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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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1405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나 1449년 1월 6일 미스트라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 속에서 동서 교회의 통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죽음은 비잔티움 제국의 종말을 의미했으며, 이후 그리스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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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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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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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 |
로마자 표기 | Kōnstantinos Dragasēs Palaiologos |
그리스어 표기 | Κωνσταντῖνος Δραγάσης Παλαιολόγος |
다른 이름 | Κωνσταντῖνος ΙΑ' Παλαιολόγος Δραγάσης |
별칭 | Μαρμαρωμένος Βασιλιάς (대리석으로 변한 황제) |
직함 | 로마인의 황제이자 전제군주 |
종교 | 동방 가톨릭 교회(이전 동방 정교회) |
출생일 | 1404년 2월 8일 |
출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동로마 제국 |
사망일 | 1453년 5월 29일 (49세) |
사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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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동로마 황제 즉위 | 1449년 1월 6일 |
동로마 황제 퇴위 | 1453년 5월 29일 |
전임 황제 |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
후임 황제 | (후임 없음) |
모레아 전제공 즉위 | 1428년 5월 1일 |
모레아 전제공 퇴위 | 1449년 3월 |
전임 모레아 전제공 |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 (단독 통치) |
후임 모레아 전제공 | 데메트리오스 및 토마스 (공동 통치) |
모레아 전제공 공동 통치자 |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 (1428–1443),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1428–1449) |
가문 | |
왕조 | 팔레올로고스 왕조 |
아버지 |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 |
어머니 | 옐레나 드라가시 |
결혼 | |
배우자 1 | 테오도라 (크레우사) 토코 (1428년 결혼, 1429년 사망) |
배우자 2 | 카테리나 가틸루시오 (1441년 결혼, 1442년 사망) |
기타 | |
성인 여부 | (성인/순교자) |
기념일 | (미정) |
주요 성지 | (미정) |
상징 | (미정) |
수호 대상 | (미정) |
논쟁 | (미정) |
2. 생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와 세르비아계 귀족 출신 어머니 헬레나 드라가시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수도에서 보냈으며, 1423년 형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가 서유럽으로 떠났을 때 잠시 섭정을 맡기도 했다.
1428년부터 동생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와 함께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모레아 데스포타트를 통치하며 파트라를 점령하는 등 라틴인 세력을 몰아내고 영토를 정비하는 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스인들의 기대를 모으며 중앙 그리스로의 진출을 꾀하기도 했으나, 1446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2세에게 패배하여 좌절되었다.
1448년 형 요안니스 8세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동생 데메트리오스와 제위 계승 분쟁이 벌어졌다. 오스만 술탄 무라트 2세의 중재로 콘스탄티노스가 후계자로 결정되어, 1449년 미스트라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1451년 즉위한 젊고 야심찬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1452년 보스포루스 해협에 루멜리히사르 요새를 건설하는 등 압박을 가해왔다. 콘스탄티노스는 제국의 운명을 걸고 서유럽 국가들에 필사적으로 지원을 요청하며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통합까지 선언했으나, 내부의 격렬한 반발만 사고 소수의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 지원병을 얻는 데 그쳤다.
1453년 4월,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압도적인 오스만 대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메흐메트 2세는 도시를 넘기면 다른 영토를 보장하겠다는 항복 조건을 제시했지만, 콘스탄티노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도시와 운명을 함께 할 것을 결의했다. 그는 항복 제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전해진다.
"당신에게 도시를 넘겨줄 권리는 나에게도, 이 곳에 사는 그 누구에게도 없소, 우리 모두를 위해서, 상호간의 이해에 따라, 우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자유 의지에 따라 죽을 것이오."[8]
약 2개월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군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돌파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최후까지 병사들을 독려하며 직접 전투에 나섰고, 난전 속에서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정확한 최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의 죽음과 함께 기원전 753년부터 이어져 온 로마 제국은 2200여 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멸망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시신은 함락 후 발견되어 메흐메트 2세에 의해 매장되었다고 전해지나, 그 진위는 불확실하다. 오스만 제국 치하의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그가 죽지 않고 대리석으로 변해 잠들어 있으며, 언젠가 부활하여 제국을 재건할 것이라는 '대리석 황제' 전설이 생겨났다. 그는 그리스 독립 전쟁 시기 독립을 염원하는 그리스인들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오늘날 그리스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가족 배경
콘스탄티누스는 1404년 2월 8일[8]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와 세르비아의 드라가시 가문 출신 아내 헬레나 드라가시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명목상 팔레올로고스 왕조 출신이었지만, 어머니 헬레나의 성인 '드라가세스(Dragašes)'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비잔티움 귀족 사회에서 부모 양쪽의 성을 사용하는 것이 드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재위 중인 황제의 황궁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주어지는 칭호인 포르피로게네토스("자주색에서 태어난 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외할머니 헬레나 칸타쿠제네를 통해 명망 높은 칸타쿠제노스 가문과도 혈연 관계가 있었다.아버지 마누일 2세는 이미 국력이 크게 쇠퇴한 비잔티움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제국의 몰락은 11세기 셀주크 튀르크의 아나톨리아 진출로 가속화되었고,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라틴 제국의 성립은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창시자 미하일 8세가 1261년 수도를 되찾았지만, 14세기 오스만 제국의 급격한 팽창으로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펠로폰네소스, 일부 에게해 섬들로 영토가 축소되었고,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했다.
제국이 쇠퇴하자 황제들은 남은 영토를 아들들에게 분봉지(appanage)로 나누어 통치하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 마누일 2세의 장남 요안니스(후일 요안니스 8세)는 공동 황제이자 후계자였고, 둘째 아들 테오도로스는 모레아 데스포타트를, 셋째 아들 안드로니코스는 1408년 테살로니키 데스포타트의 데스포트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동생들인 데메트리오스, 토마스는 할당받을 영지가 부족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렀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훗날 유명한 비잔티움 역사가가 되는 게오르기오스 스프란체스는 어린 시절부터 콘스탄티누스를 존경했으며, 후대의 찬사들은 콘스탄티누스가 항상 용감하고 모험심이 강했고, 무술, 승마, 사냥에 능숙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황제가 되기 전과 후의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많은 기록은 그의 통치를 찬양하려는 경향이 있어 과장되었을 수 있다. 그의 행적과 일부 조언자 및 동시대 인물들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콘스탄티누스는 국정이나 외교보다는 군사 문제에 더 익숙했던 것으로 보이나, 섭정 기간 동안 보여준 것처럼 유능한 행정가였으며 중요한 국정 문제에 대해서는 고문들의 조언을 경청하는 경향이 있었다. 인장이나 동전의 양식화되고 불분명한 묘사를 제외하고는 콘스탄티누스의 당대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주목할 만한 이미지로는 현재 빈에 있는 인장(출처 불명, 아마도 황실 금인칙서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 몇몇 동전, 그리고 에스텐세 도서관 소장 조나라스 역사서 사본(Mutinensis gr. 122)에 다른 비잔티움 황제들 사이에 그려진 그의 초상화가 있다. 이 사본에서 그는 둥근 수염을 기르고 있는데, 이는 갈라진 수염을 기른 그의 친척들과 대조적이지만, 이것이 그의 실제 모습을 반영하는지는 불확실하다.

