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우만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우만 전투는 1941년 7월에서 8월 사이에 벌어진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투로, 바르바로사 작전의 일환이었다. 독일군은 남부 집단군의 기동력을 활용하여 소련군을 포위, 10만 명 이상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로 소련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남부 우크라이나 방어에 큰 차질이 발생했다. 우만 전투는 독일 전격전 교리의 효과를 입증한 사례로, 독소 전쟁 초기 독일군의 성공적인 작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루마니아가 참가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와 작전 - 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과 추축국이 소련의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해 벌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투 중 하나로,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 루마니아가 참가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와 작전 -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
  • 1941년 우크라이나 - 키예프 전투 (1941년)
    키예프 전투 (1941년)는 독소전쟁 초기 독일군이 소련군을 상대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벌인 대규모 포위 섬멸전으로, 소련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독일군은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으나 모스크바 공략 작전이 지연되었다.
  • 1941년 우크라이나 - 오데사 포위전 (1941년)
    오데사 포위전은 1941년 8월부터 10월까지 루마니아군과 소련군 간에 벌어진 전투로, 루마니아는 독일의 지원을 받아 오데사를 포위했으나 흑해 함대의 지원으로 완전한 포위에 실패하고 많은 사상자를 낸 후 1944년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의 포위전 - 키예프 전투 (1941년)
    키예프 전투 (1941년)는 독소전쟁 초기 독일군이 소련군을 상대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벌인 대규모 포위 섬멸전으로, 소련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독일군은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으나 모스크바 공략 작전이 지연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의 포위전 - 베를린 전투
    베를린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소련군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기 위해 감행한 공세 작전으로, 격렬한 시가전 끝에 베를린 함락과 독일의 항복을 이끌어내며 유럽 전선 종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만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우만 전투
일부바르바로사 작전
독소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
시기1941년 7월 15일 ~ 8월 8일
장소우크라이나 우만
결과추축군 승리
우만 전투 당시의 전선
우만 전투 당시의 전선
교전 세력
교전국 1나치 독일
루마니아 왕국

슬로바키아
교전국 2소비에트 연방
지휘관 및 부대
지휘관 1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파울 루트비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지휘관 2세묜 부됸니
미하일 키르포노스
이반 튤레네프
부대 1제6군
제17군
제1 기갑 집단
부대 2제6군
제12군
제26군
제18군
병력 규모
병력 1400,000명
전차 600대
병력 2300,000명
전차 317대
피해 규모
피해 1총합: 20,853명
사망: 4,610명
부상: 15,458명
실종 또는 포로: 785명
피해 2총합: 203,000명
사상: 100,000명
포로: 103,000명
전차 317대 노획 또는 파괴
총 858정 노획

2. 배경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독일 남부 집단군은 빠른 속도로 동쪽으로 진격하여 리비우, 테르노필, 빈니차를 점령하고 브로디 전투에서 소련 기계화 군단을 격파했다. 1941년 6월 29일, 독일군은 진격을 일시 중단했지만, 소련군은 계속 후퇴했다. 제1 기갑군에 대한 소련군의 반격이 실패한 후, 독일 남부 집단군은 다시 진군하여 키예프 근처까지 도달했다.

스탈린은 독일의 주 공세 지점을 우크라이나로 판단하여 이 지역에 많은 병력을 배치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제1 기갑 집단에 제6군제17군을 더해 공세를 가했다. 소련군은 KV-1, KV-2, T-34 등 우수한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루프트바페의 제공권 장악과 병참 및 통신망 혼란으로 인해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하고 패주했다.

프리피야트 늪지로 인해 중앙 집단군과 분리된 상황에서, 7월 2일 루마니아에서 대기하던 독일 제11군이 키예프 방면으로, 루마니아군이 오데사 방면으로 진격했다. (Одесская оборона|오데사 전투 (1941년)ru 참조)

소련군은 스탈린 선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고, 제1 기갑 집단은 이를 돌파하여 7월 9일까지 지토미르베르디치우를 함락시키고 키예프에 근접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기갑 사단의 시가전 피해를 우려하여 남하 명령을 내렸다.

