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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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자흐 칸국은 1456년에서 1465년 사이에 자니베크 칸과 케레이 칸에 의해 건국된 국가이다. 우즈베크 칸국의 아불-하이르 칸의 지배에 반발한 카자흐 부족들이 모굴리스탄으로 이동하여 건국했으며, 15세기 후반 무함마드 샤이바니와의 초원 지배권 다툼, 16세기 카심 칸 시기 최대 강성기를 거쳤다. 이후 준가르 칸국과의 대립,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 확대 등으로 쇠퇴하여 18세기에는 세 개의 주즈로 분열되었고, 19세기 중반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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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 칸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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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
통용 명칭 | 카자흐 칸국 |
정부 형태 | 반선출 군주제 |
면적 | 3,200,000 km² |
위치 | 중앙아시아 |
공용어 | 킵차크어군 (카자흐어) |
종교 | 수니 이슬람 |
데모님 | 카자흐인 |
수도 | |
수도 목록 | 소자크 (–1469) 시그나크 (1469–1511) 사라이시크 (1511–1521) 시그나크 (1521–1599) 투르키스탄 (1599–1781) 타슈켄트 (1729–1781) 카라 켄기르 (1826–1844) 사리 켄기르 (1844–1847) |
역사 | |
건국 | 케레이와 자니베크가 카자흐 칸국을 건국 (1465년) |
주요 사건 | 카자흐-중가르 전쟁 (1643–1755) 오르불라크 전투 (1643년) 갈단 보쇼그투 칸의 카자흐 침공 (1680–1684) 코사크과의 전쟁 (1709–1724) 맨발의 대탈출 (1723–1727) 아니라카이 전투 (1729/1730) 소주즈의 아불 하이르 칸이 러시아 시민권을 받음 (1731년) 카자흐-청나라 전쟁 (1756–1757) 아블라이 칸이 모든 세 주즈의 칸이 됨 (1771–1781) 중주즈와 소주즈에서 칸의 통치 해체 (1822–1824) 케네사리 카시모프의 반란 (1837–1847) |
멸망 |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 (1847년) |
정치 | |
칸 목록 | 케레이 칸 (초대) 자니베크 칸 (초대) 케네사리 칸 (마지막) |
통치 기간 | 케레이 칸: 1465–1480 자니베크 칸: 1465-1480 케네사리 칸: 1841–1847 |
직함 | 칸 |
이전 및 이후 | |
이전 국가 | 우즈베크 칸국 모굴리스탄 |
이후 국가 | 러시아 제국 |
2. 역사
카자흐 칸국은 1456년에서 1465년 사이, 킵차크 칸국의 후계 국가 중 하나인 우즈베크 칸국에서 분리되어 나온 자니베크 칸과 케레이 칸에 의해 제타이수(일곱 강이라는 뜻) 지역, 즉 현재 카자흐스탄 남동부에서 건국되었다. 이는 아불 하이르 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여러 부족이 모굴리스탄 칸국으로 이주하여 세운 독립 국가였다.
건국 초기에는 우즈베크 칸국의 무함마드 샤이바니와 스텝 지역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5세기 말 부룬두크 칸의 통치 시기에는 군사력을 강화하여 시르다리야강 유역에서 우즈베크 세력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카심 칸(재위 1511년~1518년/1521년) 시대에 카자흐 칸국은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여 영토를 우랄산맥과 카스피해까지 넓혔고, 인구는 백만 명에 달했다. 그는 '카심 칸의 밝은 길'(Қасым ханның қасқа жолы|Qasym hannyñ qasqa jolykaz)이라는 법전을 제정하고 러시아 차르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카심 칸 사후 잠시 혼란기를 겪었으나, 하크나자르 칸(재위 1538년~1580년)과 에심 칸(재위 1598년~1628년)의 통치 아래 다시 안정을 찾고 세력을 회복했다. 하크나자르 칸은 주변의 노가이 칸국, 시비르 칸국, 모굴리스탄 칸국, 부하라 칸국 등과 경쟁하며 영토를 확장하고 지켰다. 에심 칸은 수도를 투르케스탄으로 옮기고 '에심 칸의 옛 길'(Есім ханның ескі жолы|Esım hannyñ eskı jolykaz)이라는 법률을 제정했으며, 타슈켄트를 점령하는 등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동쪽의 준가르 칸국이 강력한 위협으로 등장했다. 살캄-장기르 칸은 오르불라크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으나, 계속된 준가르의 침입으로 칸국은 점차 쇠퇴했다. 특히 1723년의 대규모 침공은 '거대한 재앙'으로 불릴 만큼 큰 피해를 남겼다. 결국 타우케 칸(재위 1680년~1715년/1718년) 사후, 카자흐 칸국은 대주즈(Ұлы жүз), 중주즈(Орта жүз), 소주즈(Кіші жүз)라는 세 개의 주즈로 사실상 분열되었다. 타우케 칸은 '일곱 헌장'(Жеті Жарғы|Jetı Jarğykaz)이라는 법전을 편찬하여 카자흐 사회의 규범을 정립하려 노력했다.
