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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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는 1373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5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형 안드로니코스 4세의 반란으로 후계자가 되었으며, 1379년 오스만 제국의 도움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았지만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그는 서유럽 순방을 통해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앙카라 전투 이후 일시적인 안정을 얻었지만, 결국 오스만 제국의 압박 속에서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마누일 2세는 뛰어난 문인이자 외교관이었으며, 다양한 저술 활동과 문화 교류에 기여했다. 그는 1425년 수도사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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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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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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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 |
본명 | 마누엘 팔레올로고스 (Μανουὴλ Παλαιολόγος) |
칭호 | 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 |
출생일 | 1350년 6월 27일 |
출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동로마 제국 (현재의 튀르키예 이스탄불) |
사망일 | 1425년 7월 21일 |
사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동로마 제국 |
종교 | 동방 정교회 |
통치 | |
즉위 | 대관식 |
대관일 | 1373년 9월 25일 |
재위 기간 | 1391년 2월 16일 – 1425년 7월 21일 |
선임자 |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
후임자 |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
섭정 | 요안니스 7세 팔레올로고스 (1403–1408년, 테살로니키) |
섭정 유형 | 공동 황제 |
가문 | |
왕가 | 팔레올로고스 가문 |
아버지 |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
어머니 | 헬레나 칸타쿠제네 |
배우자 | 헬레나 드라가시 |
자녀 |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레올로고스 데메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
2. 생애
동로마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와 황후 헬레나 칸타쿠제네의 둘째 아들이다.[1] 1373년 형 안드로니코스 4세 팔레올로고스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마누일은 아버지의 공동 황제이자 후계자로 임명되었다.[2]
이후 형 안드로니코스 4세 및 그의 아들 요안니스 7세와의 내전에 휘말려 여러 차례 왕위를 빼앗겼다가 되찾는 혼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의 도움을 받기도 했으나, 그 대가로 술탄 바예지드 1세의 궁정에 명예 인질로 보내져 오스만의 필라델피아 정복전에 강제로 참여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391년 아버지 요안니스 5세가 사망하자 오스만 궁정에서 탈출하여 단독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즉위 직후부터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군사적 압박에 직면했으며, 특히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서유럽 연합군이 오스만에게 대패하면서 제국의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마누일 2세는 1399년부터 약 3년간 직접 서유럽 순방에 나서 군사 지원을 호소했으나, 각국 군주들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군사 원조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티무르에게 참패하고 술탄 바예지드 1세가 사로잡히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마누일 2세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오스만 제국의 술탄 계승 분쟁(오스만 제국의 공위 시대)에 개입했고, 자신이 지지한 메흐메트 1세가 최종적으로 술탄이 되도록 도왔다. 그 결과 1403년 오스만 제국과 우호적인 평화 조약을 맺어 테살로니카 등 일부 영토를 회복하고 조공 부담에서도 벗어나, 제국은 메흐메트 1세가 사망하는 1421년까지 잠시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1421년 무라트 2세가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하자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마누일 2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요안니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오스만 제국의 계승 문제에 다시 개입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결국 1422년 오스만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고 1423년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침공하는 등 다시 위기를 맞았고, 마누일 2세는 오스만 제국에 다시 조공을 바치고 신하의 예를 갖추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맺어야 했다.
말년에는 뇌졸중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수도원으로 물러나 Ματθαῖος|마타이오스el라는 이름의 수도사로 지냈다. 1425년 7월 21일, 7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6] 그의 사후 제국은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고, 불과 28년 만인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과 함께 멸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통치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는 황제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와 그의 아내 헬레나 칸타쿠제네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데스포테스'' 칭호를 받았으며, 1365년과 1370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을 위한 지원을 구하기 위해 서유럽으로 여행했다. 1369년부터는 테살로니키의 총독으로 일했다.1373년, 그의 형 안드로니코스 4세 팔레올로고스가 아버지 요안니스 5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마누일은 아버지의 후계자이자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그는 1373년 9월 25일에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제국의 내분은 계속되었다. 1376년부터 1379년까지 마누일과 그의 아버지는 안드로니코스 4세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왕위를 빼앗겼다. 이때 오스만 제국의 도움을 받아 1379년에야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으나, 그 대가로 술탄에게 조공을 바치고 군사 원조를 제공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1390년에는 안드로니코스 4세의 아들 요안니스 7세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마누일은 이번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움을 받아 조카를 물리치고 아버지의 복위를 도왔다.
