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베 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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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베 젤러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활약한 독일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이다. 함부르크 SV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분데스리가 통산 404골을 기록했으며, 독일 국가대표팀으로 72경기에서 43골을 넣었다. 젤러는 4번의 FIFA 월드컵에 모두 출전하여 득점한 최초의 선수이며, 1960년 발롱도르 3위에 오르기도 했다. 은퇴 후 함부르크 SV 회장을 역임했으며, 독일 축구 연맹으로부터 명예 주장에 임명되었다. 2022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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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베 젤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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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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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우베 젤러 |
출생일 | 1936년 11월 5일 |
사망일 | 2022년 7월 21일 |
출생지 | 함부르크, 독일 |
사망지 | 노르더슈테트, 독일 |
신장 | 1.70m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클럽 경력 | |
유소년 클럽 | 함부르거 SV (1946–1953) |
프로 클럽 | 함부르거 SV (1953–1972): 476경기 404골 코크 켈틱 (1978): 1경기 2골 |
전체 클럽 경력 | 477경기 406골 |
국가대표 경력 | |
청소년 국가대표 | 서독 U-18 (1953–1954): 10경기 15골 |
국가대표 | 서독 (1954–1970): 72경기 43골 |
메달 기록 | |
FIFA 월드컵 | 준우승: 1966 잉글랜드 3위: 1970 멕시코 |
2. 선수 경력
우베 젤러는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170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점프력과 타이밍으로 헤딩의 명수로 성장했으며,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능력 또한 갖추었다. 16세에 독일 청소년 대표로 발탁되어 제프 헤르베르거 감독에 의해 1954년 17세의 나이로 서독 대표팀에 발탁되었다.[66]
1958년 FIFA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와의 첫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는 등 5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스타로 떠올랐다. 월드컵 이후 많은 명문팀들의 제안을 받았지만, 고향 팀인 함부르거 SV를 선택했다. 1965년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했지만 재활에 성공,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프리츠 발터에 이어 주장으로 참가하여 팀을 결승까지 이끌었다. 1970년 FIFA 월드컵까지 4회 연속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고, 월드컵 종료 후 '공로십자상'을 수상하고 은퇴했다.[66]
젤러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독일을 대표하는 축구 선수였다. 현역 시절 함부르크 SV에서만 뛰었으며, 클럽 역사상 가장 성공한 선수이자 상징적인 존재로 "'''Uns Uwe'''"(우리들의 우베)라고 불린다. 2005년 8월에는 홈 구장인 HSH 노르드방크 아레나 앞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66]
서독 대표팀으로 4번의 FIFA 월드컵에 참가하여 21경기에 출전했으며, 이는 1998년 로타어 마테우스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세계 기록이었다. 아버지 Erwin Seeler|에르빈 젤러de와 형 Dieter Seeler|디터 젤러de도 함부르크 SV에서 활약한 축구 선수이며, 손자 레빈 외즈투날리 역시 축구 선수로 1. FC 우니온 베를린에서 뛰고 있다.[66]
2. 1. 클럽 경력
젤러는 1946년에 9세의 나이로 함부르크 SV 유소년팀에 입단하여 축구를 시작했다. 1953년에 18세의 나이로 1군 팀으로 승격되었으며, 1954년 DFB-포칼 홀스타인 킬과의 경기에서 4골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8-2, 함부르크 승)[3]당시 독일 축구 선수들의 급여 수준은 낮았고, 최고 수준의 선수들은 해외에서 뛸 기회를 찾기도 했다. 젤러에게도 이탈리아와 스페인 클럽으로부터 거액의 이적 제안이 왔지만, 그는 함부르크에 대한 충성을 지키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3] 함부르크에서 젤러는 1960년 독일 선수권 대회 우승과 1963년 DFB-포칼 우승을 이끌었다. 1963-64 시즌 분데스리가 초대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3회 (1960년, 1964년, 1970년) 수상했다.[4]
1960-61 시즌 유러피언컵 준결승에서 함부르크 SV를 이끌었지만, 바르셀로나와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패하며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1967-68 시즌에는 함부르크를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결승으로 이끌었고, 득점왕을 차지했지만 AC 밀란에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4]
1972년 은퇴 후, 1978년 아일랜드의 코크 셀틱에서 한 경기를 뛰며 2골을 기록하기도 했다.[5][6] 분데스리가 통산 239경기 137골, 유럽 클럽 대항전 29경기 21골을 기록했다.
