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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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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무르 왕조는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에서 기원한 바를라스 부족의 티무르가 14세기 후반에 건국한 왕조이다.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며 이란, 중앙아시아, 인도 북부 등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다. 티무르 사후 제국은 분열되었으나, 그의 후손들은 사마르칸트, 헤라트 등지에서 세력을 유지하며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16세기 초 우즈베크족의 침입으로 멸망했지만, 바부르가 인도에 무굴 제국을 건설하여 티무르 왕조의 명맥을 이었다. 무굴 제국은 이후 인도-이슬람 문화의 황금기를 열었으나, 18세기 후반 영국 동인도 회사의 세력 확장으로 쇠퇴하여 1857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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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왕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티무르 왕조
로마자 표기Gūrkāniyān
국가티무르 제국
무굴 제국
지역중앙아시아
대이란
인도 아대륙
모가바를라스
분가무굴 왕조
작위아미르

베그
셰이크
구르카니
미르자
사히브 키란
술탄

파디샤
건립일1370년
설립자티무르
최후 통치자바하두르 샤 2세
몰락일1857년
종교하나피파 이슬람교
티무르, 티무르 왕조의 창시자
기타
언어
해체1507년 (티무르 제국)
1857년 (무굴 제국)

2. 티무르 제국의 성립과 발전

티무르는 1370년 차가타이 칸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수르가트미시 칸과 술탄 마흐무드 칸을 명목상의 칸으로 내세웠다. 칭기즈 칸의 혈통이 아니었기에 칸을 칭하지 못하고 아미르 칭호를 사용하며 사실상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제국 성립은 차가타이 칸국이 멸망한 1402년으로 보기도 한다.

티무르 사후(1405년), 그의 후계자 피르 무함마드(1405-1407), 할릴 술탄(1405-1409), 샤 루흐(1405-1447), 울루그 베그(1447-1449) 등이 아미르로서 제국을 이끌었다. 특히 샤 루흐의 통치 아래 제국은 비교적 안정되고 문화적으로 융성한 시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울루그 베그가 아들 압달라티프 미르자에게 살해당한(1449년) 이후 제국은 극심한 내분과 분열에 휩싸였다. 트란스옥시아나, 호라산, 헤라트 등지에서 티무르의 후손들이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이 혼란기에 아부 사이드 미르자우즈베크족의 도움으로 1451년부터 제국의 재통일을 시도했으나, 이란 서부 영토를 카라 코윤루아크 코윤루 등에게 빼앗겼다. 결국 1469년 아크 코윤루의 우준 하산에게 패배하고 사망하면서 제국은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사르, 파르가나, 발흐, 카불 등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아부 사이드 미르자의 손자인 바부르사파비 제국의 지원을 받아 1511년 일시적으로 사마르칸트를 회복하는 등 제국 재건을 시도했으나, 우즈베크인의 샤이바니 왕조 세력에 밀려 중앙아시아에서의 기반을 완전히 상실했다. 1507년 헤라트 함락에 이어 1512년 트란스옥시아나마저 우즈베크인에게 넘어가면서 중앙아시아의 티무르 제국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후 카불을 거점으로 삼은 바부르는 남쪽으로 눈을 돌려 1526년 인도를 정복하고 무굴 제국을 건국함으로써 티무르 왕조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티무르 제국의 주요 통치자
작위이름통치 기간
아미르티무르1370년 ~ 1405년
아미르피르 무함마드1405년 ~ 1407년
아미르할릴 술탄1405년 ~ 1409년
아미르샤 루흐1405년 ~ 1447년
아미르울루그 베그1447년 ~ 1449년


2. 1. 티무르 제국의 기원

티무르 왕조의 기원은 몽골 부족 중 하나인 바를라스(Barlas) 부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 제국의 몽골 군대에 속했던 잔류 세력이었다.[2][9][10] 몽골의 중앙아시아 정복 이후, 바를라스 부족은 오늘날의 남부 카자흐스탄, 쉬mkent(Shymkent)에서 타라즈(Taraz)와 알마티(Almaty)에 이르는 지역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한때 페르시아어로 "몽골의 땅"을 의미하는 ''모굴리 스탄(Moghulistan)''으로 불렸다. 바를라스 부족은 이곳에서 현지 튀르크계 민족 및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주민들과 상당한 정도로 융합되었다. 그 결과 티무르 시대에 이르러 바를라스 부족은 언어와 생활 습관 면에서 완전히 튀르크화되었다.