1422년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전이 실패로 끝난 후, 마누엘 2세는 뇌졸중을 겪어 몸의 한쪽이 마비되었다. 그는 이후 3년간 더 생존했지만, 제국의 통치는 사실상 장남 요안니스에게 넘어갔다. 1423년 11월, 형 요안니스가 서유럽의 지원을 얻기 위해 베네치아와 헝가리로 떠나면서, 콘스탄티누스는 데스포트 칭호를 받고 수도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요안니스가 1422년 포위 공격 중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다른 형제들보다 그를 더 신뢰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병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 마누엘 2세의 도움으로 오스만 술탄 무라트 2세와 새로운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요안니스는 별다른 지원 약속을 얻지 못한 채 1424년 11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1425년 7월 21일 마누엘 2세가 사망하고, 요안니스는 단독 황제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섭정으로서의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인정받아 1425년 메셈브리아(현재 네세버르)에서 남쪽 데르코스까지 이어지는 영지와 셀림브리아(현재 실리브리) 항구를 분봉지로 하사받았다. 이 지역은 작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가깝고 전략적으로 중요했으며, 이는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 마누엘 2세와 형 요안니스 8세 모두에게 신뢰받았음을 보여준다.
섭정으로서 능력을 입증한 콘스탄티누스는 1427년 형 요안니스 8세에 의해 모레아 데스포타트의 데스포트로 임명되었다. 당시 모레아는 형 테오도로스가 통치하고 있었으나, 1423년 오스만 제국의 침공과 에페이로스의 이탈리아계 군주 카를로 1세 토코의 계속되는 위협(1426년 원정 등)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1427년 말, 요안니스 8세는 콘스탄티누스, 스프란체스와 함께 직접 모레아로 가서 카를로 토코에 맞섰다. 1428년 에키나데스 해전에서 비잔티움 해군이 승리하자, 토코는 모레아에서 점령했던 영토를 포기하고 평화 조약을 맺는 데 동의했다. 평화의 조건으로 토코는 자신의 조카 테오도라 토코를 콘스탄티누스와 결혼시키고, 그녀의 지참금으로 글라렌차와 다른 모레아 영토를 반환했다. 글라렌차는 1428년 5월 1일에 비잔티움 측에 양도되었고, 콘스탄티누스는 같은 해 7월 1일에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동생 토마스와 함께 모레아를 공동 통치하며 1429년 파트라를 점령하고 아카이아 공국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등 라틴 세력을 축출하고 영토를 정비하는 데 성공했다.
2. 2. 모레아 데스포트
1428년, 형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 동생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와 함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동로마 제국의 몇 안 되는 잔존 영토였던 모레아 데스포타트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어머니 엘레나 드라가슈의 성을 따라 '드라가세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는 부모 양쪽의 성을 사용하는 것이 드물지 않았다. 이미 1423년 형 요한네스 8세 팔레올로고스가 서유럽으로 지원을 요청하러 떠났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섭정을 맡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2세와 평화 조약을 맺는 등 정치 경험을 쌓았다.모레아 데스포트가 된 콘스탄티노스는 1429년 파트라를 병합하여 이 지역에 남아있던 옛 십자군 국가 아카이아 공국의 세력을 몰아내는 등 영토 정비에 힘썼다. 그는 옛 동로마 제국 영토였던 중앙 그리스 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며 그리스인들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1442년에는 동생 디미트리오스가 무라트 2세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자, 모레아에서 달려와 포위군을 공격하여 물리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1443년 이후, 사망한 형 테오도로스의 뒤를 이어 동생 토마스와 함께 모레아를 공동 통치하며 데스포타트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당시 모레아는 미스트라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 세계의 문화적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플보다 더 활기찬 분위기를 보였다. 예술가와 학자들이 모여들었고, 교회, 수도원, 저택 등이 계속 건설되었다. 콘스탄티노스의 고문이었던 철학자 게미스토스 플레톤은 콘스탄티노플이 '새로운 로마'였다면, 미스트라스와 모레아는 강력한 헬레니즘 왕국인 "새로운 스파르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강화 계획의 일환으로 콘스탄티노스와 토마스는 143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던 헥사밀리온 성벽 재건에 착수하여 1444년 3월까지 완료했다. 이 대규모 공사는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부 모레아 지주들은 비용 부담을 피하려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로 도망치거나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지주들에게 토지와 특권을 부여하고 지역 운동 경기를 개최하여 민심을 얻으려 노력했다.
1444년 여름, 서방에서 십자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에 고무된 콘스탄티노스는 오스만의 봉신국인 라틴계 아테네 공국을 침공했다. 그는 아테네와 테베를 빠르게 점령하고 공작 네리오 2세 아치아이올리에게 오스만 대신 자신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또한 부르고뉴 공작 필립 2세가 보낸 300명의 지원군과 함께 북쪽으로 진군하여 테살리아의 핀두스 산맥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1444년 11월,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이 무라드 2세에게 대패하면서 상황은 불리해졌다. 콘스탄티노스의 성공에 위협을 느낀 무라드 2세는 1446년 약 6만 명으로 추정되는 대군을 이끌고 모레아를 침공했다. 콘스탄티노스와 토마스는 약 2만 명의 병력으로 재건된 헥사밀리온 성벽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오스만 군의 우세한 화력, 특히 대포 공격 앞에 성벽은 1446년 12월 10일 무너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수비대가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고, 콘스탄티노스와 토마스는 간신히 탈출했다. 오스만 군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부를 약탈하고 황폐화시켰다. 결국 콘스탄티노스와 토마스는 무라드 2세를 군주로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며, 다시는 헥사밀리온 성벽을 복구하지 않겠다는 굴욕적인 약속을 해야만 했다.
1448년, 형 요한네스 8세 팔레올로고스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콘스탄티노스는 동생 데메트리오스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 이 분쟁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2세의 중재로 이어졌고, 결국 콘스탄티노스가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그는 1449년 모레아의 수도였던 미스트라에서 황제로 즉위하며 데스포트 시대를 마감했다.