요안니스 5세가 복위한 후, 마누일은 오스만 제국 술탄 바예지드 1세의 궁정(프루사, 현재의 부르사)에 명예 인질로 보내졌다. 그는 오스만 궁정에 머무는 동안, 아나톨리아에 남아있던 마지막 비잔티움 영토인 필라델피아를 점령하는 오스만 원정에 강제로 참여해야만 했다.
1391년 2월, 아버지 요안니스 5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마누일은 오스만 궁정에서 탈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단독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바예지드 1세는 즉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으며, 1396년에는 오스만 군대가 테살리아와 펠로폰네소스반도까지 침공했다. 같은 해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서유럽 기독교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에 대패하면서 제국의 운명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마누일 2세는 1399년 서유럽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직접 긴 여정에 나섰다. 그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들을 시작으로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 왕국 등을 순방하며 각지에서 환대를 받았다. 특히 파리에서는 2년 동안 머물며 동로마와 서유럽 간의 문화 교류를 촉진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군사 원조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가 유럽에 머무는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오스만의 압박은 더욱 거세져, 1402년에는 수도를 오스만에게 넘겨주자는 논의까지 나올 정도였다.

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그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중앙아시아의 정복자 티무르가 소아시아를 침공한 것이다. 이에 맞서 싸운 바예지드 1세는 1402년 7월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 군대에게 참패하고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 소식을 파리에서 들은 마누일 2세는 즉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바예지드 1세의 부재로 시작된 오스만 제국의 공위 시대 동안, 마누일 2세는 술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들의 다툼에 개입하여 자신이 지지한 메메드 1세가 최종적으로 술탄 자리에 오르도록 도왔다.
그 결과, 1403년 마누일 2세는 새로운 술탄 메메드 1세와 우호적인 평화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이 조약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테살로니카(현재 그리스의 테살로니키)를 되찾았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조공 의무에서도 벗어났다. 이후 메메드 1세가 사망하는 1421년까지 약 20년간 비잔티움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서 벗어나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누릴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마누일 2세는 국사(國事)에서 한발 물러나 종교와 문학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러나 1421년 메메드 1세가 사망하고 무라트 2세가 술탄이 되자 상황은 다시 급변했다. 제국 궁정 내에서는 마누일 2세의 장남이자 공동 황제인 요안니스 8세를 중심으로 반(反)오스만 강경파가 세력을 얻었다. 마누일 2세는 실권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사실상 은퇴 상태에 들어갔다. 요안니스 8세는 오스만 제국 내부에 구금되어 있던 무스타파라는 인물(스스로 바예지드 1세의 아들이라 주장)을 내세워 무라트 2세에 대항하는 술탄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1422년 무스타파는 무라트 2세에게 패배하고 처형당했다. 분노한 무라트 2세는 곧바로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여 1422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고, 1423년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유린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지 않았으나, 위기 상황에 다시 나선 마누일 2세는 오스만 측과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다시 오스만 술탄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해야 했다.
2. 2. 오스만 제국의 압박과 서유럽 순방
1391년 2월 아버지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가 사망하자, 당시 오스만 제국 술탄 바예지드 1세의 부르사 궁정에서 사실상 포로로 지내던 마누일은 탈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제위를 계승했다.[3] 그는 조카 요안니스 7세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하여 수도를 확보했다. 초기에는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가 비교적 평화로웠으나, 1393년 불가리아에서 발생한 대규모 봉기를 진압한 바예지드 1세는 기독교 봉신들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의심에 사로잡혔다. 그는 모든 기독교 봉신들을 세레스로 소집하여 학살하려 했으나 계획을 철회했다.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마누일 2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유화책만으로는 제국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서방 세계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술탄 바예지드 1세는 1394년부터 1402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한편, 헝가리의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가 이끈 반(反)오스만 십자군 원정은 1396년 9월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참패했다. 마누일 2세는 이 십자군을 지원하기 위해 함선 10척을 보냈으나 역부족이었다. 계속되는 위협 속에서 마누일 2세는 1397년 10월, 삼촌 테오도로스 칸타쿠제노스 등을 프랑스의 샤를 6세에게 사절로 보내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샤를 6세는 사절단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1398년 4월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게 했으나, 당시 잉글랜드 내부 문제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프랑스 원수 장 2세 르 메잉르가 1,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원하러 왔고, 그는 마누일 2세에게 직접 서유럽 국가들을 방문하여 지원을 호소할 것을 권유했다. 5년간의 포위 공격으로 지친 마누일 2세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카에게 도시 방어를 맡기고 1399년 12월 10일, 40명의 수행원과 함께 서유럽 순방길에 올랐다.