또한, 바를라스 부족은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이슬람교를 수용하면서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과 몽골인들은 초기부터 이슬람의 영향이 강했던 페르시아 문학 및 고급 문화를 받아들였다.[11] 특히 페르시아 문학은 티무르 왕조의 엘리트 계층이 페르시아-이슬람 궁정 문화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2]

2. 2. 티무르의 등장과 제국 건설

티무르 왕조의 기원은 몽골 부족 중 하나인 바를라스(Barlas)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 제국 군대의 일부로 중앙아시아에 남은 세력이었다.[2][9][10] 몽골의 중앙아시아 정복 이후, 바를라스 부족은 현재의 남부 카자흐스탄 지역, 즉 쉼켄트에서 타라즈알마티에 이르는 곳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과거 페르시아어로 '몽골의 땅'이라는 뜻의 모굴리 스탄으로 불렸다. 바를라스 부족은 이곳에서 현지 튀르크계 민족 및 튀르크어 사용자들과 섞이면서 점차 동화되었고, 티무르 시대에는 언어와 생활 방식 면에서 완전히 튀르크화되었다.

또한, 바를라스 부족은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페르시아 문화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과 몽골인들은 이슬람의 영향 아래 발전한 페르시아 문학과 고급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11] 특히 페르시아 문학은 티무르 왕조의 지배층이 페르시아-이슬람 궁정 문화에 동화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2]

티무르는 1370년 차가타이 칸국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칭기즈칸의 후손인 수르가트미시와 술탄 마흐무드 칸을 명목상의 칸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막후에서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티무르 자신은 칭기즈칸의 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칸을 칭하지 못하고, 대신 이슬람식 칭호인 아미르(Amir)를 사용했다. 이 때문에 엄밀히 말해 티무르가 권력을 잡은 1370년보다는 명목상의 차가타이 칸국이 완전히 소멸한 1402년에 티무르 제국이 성립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티무르는 1370년부터 1405년까지 아미르로서 제국을 다스렸다.

2. 3. 티무르 제국의 팽창과 통치

티무르는 1370년부터 수르가트미시 칸과 술탄 마흐무드 칸을 명목상의 칸으로 내세우고, 차가타이 칸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는 칭기즈 칸의 직계 후손이 아니라는 혈통상의 이유로 스스로 칸의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대신 이슬람 세계에서 군사 지도자를 의미하는 아미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 때문에 티무르 제국의 시작을 차가타이 칸국이 멸망한 1402년으로 보기도 한다. 티무르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해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으나, 그의 사후 제국은 급격히 분열되었다.

티무르 사후 혼란기를 거쳐 아부 사이드 미르자우즈베크족 지도자 아불 하이르 칸의 지원을 받아 1451년부터 중앙아시아 재통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 영토 대부분은 카라 코윤루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아부 사이드 미르자는 1469년 아크 코윤루의 우준 하산에게 패배하고 사망하며 제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제국의 마지막 부흥 시도는 바부르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이란이스마일 1세의 도움으로 1511년부터 1512년까지 일시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옛 티무르 왕조 영토를 재통일했다. 당시 그의 통치 영역은 카스피해에서 우랄산맥에 이르렀고, 카불, 가즈니, 쿤두즈, 히사르, 사마르칸트, 부하라, 파르가나, 타슈켄트, 사이람 등 주요 도시를 포함했다. 이는 바부르가 인도를 정복하기 전까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우즈베크인의 압박은 계속되었고, 1512년 우바이둘라 술탄이 이끄는 우즈베크 군대가 발흐를 점령하면서 트란스옥시아나의 티무르 제국은 사실상 멸망했다. 이후 우즈베크인들은 부하라 칸국을 세워 트란스옥시아나와 호라산 지역을 장악했다. 중앙아시아에서 기반을 잃은 바부르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1526년 인도를 정복하고 무굴 제국을 건국하여 티무르 왕조의 명맥을 이었다.

3. 티무르 제국의 분열과 쇠퇴

샤 루흐가 1447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울루그 베그가 제위를 이었으나, 울루그 베그는 1449년 아들 압달라티프 미르자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 이후 티무르 제국은 다시 극심한 혼란과 분열 상태에 빠져들었다. 트란스옥시아나, 호라산, 헤라트 등 각지에서 티무르 왕족들이 할거하며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이 혼란기에 티무르의 증손자인 아부 사이드 미르자가 우즈베크족 지도자 아불 하이르 칸의 도움을 받아 1451년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제국을 일시적으로 재통합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 지역의 영토 대부분을 카라 코윤루(흑양조)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그의 통일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고, 1469년 아크 코윤루(백양조)의 우준 하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하면서 티무르 제국은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분열 상태로 접어들었다.