2. 3. 두 번째 섭정 임기
1423년, 형 요하네스 8세 팔레올로고스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 서유럽의 지원을 얻기 위해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요하네스 8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유럽으로 향하기 전, 동생 콘스탄티노스를 섭정으로 임명하여 수도의 통치를 맡겼다. 형이 없는 동안 콘스탄티노스는 어머니 엘레나 드라가슈의 도움을 받으며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2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등 국정을 운영했다.2. 4. 황제 즉위와 오스만 제국의 위협
1448년 형인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동생 데메트리오스 팔라이올로고스와 제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2세에게 중재를 요청한 결과, 콘스탄티노스가 후계자로 결정되어 1449년 1월 6일 모레아의 미스트라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밖에서 즉위한 마지막 비잔티움 황제였다. 3월에 콘스탄티노스는 오스만 제국군을 피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입성하여 술탄 무라트 2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황제 즉위 후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는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콘스탄티노스는 즉위 직후 무라드 2세와 휴전을 맺어 제국의 안정을 꾀했고, 분쟁의 소지가 있던 동생 데메트리오스를 토마스와 함께 모레아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여 수도에서 멀리 보냈다. 또한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라곤의 알폰소 5세나 트라페존트 제국, 조지아 왕국 등과 혼인 동맹을 추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450년 어머니 헬레나 드라가시가 사망하면서 정신적 지주를 잃고 고문들 사이의 의견 대립 속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당시 궁정 내 유력 인물로는 해군 사령관이자 실질적인 총리 역할을 하던 루카스 노타라스와 황제의 오랜 친구이자 조언자였던 게오르기오스 스프란체스 등이 있었으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외교 정책 등에서 의견 차이를 보였다.
1451년 2월, 무라드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메흐메트 2세가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했다. 메흐메트 2세는 처음에는 평화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콘스탄티노스가 오스만 제국의 왕위 계승 후보자인 오르한 첼레비를 이용하여 정치적 압박을 가하려 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오르한의 연금을 인상해달라고 요구하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오르한을 풀어 오스만 제국 내전을 유도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보냈다. 이는 과거 그의 아버지 마누일 2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사용했던 전략이었지만, 젊고 야심만만한 메흐메트 2세에게는 오히려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의 빌미를 제공하는 위험한 도발이었다. 오스만의 대재상 찬달르 할릴 파샤는 비잔티움 사절단에게 격노하며 이러한 행동의 어리석음을 경고했다.

메흐메트 2세는 오르한 문제를 빌미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1452년 봄,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연안에 루멜리히사르 성채 건설을 시작했다. 이는 해협 건너편의 아나돌루히사르 성과 함께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행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해상과 육지 양쪽에서 봉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콘스탄티노스는 기존의 평화 조약을 상기시키며 항의했지만, 메흐메트 2세는 요새 건설 지역이 무인지대이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밖은 비잔티움의 영토가 아니라고 일축했다. 루멜리히사르는 1452년 8월에 완공되었고,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의 전진 기지로 활용될 예정이었다. 요새 건설 과정에서 지역 교회가 철거되고 오스만 군대가 비잔티움 농지를 침범하자 콘스탄티노스는 잠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문을 닫고 튀르크인들을 체포했으나, 곧 무의미함을 깨닫고 풀어주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현실화되자 콘스탄티노스는 서방 세계에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청, 아라곤, 헝가리, 제노바 공화국 등 여러 세력에게 사절을 보내 지원을 호소하며 영토 할양까지 약속했지만,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문제에 몰두하거나 바르나 전투의 패배 이후 십자군 원정에 소극적이었다. 특히 교황 니콜라오 5세는 군사적 지원의 대가로 피렌체 공의회에서 결정된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완전한 통합을 요구했다.
이에 콘스탄티노스는 1452년 말, 절박한 심정으로 교회 통합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는 제국 내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반(反)통합파의 지도자 격이었던 루카스 노타라스 대공은 "추기경의 사각모를 보느니 차라리 술탄의 터번을 보는 편이 낫다"고 공언할 정도였으며, 많은 백성들과 성직자들도 통합을 거부했다. 결국 서방의 실질적인 군사 지원은 거의 오지 않았고, 교회 통합 시도는 제국 내부의 분열만 심화시킨 채 실패로 돌아갔다. 소수의 베네치아 공화국 함대와 조반니 주스티니아니 롱고가 이끄는 제노바 공화국 용병들의 지원을 받았지만, 이는 압도적인 오스만 군대에 맞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수리하고 물자를 비축하는 등 도시 방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메흐메트 2세의 항복 제안에 대해서는 "당신에게 도시를 넘겨줄 권리는 나에게도, 이 곳에 사는 그 누구에게도 없소, 우리 모두를 위해서, 상호간의 이해에 따라, 우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자유 의지에 따라 죽을 것이오."[8]라고 답하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2. 5.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최후
1453년 4월,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약 8만 명[2]에서 10만 명[2] 사이의 오스만 제국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이 군대에는 오르반과 같은 기술자가 제작한 거대한 대포와 약 5,000명의 정예 예니체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맞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비 병력은 그리스인 민병대를 포함하여 약 6,000명에서 8,500명 사이였으며, 추가로 1,000명의 예비 병력이 도시에 남아 있었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견고함과 수비대의 분전으로 초기 오스만군의 파상 공세를 여러 차례 막아냈다.메흐메트 2세는 포위를 풀 조건으로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 도시를 떠날 것을 요구하며, 수도를 내주는 대가로 모레아 등 다른 영토의 지배권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일부 측근들은 황제에게 일시적으로 도시를 탈출하여 다른 곳에서 저항을 계속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전해진다. "제국 없이 황제로 사는 것은 하느님이 금하시는 일입니다. 내 도시가 함락될 때, 나도 함께 함락될 것입니다. 탈출하고 싶은 자는 할 수 있다면 스스로 구원받고, 죽음에 직면할 준비가 된 자는 나를 따르십시오."[2] 그는 로마 황제로서 도시와 운명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공성전 초기, 콘스탄티노스 11세는 황금각 입구에 거대한 쇠사슬을 설치하여 오스만 함대의 진입을 막았다. 4월 20일에는 교황청과 아라곤의 알폰소 5세가 보낸 제노바 함선 3척과 대형 보급선 1척이 오스만 함대의 저지를 뚫고 황금각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여 수비대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4월 23일, 갈라타 지역 뒤편 언덕에 설치한 궤도를 이용해 오스만 함대를 육로로 황금각 안으로 옮기는 기발한 작전을 성공시켰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방비가 약했던 해안 성벽까지 방어해야 하는 부담이 커졌다.

