 조정을 비방했다고 모함하는 바람에 동탁이 부를 때까지 계속 거주지를 옮기며 도망 다녀야 했다.

2. 4. 동탁 집권 시기

189년, 하진이 죽은 후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동탁은 채옹의 명성을 듣고 조정으로 불렀다. 채옹은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으나, 화가 난 동탁이 멸족시키겠다고 협박하여 어쩔 수 없이 관직에 나아갔다.[10] 동탁은 채옹을 극진히 대접하면서 3일 동안 시중(侍中)으로 임명하는등 수차례 고속 승진을 시켰다. 이후 좌중랑장이 되고 고양향후(高陽鄕侯)에 봉해졌다.[3]

동탁은 소제를 폐하고 진류왕(헌제)을 세울 뜻을 내비쳤다. 노식이 면전에서 반대하자 동탁은 노식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갓 등용되어 동탁의 신임을 받던 채옹이 노식의 서찰을 받고 곧바로 조정으로 달려와 간언한 덕분에 노식은 벼슬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그쳤다.

190년, 채옹은 화제묘호인 목종(穆宗), 안제의 묘호 공종(恭宗), 순제의 묘호 경종(敬宗), 환제의 묘호 위종(威宗)을 모두 없애자고 건의하였으며, 받아들여져 그대로 시행되었다.[8] 191년, 동탁의 부하들이 동탁을 태공망 여상에 비유하며 상보(尙父)로 추대하려 하자 채옹은 반동탁 연합군이 진압되고 낙양으로 환도한 후에 실행할 것을 건의하여 중단되었다.[9]

2. 5. 죽음

192년 왕윤동탁을 죽였을 때, 왕윤과 같은 자리에 있던 채옹은 동탁의 죽음에 탄식하였다. 이를 노엽게 여긴 왕윤은 채옹을 죽이려 했다. 채옹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한나라의 역사를 저술할 수 있기를 원했고, 왕윤의 고집을 경계한 상서복야 사손서태위 마일제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하들도 채옹을 구제하려 했으나, 왕윤은 듣지 않고 끝내 채옹을 죽게 했다.[10]

3. 주요 업적

채옹은 죽은 뒤 10년 동안 중국이 혼란스러워 많은 작품을 잃었다. 그러나 제자인 왕찬(王粲)에게 자신의 서적 대부분을 맡겼고, 그의 작품들은 왕찬이 수집하여 ''후한서(後漢書)''와 같은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의 문예는 시, 부, 비, 뢰, 명, 찬, 연주, 잠, 조, 논의에 미치며, 축문, 장표, 서기 등 대략 104편이 세상에 전해졌다고 『후한서』 채옹전은 기록한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의례에 관한 《독단(獨斷)》
  • 약리학에 관한 《채옹본초(蔡邕本草)》
  • 여성에 대한 조언을 담은 《여훈(女訓)》
  • 고금(古琴) 연주에 관한 《금조(琴操)》
  • 전통적인 전서체(篆書體)의 측면에 관한 《전세(篆勢)》

3. 1. 희평 석경

희평 4년(175년), 채옹은 육경의 글자를 교정하도록 주청했다. 당시 유학 경전은 오랜 세월이 흘러 바른 글이 사라지고 오류가 많은 글이 유포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에 영제의 조칙이 내려져, 채옹이 직접 쓴 글씨로 낙양 태학 문 밖에 46매, 총 20만 자에 이르는 석비가 세워졌다. 이것이 희평 석경으로, 현재에도 잔석이 보관되어 있다.[3]

3. 2. 동관한기 편찬 참여

170년, 교현에게 초빙되어 사도부에 들어갔다. 채옹은 교현에게 존경받았으며, 하평현장을 거쳐 낭중, 의랑으로 승진했다.[3]

당시 유학 경전은 오랜 세월로 인해 글자에 오류가 많았다. 175년, 채옹은 오관중랑장 당계전, 양사, 마일제, 의랑 장순, 한설, 태사령 단양 등과 함께 육경의 글자를 교정할 것을 건의했다. 영제의 허락으로 채옹이 직접 글씨를 써 낙양 태학 문 밖에 석비 46매(총 20만 자)를 세웠다. 이것이 희평 석경이며, 현재 잔석이 남아있다.[3]

채옹이 수집한 한나라 역사 사료는 이각의 난으로 많이 유실되었다. 노식, 마일제 등과 함께 동관에서 진행하던 『'''한기'''』 편찬은 전란과 관계자들의 사망으로 중단되었으나, 건안 연간에 양표가 『동관한기』로 완성했다.[3]

3. 3. 저술 활동

채옹은 사망 후 10년간 이어진 중국의 혼란으로 인해 많은 작품을 유실했다. 그러나 제자인 왕찬(王粲)에게 자신의 서적 대부분을 맡겼고, 그의 작품들은 왕찬의 수집을 통해 ''후한서(後漢書)''와 같은 편집물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희평석경(熹平石經)》 편집
  • 《동관한기(東觀漢記)》 편찬
  • 의례에 관한 《독단(獨斷)》
  • 약리학에 관한 《채옹본초(蔡邕本草)》
  • 여성에 대한 조언을 담은 《여훈(女訓)》
  • 고금(古琴) 연주에 관한 《금조(琴操)》
  • 전통적인 전서체(篆書體)의 측면에 관한 《전세(篆勢)》