아부 사이드 미르자 사후,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어 사마르칸트, 부하라, 파르가나, 히사르, 발흐, 카불 등 여러 지역으로 나뉘었으며, 호라산헤라트는 술탄 후사인 미르자 바이카라흐가 장악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었다. 이러한 분열 속에서 제국의 쇠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15세기 말, 트란스옥시아나에서는 우즈베크족의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는 분열된 티무르 왕족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1501년에는 사마르칸트를, 1507년에는 헤라트를 점령하는 등 중앙아시아와 호라산 지역에서 티무르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티무르 왕조의 마지막 주요 인물인 바부르파르가나의 통치자였으나,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에게 밀려 중앙아시아를 상실하고 카불로 피신했다. 그는 사파비 왕조의 도움을 받아 잠시 중앙아시아를 회복하기도 했으나, 1512년 우즈베크족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하면서 중앙아시아에서의 티무르 왕조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이후 바부르는 남쪽으로 눈을 돌려 인도를 정복하고 1526년 무굴 제국을 건국하여 티무르 왕조의 명맥을 인도에서 이어나갔다. 중앙아시아의 옛 티무르 제국 영토는 우즈베크족이 세운 부하라 칸국 등이 차지하게 되었다.

3. 1. 티무르 사후 권력 투쟁

1405년 티무르가 사망하자, 그가 세운 거대한 제국은 후계자들 간의 치열한 권력 투쟁에 휩싸였다. 티무르는 생전에 자신의 손자인 피르 무함마드 빈 자한기르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이는 다른 왕족들의 반발을 샀다.

티무르 사후, 그의 또 다른 손자인 할릴 술탄 이븐 미란 샤가 재빨리 사마르칸트를 장악하고 스스로 아미르를 칭하며 제국의 서부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1405년부터 1409년까지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통치했다. 한편, 공식 후계자였던 피르 무함마드 역시 아미르를 칭했으나, 1407년에 사망하면서 권력 경쟁에서 일찍 탈락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티무르의 넷째 아들인 샤 루흐가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헤라트를 거점으로 삼아 호라산 지역을 안정시키고 세력을 확장했다. 샤 루흐는 점차 경쟁자들을 제압하며 1409년경에는 할릴 술탄을 몰아내고 제국의 동부 지역을 확고히 장악했다. 그는 1447년까지 헤라트를 수도로 삼아 제국을 통치하며 티무르 사후의 혼란을 상당 부분 수습하고 티무르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제국은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한 서부와 헤라트를 중심으로 한 동부로 사실상 양분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칭호이름통치 기간주요 거점
아미르피르 무함마드 빈 자한기르1405–1407-
아미르할릴 술탄 이븐 미란 샤1405–1409사마르칸트
아미르샤 루흐1405–1447헤라트


3. 2. 샤 루흐 시대의 안정과 문화 발전

티무르 사후, 그의 아들인 샤 루흐 미르자( شاھرخ میرزا|샤루흐 미르자fa )는 아미르로서 1405년부터 1447년까지 제국을 통치했다. 초기에는 할릴 술탄 이븐 미란 샤(재위 1405–1409) 등 다른 경쟁자들과 권력을 다투었으나, 이후 제국의 주요 통치자로 자리매김했다. 샤 루흐 사후에는 그의 아들인 미르자 무함마드 타라가이( میرزا محمد طارق|미르자 무함마드 타라가이fa )가 아미르 작위를 계승했다. 울루그 베그( الغ بیگ|울루그 베그fa )는 1447년부터 1449년까지 통치했다.

3. 3. 제국의 재분열과 쇠퇴

샤 루흐가 1447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자 저명한 천문학자였던 울루그 베그가 제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울루그 베그는 학문적 업적과 달리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그는 1449년 아들 압달라티프 미르자에게 살해당했고, 압달라티프 미르자는 이 사건으로 '파다르쿠시'(부친살해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얻었다.

압달라티프 미르자 역시 1450년에 암살당하면서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트란스옥시아나, 호라산, 헤라트 등 각지에서 티무르 왕족들이 할거하며 서로 권력을 다투는 분열 상태가 심화되었다. 사마르칸트에서는 압달라 미르자가 1450년부터 1451년까지 잠시 통치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티무르의 증손자인 아부 사이드 미르자가 세력을 키웠다. 그는 우즈베크족 지도자 아불 하이르 칸(훗날 무함마드 샤이바니의 조부)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451년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제국을 다시 통합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 지역의 영토 대부분을 카라 코윤루(흑양조)에게 넘겨주어야 했으며, 그의 통일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469년, 아크 코윤루(백양조)의 우준 하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하면서 티무르 제국은 다시 회복 불가능한 분열 상태로 접어들었다.

아부 사이드 미르자가 사망한 후,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한편, 호라산 지역의 헤라트티무르의 다른 후손인 술탄 후사인 미르자 바이카라흐가 장악하여 1469년부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문화적 부흥기를 이끌었다.