18세기부터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었다. 준가르의 위협과 내부 분열에 시달리던 각 주즈의 칸들은 차례로 러시아의 보호를 받아들이며 복속했다. 아블라이 칸(재위 1771년~1781년)은 중주즈의 칸으로서 세 주즈를 통합하려 노력하고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그의 사후 러시아의 지배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19세기에 들어 러시아 제국은 칸 제도를 폐지하고 직접 통치를 강화하며 식민 정책을 본격화했다. 이에 맞서 케네사리 칸(재위 1841년~1847년)은 아블라이 칸의 손자로서 분열된 카자흐 세력을 규합하여 러시아에 대항하는 대규모 민족 해방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841년 전 카자흐의 칸으로 추대되었으나, 내부 배신과 러시아의 군사적 압박으로 결국 1847년 키르기스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케네사리 칸의 죽음 이후 카자흐 칸국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카자흐 영토는 19세기 후반까지 러시아 제국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2. 1. 건국 (15세기 중반)


카자흐 칸국의 기원은 킵차크 칸국의 동부 지역이었던 백장 칸국에서 찾을 수 있다. 1361년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된 백장 칸국은 한동안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했으나, 1428년 바라크 칸이 사망하면서 분열되었다. 백장 칸국의 영토는 우즈베크 칸국과 노가이 오르다로 나뉘었고, 우즈베크 칸국은 바라크 칸 살해에 가담했던 아불 하이르 칸이 통치하게 되었다. 아불 하이르 칸의 통치 아래 우즈베크 칸국은 내부 문제와 오이라트의 침략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특히 1457년 오이라트에게 패배하면서 아불 하이르 칸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459년경, 칭기즈 칸의 장남 주치의 후손이자 우루스 칸의 증손자인 자니베크 칸과 케레이 칸은 아불 하이르 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여러 부족을 이끌고 우즈베크 칸국을 떠났다. 이 사건은 "대이동"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은 동쪽의 모굴리스탄 칸국으로 이주했다. 모굴리스탄 칸국의 에센 부카 2세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서쪽 국경 지대인 추강 유역의 제타이수(일곱 개의 강이라는 뜻) 지역에 정착하도록 도왔다. 이는 아불 하이르 칸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지원이기도 했다.
1465년 혹은 1466년,[4] 자니베크 칸과 케레이 칸을 따르는 약 20만 명의 유목민들은 제타이수 지역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며 카자흐 칸국을 건국했다. 이는 카자흐 민족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건국 초기에는 케레이 칸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나, 1473년 혹은 1474년 그가 사망하자 자니베크 칸이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36][37]
새롭게 건국된 카자흐 칸국은 곧바로 우즈베크 칸국과의 스텝 지역 패권을 둘러싼 경쟁에 돌입했다. 1468년 자니베크 칸은 우즈베크 칸국을 침공하여 카자흐 독립 전쟁을 시작했다. 아불 하이르 칸은 이에 맞서 원정을 준비했으나 제타이수로 향하던 중 사망했다. 이후 아불 하이르 칸의 손자인 무함마드 샤이바니가 우즈베크 세력을 이끌었으나, 1470년 카자흐 칸국은 투르키스탄(당시 이아시)에서 샤이바니 군대를 격파하고 우즈베크 세력을 시르강 남쪽의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방면으로 몰아냈다.