7월 10일, 스탈린은 통일된 지휘를 위해 통수권을 장악하고, 남서 총군 사령관에 세묜 부됸니 원수, 군사 회의 위원에 니키타 흐루쇼프를 기용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제6군에게 프리피야트 늪지대 남쪽의 소련 제5군을 억누르게 하고, 제17군을 제11군 지원으로 돌려 남쪽에서 큰 포위망을 완성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7월 말, 제11군이 부흐 강에 도달하고, 제17군과 기갑 사단은 우만으로 향해 8월 2일 우만-부흐 강 사이에 포위망을 완성, 소련 제6군과 제12군 등을 포위하여 10만 명 이상을 포로로 잡았다.

8월 말, 남부 집단군은 드네프르 강에 도달했다. 독일군의 주 공격 방향을 남부 자원 지대로 판단한 소련군의 배치로 인해, 강력한 소련군 남부 부대에 대한 1개 기갑군 집단의 편익 포위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키예프를 우회한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으며, 키예프 정면에는 강력한 소련군이 대기하고 있어 돌파가 불가능했다. 키예프 함락은 중앙 집단군에서 남쪽으로 선회한 구데리안키예프 전투까지 기다려야 했다.

2. 1. 전투 서열

소련군은 루프트바페의 공격과 브로디 전투 패배로 인해 기계화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대부분 소총 군단으로 재편되었다. 추축군은 물자 부족에도 불구하고 전투력을 유지한 제1 기갑 집단과 크림 반도 북쪽의 기갑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한 독일 및 루마니아군 보병 부대들로 구성되었다.[2]

우만 전투 전투 서열
소련군추축군
valign="top" |valign="top" |


2. 1. 1. 소련군

루프트바페의 공격과 브로디 전투 패배로 소련군의 기계화 전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대부분의 기계화 군단은 전력이 크게 감소하여 소총 군단으로 재편되었다.

부대구성
소련 6 군
소련 12 군
소련 18 군 (일부)(상세 불명)



KV-1 전차 (1939년형). 우만으로 재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제2 기계화 군단에는 거의 400대의 전차 중 10대만이 남아 있었다.


7월 18일, 소련군 사령부는 제1 기갑 집단의 돌파를 저지하고 스탈린 선을 따라 방어를 회복할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에 따라 제6군과 제12군은 벨라야 체르코프 – 테티예프 – 키타이고로드 – 하이신 선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4] 같은 날, 제2 기계화 군단은 남부 전선에서 우만으로 이동하여 독일 제48 기갑 군단을 상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

2. 1. 2. 독일군

남부 집단군 소속 독일군은 물자 부족에도 불구하고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1 기갑 집단은 군수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전투 능력은 여전했다.[2] 크림 반도 북쪽에서 기갑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한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의 보병 부대들이 남부 집단군의 초기 목표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2]

우만 전투에 참여한 독일군 부대는 다음과 같다.

부대
독일 6군
제1 기갑 집단 (일부 전력)
독일 17군
헝가리 기계화 군단
루마니아 3군
독일 11군


3. 포위전

1941년 7월 10일, 소련 남서부 전선군 사령관 브됸늬는 남서부 및 남부 전선군에 우만 방면으로 진격하여 독일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독일군은 이미 1 기갑군을 중심으로 키예프 남쪽과 빈니차 북쪽에 쐐기를 박고 있었다. 7월 15일, 독일군은 베르디치우를 점령하고, 7월 16일에는 코지아텐(Koziatyn)을 점령했다. 장군 카를 하인리히 본 스툴파나겔의 17 군은 우만 남쪽으로, 에우겐 리테르 본 슈베르트의 11 군은 루마니아 국경에서 북쪽으로 진격했다.[3]

소련군 지휘부는 독일군의 진격 방향을 오판하여 6 군과 12 군의 포위 위험을 과소평가했다. 그들은 독일군이 키예프와 체르카시 사이 드네프르 강을 도하해 돈바스(Donbass)로 진군할 것이라고 착각했다. 7월 28일, 소련군은 드네프르 강을 건너려는 독일군을 저지하기 위해 동쪽으로 후퇴했지만, 이는 남동쪽으로 후퇴하여 포위망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결과였다.