마누일 2세는 먼저 모레아로 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동생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에게 맡긴 뒤, 1400년 4월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이후 파두아, 비첸차, 파비아를 거쳐 밀라노에서 마누엘 크리솔로라스를 만났고, 1400년 6월 3일에는 파리 근교 샤랑통에서 프랑스의 샤를 6세를 만났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그는 유럽의 다른 군주들과도 계속 접촉했다. 샤를 6세는 마누일 2세를 극진히 환대하며 루브르 성에 숙소를 마련해주었다.

1400년 12월, 마누일 2세는 잉글랜드로 건너가 헨리 4세를 만났다. 그는 12월 21일 블랙히스에서 헨리 4세의 영접을 받았으며, 영국을 방문한 유일한 비잔티움 황제가 되었다. 그는 1401년 2월 중순까지 엘섬 궁전에 머물렀고, 그를 위한 기사 결투가 열리기도 했다.[4] 헨리 4세는 마누일 2세에게 2000GBP를 지원했으며, 마누일은 라틴어로 작성된 영수증에 자신의 황금칙서로 이를 확인해주었다. 당시 영국 기록들은 동방의 황제가 이교도에 맞서 도움을 구하기 위해 먼 서쪽 섬나라까지 찾아온 것에 대한 연민과 존경을 표하고 있으며, 마누일 2세 자신도 친구 크리솔로라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헨리 4세의 환대와 인품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했다.
마누일 2세는 서유럽 각국에서 많은 환영과 약속을 받았지만, 실질적인 군사 지원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성물을 여러 군주와 교황에게 보내며 추가 지원을 호소했으나, 결국 1402년 11월 프랑스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그가 아직 서유럽에 머물던 중, 1402년 7월 티무르가 이끄는 군대가 소아시아를 침공하여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를 격파하고 술탄 바예지드 1세를 사로잡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마누일 2세는 1403년 6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오스만 제국은 바예지드 1세의 아들들 사이에 벌어진 술탄 계승 전쟁으로 혼란에 빠졌고, 마누일 2세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이 지지한 메흐메트 1세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도록 도왔다. 그 결과, 메흐메트 1세와의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1403년 평화 조약을 맺어 테살로니카(현재 그리스의 테살로니키)를 돌려받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조공 납부 의무도 면제받았다. 이후 메흐메트 1세가 사망하는 1421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1421년 무라트 2세가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하자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제국 내에서는 장남 요안니스 8세를 중심으로 한 반(反)오스만 강경파가 세력을 얻었고, 마누일 2세는 요안니스 8세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실권을 넘겨주었다. 요안니스 8세는 무라트 2세에 대항하여 오스만 제국 내에 망명해 있던 무스타파라는 인물(스스로 바예지드 1세의 아들이라 주장)을 술탄으로 지지하며 내전에 개입했다. 하지만 무스타파는 1422년 무라트 2세에게 패배하여 처형당했고, 분노한 무라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다시 포위 공격했으며 1423년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유린했다. 결국 은퇴했던 마누일 2세가 다시 나서 오스만 측과 협상하여 강화를 맺었으나, 그 내용은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술탄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굴욕적인 것이었다. 이로써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2. 3. 앙카라 전투와 제국의 일시적 안정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 군대가 티무르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제국은 뜻밖의 기회를 맞이했다. 바예지드 1세가 포로로 잡히고 그의 아들들이 왕위 계승을 놓고 다투는 오스만 제국 공위 시대가 시작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고 있던 조카 요한 7세는 이 기회를 활용했다. 요한 7세는 1403년 갈리폴리 조약을 통해 마르마라해의 유럽 연안 대부분과 테살로니키를 동로마 제국으로 반환받는 데 성공했다. 또한 이 조약으로 메셈브리아(1403~1453), 바르나(1403~1415), 그리고 위스퀴다르(Üsküdar, Scutari)에서 이즈미트(İzmit, Nicomedia)까지의 마르마라 해안(1403~1421)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되찾았다.서유럽에서 지원을 얻기 위해 순방 중이던 마누일 2세는 앙카라 전투 소식을 듣고 1403년 수도로 돌아왔다. 그의 조카 요한 7세는 순순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통치권을 넘겨주었고, 그 보상으로 새로 회복한 테살로니키의 총독직을 받았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일시적으로 사라졌지만, 마누일 2세는 안심하지 않았다. 그는 1407년부터 1408년까지 사절 마누일 크리솔로라스를 파견하여 베네치아, 제노아, 파리, 아라곤 등 서유럽 국가들과 계속 접촉하며 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연합을 모색했다.