도시 방어에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출신 외국인 용병들도 참여했다. 특히 1453년 1월 자발적으로 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도착한 제노바의 용병대장 조반니 주스티니아니는 육지 성벽 방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방어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도시 방어를 위해 교회와 수도원의 귀금속까지 징발하여 군자금과 빈민 구제에 사용하며 끝까지 저항을 독려했다.
공성전이 길어지면서 도시 내부의 식량 사정은 악화되었고, 서방 세계의 지원은 더디기만 했다. 베네치아 함대의 구원 소식만을 기다렸지만, 정찰선은 지원군이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전해왔다. 함락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5월 28일 저녁,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 신자들이 함께 참여한 마지막 예배를 드렸다. 그는 이 자리에서 성찬을 받고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했으며, 황궁으로 돌아가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성벽으로 향해 병사들을 점검했다.

1453년 5월 29일 새벽, 오스만 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바시바조크 부대의 1차 공세, 정규군의 2차 공세, 예니체리 군단의 3차 공세까지 이어졌으나, 주스티니아니가 이끄는 수비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약 6시간의 격전 끝에 주스티니아니가 오스만군의 포격에 치명상을 입고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그의 후퇴는 제노바 용병들의 사기를 꺾었고, 방어선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수비대가 미처 잠그지 못한 작은 문인 케르코포르타를 통해 약 50명의 오스만 병력이 성벽 내부로 진입하여 탑 위에 오스만 깃발을 내걸었다. 이를 본 수비 병력의 전의는 완전히 꺾였고, 성벽 여러 곳이 돌파당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결국 함락되었다. 부상당한 주스티니아니는 배를 타고 탈출했으나 며칠 뒤 사망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도시가 함락되던 5월 29일에 사망했다. 그의 최후를 직접 목격한 기록은 없으며, 여러 가지 상반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역사가 미카엘 크리토불로스는 황제가 "도시는 함락되었고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을 남기고 오스만 군을 향해 돌격하여 싸우다 영웅적으로 전사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후대 그리스 역사가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그가 순교자로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인식이 강하다. 다른 기록으로는, 주스티니아니의 후퇴 후 절망한 황제가 부하들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간청했으나 아무도 따르지 않자, 황제의 휘장을 벗어던지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싸우다 죽었다는 설(니콜라 사군디노), 성문 근처에서 혼전 중에 넘어져 짓밟혀 죽었다는 설(키오스의 레오나르도), 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니콜로 바르바로) 등이 있다. 오스만 측 기록(투르순 베그, 이븐 케말)은 황제가 도주하려다 오스만 병사에게 살해당하고 참수되었다고 전한다.
함락 후, 황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황제가 신었다는 자색 부츠를 통해 신원이 확인되었고, 메흐메트 2세는 이 시신의 목을 베어 효수했다고 한다(이시도르 추기경, 니콜라 사군디노).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황제의 시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그의 휘하 귀족이나 고위 관료의 시신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죽음으로 아우구스투스 이래 이어져 온 로마 황제의 계보는 끊겼고, 기원전 8세기에 건국되어 2200년 이상 지속된 로마 제국은 마침내 멸망했다.
3. 유산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죽음은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으며 시작된 비잔티움 제국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스스로를 헬레네스(그리스인)가 아닌 로마이오이(로마인)로 여겼던 비잔티움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은 1,480년 전 아우구스투스 이래 지속된 로마 황제 계보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했다. 또한 이는 오스만 제국이 동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메흐메트 2세와 후계 술탄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을 통해 스스로 로마 황제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다.
생전에 피렌체 공의회의 교회 통합 문제로 일부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도시를 지키다 전사한 그의 최후는 그를 순교자이자 영웅으로 만들었다. 정교회에서도 그의 죽음은 성스러운 희생으로 받아들여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유럽 기독교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정교회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성 소피아 대성당이 잃어버린 위대함의 상징이 되었다. 러시아의 네스토르 이스칸데르 이야기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세워진 도시가 같은 이름의 황제 치하에서 멸망한 것을 운명적인 사건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탈리아로 망명한 그리스 학자 안드로니코스 칼리스토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을 애도하며 콘스탄티누스를 위대한 통치자로 칭송했고, 1453년에 쓰인 익명의 그리스 서사시 "도시의 함락"은 그의 불운을 안타까워하며 서유럽의 도움이 없는 상황에서 그가 최선을 다했음을 강조했다.
사후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오스만 제국 지배하의 그리스인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그가 죽지 않고 천사에 의해 구출되어 대리석으로 변한 채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는 "대리석 황제" 전설이 생겨났고, 이는 수 세기 동안 그리스 민족의 정체성과 독립 의지에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그는 그리스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수도 아테네에는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근대 그리스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제작되었다.
3. 1. 역사적 평가와 논란
당시에 "로마 제국은 창시자와 이름이 같은 황제의 치하에서 멸망한다"는 예언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이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죽음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 현실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플라비우스 모마일루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역시 로마의 첫 번째 왕 로물루스와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9]콘스탄티노스 11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못했기 때문에[10],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그리스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천사들이 내려와 콘스탄티노스 11세를 구해 대리석상으로 만들었으며, 오스만 지배가 무너지고 그리스가 해방될 날 다시 부활하여 앞장설 것'이라는 ''''대리석 황제'''(Μαρμαρωμένος Βασιλιάς|마르마로메노스 바실리아스el) 전설이 생겨났다. 이 전설은 오스만 제국 지배하의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언젠가 콘스탄티노스가 부활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재건할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일 사망했다. 황제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의 최후에 대한 신뢰할 만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측근도 살아남지 못했다. 메흐메트 2세 치하에서 활동한 그리스 역사가 미카엘 크리토불로스는 콘스탄티노스가 오스만 군대와 싸우다 전사했다고 기록했다. 후대의 그리스 역사가들은 이 기록을 받아들였고, 콘스탄티노스가 영웅이자 순교자로서 죽었다는 사실은 그리스어권 세계에서 거의 의심받지 않았다. 크리토불로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노스가 오스만 군을 향해 돌격하기 전 마지막 말은 "도시는 함락되었고 나는 아직 살아 있다"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상반된 기록들도 존재한다.
- '''키오스의 레오나르도''': 오스만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그는, 용병대장 주스티니아니가 부상으로 전장을 떠나자 황제의 용기가 꺾였고,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피하기 위해 부하들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간청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결국 오스만 군이 몰려오자 전투 중에 쓰러졌다가 짓밟혀 죽었다고 한다.
