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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스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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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스 칸은 14세기 후반 조치 울루스(금장 한국)의 분열된 세력 중 하나인 오르다 울루스에서 세력을 확장한 칸이다. 칭기즈 칸의 후손으로, 1368/1369년 쿠틀루크 콰자를 몰아내고 칸이 되었다. 동쪽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우며 금장 한국 재통합을 시도했으나, 티무르와의 갈등으로 인해 실패했다. 그는 카자흐 칸국의 초대 칸들과도 연관되어 있으며, 여러 아들들이 그의 뒤를 이어 권력 다툼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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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스 칸
우루스 칸
기본 정보
재위 기간1369년 ~ 1377년
유형
전임자침타이
후임자토크타키야
재위 기간21373년 ~ 1375년
유형2
전임자2무함마드-술탄
후임자2카간 베그
개인 정보
아버지바디크
종교수니파
가문
왕조보르지긴 가문

2. 혈통 및 가계

자미 알-타와리흐, ''무이즈 알-안삽'', ''타와리흐-이 구지다-이 누스라트-나마''에 따르면, 우루스의 계보는 칭기즈 칸 - 조치 - 투카-티무르 - 우즈-티무르/우룽-티무르 - 아치크 - 타크타크 - 티무르 카와자 - 바디크 - 우루스로 이어진다.[1] 그러나, 조치의 아들 오르다의 가상적인 계보는 이전 문헌에서 발견되었으며, 많은 작품에서 계속 인용되고 있다.[2]

집사』 조치 칸기에 따르면, 조치의 13남 토카 테무르에게는 바이 테무르, 바얀, 우룬 테무르, 킨 테무르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셋째 아들 우룬 테무르(اورنك تيمور|Ūrunk Tīmūrotk)에게는 아지키(اجيقی|ajīqīotk 또는 اجق|ajiqotk), 아리크리(아즈ィ크리), 사리자, 키라키즈의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아지키에게는 바흐티야르(بختيار|bakhtiyārotk)라는 아들만이 언급되지만, 티무르 왕조 시대 계도 자료 『고귀 계보』에는 바흐티야르 외에 바키크(باقيق|bāqīq?otk 또는 ماقيق|māqīq?otk)라는 형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키크의 아들은 테무르 호자(تيمور خواجه|tīmūr khwājaotk), 그의 아들은 바디크(بادق|bādiqotk 또는 يادق|yādiqotk)이며, 바디크의 아들이 우루스이다.

2. 1. 가계도

칭기즈 칸의 계보

[1]

집사』 조치 칸기에 따르면, 조치의 13남 투카 티무르에게는 바이 테무르, 바얀, 우룬 테무르, 킨 테무르의 4명의 아들이 있었다.[1]

우룬 테무르(اورنك تيمور|Ūrunk Tīmūrotk)에게는 아지키(اجيقی|ajīqīotk 또는 اجق|ajiqotk), 아리크리(아즈ィ크리), 사리자, 키라키즈의 4명의 아들이 있었다.[1]

집사』에서는 아지키에게 바흐티야르(بختيار|bakhtiyārotk)라는 아들만이 언급되지만, 티무르 왕조 시대 계도 자료 『고귀 계보』에는 바흐티야르 외에 바키크(باقيق|bāqīq?otk 또는 ماقيق|māqīq?otk)라는 형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키크의 아들은 테무르 호자(تيمور خواجه|tīmūr khwājaotk), 그의 아들은 바디크(بادق|bādiqotk 또는 يادق|yādiqotk)이며, 바디크의 아들이 우루스이다.[1]

3. 생애

1368년, 수그나크에서 칸위에 오른 우루스 칸은 베르디베크 칸 사후 혼란에 빠진 조치 울루스를 통합하고자 했다. 1372년 사라이를 점령했으나, 마마이와의 충돌을 피하고 시르다리야 방면으로 돌아갔다.[10]

동쪽에서 자리를 잡은 우루스는 금장의 전통적인 수도인 볼가 강 하류의 사라이를 차지하려 했다. 1373년에 베글레르베그 마마이의 후원자인 무함마드-술탄을 쫓아냈고 잠시 그 도시를 점령했으나, 곧 아스트라한의 지역 통치자 하지 체르케스와 시바니드 일 베그에게 잃었다. 1374년에 마마이가 다시 무함마드-술탄을 위해 사라이를 되찾았을 때, 우루스는 그 도시를 다시 성공적으로 공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을 오래 지키지 못하고 1375년에 일 베그의 아들 카간 베그에게 잃었다.