1414년 여름, 마누일 2세는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출발하여 타소스에 들러 제국의 권위를 재확립한 뒤, 아들 안드로니코스가 총독으로 있는 테살로니키로 향했다. 이듬해인 1415년 봄에는 펠로폰네소스로 이동하여 모레아 전제공국의 방어를 강화하는 데 힘썼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막기 위해 코린토스 지협을 가로지르는 헥사밀리온(Hexamilion, 6마일 성벽) 건설을 직접 감독했다.
마누일 2세는 오스만 제국 공위 시대에 개입하여 자신이 지지한 메흐메트 1세가 최종적으로 술탄이 되도록 도왔다. 이 덕분에 메흐메트 1세의 재위 기간(1413~1421) 동안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제국은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1421년 메흐메트 1세가 사망하고 무라트 2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제국 궁정 내에서는 장남 요한네스를 중심으로 한 반(反)오스만 강경파가 목소리를 높였고, 마누일 2세는 요한네스를 공동 황제로 삼아 실권을 넘겨주었다. 요한네스는 오스만 제국의 왕위 계승 문제에 다시 개입하여, 바예지드 1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무스타파를 지원했으나, 1422년 무스타파는 무라트 2세에게 패배하고 처형당했다. 분노한 무라트 2세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다(142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수도가 포위되자 은퇴했던 마누일 2세가 다시 전면에 나섰다. 그는 오스만 측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강화를 이끌어내려 노력했다. 또한 마지막으로 서유럽의 지원을 얻기 위해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왕을 찾아갔으나, 지기스문트는 니코폴리스 전투에서의 패배 경험과 후스 전쟁 등으로 인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다.[5] 결국 마누일 2세는 빈손으로 돌아왔고, 1424년 제국은 오스만 제국과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 조약으로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술탄에게 매년 조공을 바치고 신하의 예를 갖추기로 약속했으며, 제국의 짧았던 안정기는 막을 내렸다.
2. 4. 말년과 죽음
티무르가 소아시아를 침공하여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세가 패배하고 포로가 되자, 마누일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계승권 다툼(오스만 제국의 공위 시대)에 개입하였다. 그는 자신이 지지한 메흐메트 1세를 술탄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그 대가로 1403년 메흐메트 1세와 우호적인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을 통해 동로마 제국은 테살로니카(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를 되찾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조공 의무도 면제받았다. 이후 메흐메트 1세가 사망한 1421년까지 제국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으며, 마누일 2세는 국정에서 한발 물러나 종교와 문학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그러나 1421년 메흐메트 1세가 죽고 무라트 2세가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마누일 2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를 중심으로 한 궁정 내 강경파는 오스만 제국에 대해 다시 적대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마누일 2세는 아들에게 실권을 넘겨주고 사실상 은퇴 상태에 들어갔다. 요한네스 8세는 동로마 제국 내에 망명해 있던 무스타파라는 인물(바예지드 1세의 아들이라고 주장)을 내세워 무라트 2세에게 대항하려 했으나, 1422년 무스타파는 무라트 2세에게 패배하고 처형당했다.
분노한 무라트 2세는 곧바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1422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으며, 1423년에는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침공하여 유린했다. 수도는 함락되지 않았지만, 위기 속에서 은퇴했던 마누일 2세가 다시 전면에 나섰다. 그는 오스만 측과의 오랜 관계를 바탕으로 간신히 강화 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조약은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술탄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고 다시 조공을 바쳐야 한다는 굴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제국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다.
마누일 2세는 1422년 10월 1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일부가 마비되었으나, 정신은 온전하여 이후 3년간 더 제국을 다스렸다. 말년에는 수도원으로 들어가 마테오(Ματθαῖος)라는 이름의 수도사로 지냈다. 그는 아들 요한네스 8세의 강경 노선이 제국의 미래에 위험을 초래할 것을 염려하여 장관 게오르기오스 스프란체스에게 "지금 제국에는 황제가 아니라 관리자가 필요하다"고 토로하기도 했으나, 임종 시에는 아들에게 "앞으로는 네 맘대로 해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1425년 7월 21일, 마누일 2세는 7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6] 그의 사후 불과 28년 만인 1453년,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외교 및 군사 정책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의 통치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은 끊임없이 확장하는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압박에 직면해 있었다. 그의 외교 및 군사 정책은 이러한 절박한 상황 속에서 제국의 생존을 꾀하고 오스만의 위협에 맞서는 데 집중되었다.