- '''니콜로 바르바로''': 포위 공격에 참여했던 베네치아 의사로, 황제의 생사 여부를 아무도 몰랐다고 기록했다.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설과 성 로마누스 문이 돌파되자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는 설이 있다고 전했다.
- '''이시도르 추기경''': 크리토불로스와 마찬가지로 성 로마누스 문에서 싸우다 죽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오스만 군이 그의 시신을 발견하여 머리를 베어 메흐메트 2세에게 바쳤고, 술탄이 이를 모욕한 뒤 아드리아노플로 가져갔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 '''자코포 테달디''': 피렌체 상인으로, "어떤 사람들은 그의 머리가 잘렸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문에서 압사당했다고 한다. 두 이야기 모두 사실일 수도 있다"고 기록했다.
- '''오스만 기록''': 투르순 베그는 황제가 당황하여 항구로 도망치려다 터키 해병에게 살해당하고 참수되었다고 기록했으며, 후대의 역사가 이븐 케말은 신원 미상의 거대한 해병에게 참수당했다고 기록했다. 오스만 측 기록들은 공통적으로 황제가 참수되었다고 전한다.
- '''니콜라 사군디노''': 베네치아인으로, 1454년 아라곤과 나폴리의 알폰소 5세에게 황제의 최후를 전했다. 그는 주스티니아니가 후퇴한 후 황제가 탈출 권유를 거부하고 제국과 함께 죽기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콘스탄티노스는 휘장을 버리고 가장 치열한 전투 속으로 뛰어들었으며, 이후 시신이 발견되어 참수된 머리가 콘스탄티노플을 행진한 뒤 이집트 술탄에게 보내졌다고 전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죽음은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한 이래 이어져 온 비잔티움 제국의 종말을 의미했다. 비록 영토가 그리스어권으로 축소되었지만, 스스로를 '로마인'(로마이오이)이라 여겼던 비잔티움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은 1,480년 전 아우구스투스 이래 지속된 로마 황제 계보의 단절이기도 했다. 또한 이는 1922년까지 동부 지중해를 지배하게 될 오스만 제국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은 8세기 이후 이슬람 군대의 오랜 염원이었으며, 메흐메트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를 통해 스스로 로마 황제의 계승자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생전에 콘스탄티노스 11세는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결정된 동서 교회 통합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많은 신하들에게 배신자이자 이단으로 비난받았다. 그는 제국의 생존을 위해 교회 통합이 필요하다고 여겼으나, 반대파는 이를 세속적인 타협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보여준 용기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다 죽은 그의 최후는 그에 대한 평가를 극적으로 바꾸었다. 그리스인들은 그가 '이단'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잊거나 무시했고, 많은 이들이 그를 순교자로 여기게 되었다. 정교회의 시각에서도 콘스탄티노스의 죽음은 그를 성화시켰고, 그는 영웅으로 죽었다고 평가받는다. 공식적으로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일부 정교도들은 그를 성인으로 여기며 그의 초상화를 역사적인 그리스 정교회 이콘으로 제작하기도 한다.

오늘날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그리스의 국민적 영웅으로 여겨진다. 수도 아테네에는 그의 동상이 두 개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팔라이오 팔리로 해변가에 세워진 거대한 기마상이고 다른 하나는 아테네 대성당 광장에 칼을 뽑아 든 모습으로 서 있는 작은 동상이다. 이는 바실리오스 2세나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처럼 훨씬 성공적인 통치를 했던 황제들에게는 없는 영예이다. 또한 근대 그리스 왕국의 마지막 국왕 이름이 콘스탄티노스 2세였던 것도 그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 전쟁 시기에도 그는 독립을 위해 싸우는 그리스인들의 상징이었으며, 근대 그리스에서는 그를 주제로 한 음악이나 영화 등이 제작되기도 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에 대한 학술적 평가는 주로 그를 비극적 영웅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 '''체도밀리 미야토비치''' (1892): "콘스탄틴 팔라이올로고스 (1448-1453) 또는 튀르크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에서 그는 콘스탄티노스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사건의 비극적 희생자로 그렸다. 이 책은 그리스 왕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에 쓰였으며, 그리스의 메갈리 이데아(대그리스주의)를 고취하려는 의도도 담고 있었다.
- '''스티븐 런시먼''' (1965):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몰락 1453"에서 콘스탄티노스를 제국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비극적 인물로 묘사했다. 다만, 오스만 왕위 계승자 오르한을 이용해 메흐메트 2세를 자극한 점에 대해서는 일부 책임을 묻기도 했다.
- '''도널드 니콜''' (1992): "불멸의 황제: 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고스의 삶과 전설"에서 황제로서뿐만 아니라 모레아 전제공으로서 겪었던 시련을 포함하여 그의 전 생애를 조명했다. 니콜 역시 콘스탄티노스를 대체로 비극적인 인물로 평가했다.
- '''마리오스 필리피데스''' (2019):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스 팔라이올로고스 (1404-1453): 비잔티움의 마지막 황제"에서 보다 비판적인 평가를 제시했다. 필리피데스는 콘스탄티노스가 위대한 정치가나 군인이었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고 보았으며, 외교적으로 무능하고 백성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콘스탄티노스의 모레아 재정복이 군사적 승리보다는 주로 결혼 동맹에 의한 것이었음을 지적하며, 그의 모레아 원정이 오히려 반도를 "튀르크에게 더 쉬운 먹잇감"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평가는 다소 추측에 기반한다는 비판도 있다.
3. 2. 그리스 민족주의와 상징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10],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그리스에서는 그와 관련된 특별한 전설이 생겨났다. 이 전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 천사들이 내려와 콘스탄티노스 11세를 구출하여 대리석상으로 만들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끝나고 그리스가 해방될 날 다시 부활하여 민족을 이끌 것이라고 한다.
이 전설은 시간이 흐르면서 "대리석 황제"(그리스어: ''Marmaromenos Vasilefs'', 문자 그대로 "대리석으로 변한 황제/왕") 이야기로 발전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죽지 않고 오스만 군대에게 죽임당하기 직전 천사에 의해 구출되어 대리석으로 변해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천사들은 그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금문(과거 황제들이 개선 행진을 하던 문) 아래 비밀 동굴에 숨겨두었고, 그는 그곳에서 다시 도시를 탈환하라는 천사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진다. 오스만 제국이 나중에 황금문을 벽으로 막아버린 것도 콘스탄티노스의 부활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전설에 따르면, 신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회복을 원할 때 천사가 내려와 콘스탄티노스를 부활시키고 칼을 주면, 그는 도시로 진군하여 몰락한 제국을 되찾고 투르크인들을 그들의 전설적인 고향인 "붉은 사과나무"까지 몰아낼 것이라고 한다. 또한 콘스탄티노스의 부활은 큰 황소의 울음소리로 알려질 것이라고도 한다.