1376년, 티무르의 지원을 받는 토크타미쉬의 침공을 여러 차례 받았다. 우루스 칸은 토크타미쉬의 아버지인 토이 호자를 죽였는데, 토크타미쉬는 티무르에게 망명하여 지원을 받았다.[10] 첫 번째 침공에서 우루스 칸의 아들 쿠틀루-부카는 토크타미쉬를 격퇴했으나 전사했다. 두 번째 침공에서는 장남 토크타키야가 패했으나 토크타미쉬에게 부상을 입혀 후퇴시켰다.[10] 세 번째 침공에서는 티무르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왔으나, 우루스 칸은 오트라르에 군대를 보내고 자신은 수그나크를 지키며 지구전을 펼쳤다. 겨울이 오면서 양측은 휴전했고, 티무르는 케쉬로 돌아갔다.

1377년 봄, 티무르의 재침공 때 우스튜르트 고원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자연사 또는 부상으로 인한 전사라는 설이 있다.[10] 우루스 칸은 조부 엘젠을 따라 수그나크에 여러 건축물을 기증했으며,[10] 1374년-1375년1377년-1378년에 사라이에서 주조한 화폐가 남아있다.

3. 1. 초기 생애

우루스 칸은 조치의 열셋째 아들 투카-티무르의 후손이었다. 1260년, 크림 반도에서 투카-티무르의 이름으로 동전이 주조되었을 수도 있다. 몽케-티무르가 금장(Golden Horde)을 통치했을 때, 그는 투카-티무르의 아들 우룽-티무르(우즈-티무르, 우룽바쉬라고도 불림)에게 크림 반도의 땅을 주었고, 이 땅은 그의 후손들에게 유지되었다.[3]

우루스 칸의 초기 생애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1350년대에 우루스는 볼가 강 지역에서 금장의 남동부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오르다 칸의 울루스였는데, 1330년 우즈베크 칸에 의해 억압되었다. 이곳은 시그나크에서 칸을 대신하여 키야트 총독 이사타이의 아들 지르-쿠틀루크가 통치했다. 그는 우루스가 소규모의 측근들과 함께 코사크 활동을 하던 중 충돌로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르-쿠틀루크는 그의 아들 팅기즈-부카가 총독직을 이어받아 반대 세력을 가혹하게 진압했다.[4]

칸 베르디 베크가 죽어갈 무렵, 팅기즈-부카는 자신의 칸을 세우기 위해 음모를 꾸몄지만, 그의 선택인 투카-티무르의 후손 카라 노가이는 그를 배신하고 살해했다(1359/1360). 카라 노가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다의 전 울루스의 왕위를 차지했지만, 1363년에 단 3년 만에 사망했다.[5] 그는 조카(투글루크-티무르), 사촌(무바라크 콰자, 그는 자신의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형제(쿠틀루크 콰자)의 뒤를 이었다.[6] 우루스는 어떻게든 팅기즈-부카의 분노를 피했고, 먼 친척들의 짧은 통치를 견뎌냈다. 1368/1369년에 그는 쿠틀루크 콰자로부터 오르다의 울루스 왕위를 빼앗아 스스로 칸이 되었다.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고 권위를 높이기 위해 그는 자신의 반대자로 여겨지는 왕자와 에미르들을 제거했다. 이러한 희생자 중 한 명은 미래의 칸 토크타미쉬의 아버지인 그의 사촌 투이 콰자였으며, 이는 후자가 우루스와 그의 아들들에 대한 끊임없는 적대감을 유발했다.

3. 2. 권력 장악

우루스 칸은 조치의 열셋째 아들 투카-티무르의 후손이었다. 1350년대에 우루스는 볼가 강 지역에서 금장의 남동부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오르다 칸의 울루스였는데, 1330년 우즈베크 칸에 의해 억압되었다. 이곳은 시그나크에서 칸을 대신하여 키야트 총독 이사타이의 아들 지르-쿠틀루크가 통치했다. 우루스가 소규모의 측근들과 함께 코사크 활동을 하던 중 충돌로 지르-쿠틀루크는 사망했다. 그의 아들 팅기즈-부카가 총독직을 이어받아 반대 세력을 가혹하게 진압했다.[4]