8월 2일, 독일 1 기갑군과 17 군이 우만에서 만나 포위망을 완성했다. 이 포위망은 독일 16 기갑사단과 헝가리 기계화 군단이 합류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8월 8일, 소련군의 저항은 대부분 멈췄고, 10만 3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5] 여기에는 6 군 및 12 군 사령관, 4개 군단장, 11개 사단장이 포함되었다.[4]

3. 1. 포위전의 전개

1941년 7월 10일, 남서부 지구 사령관 브됸늬는 남서부와 남부 전선군의 전투를 조정하기 위해 남서 방향으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브됸늬는 150만 명의 병력을 키예프와 빈니차-우만에 배치했다. 그러나 독일 남부 집단군은 세 갈래로 빠르게 진군하여 소련군을 압박했다. 폰 클라이스트의 1 기갑 집단은 키예프 남쪽과 빈니차 북쪽에 쐐기를 박는 공세를 펼쳐 7월 15일 베르디치우를, 7월 16일에는 코지아텐(Koziatyn)을 점령했다. 카를 하인리히 본 스툴파나겔(Karl-Heinrich von Stülpnagel)의 17 군은 우만 남쪽으로, 에우겐 리테르 본 슈베르트(Eugen Ritter von Schobert)의 11 군은 루마니아 국경에서 북쪽으로 진군했다.[3]

소련군 지휘부는 독일군이 드네프르 강을 도하하여 돈바스(Donbass)로 진군할 것이라고 오판하여 6 군과 12 군의 포위 위험을 과소평가했다. 7월 28일, 남서부와 남부 전선군은 드네프르 강을 건너려는 독일군을 저지하고 동쪽으로 후퇴했지만, 이는 포위 위험을 피할 기회를 놓치는 결과로 이어졌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남부 집단군은 동쪽으로 빠르게 진격하여 브로디 전투에서 소련 기계화 군단을 격파했다. 소련군은 스탈린 선으로 후퇴했지만, 독일군은 스탈린 선의 취약한 방어선을 돌파했고 제1 기갑군의 동쪽 진격을 막기 위한 소련군의 반격은 실패했다. 북쪽에서는 제3 기계화 군단이 스탈린 선을 돌파하여 키이우에 접근했다. 히틀러와 최고 사령부는 소련군 포위를 위해 남쪽으로 공격 방향을 전환했고, 제48 기계화 군단만이 우만 전투 초기에 6군과 12군을 포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14 기갑군단이 남쪽에서 이동하여 48 기계화 군단을 지원했다. 독일 제6 야전군은 진격한 전차 부대를 교체하기 위해 서둘렀고, 제17 야전군은 소련 6군과 12군을 추격했다. 소련-루마니아 국경에서 제11 야전군의 진격은 소련의 반격으로 중단되었고, 빈니차를 향한 공격은 연기되었다.