15세기 후반부터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한 이 전설은 크레타의 역사가이자 화가인 게오르기오스 클론차스가 1590년에 그린 17개의 미니어처 연작을 통해 시각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이 그림들은 천사들의 보호 아래 잠든 황제, 아야 소피아에서 다시 왕관을 쓰는 모습, 황궁에 들어가 투르크인들과 전투를 벌이는 모습 등을 담고 있다. 승리 후 그는 카이세리에서 기도하고 팔레스타인으로 행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며, 그곳 성묘 교회에 왕관과 참십자가를 봉헌하고 골고다 언덕에서 임무를 완수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마지막 그림에서는 성묘 교회에 묻힌 모습이 그려진다. 1625년 영국의 외교관 토마스 로는 오스만 정부가 황금문에 대해 미신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문에 놓인 조각상이 파괴되면 도시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대리석 황제'의 예언은 19세기 그리스 독립 전쟁 이후에도 그리스 민족주의와 결합하며 계속 이어졌다. 특히 1868년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1세가 장남의 이름을 콘스탄티노스로 지으면서, 옛 비잔티움 황제들의 계승자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가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1세로 즉위하자 많은 그리스인들은 그를 '콘스탄티노스 12세'라고 부르며 기대를 걸었다. 콘스탄티노스 1세가 1912년 발칸 전쟁 중 테살로니키를 탈환하자, 예언이 실현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이 다음 목표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커졌다. 그러나 그가 1917년 퇴위하고, 1922년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그리스가 패배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으려는 희망(소위 메갈리 이데아)은 사실상 사라졌다.
비록 제국 재건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마지막 황제로서 그리스인들에게 민족적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공식적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일부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은 그를 성인으로 여기기도 하며, 그의 초상화는 역사적인 이콘으로 취급된다. 오늘날 수도 아테네에는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현대 그리스 왕국의 마지막 국왕 이름도 콘스탄티노스 2세였다. 또한 근대 그리스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한 음악이나 영화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제작되었다.
3. 3. 대중문화 속의 콘스탄티노스 11세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영웅적인 최후는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생전에는 피렌체 공의회에서 결정된 동서 교회의 통합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일부 신하들에게 '배신자', '이단'으로 비난받기도 했으나, 도시를 지키다 튀르크 군대와 싸우다 전사한 그의 죽음은 이러한 논란을 잠재우고 그를 순교자이자 영웅으로 만들었다. 동방 정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그의 죽음은 성스러운 희생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위대한 황제로 기억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대리석 황제"(Μαρμαρωμένος Βασιλιάς|마르마로메노스 바실리아스el)라는 전설로 이어졌다. 이 전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죽지 않고 천사에 의해 구출되어 대리석으로 변한 채 콘스탄티노플의 황금문(Golden Gate) 아래 비밀 동굴에 잠들어 있으며, 언젠가 다시 깨어나 도시를 되찾고 비잔티움 제국을 재건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터키인들이 황금문을 벽으로 막은 이유도 이 전설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15세기 크레타의 화가 게오르기오스 클론차스는 황제가 잠에서 깨어나 제국을 재건하고 예루살렘까지 순례하는 과정을 담은 미니어처 연작을 남기기도 했다. 17세기 영국 외교관 토마스 로는 황금문 근처의 돌을 가져가려다 터키인들의 미신적인 두려움 때문에 거절당한 일화를 기록하기도 했다.
"대리석 황제" 전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그리스인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고, 19세기 그리스 독립 전쟁 시기 민족적 정체성을 고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근대 그리스 왕국이 성립된 후, 초대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는 장남의 이름을 콘스탄티누스로 지어 비잔티움 황제의 계승자임을 암시했고, 이는 그리스인들에게 큰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콘스탄티노스 1세가 발칸 전쟁에서 승리하며 테살로니키를 탈환하자, 많은 이들은 그가 "콘스탄티노스 12세"로서 콘스탄티노플까지 되찾을 것이라 믿었다. 이러한 기대는 1922년 그리스-터키 전쟁의 패배로 좌절되었지만,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여전히 그리스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오늘날 아테네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그리스 왕국의 마지막 국왕 이름도 콘스탄티노스 2세였다. 또한 근대 그리스에서는 그를 주제로 한 음악이나 영화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제작되었다.
한편, 일본의 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는 "오탄친・파레오로가스"(オタンチン・パレオロガス)라는 독특한 욕설이 등장한다.[3][4][5] 이는 일본어에서 바보를 뜻하는 "오탄친"(おたんちん)과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의 영어식 발음을 결합한 소세키의 말장난으로 알려져 있다.[4][5][6][7] 이 욕설이 콘스탄티노스 11세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비잔틴 미술 연구가 마스다 토모유키는 제국을 잃은 마지막 황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보다는, 강대국에 휘둘린 비운의 황제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정이 담긴 표현일 수 있다고 보았다.[5] 반면 철학자 쿠노 아키라나 문헌학자 야마구치 요시지는 이 표현이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역사적 평가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단순한 언어유희일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한다.[4]
4. 가족 관계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두 번 결혼했지만 두 번의 결혼 모두 짧았고 자녀를 남기지 못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전에 세 번째 결혼을 시도했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결국 자녀 없이 사망했다.