15세기 말, 트란스옥시아나에서는 칭기스 칸의 후예를 자처하는 우즈베크족의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는 분열된 티무르 왕족들을 차례로 공격하며 영토를 빠르게 확장했다. 1500년에는 부하라를, 1501년에는 티무르 제국의 심장부였던 사마르칸트를 점령했다. 파르가나의 통치자였던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 2세의 아들 바부르사마르칸트를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결국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에게 패배하여 남쪽의 카불로 밀려났다.

1507년,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은 헤라트마저 점령하면서 호라산 지역을 지배하던 술탄 후사인 미르자 바이카라흐의 후계자들을 몰아내고 이 지역의 티무르 왕조 통치를 종식시켰다.

카불로 피신한 바부르는 1511년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이스마일 1세와 동맹을 맺고 우즈베크족을 몰아내어 잠시 사마르칸트를 포함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되찾기도 했다. 이때 그의 통치 영역은 카스피해에서 우랄산맥까지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재통합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고, 1512년 우즈베크족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중앙아시아에서의 티무르 왕조 시대는 막을 내렸다. 우즈베크족은 이 지역에 부하라 칸국을 세우고 지배권을 확립했다.

중앙아시아에서 기반을 완전히 상실한 바부르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인도 정복에 나섰고, 1526년 델리 술탄 왕조를 무너뜨리고 무굴 제국을 건국하여 인도에서 티무르 왕조의 명맥을 이었다.

4. 티무르 제국의 후예들

티무르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혼란이 발생했다. 티무르는 손자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다른 후손들이 이에 도전하며 내전이 벌어졌다. 결국 티무르의 넷째 아들인 샤 루흐가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1409년 제국의 통치권을 확립했다. 샤 루흐는 수도를 사마르칸트에서 헤라트로 옮기고 약 40년간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며 문화적 부흥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1447년 샤 루흐가 사망하자 제국은 다시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그의 아들이자 저명한 천문학자였던 울루그 베그가 잠시 통치권을 잡았으나(1447–1449), 곧 자신의 아들 압달라티프 미르자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이후 제국은 여러 지역으로 분열되어 티무르의 후손들이 각자의 영지를 다스리며 서로 경쟁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분열 상황 속에서 티무르의 증손자인 아부 사이드 미르자우즈베크족 지도자 아불 하이르 칸의 도움을 받아 세력을 키웠다. 그는 1451년부터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하며 트란스옥시아나호라산 등 제국의 핵심 영토 대부분을 재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 서부 영토 상당수는 카라 코윤루아크 코윤루 같은 투르크멘 왕조에게 넘어갔다. 아부 사이드 미르자는 아크 코윤루의 우준 하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1469년 사망하면서, 그의 통일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티무르 제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아부 사이드 미르자 사후,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지역(사마르칸트, 부하라, 히사르, 페르가나, 발흐, 카불)과 헤라트를 중심으로 한 호라산 지역으로 나뉘어졌다. 이 시기 북쪽에서는 우즈베크인 세력이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의 지도 아래 강성해지며 티무르 왕조의 영토를 계속해서 잠식해 들어왔다. 결국 1507년에는 헤라트가, 1512년에는 트란스옥시아나 지역 대부분이 우즈베크인에게 넘어가면서 중앙아시아에서의 티무르 제국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페르가나의 통치자였던 바부르는 중앙아시아에서의 기반을 잃고 남쪽으로 밀려나 카불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는 중앙아시아 회복을 단념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인도로 눈을 돌렸고, 마침내 1526년 델리 술탄국을 무너뜨리고 무굴 제국을 건국하여 티무르 왕조의 명맥을 인도 아대륙에서 이어나갔다.

4. 1.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티무르 왕조

아부 사이드 미르자가 1469년 아크 코윤루의 우준 하산에게 패배하고 사망한 후, 티무르 제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아부 사이드의 아들들이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을 나누어 통치했다. 주요 분할 지역과 각 지역의 통치자는 다음과 같다.

사마르칸트부하라히사르페르가나발흐카불
술탄 아흐마드 미르자
1469–1494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 2세
1469–1494
술탄 마흐무드 미르자
1469–1495
울루그 베그 미르자 2세
1469–1502
술탄 바이순쿠르 미르자 빈 마흐무드 미르자
1495–1497
술탄 알리 빈 마흐무드 미르자
1495–1500
술탄 마수드 미르자 빈 마흐무드 미르자
1495 – ?
바부르
1494–1497
쿠스로에 샤
찬탈자
? – 1504
무킴 베그 아르군
찬탈자
? – 1504
우즈베크의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
1500–1501
자한기르 미르자 2세
술탄 아흐메드 탐볼의 괴뢰
1497 – 1503
바부르
1504
우즈베크의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
1503–1504
바부르
1504–1511
바부르
1511–1512
페르가나 출신의 바부르사파비 제국이스마일 1세의 도움을 받아 우즈베크인을 몰아내고 사마르칸트를 포함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 대부분을 일시적으로 재통합했다. 이 시기 그의 영토는 카스피해에서 우랄산맥까지 이르렀으며, 카불, 가즈니, 쿤두즈, 히사르, 사마르칸트, 부하라, 페르가나, 타슈켄트, 사이람 등 주요 도시를 포함했다. 이는 그가 인도를 정복하기 전까지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던 시기였다.
우즈베크인의 우바이둘라 술탄이 트란스옥시아나발흐 재정복
1512
바부르
1512–1530