16세기 역사가 미르자 무함마드 하이다르 두글라트는 그의 저서 ''타리크-이 라시디''에서 카자흐 칸국의 건국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4]
:그 당시, 아불-하이르 칸은 다슈트-이-키프차크에서 완전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주치의 술탄들과 전쟁을 벌였고, 자니 베그 칸과 카라이 칸은 그를 피해 모굴리스탄으로 도망갔다. 이산 부가 칸은 그들을 매우 영예롭게 맞이했고, 모굴리스탄의 서쪽 경계인 추 근처의 쿠지 바시를 그들에게 넘겨주어 그들은 평화롭게 살았다. 아불-하이르 칸이 사망하자 우즈베크족의 울루스는 혼란에 빠졌고, 그들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났다. 그들 대부분은 카라이 칸과 자니 베그 칸의 편에 섰다. 그들은 약 20만 명이었고, 우즈베크-카자크라는 이름을 받았다. 카자크 술탄들은 AH 870년 (서기 1465–1466년)에 통치를 시작했고 (하지만 신이 가장 잘 아신다), 940년 (서기 1533–1534년)까지 우즈베키스탄의 대부분 지역에서 절대 권력을 누렸다.
2. 2. 초기 발전 (15세기 후반 ~ 16세기)
1446년 우즈베크의 아불-하이르 칸이 시르강 중류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점령하자, 시르강 중류를 지배하던 청장 칸국의 잔당(당시 사료에서는 '''카자흐-우즈베크'''라 불림)은 토카 테무르 가문의 케레이와 자니베크를 옹립하여 아불-하이르 칸에 반기를 들고 모굴리스탄 변경으로 이주했다[36]。 1468년 아불-하이르 칸이 사망 후 우즈베크의 울루스가 분열되자, 그 대부분이 카자흐 측에 합류하며 케레이와 자니베크를 군주로 추대하여 '''카자흐 칸국'''이 형성되었다. 이때 인구는 20만 명에 달했다[37]。비록 자니베크 칸과 케레이 칸 모두 건국 군주로 여겨지지만, 초기에는 케레이 칸이 권력의 중심이었다. 1470년 케레이 칸 사후 자니베크 칸이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카자흐 칸국의 초기 역사는 우즈베크인 지도자 무함마드 샤이바니에 맞서 스텝 지배권을 확보하는 과정이었다. 1470년 카자흐는 무함마드 샤이바니를 투르키스탄에서 물리치고 우즈베크 세력을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남쪽으로 밀어냈다.
1480년 케레이 칸의 아들 부룬두크가 칸이 되었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재위: 1473년/1474년 - 1511년).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카자흐는 5만 명 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시르다리야강 유역의 무함마드 샤이바니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했으며, 1508년부터 1509년 사이의 샤이바니 칸의 침공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카심 칸은 자니베크 칸의 아들로 1511년 칸위에 올랐으며 (다른 자료에 따르면 재위: 1511년 - 1518년), 이후 카자흐 칸국은 그의 후손들이 통치하게 된다. 그의 치세에 카자흐 칸국은 최대 강성기를 맞이했다. 영토는 우랄산맥과 카스피해까지 확장되었고, 인구는 백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킵차크 초원의 유목민 대부분이 카자흐의 영향 아래 들어왔으며, 시르다리야강 중류와 세미레치예 지방의 오아시스 도시들도 지배했다. 주요 적대 세력은 서쪽의 노가이 오르다였는데, 카심 칸은 1520년 노가이의 수도 사라이주크를 점령하여 노가이 세력을 아스트라한 칸국 방면으로 몰아냈다.