첫 번째 부인은 에피로스 데스포타토( Ἐπιρῶτα Δεσποτάτο|에피로타 데스포타토ell )의 군주 카를로 1세 토코의 조카인 마달레나 토코였다. 그녀는 결혼 후 테오도라로 개명했으며, 1428년 7월 1일 결혼했지만 1429년 11월에 사망했다. 두 번째 부인은 에게해 레스보스섬의 제노바인 군주 도리노 1세 가틸루시오의 딸인 카테리나 가틸루시오였다. 그녀 역시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442년에 사망했다. 두 결혼 모두 자녀는 없었다. 황제로 즉위한 후 세 번째 결혼이 계획되었고, 상대는 조지아 공주로 결정되었으나, 신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출발하기 전에 포위 공격이 시작되어 결혼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만약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제위는 그의 형제인 토마스나 데메트리오스가 계승했을 것이다. 이들은 당시 모레아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 미망인과 여러 딸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전해져 왔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453년 7월, 훗날 교황 비오 2세가 되는 아이네아스 실비우스가 교황 니콜라스 5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견된다. 아이네아스는 그의 저서 ''코스모그라피아''(1456–1457)에서 메흐메트 2세가 승리 후 축하 행사에서 황후와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딸들을 모욕하고 살해했다고 더 자세히 서술했다. 또한 그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의 가상의 아들이 금각만을 건너 갈라타로 도망쳤다고도 썼다.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아내와 딸들에 대한 이야기는 15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퍼진 차르그라드 함락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더욱 확산되었을 수 있는데, 이 이야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다. 16세기 프랑스 연대기 작가 마티외 데스쿠시는 메흐메트 2세가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황후를 강간한 뒤 자신의 하렘에 가두었다고 기록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의 가상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현대 그리스 민담에도 남아 있다. 20세기 후반까지 전해진 한 이야기에 따르면, 콘스탄티노스 11세의 가상의 황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임신 6개월이었고, 메흐메트 2세가 북쪽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황후가 아이를 키워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어에 능통하게 되었지만, 성인이 된 후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결국 술탄이 되었고, 이후 모든 오스만 술탄이 그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허구이지만, 일부 사실과 연결될 여지는 있다.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형제 토마스의 손자인 안드레아스 팔라이올로고스는 16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살면서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오스만 궁정 관리로 일했다.
또 다른 후기 민담에서는 메흐메트 2세의 승리 후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황후가 황궁에 스스로를 가두었다고 전한다. 오스만 군대가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궁전에 들어가지 못하자 메흐메트 2세는 그녀에게 세 가지 양보를 해야 했다고 한다. 첫째, 도시에서 술탄이 주조하는 모든 동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또는 콘스탄티누스의 이름이 새겨져야 한다. 둘째, 그리스인만을 위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 셋째, 기독교인 사망자의 시신은 기독교 관습에 따라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5. 기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의 증손자인 오르한 첼레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었다. 오르한은 메흐메트 2세를 제외하고 오스만 왕조의 유일한 생존 남성 구성원이었기에 잠재적인 술탄 경쟁자였다. 메흐메트 2세는 오르한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억류하는 대가로 매년 비용을 지불하기로 했으나, 1451년 콘스탄티노스는 지불액이 부족하다며 항의하고, 더 많은 돈을 주지 않으면 오르한을 풀어 오스만 내전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는 과거 그의 아버지 마누엘 2세도 사용했던 위험한 전략이었다. 메흐메트의 대재상 찬달르 할릴 파샤는 이 메시지를 받고 비잔티움 제국의 무능함에 경악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오랫동안 비잔티움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결국 오스만 제국에 충성했으며 비잔티움 사절들에게 다음과 같이 분노를 표출했다고 한다.
> 너희 어리석은 그리스인들아, 나는 너희의 교활한 방법에 질렸다. 고인이 된 술탄은 너희에게 관대하고 양심적인 친구였다. 현 술탄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콘스탄티누스가 그의 대담하고 성급한 손아귀를 피한다면, 그것은 신이 너희의 교활하고 사악한 계략을 계속해서 간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공상으로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보들이며, 우리의 최근 조약에 잉크가 겨우 마른 때에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힘이나 이성이 없는 아이들이 아니다. 너희가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라. 너희가 트라키아에서 오르한을 술탄으로 선포하고 싶다면, 계속해라. 너희가 헝가리인들을 다뉴브 강 너머로 데려오고 싶다면, 그들을 오게 해라. 너희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곳들을 되찾고 싶다면, 시도해 보아라. 하지만 이것을 알아라. 너희는 이러한 일들 중 어느 것에도 진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남아 있는 작은 것들을 잃는 것뿐이다.
콘스탄티노스와 그의 고문들은 새로운 술탄 메흐메트 2세의 결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효과적인 대외 정책을 수립하지 못했고, 주로 전임자들의 정책을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에 힘쓰면서도 오스만 제국에 대해 애원과 대결을 오가는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결국 재앙을 초래했다.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누스가 1449년의 휴전 조건을 어겼다고 간주하고, 기존의 작은 양보들을 철회했다. 오르한 석방 위협은 메흐메트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이라는 그의 본래 목표에 집중할 명분을 주었다. 메흐메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이 오스만 제국의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도시 함락은 잠재적 십자군의 거점 확보를 막고, 다른 경쟁 세력의 손에 도시가 넘어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또한 메흐메트는 고대 그리스-로마 및 비잔티움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아킬레우스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인물들을 영웅으로 여겼다.
메흐메트는 즉시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1452년 봄, 보스포루스 해협 서쪽에 루멜리히사르 성 건설을 시작하여 이미 존재하던 동쪽의 아나돌루히사르 성과 마주 보게 했다. 이 두 성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행을 통제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봉쇄할 수 있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메흐메트의 할아버지 메흐메트 1세가 아나돌루히사르를 지을 때 마누엘 2세의 허락을 구했던 점과 기존 휴전 협정을 상기시키며 항의했지만, 이는 시간 벌기에 불과했다. 메흐메트는 성을 짓는 지역이 무인지대이며 콘스탄티누스는 성벽 밖 영토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일축했다.
루멜리히사르가 1452년 8월 완공되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공포가 확산되었다. 성 건설 과정에서 일부 지역 교회가 철거되고 오스만 군대가 마르마라 해 연안의 비잔티움 농경지에서 가축을 방목하면서 지역 그리스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 격분한 콘스탄티누스는 메흐메트 2세에게 선전포고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문을 닫고 성내 모든 터키인을 체포했으나, 사흘 만에 이를 철회하고 포로들을 석방했다. 그러나 이후 메흐메트가 이탈리아 선박을 나포하고 선원들을 처형하자, 콘스탄티누스는 마지못해 성 안의 모든 터키인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다가올 봉쇄나 포위 공격에 대비하여 물자를 모으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수리하는 데 힘썼다. 성벽 복원은 1452년 말 완료되었다. 그는 서방에 절박하게 지원을 요청했다. 베네치아에 사절을 보내 즉시 증원군을 보내지 않으면 도시가 함락될 것이라고 호소했지만,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내 분쟁으로 병력 지원이 어렵다고 답했다. 그러나 1452년 11월 오스만 제국이 베네치아 상선을 격침하고 선원들을 처형하자 베네치아의 태도가 바뀌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모레아의 형제들, 아라곤과 나폴리의 알폰소 5세에게 렘노스 섬을 대가로 지원을 요청했고, 헝가리의 훈야디 야노스에게는 셀림브리아나 메셈브리아를 약속하며 도움을 청했다. 키오스 섬의 제노바인들에게도 금전적 대가를 약속하며 지원을 간청했지만, 실질적인 응답은 거의 받지 못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마누엘 2세의 아들 중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라는 이름을 가진 두 번째 아들이다. 사실 요안니스 8세 다음에 태어난 둘째 아들로 또 다른 콘스탄티노스가 있었으나(1393년~1398년 사이 출생 추정), 어린 시절 모레아로 피신했다가 모넴바시아에서 요절했다(1405년 이전 사망 추정). 또한 콘스탄티노스 11세와 그의 동생 데메트리오스 사이에는 미카엘(미하일)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나(1406년경 출생), 역시 일찍 사망했다.