그러나 바부르의 재통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1512년, 우즈베크인의 우바이둘라 술탄이 다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했다. 이로써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한 티무르 왕조의 트란스옥시아나 지배는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우즈베크인들은 이 지역에 부하라 칸국을 세웠다.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밀려난 바부르카불을 거점으로 삼아 남하하였고, 1526년 인도를 정복하여 무굴 제국을 건국함으로써 티무르 왕조의 명맥을 인도에서 이어나갔다.

4. 2. 헤라트의 티무르 왕조

샤 루흐 사후, 티무르 제국은 다시 분열의 길을 걸었다. 헤라트를 중심으로 한 호라산 지역은 샤 루흐의 후손들이 통치하게 되었다. 샤 루흐의 아들 울루그 베그가 잠시 제국 전체를 통치했으나(1447–1449), 그가 암살된 후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다.

헤라트와 호라산 지역에서는 샤 루흐의 손자들이 경쟁했다. 처음에는 알라 웃 다울라 미르자가 헤라트를, 술탄 무함마드가 호라산을 차지했으나, 곧 아불 카심 바부르가 두 지역을 모두 장악하고 1457년까지 통치했다. 그의 사후 짧은 기간 동안 아들 미르자 샤 마흐무드와 이브라힘 미르자가 차례로 헤라트를 다스렸지만, 이 지역의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었다.

1451년부터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세력을 키운 아부 사이드 미르자우즈베크족의 도움을 받아 제국의 상당 부분을 재통일했으나, 1469년 아크 코윤루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하면서 제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아부 사이드 사후의 혼란을 틈타, 티무르의 증손자인 술탄 후사인 바이카라(سلطان حسین میرزا بایقرا|술탄 후사인 미르자 바이카라fa)가 헤라트를 점령하고 호라산 지역의 통치자로 자리 잡았다. 1470년 야드가르 무함마드 미르자가 잠시 헤라트를 차지하기도 했으나, 6주 만에 술탄 후사인 바이카라에게 축출되었다. 이후 술탄 후사인 바이카라는 1506년까지 비교적 안정적으로 헤라트를 통치했다. 그의 치세 동안 헤라트는 티무르 르네상스의 마지막 중심지로서 학문과 예술이 크게 융성하는 등 문화적 황금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1506년 술탄 후사인 바이카라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인 바디 알자만 미르자(بدیع الزمان میرزا|바디 알자만 미르자fa)와 무자파르 후사인 미르자(مظفر حسین میرزا|무자파르 후사인 미르자fa)가 공동으로 통치하며 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북쪽의 우즈베크족 세력이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محمد شایبک خان ازبک|무함마드 샤이바크 칸 아즈바크fa)의 지도 아래 남하하기 시작했다. 결국 1507년, 우즈베크족이 헤라트를 점령하면서 헤라트를 중심으로 한 티무르 왕조는 막을 내렸다.

4. 3. 무굴 제국의 건설

티무르의 5대손인 바부르(자히르 웃 딘 무함마드)는 원래 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 지역 통치자였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우즈베크인 세력, 특히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에게 밀려 중앙아시아에서의 기반을 점차 잃어갔다. 비록 잠시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결국 우즈베크인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

중앙아시아에서의 세력 확장이 어려워지자 바부르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1504년,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점령하여 새로운 거점을 마련했다. 이는 티무르 왕조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바부르는 사파비 제국이스마일 1세와 동맹을 맺고 1511년 우즈베크인을 몰아내며 사마르칸트를 포함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을 일시적으로 회복했다. 이 시기 그의 세력은 카스피해에서 우랄산맥까지 이르렀으나, 우즈베크인의 반격으로 1512년 다시 트란스옥시아나를 상실하고 카불로 후퇴해야 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의 티무르 제국은 1507년 헤라트가, 1512년에는 트란스옥시아나가 우즈베크인에게 넘어가면서 사실상 종말을 맞이했다.