카심 칸은 1520년 카자흐 최초의 성문법인 Қасым ханның қасқа жолы|카심 한능 카스카 졸르kk (, "카심 칸의 밝은 길")을 제정했다. 외교적으로는 러시아 차르국과 처음으로 공식 관계를 수립했으며, 셰이바니 세력이 약화된 후에는 티무르의 바부르와 동맹을 맺었다. 이는 무굴 제국과 사마르칸트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카심 칸은 예술, 문학, 종교의 후원자였으며, 그의 통치하에 이슬람은 카자흐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사회·문화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페르시아 역사가의 기록 "타리크-사파비"는 카심 칸이 다슈트-이 키프차크 대부분을 장악했다고 전하며, 그의 8천 군대가 호라산 병합 시 셰이바니 칸을 도왔다고 기록했다. 미르자 무하마드 하이다르는 그의 저서 ''타리크-이 라시디''에서 카심 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5]
>"카심 칸은 다슈트-이 키프차크 전체를 정복했다. 그의 군대는 백만 명이 넘었다. 주치 칸을 제외하고는 그 나라에서 그보다 더 위대한 칸은 없었다."
1598년 샤이바니 왕조의 압둘-무민 칸 암살 후 혼란을 틈타 카자흐 칸국이 샤이바니 왕조를 침공했으나, 피르 무함마드 2세에게 격퇴당했다.
2. 3. 중흥기 (16세기 후반 ~ 17세기 초)
하크나자르 칸(재위 1538년~1580년)[43] 또는 아크 나자르 칸[44]으로도 알려진 카크나자르 칸의 통치 아래 카자흐 칸국은 여러 방면에서 경쟁에 직면했다. 서쪽으로는 노가이 칸국, 북쪽으로는 시비르 칸국, 동쪽으로는 모굴리스탄 칸국, 남쪽으로는 부하라 칸국과 경쟁해야 했다.[45][46][47]하크나자르 칸은 타슈켄트에서 부하라 칸국을 상대로, 그리고 차가타이 칸국의 지도자 압두르-라쉬드 칸을 상대로 주요 전투를 이끌었다. 그는 빼앗겼던 카자흐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여 사리-아르카 북부 지역을 카자흐 칸국으로 반환시켰다. 노가이 칸국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벌여 사라이지크를 되찾고 주변 카자흐 영토를 회복했다. 또한 히바와의 전투에서 망기슐라크 반도를 정복하고 오이라트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동쪽으로는 모굴리스탄 칸국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벌여 제티수 지역을 카자흐 칸국에 최종적으로 병합하려 했으며, 이 작전은 모굴리스탄을 패배시키는 성공을 거두었다. 1568년에는 엠바강에서 노가이 칸국 군대를 격파하고 아스트라한까지 진출했으나, 러시아 군대에 의해 물러나야 했다.[6][8][9] 북쪽에서는 쿠춤 칸이 이끄는 시비르 칸국의 위협도 존재했다.
하크나자르 칸 사후, 자니베크 칸의 손자이자 자디크 술탄의 아들인 시가이 칸(재위 1580년~1582년)이 칸위에 올랐다. 당시 80세의 고령이었지만 카자흐족 사이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시가이 칸은 하크나자르 칸의 외교 정책을 이어받아 샤이바니 왕조 계승자들 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카자흐 국가를 강화하고자 했다. 1582년, 그는 부하라의 압둘라 칸 및 자신의 아들 타우케엘 술탄과 연합하여 타슈켄트의 통치자 바바 술탄을 상대로 울리타우 원정을 조직했다. 바바 술탄은 패배하여 데시트-키프차크 초원으로 도망쳤고, 우즈베크와 카자흐 연합군은 사리수와 울리타우까지 추격했다. 시가이 칸은 이 원정 도중 사망했다. 그의 아들 타우케엘 술탄은 투르케스탄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바 술탄을 살해하고 그 시신을 압둘라 칸에게 보냈다. 이에 만족한 압둘라 칸은 사마르칸트 지역의 아프리켄트 주를 시가이 칸에게 사후 하사했다.
타우에켈 칸(재위 1582년~1598년) 사후, 시가이 칸의 또 다른 아들인 에심 칸(재위 1598년~1628년)이 즉위했다. 에심 칸은 "엔세게이 보일르 에르 에심(Ensegei boily er Esim)", 즉 '키가 매우 큰 남자 에심'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통치기는 카심 칸과 하크나자르 칸 이후 카자흐 칸국의 세 번째 부흥기로 평가받는다. 에심 칸은 칸국의 수도를 시그나크에서 투르케스탄으로 옮기고 카라칼파크족의 반란을 진압했다.