8월 2일, 1 기갑 그룹과 독일 17 군에 의해 포위망이 완전히 봉쇄되었고, 독일 16 기갑사단과 헝가리 기계화 군단이 합류하면서 포위망은 더욱 강화되었다. 8월 8일, 대부분의 소련군 저항은 멈췄고, 6 군과 12 군의 잔해 20개 사단이 포위되었다.[4] 독일군 정보에 따르면 103,000명의 소련군 포로를 확보했으며, 여기에는 6 군, 12 군 지휘관, 4개 군단 지휘관, 11개 사단 지휘관이 포함되었다.[5]

3. 1. 1. 1단계

7월 15일부터 독일 제48 기갑 군단은 소련군의 반격을 격퇴하고 공세를 재개했다. 제16 기갑 사단은 코자틴(Koziatyn)을 점령했고, 제11 기갑 사단은 남동쪽으로 깊숙이 진격하여 스타비슈체를 점령했다. 소련 제6군의 반격은 실패로 돌아갔다.[3]

3. 1. 2. 퇴각 시도

7월 18일, 소련 사령부는 제1 기갑 집단의 돌파를 막을 병력이 부족함을 깨닫고, 제6군과 제12군을 빌라체르키우 – 테티예프 – 키타이고로드 – 하이신 선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독일 전차는 이미 이 선을 돌파한 상태였다.[3] 7월 21일, 소련 제6군과 제12군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독일군은 방어에 성공했다. 소련 제2 기계화 군단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독일 제11 기갑 사단의 진격을 막았다.[3]

3. 1. 3. 최종 단계

1941년 8월 1일 아침, 제6군과 제12군 사령부(7월 28일부터 제6군과 제12군의 잔존 병력과 제2기계화군단이 포네델린 집단으로 통합됨)는 남부 전선 사령부에 공동 통신문을 보냈고, 이 통신문의 사본은 스탈린에게 전달되었다.[4]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상황이 심각해졌습니다. 제6군과 제12군의 포위가 완료되었습니다. 제6군과 제12군의 결합된 전투 명령의 와해의 직접적인 위협이 있습니다. (...) 예비대가 없습니다 (...) 탄약이 없고, 연료가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부 전선 사령관 튜레네프는 스탈린에게 북동쪽에서 신규 제223소총사단의 포네델린 집단으로의 공격, 남쪽에서 제18군의 부대들에 의해 상황이 회복될 것이라고 확신했고, 보급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부인했다.

8월 1일, 소련 제18군은 남쪽에서 포네델린 집단에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제49산악군단의 우익 부대는 소련 제17소총군단의 공격을 격퇴했고, 저녁까지 제18군은 제52군단과 헝가리 기동군단의 부대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제18군 사령관은 페르보마이스크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포네델린 집단에 대한 제49산악군단의 공격은 소련 부대들을 분산시키고 제1산악사단이 훨씬 더 동쪽으로 이동할 수 있게 했다.

막 편성되어 경험이 부족한 제223소총사단은 공격을 준비하던 중 제14기갑사단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았고, 빠르게 격파되었다. 북동쪽에서 포네델린 집단으로의 돌파는 좌절되었다. 남부 전선 사령부는 이 방향에서 적의 "누출된" 집단만이 활동하고 있다고 계속 믿었고, 제1기갑집단의 주력 부대는 이미 돌파하여 남쪽과 남동쪽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8월 2일, 제1산악사단의 부대들은 시뉴하 강에 도달하여 제14기갑군단의 제9기갑사단과 합류했다. 이 시점에서 제48군단과 제14군단의 다른 부대들은 격렬한 전투 속에서 포네델린 집단의 동쪽과 북동쪽으로 돌파하려는 모든 시도를 격퇴했다. 포위망은 닫혔지만 아직 강력하지 않았다. 다음 날, 독일 제16기갑사단이 페르보마이스크에서 헝가리 기동군단과 만나 형성된 두 번째 합류에 의해 포위망이 강화되었다.[4]

4. 포위전 이후

독일 제1 기갑 집단이 북쪽으로 진격하면서 포위망은 완전히 사라졌고, 도시 주변을 완전히 포위했던 제2 기갑 그룹은 키예프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집단군의 목표를 계속 바꾸면서 남부 집단군의 전략적 목표 달성을 지연시켰다.