중앙아시아 회복의 꿈을 접은 바부르는 인도 정복에 집중했다. 당시 북인도는 델리 술탄국의 로디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으나 내부 분열로 약화된 상태였다. 1526년, 바부르는 파니파트 전투에서 델리 술탄국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델리아그라를 장악한 바부르는 인도 북부에 새로운 제국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무굴 제국이다. 이로써 티무르 왕조는 인도에서 그 명맥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5. 무굴 제국

무굴 제국티무르의 5대손인 바부르1526년 인도에 세운 이슬람 왕조이다. 바부르는 파니팟 제1차 전투와 칸와 전투에서 승리하여 북인도를 장악하고 무굴 제국의 기초를 마련했다.

아래는 무굴 제국의 황제 목록이다.

황제출생재위 기간사망비고
바부르(Babur)1483년 2월 14일1526년 4월 21일 – 1530년 12월 26일1530년외조모를 통해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 부친을 통해 티무르의 후손. 파니팟 제1차 전투와 칸와 전투 승리 후 무굴 제국 건국.
후마윤(Humayun)1508년 3월 6일1530년 12월 26일 – 1540년 5월 17일1556년 1월 27일수르 왕조의 셰르 샤 수리에게 제위를 빼앗김. 젊고 경험 부족.
셰르 샤 수리(Sher Shah Suri)1486년1540년 5월 17일 – 1545년 5월 22일1545년 5월 22일후마윤을 폐위시키고 수르 왕조를 이끎.
이슬람 샤 수리(Islam Shah Suri)1507년1545년–1554년1554년수르 왕조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통치자. 후마윤의 복위로 그의 후계자 주장은 무효화됨.
후마윤(Humayun)1508년 3월 6일1555년 6월 22일 – 1556년 1월 27일1556년 1월 27일복위 후 더 통합되고 효과적인 통치. 아들 악바르에게 통합된 제국을 남김.
악바르(Akbar)1542년 10월 15일1556년 2월 11일 – 1605년 10월 27일1605년 10월 27일파니팟 제2차 전투 승리, 제국 확장 및 제도 정비. 가장 위대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됨. 라호르 요새, 아그라 요새 건설.[13]
자한기르(Jahangir)1569년 8월 31일1605년 11월 3일 – 1627년 10월 28일1627년 10월 28일아들의 반란 선례 남김. 영국 동인도 회사와 최초 관계 수립.
샤 자한(Shah Jahan)1592년 1월 5일1628년 1월 19일 – 1658년 7월 31일1666년 1월 22일무굴 미술과 건축의 절정기. 타지마할, 자마 마스지드, 붉은 요새 등 건설.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폐위됨.
아우랑제브(Aurangzeb)1618년 11월 3일1658년 7월 31일 – 1707년 3월 3일1707년 3월 3일샤리아 재해석(파타와-에-알람기리). 제국 최대 영토 확장. 마라타와의 장기 전쟁. 사후 제국 쇠퇴 가속화.
바하두르 샤 1세(Bahadur Shah I)1643년 10월 14일1707년 6월 19일 – 1712년 2월 27일1712년 2월 27일통제 불능의 반란 속에서 즉위. 그의 사후 제국 쇠퇴 본격화.
자한다르 샤(Jahandar Shah)1661년 5월 10일1712년 3월 29일 – 1713년 2월 11일1713년 2월 11일무능하고 인기 없는 명목상의 황제. 형제 살해 후 즉위.
파룩시야르(Farrukhsiyar)1683년 8월 20일1713년 1월 11일 – 1719년 4월 9일1719년 4월 9일사이드 형제의 권력 장악. 1717년 영국 동인도 회사벵골 무관세 무역권 부여 피르만 발급.
라피 울-다르자트(Rafi Ul-Darjat)1699년 12월 1일1719년 2월 28일 – 6월 6일1719년 6월 6일 
라피 우드-다울라트(Rafi Ud-Daulat)1696년 6월1719년 6월 6일 – 9월 17일1719년 9월 18일 
무함마드 이브라힘(Muhammad Ibrahim)1703년 8월 9일1720년 10월 15일 – 11월 13일1746년 1월 31일 
무함마드 샤(Muhammad Shah)1702년 8월 7일1719년 9월 27일 – 1748년 4월 26일1748년 4월 26일사이드 형제 제거. 마라타 부상과 제국 붕괴 가속화. 1739년 페르시아 나디르 샤의 침입.[14]
아마드 샤 바하두르(Ahmad Shah Bahadur)1725년 12월 23일1748년 4월 29일 – 1754년 6월 2일1775년 1월 1일
알람기르 2세(Alamgir II)1699년 6월 6일1754년 6월 3일 – 1759년 11월 29일1759년 11월 29일총리 이마드-울-물크와 마라타 동맹 세력에 의해 살해됨.
샤 자한 3세(Shah Jahan III)1711년1759년 12월 10일 – 1760년 10월 10일1772년이마드-울-물크의 도움으로 즉위했으나 마라타에 의해 폐위됨.[15][16]
샤 알람 2세(Shah Alam II)1728년 6월 25일1760년 10월 10일 – 1788년 7월 31일, 1788년 10월 16일 – 1806년 11월 19일1806년 11월 19일마라타와 아마드 샤 두라니에 의해 황제로 인정받음.[15][17] 북사르 전투(1764) 패배 후 알라하바드 조약(1765) 체결. 명목상 황제. 1793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벵골의 무굴 종주권 폐지.[18]
악바르 샤 2세(Akbar Shah II)1760년 4월 22일1806년 11월 19일 – 1837년 9월 28일1837년 9월 28일제3차 영국-마라타 전쟁 후 영국의 연금 수령자로 전락. 공식 화폐에서 황제 이름 제거됨.
바하두르 샤 2세(Bahadur Shah II)1775년 10월 24일1837년 9월 28일 – 1857년 9월 21일1862년 11월 7일마지막 무굴 황제. 1857년의 세포이 항쟁 후 영국에 의해 폐위되어 버마로 유배됨. 그의 죽음으로 무굴 왕조 종말.