초기에 마누일 2세는 아버지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시대부터 이어진 오스만 제국에 대한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는 제위 계승 과정에서 오스만의 도움을 받았고, 그 대가로 조공을 바치고 술탄 바예지드 1세의 궁정에서 신하로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오스만의 압박이 거세지고 술탄의 위협이 노골화되자(1393년 세레스 회합 사건 등), 마누일 2세는 유화책만으로는 제국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후 그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한 외교적, 군사적 노력을 강화했다.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1394-1402) 등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에 직면하자, 마누일 2세는 서유럽 국가들에 도움을 요청하는 외교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직접 서유럽 주요국을 방문하는 대규모 순방(1399-1403)에 나서 각국 군주들에게 군사 지원을 호소했다. 이 순방은 동서 문화 교류에는 기여했으나, 각국의 내부 사정으로 인해 실질적인 군사 원조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티무르에게 패배하고 내전에 휩싸이자, 동로마 제국은 잠시 숨 돌릴 틈을 얻었다. 마누일 2세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갈리폴리 조약을 통해 테살로니카 등 일부 영토를 회복하고 오스만과의 관계에서 일시적인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그는 오스만 내전에서 승리한 메흐메트 1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제국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제국의 방어력 강화에도 힘썼다. 특히 1415년에는 펠로폰네소스반도로 가서 모레아 전제공국의 방어를 위해 코린토스 지협을 가로지르는 헥사밀리온(6마일 성벽) 건설을 직접 감독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근본적인 군사적 열세는 극복하기 어려웠다. 메흐메트 1세 사후, 아들 요안니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오스만 제위 계승 문제에 섣불리 개입하면서 무라트 2세의 분노를 샀고, 이는 142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와 1423년 펠로폰네소스 유린으로 이어졌다. 마누일 2세는 다시 한번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빈손으로 돌아왔고,[5] 결국 1424년 오스만 제국에 다시 조공을 바치는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결론적으로 마누일 2세의 외교 및 군사 정책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제국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으나, 압도적인 오스만 제국의 힘 앞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3. 1. 서유럽과의 관계
1396년 투르크가 테살리아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침공하자, 마누일 2세는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서유럽 순방길에 올랐다. 비록 이 방문은 비잔티움 제국과 서유럽 간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절실했던 군사 원조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본격적인 순방은 1399년 12월 10일에 시작되었다. 그는 먼저 모레아로 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동생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에게 맡겼다. 1400년 4월 베네치아에 도착한 후, 파도바, 비첸차, 파비아를 거쳐 밀라노에 이르렀다. 밀라노에서는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공작과 학자 마누엘 크리솔로라스를 만났다. 이후 프랑스로 이동하여 1400년 6월 3일 샤랑통에서 프랑스의 샤를 6세 국왕을 만났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에도 마누일 2세는 다른 유럽 군주들과 계속 접촉하며 지원을 호소했다.
프랑스 방문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샤를 6세는 마누일 2세를 극진히 대접했다.
"그러자 왕은 모자를 들었고 황제는 제국의 모자(그는 모자를 쓰지 않았다)를 들었고, 둘 다 가장 존경스러운 방식으로 서로에게 인사했습니다. 왕은 황제를 환영한 후, 옆에 나란히 타고 파리로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왕족들이 뒤따랐고, 왕궁에서 연회가 끝나자 루브르 성에 마련된 숙소로 황제를 호위했습니다."
1400년 12월, 마누일 2세는 잉글랜드로 건너가 헨리 4세 국왕을 만났다. 헨리 4세는 12월 21일 블랙히스에서 그를 맞이했다. 마누일 2세는 잉글랜드를 방문한 유일한 비잔티움 황제로 기록되었으며, 1401년 2월 중순까지 엘섬 궁전에 머물렀다. 그의 체류 기간 동안 기사 결투가 열리기도 했다.[4] 헨리 4세는 마누일 2세에게 2000GBP를 지원금으로 제공했고, 마누일 2세는 라틴어로 작성된 영수증에 자신의 황금칙서로 날인하여 이를 확인했다.
당시 기록가 토마스 월싱엄은 마누일 2세의 방문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동시에 콘스탄티노플 황제가 터키에 대항하여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습니다. 왕은 위엄 있는 수행원과 함께 성 토마스 축일(12월 21일)에 블랙히스에서 그를 만나 그러한 위대한 영웅에게 적절한 환영을 해주고 런던으로 호위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여러 날 동안 그를 왕실처럼 대접하며 황제의 체류 비용을 지불하고, 웅장한 선물로 그러한 고귀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을 보였습니다."