5. 1. 콘스탄티노스 12세, 13세 설
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고스는 일반적으로 그 이름을 가진 11번째 황제로 여겨진다.[9] 따라서 그는 통상 '콘스탄티누스 11세'로 불리는데, 'XI'는 중세 이후 군주제에서 같은 이름을 가진 통치자들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 재위 번호이며, 동일 영토를 통치한 같은 직책의 통치자들을 구분하는 데 쓰인다. 재위 번호는 로마 제국에서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고, 비잔티움 제국에서도 이러한 관행은 도입되지 않았다. 대신 비잔티움인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황제들을 구분하기 위해 별명(예: 현재 미카엘 3세로 번호가 매겨진 "미카엘 술꾼")이나 부계명(예: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아닌 "마누엘의 아들 콘스탄티누스")을 사용했다. 비잔티움 황제들의 현대적인 번호 매기기는 순전히 역사적 발명품으로, 에드워드 기번이 그의 저서 ''로마 제국 쇠망사''(1776~1789)에서 시작하여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창건자이자 최초의 기독교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황제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다. 현대 역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을 가진 11명의 황제를 인정하지만, 이전의 저술에서는 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고스의 번호를 다르게 매긴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기번은 두 명의 어린 공동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레카페노스(924~945년 공동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두카스(1074~1078년, 1081~1087년 공동 황제)를 포함하여 그를 '콘스탄티누스 13세'로 번호를 매겼다. 현재 통용되는 번호인 'XI'는 샤를르 르 보의 ''Histoire du Bas-Empire en commençant à Constantin le Grand'' 개정판이 1836년에 출판되면서 확립되었다. 초기 화폐학 저술에서는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공동 황제들이 주조한 많은 동전 때문에 일반적으로 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고스에게 더 높은 번호를 부여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으로 통치자로 공식 인정받은 황제, 즉 명목상 공동 황제였지만 최고의 칭호를 가졌던 인물까지 포함하면 그 정확한 수에 혼란이 생긴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콘스탄티누스 3세(407~411)로 알려진 서로마의 찬탈자와 7세기에 짧게 통치한 비잔티움의 콘스탄티누스 3세가 있다. 또한 오늘날 콘스탄스 2세(재위 641–668)로 알려진 황제는 실제로는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으로 통치했으며, 때때로 콘스탄티누스 3세로 불리기도 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는 콘스탄티누스 라스카리스인데, 그는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 당시 니케아 제국의 첫 황제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실제로 황제로 통치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때때로 '콘스탄티누스 11세'로 계산되기도 한다. 이 경우 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고스는 '콘스탄티누스 12세'가 된다. 때때로 콘스탄티누스 라스카리스는 '콘스탄티누스 (11세)'로, 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고스는 '콘스탄티누스 11세 (12세)'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콘스탄티누스 11세를 “12세” 또는 “13세”로 세는 방법도 존재한다.
- 콘스탄티노스 12세 설: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 당시 잠시 황제로 추대되었던 콘스탄티누스 라스카리스(니케아 제국 초대 황제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의 형)를 콘스탄티누스 11세로 간주하고,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고스를 12세로 세는 방식이다.
- 콘스탄티노스 13세 설: 7세기 황제 콘스탄스 2세의 본명이 “콘스탄티누스”였던 점에 착안하여 그를 “콘스탄티누스 4세”로 간주한다. 이에 따라 그 이후의 황제들(콘스탄티누스 4세 → 5세, 콘스탄티누스 5세 → 6세 등)의 번호를 하나씩 밀어 세고, 여기에 더해 콘스탄티누스 라스카리스를 “콘스탄티누스 12세”로 포함시켜 마지막 황제를 13세로 보는 방식이다. (이는 기번이 공동 황제들을 포함하여 13세로 센 것과는 다른 계산 방식이다.)
만약 명목상의 공동 황제까지 포함하여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으로 공식 인정받은 모든 통치자를 센다면, 그 수는 18명에 달한다. 레오 5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바실 1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 레카페노스, 콘스탄티누스 두카스 외에도 콘스탄스 2세, 콘스탄티누스 라스카리스, 서로마의 콘스탄티누스 3세 등을 모두 포함하여 번호를 매기면 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고스는 '콘스탄티누스 18세'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공동 황제를 계산에 포함하지 않는데, 그들의 통치 범위는 대부분 명목상이었고 독립적인 최고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고 권력을 가졌던 황제들(서로마 콘스탄티누스 3세, 콘스탄스 2세, 콘스탄티누스 라스카리스 등)만을 포함할 경우, 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고스의 번호는 '콘스탄티누스 14세'가 된다.
참고로, 마누엘 2세에게는 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고스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이 두 명 있었다. 요안니스 8세 다음에 태어난 둘째 아들(1393~1398년 출생 추정) 역시 콘스탄티누스였으나, 어린 시절 모레아로 피신했다가 모넴바시아에서 요절했다(1405년 이전 추정). 콘스탄티누스 11세와 그의 동생 데메트리오스 사이에는 미카엘(미하일)이라는 또 다른 아들이 있었으나(1406년경 출생), 역시 일찍 사망했다.
참조
[1]
웹사이트
Constantine XI Palaeologus Byzantine emperorNero Roman emperor
https://www.britanni[...]
[2]
서적
The Fall of Constantinople: The Ottoman Conquest of Byzantium
Osprey Publishing
[3]
서적
吾輩は猫である
岩波書店
1990-04-16
[4]
간행물
漱石の揶揄
http://www.city.heki[...]
碧南市哲学たいけん村 無我苑
2014-03-01
[5]
간행물
閉会の挨拶
https://www.waseda.j[...]
2015-10
[6]
웹사이트
夏目漱石「吾輩は猫である」83
https://digital.asah[...]
朝日新聞社
2024-10-08
[7]
웹사이트
〈7〉漱石の略式結婚
https://www.city.kum[...]
熊本市西区
2022-09-02
[8]
기타
[9]
기타
[10]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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