에심 칸의 통치 초기에는 부하라 칸국과 15년간의 평화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1613년, 에심 칸은 이전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우즈베크족을 격파하고 사마르칸트를 카자흐 칸국에 복속시켰다. 이후 그는 카자흐 군대를 통합하여 타슈켄트의 칸 투르순 무하마드와 부하라 칸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다. 1627년, 에심 칸은 이들을 격파하고 타슈켄트 칸국을 폐지하며 전쟁을 종결지었다.
에심 칸은 또한 Есім ханның ескі жолы|예심 한느녜 예스키 졸르kaz (라틴 문자 표기: ''Esım hannyñ eskı joly'', "에심 칸의 옛 길")라고 불리는 법률을 제정하여 칸국의 통치 기반을 다졌다.
2. 4. 쇠퇴기 (17세기 중반 ~ 18세기)
살캄-장기르 칸의 통치 기간 동안, 동쪽에서 준가르 칸국이라는 새롭고 강력한 경쟁 세력이 등장했다. 1643년 겨울, 에르데니 바투르가 이끄는 준가르 군대가 카자흐 영토를 공격하면서 주요 충돌이 시작되었다. 준가르족은 제티수 지역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고 약 1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46] 이에 살캄-장기르 칸은 6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르불라크 강에서 준가르 군대와 맞섰다. 이 전투가 유명한 오르불라크 전투이다. 사마르칸트의 통치자 잘랑토스 바하두르가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장기르 칸을 지원했으며, 그의 도움으로 카자흐 군대는 승리하여 에르데니 바투르는 후퇴해야 했다. 이 전투에서 준가르 군대는 약 1만 명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1652년, 카자흐족과 준가르족 간의 전투에서 카자흐 군대가 패배하고 살캄-장기르 칸은 전사했다.장기르 칸 사후, 타우케 칸이 1672년부터 카자흐 칸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타우케 칸은 분열된 카자흐 세력을 규합하여 대초원에서 준가르의 진격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약화된 카자흐 군대는 사이람 전투에서 다시 패배했고, 주요 도시들을 준가르에게 빼앗겼다. 타우케 칸은 동남쪽의 키르기스족 및 타림 분지의 위구르족과 동맹을 모색하기도 했다. 1687년 준가르 군대가 하지라트-에 투르키스탄을 포위했으나, 부하라 칸국의 수반 쿨리 칸의 개입으로 물러났다.
1697년 체왕 랍탄이 준가르 칸국의 지도자가 되면서 카자흐 칸국에 대한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1709년, 1711–1712년, 1714년, 1718년에 걸쳐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계속된 전쟁으로 카자흐 칸국은 더욱 쇠약해졌고 인구의 거의 3분의 1을 잃었다. 1718년 타우케 칸이 사망하자, 카자흐 칸국은 사실상 세 개의 주즈( жүз )로 분열되었다: 대주즈(Ұлы жүз), 중주즈(Орта жүз), 소주즈(Кіші жүз). 이후 각 주즈는 독자적인 칸을 선출하게 되었다. 한편, 타우케 칸은 카자흐 법전을 정비하여 Жеті Жарғыkk (, "일곱 헌장")라는 이름으로 재발행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18세기 전반, 정치적 통일성을 상실한 카자흐의 세 주즈는 동쪽 준가르의 침공에 시달렸다. 특히 1723년의 침공은 "거대한 재앙(악타반 슈브룬두)"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피해를 입혔다. 준가르의 위협에 직면한 소주즈의 아불-하이르 칸 (재위: 1716년 - 1748년)은 1730년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러시아 제국에 사절을 보내 보호를 요청하며 복속했다. 이를 계기로 다른 주즈의 칸들도 러시아 제국에 복속을 표명하며 준가르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복속은 점차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다. 1820년대에 들어서자 러시아 제국은 이미 권위를 상실한 소주즈와 중주즈의 칸 제도를 폐지하고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남쪽의 코칸트 칸국의 위협에 직면한 대주즈 역시 러시아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2. 5. 러시아 제국 편입 (18세기 ~ 19세기)