그의 문예는 시, 부, 비, 뢰, 명, 찬, 연주, 잠, 조, 논의에 미치며, 『독단』, 『권학』, 『석회』, 『서악』, 『여훈』, 『전예』와 같은 저작이 알려져 있다. 그 외에 축문, 장표, 서기 등 대략 104편이 세상에 전해졌다고 『후한서』 채옹전은 기록한다. 채옹이 수집한 한나라 역사의 사료는 이각의 난으로 인해 많이 유실되었다. 원래 동관에서 노식, 마일제 등과 함께 진행되던 『'''한기'''』의 찬보(撰補)는 전란과 관계자들의 사망 등으로 인해 중단되었지만, 건안 연간에 양표의 손으로 마지막 편찬이 이루어져, 『동관한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후한 말의 문화인으로 유명한 완우, 왕찬, 로숙 등은 그의 문하생이다.

4. 평가

채옹은 후한 말의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로,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인품과 학문적 업적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효성이 지극하고 의로운 인물로 칭송받았다. 어머니를 정성으로 간호하고, 숙부 및 종제와 재산을 나누어 함께 사는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3]

박학다식하여 경전뿐만 아니라 사장(辞章), 산술, 천문, 음률에도 정통했다. 특히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희평 석경을 제작하여 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정치적으로는 환관의 전횡을 비판하고, 동탁에게 중용되었으나 그의 독선적인 정치를 경계하는 등 곧은 절개를 지켰다. 비록 왕윤에게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충절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문학적으로는 시, 부, 비문 등 다양한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 『동관한기』 편찬에 참여했다. 그의 문하생으로는 완우, 왕찬, 로숙 등 후한 말의 저명한 문인들이 있다.

4. 1. 후대의 평가

채옹은 젊은 시절부터 박학다식하여 태부 호광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사장(辞章)·산술·천문에 능통했으며, 음률에도 정통했다.[3] 효성이 지극하고, 숙부, 종제와 함께 3대가 재산을 나누어 살아 동포들로부터 의리를 높이 평가받았다.

환제 때 재능을 인정받아 조정에 불려갈 뻔했으나, 병을 핑계로 은둔하며 고문을 연구했다. 건녕 3년(170년) 교현에게 초빙되어 사도부에서 일했으며, 이후 낭중, 의랑으로 승진했다.

당시 유학 경전에 오류가 많다고 여겨, 희평 4년(175년) 육경의 글자를 교정할 것을 건의하여 영제의 허락을 받았다. 채옹이 직접 쓴 글씨로 낙양 태학 문 밖에 석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희평 석경이다.

광화 원년(178년) 환관의 전횡을 비판하는 봉사를 올렸다가 조절에게 미움을 사 삭방군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양주로 망명하여 12년간 체류했다.

중평 6년(189년) 동탁에게 초빙되어 3일[3] 만에 시어사, 지서어사, 상서로 승진했다. 초평 원년(190년) 좌중랑장을 맡아 동탁의 왕광 토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헌제의 장안 천도 후 고양향후에 봉해졌다.

초평 3년(192년) 동탁이 왕윤에게 주살되자 슬퍼하다가 왕윤에게 "동탁은 나라의 큰 적"이라며 "사사로운 만남을 그리워하고 대절을 잊었는가"라는 질책을 받고 정위에 감금되었다. 채옹은 사죄하고 형벌을 받는 대신 한서 편찬을 계속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태위 마일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왕윤을 설득했지만, 왕윤은 "무제가 사마천을 죽이지 않아 비방의 서가 유행하게 되었다"며[4] 채옹을 옥사시켰다.

채옹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으며, 북해국의 정현은 "한나라의 일을 누구와 더불어 바로잡아야 하는가"라고 탄식했다. 진류현에서는 채옹의 초상을 그려 칭송했다.

채옹은 시, 부, 비, 뢰, 명, 찬, 연주, 잠, 조, 논의 등 다양한 문예 작품을 남겼으며, 『독단』, 『권학』, 『석회』, 『서악』, 『여훈』, 『전예』 등의 저작이 전해진다. 후한서 채옹전에는 채옹의 글이 대략 104편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채옹이 수집한 한나라 역사 사료는 이각의 난으로 많이 유실되었으나, 노식, 마일제 등과 함께 편찬한 『'''한기'''』는 건안 연간에 양표에 의해 『동관한기』로 완성되었다.

후한 말의 대표적인 문화인으로, 완우, 왕찬, 로숙 등이 그의 문하생이다.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할아버지채희
아버지채능
삼촌채질
채염
이름 미상, 양도에게 시집감
아들이름 미상
손자채습
외손녀양회유
외손자양호


6. 기타

채옹은 14세기 고명의 희곡 비파기의 주인공이다.

참조

[1]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2]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192-05-22
[3] 서적 北堂書鈔
[4] 서적 삼국지 (歴史書) 裴松之
[5] 서적 後漢書
[6] 간행물 채중랑집
[7] 문서 자기나 자기 인척의 본적이 있는 지방의 관리가 되지 못하게 하는 법. 예를 들면 진류 사람인 채옹은 진류태수가 될 수 없다.
[8] 서적 자치통감
[9] 서적 삼국지
[10] 서적 후한서 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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