칸 베르디 베크가 죽어갈 무렵, 팅기즈-부카는 자신의 칸을 세우기 위해 음모를 꾸몄지만, 그가 선택한 투카-티무르의 후손 카라 노가이는 그를 배신하고 살해했다(1359/1360). 카라 노가이는 오르다의 전 울루스의 왕위를 차지했지만, 1363년에 단 3년 만에 사망했다.[5] 그는 조카(투글루크-티무르), 사촌(무바라크 콰자) 그리고 형제(쿠틀루크 콰자)의 뒤를 이었다.[6] 우루스는 팅기즈-부카의 분노를 피했고, 먼 친척들의 짧은 통치를 견뎌냈다. 1368년/1369년에 그는 쿠틀루크 콰자로부터 오르다의 울루스 왕위를 빼앗아 스스로 칸이 되었다.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고 권위를 높이기 위해 그는 자신의 반대자로 여겨지는 왕자와 에미르들을 제거했다. 희생자 중 한 명은 미래의 칸 토크타미쉬의 아버지인 그의 사촌 투이 콰자였으며, 이는 후자가 우루스와 그의 아들들에 대한 끊임없는 적대감을 유발했다.

1368년, 수그나크에서 칸위에 오른 우루스는 바투 가문과 오르다 가문이 단절된 이후 혼란이 지속되던 조치 울루스를 통합하고, 울루스의 좌우 양익 재편을 목표로 1372년 사라이를 점령했다.

3. 3. 킵차크 칸국 재통합 시도

1368년, 수그나크에서 칸위에 오른 우루스 칸은 베르디베크 칸 사후 혼란에 빠진 조치 울루스를 통합하고자 했다. 1372년 사라이를 점령했으나, 마마이와의 충돌을 피하고 시르다리야 방면으로 돌아갔다.[10]

1376년, 티무르의 지원을 받는 토크타미쉬의 침공을 여러 차례 받았다. 우루스 칸은 토크타미쉬의 아버지인 토이 호자를 죽였는데, 토크타미쉬는 티무르에게 망명하여 지원을 받았다.[10] 첫 번째 침공에서 우루스 칸의 아들 쿠틀루-부카는 토크타미쉬를 격퇴했으나 전사했다. 두 번째 침공에서는 장남 토크타키야가 패했으나 토크타미쉬에게 부상을 입혀 후퇴시켰다.[10] 세 번째 침공에서는 티무르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왔으나, 우루스 칸은 오트라르에 군대를 보내고 자신은 수그나크를 지키며 지구전을 펼쳤다. 겨울이 오면서 양측은 휴전했고, 티무르는 케쉬로 돌아갔다.

1377년 봄, 티무르의 재침공 때 우스튜르트 고원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자연사 또는 부상으로 인한 전사라는 설이 있다.[10] 우루스 칸은 조부 엘젠을 따라 수그나크에 여러 건축물을 기증했으며,[10] 1374년-1375년1377년-1378년에 사라이에서 주조한 화폐가 남아있다.

3. 4. 티무르와의 갈등

1368년, 수그나크에서 칸위에 오른 우루스 칸은 베르디베크 칸 사후 혼란에 빠진 조치 울루스의 통합을 목표로 했다. 1372년 사라이를 점령했으나, 볼가강 유역의 실력자 마마이와의 충돌은 피했다.[10]

우루스 칸은 티무르의 지원을 받는 토크타미쉬와 대립했다. 토크타미쉬는 우루스 칸에게 살해된 토이 호자의 아들이었다. 1차 침공에서 우루스 칸의 아들 쿠틀루-부카는 토크타미쉬를 격퇴했으나 전사했다. 2차 침공에서는 우루스 칸의 장남 토크타키야가 패했으나, 토크타미쉬에게 부상을 입혀 후퇴시켰다.[10]

1376년, 티무르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3차 침공을 해왔다. 우루스 칸은 오트라르에 군대를 파견하고, 자신은 수그나크(사우란이라는 설도 있음)를 지키며 지구전을 펼쳤다. 겨울이 되어 양측은 휴전했고, 티무르는 케쉬로 돌아갔다.[10]

1377년 봄, 티무르의 재침공 때 우루스 칸은 우스튜르트 고원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 그의 사인은 자연사 또는 부상으로 인한 전사라는 설이 있다.[10] 우루스 칸은 히즈라력 776년(1374년-1375년)과 779년(1377년-1378년)에 사라이에서 화폐를 주조했다.[10]

3. 5. 죽음

1377년 봄, 티무르의 재침공을 맞아 우스튜르트 고원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사망했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자연사 또는 부상으로 인한 전사라는 설이 있다.[10]

조치의 열셋째 아들 투카-티무르의 후손인 우루스 칸은 1368년 수그나크에서 칸위에 올랐다. 조치 울루스를 통합하고 울루스의 좌우 양익 재편을 목표로 1372년 사라이를 점령했으나, 볼가강 유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마이의 세력과는 다투지 않고 시르다리야 방면으로 귀환했다. 1376년부터 티무르의 지원을 받은 토크타미쉬의 여러 차례 침공을 받았다.