클럽 | 시즌 | 리그 | 독일 챔피언십 | DFB-포칼 | 유럽 | 합계 | ||||||
---|---|---|---|---|---|---|---|---|---|---|---|---|
디비전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
함부르크 SV | 1954–55 | 오버리가 노르트 | 26 | 28 | 5 | 1 | 1 | 2 | – | 32 | 31 | |
1955–56 | 29 | 32 | 5 | 4 | 2 | 2 | – | 36 | 37 | |||
1956–57 | 26 | 31 | 4 | 2 | 1 | 0 | – | 31 | 33 | |||
1957–58 | 24 | 22 | 4 | 2 | – | – | 28 | 26 | ||||
1958–59 | 27 | 29 | 4 | 5 | 1 | 0 | – | 32 | 34 | |||
1959–60 | 26 | 36 | 7 | 13 | 1 | 0 | – | 34 | 49 | |||
1960–61 | 23 | 29 | 6 | 8 | – | 7 | 5 | 36 | 42 | |||
1961–62 | 28 | 28 | 2 | 4 | – | – | 30 | 32 | ||||
1962–63 | 28 | 32 | 6 | 2 | 4 | 6 | – | 38 | 40 | |||
1963–64 | 분데스리가 | 30 | 30 | – | 2 | 2 | 6 | 5 | 38 | 37 | ||
1964–65 | 19 | 14 | – | 1 | 1 | – | 20 | 15 | ||||
1965–66 | 23 | 11 | – | 2 | 1 | – | 25 | 12 | ||||
1966–67 | 23 | 10 | – | 5 | 3 | – | 28 | 13 | ||||
1967–68 | 30 | 12 | – | 1 | 0 | 9 | 8 | 40 | 20 | |||
1968–69 | 33 | 23 | – | 3 | 1 | 4 | 3 | 40 | 27 | |||
1969–70 | 30 | 17 | – | 2 | 0 | 2 | 0 | 34 | 17 | |||
1970–71 | 25 | 9 | – | 2 | 3 | 1 | 0 | 28 | 12 | |||
1971–72 | 26 | 11 | – | 4 | 3 | – | 30 | 14 | ||||
합계 | 476 | 404 | 43 | 41 | 32 | 24 | 29 | 21 | 580 | 490 | ||
코크 셀틱 | 1977–78 | 리그 오브 아일랜드 | 1 | 2 | – | – | – | 1 | 2 | |||
통산 | 477 | 406 | 43 | 41 | 32 | 24 | 29 | 21 | 581 | 492 |
2. 2. 국가대표 경력
젤러는 1954년 17세의 나이로 서독 대표팀에 데뷔하여 1970년까지 72경기에서 43골을 기록했다.[11] 그는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4위,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8강,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준우승,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3위를 기록하는데 기여했다.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결승전에서 잉글랜드에 연장전 끝에 4-2로 패배한 후[9] 실망한 채 경기장을 떠나는 젤러의 사진은 독일에서 '세기의 사진'으로 선정되기도 했다.[12][13] 1970년 FIFA 월드컵 준결승에서 이탈리아에 연장 접전 끝에 4-3으로 패배한 경기는 '세기의 경기'로 불린다.[4]
젤러는 4번의 월드컵에 모두 출전하여 득점한 최초의 선수이며, 각 월드컵에서 최소 2골 이상을 득점한 최초의 선수이다 (이 기록은 2014년에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타이기록).[11] 또한 월드컵 통산 출전 시간에서 파올로 말디니와 로타어 마테우스에 이어 1,980분으로 3위를 기록하고 있다.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서독 대표팀 주장을 역임했다.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장 | 골 |
---|---|---|---|
독일 | 1954 | 3 | 0 |
1955 | 0 | 0 | |
1956 | 1 | 0 | |
1957 | 0 | 0 | |
1958 | 9 | 5 | |
1959 | 5 | 6 | |
1960 | 5 | 4 | |
1961 | 6 | 5 | |
1962 | 7 | 2 | |
1963 | 3 | 3 | |
1964 | 3 | 4 | |
1965 | 1 | 1 | |
1966 | 12 | 7 | |
1967 | 3 | 1 | |
1968 | 1 | 0 | |
1969 | 3 | 0 | |
1970 | 10 | 5 | |
합계 | 72 | 43 |
1995년 친정팀인 함부르크 SV 회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1998년에 재정 스캔들이 발각되자, 젤러 본인은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지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14][15]
(함부르크 SV)
3. 은퇴 후
2003년 함부르크시 명예 시민상을 받았다.
4. 수상 내역
국가대표
(서독)개인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