18세기 전반, 카자흐 칸국은 정치적 통일성을 상실하고 세미레치예 지방의 대주즈(Ūly jüz), 카자흐 초원 중부의 중주즈(Orta jüz), 카자흐 초원 서부의 소주즈(Kışı jüz)라는 세 개의 부족 연합체로 분열되었다. 이 시기 카자흐인들은 동쪽 준가르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으며, 특히 1723년의 침공은 '거대한 재앙'(Aqtaban Şūbyryndy, 악타반 슈브룬두)이라 불릴 만큼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준가르의 위협과 내부 경쟁에 직면한 소주즈의 아불-하이르 칸(재위: 1716년–1748년)은 1730년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러시아 제국에 사절을 보내 복속을 청했다. 1731년 10월 10일, 그는 안나 여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러시아의 보호를 받고자 했다.[11] 곧이어 중주즈의 칸 세메케(Semeke) 역시 같은 조건으로 러시아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12] 비록 두 칸의 충성심이 깊지는 않았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 군주들은 소주즈와 중주즈의 칸 임명에 개입하며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카자흐인들은 칸들이 내부 경쟁자를 견제하기 위해 외부 세력인 러시아의 힘을 빌리는 것에 대해 점차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13]
1781년 아블라이 칸이 사망한 후, 중주즈는 명목상 그의 아들 발리(Wali)가 통치했지만, 그는 주즈 전체를 장악하지 못했다. 1798년 러시아는 질서 확립을 명분으로 페트로파블로프스크에 재판소를 설치하여 카자흐인 간의 분쟁을 해결하려 했으나, 카자흐인들은 이를 대체로 무시했다. 1817년 발리 칸이 사망하고 1818년 그의 경쟁자였던 부케이(Bukei)마저 사망하자, 러시아는 1822년 중주즈의 칸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14] 러시아는 중주즈가 차지했던 영토를 '시베리아 키르기즈의 영토'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일련의 행정 개혁을 통해 카자흐인들을 농업에 정착시키려 했으나, 대부분의 카자흐인들은 전통적인 유목 생활 방식을 고수했다.[15]
러시아의 통치가 강화되면서 카자흐인들의 저항도 시작되었다. 1827년부터 1828년까지 카이프 알리(Kaip Ali)는 필요한 목초지를 찾아 우랄강을 건너려는 부케에 오르도의 전사들을 막는 러시아 수비대에 맞서 싸웠다.[16] 이후 이사타이 타이나울리(Isatay Taymanuly)는 부케에 오르도의 칸과 러시아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한 저항 운동을 이끌었으나, 이 운동은 1838년 7월 러시아군에 의해 진압되었다.[17]
1837년경, 중 주즈의 일부 부족들은 아블라이 칸의 손자인 케네사리 칸(Kenesary Khan, 또는 케네사리 카시모프)을 지도자로 추대하여 러시아의 점령에 맞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러시아가 카자흐인들에게 필수적인 목초지 사용을 제한하고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며, 러시아 상인들의 착취를 방관한 것이 저항의 주요 원인이었다.[18] 케네사리는 러시아의 강압적인 통치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을 바탕으로 분열되었던 카자흐 세력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고, 1841년 모든 카자흐 대표들이 모인 쿠룰타이에서 카자흐 칸국의 마지막 칸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 잠식과 분리 정책에 저항하는 민족 해방 운동의 상징적인 지도자로 부상했다. 케네사리는 군사 전략가로서 예측 불가능한 면모를 보이며 러시아에 맞섰으나, 1846년 그의 저항 운동은 일부 부유한 측근들이 러시아 측의 뇌물과 회유에 넘어가 배신하면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배신을 겪은 케네사리는 남은 저항 세력에 대해 점점 더 의심하게 되었고, 이는 내부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847년, 케네사리 칸은 북부 키르기스 부족을 공격하던 중 키르기스 영토에서 오르몬 칸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오르몬 칸은 케네사리를 처형한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영지와 행정적 지위를 보상받았으며, 케네사리의 머리는 잘려 러시아 당국에 보내졌다.[19] 지난 수십 년간 케네사리 칸은 카자흐 문학과 미디어에서 민족 영웅으로 재조명되고 있으며, 그의 기념비는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의 에실 강변에 세워져 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카자흐족은 러시아 제국의 완전한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카자흐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할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제국의 입법 구조에서도 배제되었다. 모든 재정 및 세금 징수 권한 역시 현지 카자흐 대표들로부터 빼앗겨 러시아 행정관에게 넘어갔다. 러시아 제국은 군사 요새 건설, 러시아인 정착촌 확대, 칸 통치와 같은 전통적 토착 정부 형태 폐지, 분리주의적 정착 정책 시행 등 식민 통치를 강화했으며, 이는 마캄베트 우테미술리(Makhambet Utemisuly, 1836–1838)나 에세트 코티바룰리(Eset Kotibaruly, 1847–1858)와 같은 지도자들이 이끈 저항 운동을 촉발했다.