포위된 소련군 지휘부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지원을 요청했지만, 받지 못했다. 남부 전선의 병력은 후퇴했고, 전투선은 여러 차례 붕괴되었다. 제26군은 제1 기갑 집단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드네프로강으로 후퇴했다. 포넬린 집단이 이들과 연결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8월 2일 밤, 제6군 사령관 무지첸코는 남부 전선 제18군을 향해 남동 방향으로 포위망을 돌파할 허가를 요청했으나, 남부 전선의 지휘부는 거부했다.

8월 4일, 독일군은 양 측면에서 공격하여 소련군이 점령한 교두보를 제거했다. 같은 날 저녁, 소련 최고 사령부는 포위된 군대의 잔존 병력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8월 6일, 우만을 향한 소련군의 북동쪽 공세가 계획되었지만, 실제로는 군대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8월 5일까지, 포위된 소련군(약 65,000명)이 여전히 점령하고 있던 지역은 10x10km에 불과했고, 완전히 포화 상태였다. BT-7M 전차는 빠른 속도와 얇은 장갑으로 유명했으며, 1941년 소련 전차대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우만 "가마솥"에서 돌파한 제6군 참모장 이바노프는 BT-7M 전차를 타고 독일 후방 200 km를 이동했다.

BT-7M; BT 전차는 빠른 속도와 얇은 장갑으로 유명했으며, 1941년 소련 전차대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우만 "가마솥"에서 돌파한 제6군 참모장 이바노프는 BT-7M 전차를 타고 독일 후방 200 km를 이동했다.


8월 6일 밤, 소련군은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남쪽으로 공격했지만, 독일군에 저지되어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심각한 손실을 입었고, 8월 7일 아침 대부분 격파되었으며, 소규모 병력만이 포위망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특수 임무" 부대는 전멸했고, 제6군 사령관 무지첸코는 포로로 잡혔다.

다음 날 밤, 제12군과 제2 기계화 군단 병력이 동쪽과 북동쪽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소규모 부대만이 포위망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제12군 사령관 포넬린은 자신의 전차가 피격된 후 포로로 잡혔다. 제2 기계화 군단 사령관과 정치 위원은 몇 달 후에야 포위망을 벗어났다.

8월 7일 오후, 포드비소코예와 코펜코바토예 마을 근처의 숲(그린 브라마 숲 포함)에 포위된 소련군은 항복하기 시작했다. 제6군과 제12군 사령관 외에 4명의 군단 사령관과 11명의 사단 사령관이 포로로 잡혔다.

이후 소련군은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으며, 남부 우크라이나 방어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이는 이후 키예프 전투에서 소련군이 더욱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5. 결과 및 영향

우만 전투는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독일군의 전격전 교리가 동부 전선에서도 효과적임을 보여준 사례 중 하나이다. 독일군은 기동력을 활용하여 소련군을 포위 섬멸함으로써 전술적, 전략적 우위를 확보했다. 이 전투에서 독일 제1기갑집단은 제6군, 제17군과 협력하여 소련 제6군, 제12군, 제18군을 포위, 10만 명 이상을 포로로 잡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소련군은 막대한 병력과 장비를 잃었으며, 이는 이후 전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우크라이나 지역의 방어 능력이 약화되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어려워졌다.

이 전투는 독소 전쟁 초기 독일군의 성공적인 작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소련군에게는 뼈아픈 패배로 기억되고 있다.

참조

[1] 서적 1941. Победный парад Гитлера. Правда об Уманском побоище https://books.google[...] Яуза: Эксмо 2017
[2] 문서 Léderrey, p.32
[3] 문서 슈베르트는 1941년 9월 11일 비행기가 지뢰밭에 착지하여 사망했다. 1941-09-11
[4] 문서 80 소총 사단 및 139 소총 사단 포함. Craig Crofoot, Armies of the Bear
[5] 간행물 Life magazine, p.411, Steinberg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