아담 오브 어스크 역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사도 성 토마스 축일(12월 21일)에 그리스 황제가 사라센에 대항하여 도움을 구하기 위해 런던의 잉글랜드 왕을 방문하여 그에게 영예로운 환영을 받았으며, 두 달 동안 왕에게 막대한 비용을 들여 그와 함께 머물렀고, 떠날 때 선물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 황제와 그의 사람들은 항상 탭버드처럼 잘린 긴 로브를 똑같이 입고 다녔는데, 그 색깔은 모두 흰색이었고, 영국인들이 입는 유행과 다양한 옷차림을 매우 싫어하며, 그것은 마음의 불변과 변덕을 의미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면도날이 그의 사제들의 머리나 수염에 닿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종교 의식에 매우 독실하여 기사나 성직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찬송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모국어로 노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먼 동방의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가 불신자들의 힘에 밀려 서쪽의 먼 섬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던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생각했습니다."
마누일 2세 자신도 친구 마누엘 크리솔로라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의 환대에 대해 언급했지만, 실질적인 군사 지원 약속에 대한 언급보다는 헨리 4세 개인에 대한 칭찬과 환대에 대한 감사를 주로 표현했다.
"이 편지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훌륭하고 놀라운 약속을 담은 수많은 편지들이 전 세계에서 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현재 머물고 있는 통치자, 즉 두 번째 문명화된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영국 왕으로, 그는 너무나 많은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종류의 미덕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의 명성은 그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감탄을 얻는 반면, 그를 한 번 본 사람들에게 그는 명성이 실제로 여신이 아니라는 것을 훌륭하게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실제 경험이 보여주는 것만큼 위대한 사람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통치자는 그의 지위 때문에 가장 저명하며, 그의 지능 때문에 또한 가장 저명합니다. 그의 힘은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그의 이해는 그에게 친구를 얻게 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모든 면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헌신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성격에 따라 그는 이중적인 폭풍, 즉 계절의 폭풍과 운명의 폭풍 속에서 우리를 위한 사실상의 피난처를 만들었고, 우리는 그 사람 자신과 그의 성격 속에서 피난처를 찾았습니다. 그의 대화는 매우 매력적입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그는 우리를 최대한 존경하고 우리를 덜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한 모든 일에 극단에 이르렀지만,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고 믿는 것에 거의 부끄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그 사람이 얼마나 관대한지를 보여줍니다."
마누일 2세는 상당한 지원과 자금을 기대하며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는 교황 보니파시오 9세, 반교황 베네딕토 13세,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 아라곤의 마르틴 1세, 나바라의 카를로스 3세 등에게 그리스도의 겉옷 조각과 성해면 조각 같은 성유물을 보내며 추가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1402년 11월 23일 프랑스를 떠나, 마침내 1403년 6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그의 서유럽 순방은 문화 교류에는 기여했지만, 오스만 제국에 맞설 군사적 지원을 얻는다는 본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3. 2.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들인 마누일은 1373년 형 안드로니코스 4세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후계자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공동 황제가 되었다. 1379년, 그는 아버지를 도와 형이 1376년에 장악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제위를 되찾는 과정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도움을 받았다. 이 대가로 동로마 제국은 술탄에게 조공을 바치고 군사 원조를 제공해야 하는 종속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1390년에는 안드로니코스 4세의 아들 요안니스 7세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제위를 빼앗았으나, 이번에도 오스만 제국의 도움으로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은 제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마누일은 술탄 바예지드 1세의 신하로서 부르사의 오스만 궁정에서 사실상의 인질 생활을 하다가, 1391년 2월 아버지 요안니스 5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탈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제위를 확보했다. 이는 조카 요안니스 7세의 잠재적인 제위 주장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다.마누일의 즉위 초기,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는 동로마 제국을 비교적 평화롭게 두었다. 그러나 1393년 불가리아에서 대규모 봉기가 발생하고 오스만 제국이 이를 진압한 후, 바예지드 1세는 기독교 봉신들이 자신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의심에 빠졌다. 그는 모든 기독교 봉신들을 세레스로 소집하여 학살하려 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계획을 철회했다. 이 사건은 마누일을 포함한 기독교 봉신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마누일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유화 정책만으로는 제국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 서유럽의 지원을 얻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에 술탄 바예지드 1세는 1394년부터 1402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며 압박을 가했다. 한편,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왕이 주도한 반(反)오스만 십자군은 1396년 9월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군에게 참패했다. 마누일 2세는 이 십자군을 돕기 위해 함선 10척을 보냈었다. 포위가 장기화되자 마누일 2세는 서유럽에 직접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1397년, 그의 삼촌 테오도로스 칸타쿠제노스가 프랑스의 샤를 6세에게 사절로 파견되어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프랑스는 장 2세 르 메잉르 원수가 이끄는 1,2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원수의 격려에 힘입어 마누일 2세는 직접 서유럽 순방에 나서기로 하고, 조카에게 도시 방어를 맡긴 뒤 1399년 12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났다. 그는 모레아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동생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에게 맡기고 여정을 시작했다.