한편, 남쪽의 대주즈는 부하라 토후국 및 코칸트 칸국과 연대하여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저지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군이 남부의 주요 도시인 아크-메쉬트, 쉼켄트, 아울리에-아타 등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카자흐 전역에 대한 러시아의 완전한 통치가 확립되었다. 러시아 제국에 편입된 카자흐 영토는 아크몰린스크주, 세미팔라틴스크주, 세미레치예주, 우랄스크주, 투르가이주, 시르다리야주의 6개 주로 재편되었고, 이 중 동쪽 절반은 1891년에 신설된 스텝 총독부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세미레치예주는 1897년 투르키스탄 총독부로 이관됨).
3. 경제
실크로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말, 소, 도자기, 모피 등을 거래하는 무역이 주요 수입원이었다.
18세기 중반 러시아 제국이 시베리아로 팽창하면서 볼가강과 우랄강(야이크강)을 따라 러시아 정착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카자흐-러시아 국경 지역의 관계는 긴장 상태에 놓였고, 러시아 코사크의 카자흐 영토 침입과 카자흐족의 러시아 정착촌 약탈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8세기 동안 카자흐족은 오렌부르크를 자주 습격하여 많은 러시아인들을 포로로 잡아 중앙아시아 시장에서 노예로 팔았다. 볼가강 주변 사라토프 인근에 살던 볼가 독일인 역시 카자흐족 습격의 피해자가 되었다.
카자흐족과 키르기스 부족민들은 1717년 히바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3,000명의 러시아 노예를 팔았다.[20] 1722년에는 가축을 훔치고 러시아 마을을 약탈했으며, 포로로 잡은 사람들을 중앙아시아 노예 시장에 팔았다. 당시 부하라에는 5,000명이 넘는 러시아인 포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17세기 중반에는 매년 평균 500명의 러시아인이 카자흐족에 의해 히바로 팔려나갔다. 1730년 무렵 카자흐족의 빈번한 러시아 영토 습격은 지속적인 갈등 요인이었으며, 많은 러시아 백성들이 노예로 잡혀 카자흐 초원에서 팔리는 결과를 낳았다.[21] 1830년까지 러시아 정부는 매년 약 200명의 러시아인이 납치되어 히바에서 노예로 팔리는 것으로 추산했다.[29]
러시아와의 관계 속에서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1736년, 키릴로프의 독려를 받은 소 호드 및 중 호드의 카자흐족은 바시키르 영토를 습격하여 많은 바시키르인을 살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22] 1743년, 러시아 정착지에 대한 카자흐족의 공격으로 러시아인 14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당했으며, 96명의 코사크가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하자, 러시아 원로원은 이에 대한 대응 명령을 내렸다.[23] 1755년, 네플리에프는 카자흐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보복 습격을 중단하고, 카자흐족이 포로로 잡고 있던 바시키르 여성과 아이들을 계속 보유하도록 허용했다.[24] 그러나 봉기 과정에서 수천 명의 바시키르인이 차르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려는 카자흐족이나 기회를 틈탄 카자흐족에 의해 학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25][26] 1764년부터 1803년까지 오렌부르크 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개의 러시아 대상단이 공격받아 약탈당했으며, 카자흐 습격자들은 많은 경비원이 동행한 대규모 대상단까지 공격했다.[27] 1774년 봄, 러시아는 최근 카자흐족의 습격으로 포로가 된 러시아인 256명의 반환을 칸에게 요구했다.[28] 같은 해 여름, 코사크 지도자 푸가초프가 이끈 푸가초프의 반란을 러시아 군대가 카잔 지역에서 진압하는 동안, 카자흐족은 오렌부르크 국경 지대에서 240회 이상 러시아 정착촌을 습격하여 많은 러시아인과 가축을 약탈했다.[28] 1799년에는 당시 가장 큰 규모의 러시아 대상단이 약탈당해 29.5만러시아 루블 상당의 재산을 잃었다.[31]