5. 1. 무굴 제국의 발전과 팽창

바부르의 뒤를 이어 1530년 그의 아들 후마윤이 무굴 제국의 두 번째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즉위 당시 젊고 경험이 부족했던 후마윤은 1540년 셰르 샤 수리에게 패배하여 제위를 빼앗기고 페르시아로 망명해야 했다. 이로 인해 북인도 지역은 잠시 수르 왕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셰르 샤 수리와 그의 아들 이슬람 샤 수리가 통치한 수르 왕조 시대 이후, 후마윤은 1555년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델리를 탈환하고 왕위를 되찾았다. 복위 후 후마윤은 이전보다 더 통합되고 효과적인 통치를 펼치며 아들 악바르에게 안정된 제국을 물려줄 기반을 마련했으나, 1556년 사고로 사망했다.

후마윤의 뒤를 이은 악바르1556년 불과 13세의 나이로 즉위했지만, 바이람 칸의 도움으로 1556년 파니팟 제2차 전투에서 헤무를 격파하며 통치 기반을 다졌다. 악바르 치세에 무굴 제국은 치토르가르 공성전과 란탐보르 공성전 등 여러 정복 전쟁에서 승리하며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는 군사적 확장뿐만 아니라 제국의 행정, 조세, 군사 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으며, 이는 무굴 제국이 전성기를 맞이하는 토대가 되었다. 특히 악바르는 라즈푸트족 공주인 마리아무즈 자마니와 혼인하는 등 힌두교도를 포용하고 여러 종교 간의 이해와 화합을 추구하는 관용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정책은 제국의 안정과 통합에 크게 기여했으며, 악바르는 무굴 제국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시대에는 라호르 요새와 아그라 요새 등 웅장한 건축물들이 세워지기도 했다.[13]

악바르의 아들 자한기르 시대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와 처음으로 공식적인 관계를 맺었으나, 황자인 샤 자한이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내부적인 불안 요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샤 자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타지마할, 델리의 자마 마스지드, 붉은 요새 등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남기며 무굴 건축과 예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치세 말년에는 아들들 간의 격렬한 제위 계승 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폐위되어 유폐되었다.

아우랑제브1658년 형제들을 제거하고 황제에 올랐다. 그는 독실한 수니파 무슬림으로서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기반한 통치를 강화하고 파타와-에-알람기리라는 법령을 편찬했다. 아우랑제브는 남부 데칸 고원의 골콘다 술탄국 등을 정복하며 무굴 제국의 영토를 역사상 최대로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종교 정책은 비무슬림들의 반발을 샀으며, 특히 마라타족과의 오랜 전쟁(마라타 독립 전쟁)은 제국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행정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아우랑제브의 치세 동안 제국은 외형적으로는 최대로 팽창했지만, 과도한 확장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그의 사후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5. 2. 무굴 제국의 문화

악바르 황제는 라호르 요새와 아그라 요새를 건설하며 무굴 건축의 기반을 다졌다.[13] 이후 샤 자한 황제의 치세에 이르러 무굴의 미술과 건축은 절정에 달했다. 샤 자한은 그의 아내 뭄타즈 마할을 기리기 위해 타지마할을 건설했으며, 이 외에도 자마 마스지드, 붉은 요새, 자한기르 묘, 샬리마르 정원(라호르) 등 수많은 중요 건축물을 남겼다. 한편, 아우랑제브 황제는 종교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자신의 서체로 직접 코란을 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3. 무굴 제국의 쇠퇴와 멸망