마누일 2세는 1400년 베네치아에 도착한 후 여러 이탈리아 도시를 거쳐 6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샤를 6세 국왕을 만났고, 12월에는 잉글랜드로 건너가 헨리 4세 국왕을 만났다. 그는 영국을 방문한 유일한 비잔티움 황제가 되었으며, 각지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4] 헨리 4세는 그에게 2000GBP를 지원하기도 했다.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 왕은 콘스탄티노플로 보낼 같은 금액을 모았으나, 헨리 4세의 이후 조사에도 불구하고 제노아의 은행을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서유럽 국가들은 각자의 내부 문제와 전쟁으로 인해 실질적인 군사 지원을 약속하지는 못했다. 마누일 2세는 성물을 여러 군주에게 보내며 추가 지원을 호소했으나 큰 성과 없이 1402년 11월 프랑스를 떠나 1403년 6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마누일 2세가 서유럽에 머무는 동안, 오스만 제국의 상황은 급변했다. 술탄 바예지드 1세가 1402년 7월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포로로 잡힌 것이다. 이 사건으로 오스만 제국은 술탄 계승권을 둘러싼 내전에 휩싸였고, 동로마 제국은 잠시 숨 돌릴 틈을 얻었다. 마누일 2세의 부재 중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키던 요안니스 7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갈리폴리 조약을 체결, 마르마라 해 연안의 유럽 영토와 테살로니카(현재의 그리스 테살로니키)를 되찾았다. 1403년 마누일 2세가 귀국하자 요안니스 7세는 순순히 통치권을 넘겨주고 테살로니카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 조약을 통해 동로마 제국은 메셈브리아, 바르나, 그리고 이스퀴다르(스크타리)에서 이즈미트(니코메디아)까지 이어지는 마르마라 해안 지역도 일시적으로 회복했다.
마누일 2세는 오스만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메흐메트 1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제국의 안정을 꾀했다. 그는 오스만 내정에 개입하여 메흐메트 1세의 즉위를 도왔고, 그 결과 메흐메트 1세가 사망하는 1421년까지 양국 간에는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었다. 이 기간 동안 마누일 2세는 제국의 방어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1414년에는 함대를 이끌고 타소스섬의 제국 권위를 재확립했으며, 1415년에는 펠로폰네소스반도로 가서 모레아 전제공국의 방어를 위해 코린토스 지협을 가로지르는 헥사밀리온(6마일 성벽) 건설을 감독했다. 또한 1407-1408년에는 사절을 파견하여 서유럽 국가들과 접촉하며 반 오스만 연합 구축을 계속 모색했다.
그러나 1421년 메흐메트 1세가 사망하고 무라트 2세가 즉위하면서 평화는 깨졌다. 마누일 2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요안니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를 중심으로 한 궁정 내 강경파는 양국 간의 불안정한 평화를 깨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 계승 문제에 개입했다. 요안니스 8세는 동로마 제국 내에 있던 무스타파라는 인물(스스로 바예지드 1세의 아들이라 주장)을 무라트 2세에 대항하는 술탄으로 내세웠다. 이는 위험한 도박이었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1422년, 무라트 2세는 무스타파의 반란을 손쉽게 진압하고 처형한 뒤, 즉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다(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422년)). 또한 1423년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침공하여 유린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지 않았으나, 위기에 처한 마누일 2세는 다시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그는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왕을 찾아가 두 달간 머물렀으나, 후스 전쟁 등으로 여력이 없던 헝가리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5] 결국 1424년,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게 다시 조공을 바치고 술탄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는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제국은 다시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말년에 마누일 2세는 대부분의 공식 업무를 아들 요안니스 8세에게 맡기고 사실상 은퇴하여 수도원으로 물러났다. 그는 제국의 암울한 미래를 예감하며 장관 게오르기오스 스프란체스에게 "지금 제국에는 황제가 아니라 관리자가 필요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1425년 7월, 마누일 2세는 수도사 마타이오스(Ματθαῖος)라는 이름으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아들 요안니스 8세에게 "앞으로는 네 맘대로 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의 사후 불과 28년 뒤인 1453년,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4. 문화적 업적
마누일 2세는 뛰어난 문인이었으며, 「팔레올로고스 왕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비잔티움 문화의 마지막 황금기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제국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당대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구체적인 저술 활동과 내용은 아래 문단에서 상세히 다룬다.