한편, 노예 무역과 관련된 법적 조치들도 있었다. 1737년, 러시아의 안나 여제는 시베리아에서의 노예 무역을 합법화하는 명령을 내렸다.[30] 코사크들이 카자흐 가족을 납치하여 페트로파블롭스크와 옴스크로 끌고 가 부유한 러시아 지주에게 농노로 팔아넘긴 사례도 있었다.[30] 18세기 말, 카자흐 소 주즈(소 호르데) 영토가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면서 카자흐족의 러시아 식민지에 대한 습격은 점차 줄어들었다.[31] 1808년 5월 23일, 페터 캅체비치 총독은 25세가 된 모든 남녀 노예 또는 농노 신분의 카자흐족을 해방하는 명령에 서명했다.[30]
부하라, 사마르칸트, 카라쿨, 카르시, 차르주 등 중앙아시아 주요 시장에서는 주로 이란인과 러시아인, 일부 칼미크인 노예가 거래되었으며, 이들은 투르크멘족, 카자흐족, 키르기스족에 의해 끌려왔다.[32] 특히 히바 칸국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러시아인과 페르시아인 노예를 거래하는 악명 높은 시장이었다.[33] 19세기 전반에만 약 100만 명의 페르시아인과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상당수의 러시아인이 노예가 되어 중앙아시아 칸국으로 이송된 것으로 추정된다.[34][35] 1873년 러시아군이 히바를 점령했을 당시, 투르크멘족 약탈자에게 붙잡힌 페르시아인 노예는 29,300명에 달했다. 요제프 볼프(1843–1845년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부하라 칸국의 인구 120만 명 중 20만 명이 페르시아인 노예였다고 한다.
4. 역대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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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통치 기간 | 카자흐어 이름 |
---|---|---|
케레이 칸 | 1456–1473 | Керей-хан, كيري |
자니베크 칸 | 1473–1480 | Жәнібек-хан, جانيبك |
부룬두크 칸 | 1480–1511 | Бұрындық-хан (Мұрындық), بوروندي |
카심 칸 | 1511–1518 | Қасым-хан, قاسم |
마마쉬 칸 | 1518–1523 | Мұхаммед-хан, محمد |
타이르 칸 | 1523–1533 | Тахир-хан, طاهر |
부이다쉬 칸 | 1533–1538 | Бұйдаш-хан, بويداش |
아흐메트 칸 | 1533–1535 | Ахмед-хан, أحمد |
토김 칸 | 1535–1537 | Тоғым-хан, توغيم |
하크나자르 칸 | 1538–1580 | Хақназар-хан, حقنازار |
시가이 칸 | 1580–1582 | Шығай-хан, شیغی |
타우에켈 칸 | 1582–1598 | Тәуекел-хан, تاوکل |
에심 칸 | 1598–1628 | Есім-хан, عاصم |
살캄 장기르 칸 | 1628–1652 | Жәңгір-хан, جهانگیر |
바하두르 칸 | 1652–1680 | Баһадүр, بهادور |
타우케 칸 | 1680–1715 | Тәуке-хан, تاوكي |
카이프 칸 | 1715–1718 | Қайып-хан, كايب |
볼라트 칸 | 1718–1729 | Болат-хан, بولات |
아불맘베트 칸 | 1729–1771 | Әбілмәмбет-хан, أبو المامبيت |
아블라이 칸 | 1771–1781 | Әбілмансұр, Абылай-хан أبو المنصور |
케네사리 칸 | 1841–1847 | Кенесары, كينيسار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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