아우랑제브 황제 시대(1658년~1707년)에 무굴 제국은 영토상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그는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재해석하여 파타와-에-알람기리를 편찬하고 골콘다 술탄국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점령하는 등 제국의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마라타와의 27년에 걸친 전쟁 등 끊임없는 군사 활동과 종교적 불관용 정책은 제국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재정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아우랑제브의 정복으로 제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지만, 과도하게 팽창된 제국은 이미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그의 사후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아우랑제브 사후,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바하두르 샤 1세(1707년~1712년)가 즉위했을 때는 이미 제국 곳곳에서 통제 불능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사후에는 황제 자리를 둘러싼 계승 분쟁이 격화되었고, 자한다르 샤(1712년~1713년)와 같이 무능하고 인기 없는 황제들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제국의 쇠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파룩시야르(1713년~1719년) 시대에는 교활한 사이드 형제와 같은 권신들이 실권을 장악하여 황제의 권위를 무력화시켰다. 특히 파룩시야르는 1717년 영국 동인도 회사벵골 지역에서의 무관세 무역권을 인정하는 피르만을 내렸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영국 세력이 인도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13] 비록 당시 벵골의 통치자였던 무르시드 쿨리 칸이 이를 거부했지만, 중앙 정부의 약화는 이러한 외부 세력의 침투를 막기 어렵게 만들었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무굴 제국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무함마드 샤(1719년~1748년)는 사이드 형제를 제거하고 제국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나, 마라타 세력의 급격한 부상을 막지 못하고 제국의 영토는 계속해서 축소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739년에는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가 델리를 침공하여 약탈함으로써 제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14] 이후 알람기르 2세(1754년~1759년)는 총리였던 이마드-울-물크와 마라타 동맹 세력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이하는 등, 황제는 이름뿐인 존재로 전락했다.

샤 알람 2세(1760년~1806년)는 마라타 세력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기도 하고,[15] 파니팟 제3차 전투(1761년) 이후 아마드 샤 두라니에 의해 다시 황제로 인정받는[17] 등 외부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처지였다. 그는 북사르 전투(1764년)에서 아와드 나와브 및 벵골 나와브 연합군과 함께 영국 동인도 회사에 맞섰으나 패배했고, 결국 알라하바드 조약(1765년)을 통해 영국 동인도 회사의 보호령 신세가 되었다.[18] 이후 그는 명목상의 황제로 남았으며, 1793년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니자마트(무굴 제국의 종주권)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벵골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악바르 샤 2세(1806년~1837년)는 제3차 영국-마라타 전쟁에서 마라타 세력이 패배하면서 완전히 영국의 연금 수령자로 전락했고, 영국 동인도 회사와의 갈등 끝에 공식 화폐에서 황제의 이름마저 제거되는 수모를 겪었다.

마지막 무굴 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1837년~1857년)는 1857년 세포이 항쟁 당시 항쟁의 구심점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항쟁은 영국 동인도 회사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고, 바하두르 샤 2세는 폐위되어 버마로 유배되었다. 1862년 그가 유배지에서 사망하면서, 한때 인도를 호령했던 무굴 제국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Timurids in Transition: Turko-Persian Politics and Acculturation in Medieval Persia Brill 2007
[2] 백과사전 "Tīmūr Lang" 2006
[3] 백과사전 Timurid Dynasty http://www.britannic[...] 2007
[4] 백과사전 Timurids http://www.bartleby.[...] Columbia University 2006-11-08
[5] 백과사전 Consolidation & expansion of the Indo-Timurids http://www.britannic[...] 2007
[6] 서적 A History of the Muslim World Since 1260: The Making of a Global Community
[7] 웹사이트 The Man Behind the Mosque http://www.amitavgho[...] 2015-08-09
[8] 서적 Timurids in Transition
[9] 백과사전 Timur http://www.bartleby.[...] 2005
[10] 백과사전 Consolidation & expansion of the Indo-Timurids http://www.britannic[...] 2024-01-12
[11] 백과사전 Central Asia in the Mongol and Timurid periods http://www.iranicaon[...] 2006
[12] 서적 The Persian Album, 1400–1600: From Dispersal to Collection Yale University Press 2005
[13] 학술지 The Jahangiri Mahal of the Agra Fort: Expression and Experience in Early Mughal Architecture 1988
[14] 서적 History Modern India New Age International 2006
[15] 서적 Advanced Study in the History of Modern India 1707–1813 https://books.google[...]
[16] 서적 Mughal Empire in India: A Systematic Study Including Source Material https://books.google[...] Atlantic Publishers & Dist 1999
[17] 서적 Mughal Empire in India: A Systematic Study Including Source Material https://books.google[...] Atlantic Publishers & Dist 1999
[18] 서적 The Great Maratha Mahadaji Scindia https://books.google[...] Sarup & Son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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