4. 1. 저술 활동
마누일 2세는 뛰어난 문인이었으며, 후에 「팔레올로고스 왕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비잔티움 문화의 마지막 황금기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제국의 유지를 위해 분주히 활동하면서도 바쁜 정무의 틈을 타 다양한 성격의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그의 저술에는 편지, 시, 성인전, 신학과 수사학에 관한 논문 등이 포함된다. 또한 그의 형제인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를 위한 비문과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요한을 위한 군주론도 집필했다. 특히 이 군주론은 비잔티움인들이 남긴 군주론 문학 장르의 마지막 표본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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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긍정적 평가
마누일 2세는 황제의 화려한 옷이나 왕관 대신, 상복과 같은 흰 옷을 즐겨 입었다고 전해진다. 신하들은 그를 슬픈 눈을 가진 군주로 기억했다. 비록 정치적으로 큰 업적을 남길 기회는 적었지만, 그는 매우 교활하고 끈기 있는 외교관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최강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황위 계승 문제를 이용한 이간책을 여러 차례 구사하는 등 뛰어난 책략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황제 암살이나 폐위, 친족 살해가 빈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단파였던 장남 요하네스 8세 팔레올로고스를 이해하고 끝까지 지지하며 가족을 아끼는 인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더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훌륭한 군주가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6. 가족 관계
마누일 2세는 황제 요한 5세 팔레올로고스와 황후 헬레나 칸타쿠제네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형은 안드로니코스 4세 팔레올로고스이다.
1392년 2월 10일, 마누일 2세는 세르비아의 군주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스의 딸인 헬레나 드라가스와 결혼했다. 헬레나와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구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장녀 | (이름 미상) | ? - 1406년경 | 1406년 페스트로 요절했다는 기록이 있음. |
차녀 | (이름 미상) | ? - 1406년경 | 1406년 페스트로 요절했다는 기록이 있음. |
장남 |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 1392년 12월 18일 – 1448년 10월 31일 | 비잔티움 제국 황제 (1425년–1448년) |
차남 |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 1393/8년경 – 1405년 이전 | 모넴바시아에서 요절[8] |
3남 |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 | ? – 1429년 | 테살로니키의 데스포테스 (1408년–1423년) |
4남 |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 | ? – 1448년 | 모레아의 데스포테스 |
5남 |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 | 1404년 2월 8일 – 1453년 5월 29일 | 모레아의 데스포테스, 마지막 비잔티움 황제 (1448년–1453년) |
6남 | 미카엘 팔레올로고스 | 1406/7년 – 1409/10년 | 흑사병으로 요절[9] (다른 기록에는 1406년 요절) |
7남 | 데메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 1407년경 – 1470년 | 모레아의 데스포테스 |
8남 |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 1409년경 – 1465년 5월 12일 | 모레아의 데스포테스 |
또한 마누일 2세는 헬레나와 결혼하기 전에 사생녀 자비아(Zabia-Isabella Palaiologina, Ζαμπία Παλαιολογίναel, 생몰년 미상)를 두었다. 자비아는 제노바 출신의 정교회 신자인 일라리오 도리아(Ilario Doria, 1423년 사망)와 결혼했다. 일라리오 도리아는 140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카스티야 왕국 사절 루이 곤살레스 데 클라비호[11]의 안내를 맡았으며, 1423년 궁정 내 소동에 연루되어 헝가리로 망명한 직후 사망했다.
7. 어록
참조
[1]
서적
Byzantium: Faith and Power (1261-1557)
https://books.googl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4
[2]
웹사이트
Ὁ Ὅσιος Μανουὴλ Αὐτοκράτωρ Κωνσταντινουπόλεως
http://synaxarion.gr[...]
[3]
웹사이트
St Alban's chronicle
https://images.lambe[...]
[4]
웹사이트
An emperor in Eltham
http://www.newstates[...]
2006-09-25
[5]
서적
A Magyar Nemzet Története
Udvari Könyvkereskedés Kiadó
1896
[6]
간행물
The tombs of the Palaiologan emperors
2018
[7]
서적
The Portrait in Byzantine Illuminated Manuscripts
https://books.google[...]
Brill
1976
[8]
백과사전
21490. Παλαιολόγος Κωνσταντῖνος
[9]
백과사전
21520. <Παλαιολόγος> Μιχαήλ
[10]
서적
ビザンツ皇妃列伝
白水社
[11]
서적
遥かなるサマルカンド
原書房
1998
[12]
문서
あるペルシャ人との対話
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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