우루스 칸은 이전에 자신의 친족을 죽였는데, 티무르와 결탁한 토크타미쉬는 우루스 칸에게 살해된 친족의 아들이었다. 우루스 칸은 토크타미쉬를 살려주었지만, 토크타미쉬는 탈주와 귀순을 반복한 후 티무르에게 망명했다. 1차 침공에서는 아들 쿠트루크 부카를 시켜 토크타미쉬를 격퇴했지만, 쿠트루크 부카는 전사했다. 2차 침공에서는 장남 토크타키야가 패배했지만 토크타미쉬에게 부상을 입혀 철수하게 만들었다.[10] 3차 침공에서는 티무르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 왔지만, 우루스 칸은 지구전을 펼쳤다. 겨울이 닥치면서 양측은 휴전에 들어갔고, 티무르는 케쉬로 귀환했다.

우루스 칸은 조부 엘젠을 따라 수그나크에 다수의 건축물을 기증했으며,[10] 1374년-1375년1377년-1378년에 사라이에서 주조한 화폐가 현존한다.

4. 카자흐 칸국과의 관계

우루스 칸은 카자흐 칸국의 칸들에게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카자흐 칸국의 초대 칸인 자니베크와 기레이의 증조부였으며, 주변 국가들은 카자흐 칸국을 "우루스 차레프 유르트" 또는 "우루스 하노프 유르트"라고 불렀다. 중세 시대 사람들은 그를 카자흐 칸국의 초대 칸으로 여기기도 했다.[1]

4. 1. 알라샤 칸과의 동일시

카자흐 칸국의 칸들에게 우루스 칸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그는 초대 카자흐 칸인 자니베크와 기레이의 증조부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은 카자흐 칸국을 "우루스 차레프 유르트" 또는 "우루스 하노프 유르트"라고 불렀다. 따라서 중세 시대의 동시대인들은 그를 이 국가의 초대 칸으로 여겼다. 일부 역사가, 특히 라디크 테미르갈리예프는 우루스 칸을 전설적인 알라샤 칸과 동일시하는데, 여러 자료에 따르면 알라샤 칸은 초대 카자흐 칸으로 불렸으며 모든 카자흐 칸과 술탄의 조상으로 여겨졌다. 알라샤 칸의 묘는 울리타우에 위치해 있으며, 조치의 묘에서 멀지 않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알라샤 칸이 칭기즈 칸 자신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5. 후손

우루스 칸은 샤이바니 왕조 초기의 역사서인 『승리의 책이라 불리는 선별된 여러 역사(Tawārīkh-i Guzīda-yi Nuṣrat Nāma)』(1504년경 성립)에 따르면 7명의 아들과 5명의 딸을 두었다.[11][10]


  • 남자

:: 토크타키야

:: 쿠툴루크 부카

:: 투글루크 풀라드

:: 쿠유르추크

:: 토크타 풀라드

:: 사이이드 아흐마드

:: 사이이드 알리

  • 여자

:: 멩그리 베크

:: 시칼 베크

:: 수디 베크

:: 이란 베크

:: 멩그리 투르칸

5. 1. 후손 관련 주요 분쟁

우루스 칸에게는 정치적인 역할을 한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름설명
쿠틀루 부카동쪽을 통치했으며, 우루스가 사라이를 점령하려다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토크타키야아버지를 계승했지만 두 달 만에 사망했다.
티무르 말리크형제를 계승했지만 사촌 토크타미쉬에게 쫓겨났다.
쿠유르추크1395년에서 1397년 사이에 토크타미쉬에게 대항하여 금장 칸국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토크타키야의 아들 베그 풀라드와 쿠유르추크의 아들 바라크 역시 금장 칸국의 칸이 되려고 시도했고, 바라크는 1423년에서 1428년 사이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참조

[1] 간행물
[2] 서적
[3] 간행물
[4] 간행물
[5] 간행물
[6] 간행물
[7] 간행물
[8] 서적
[9] 서적 ジュチ裔諸政権史の研究
[10] 서적 カザフスタン中世史より
[11] 서적 ジュチ裔諸政権史の研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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