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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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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스터 전투는 1651년 9월 3일 올리버 크롬웰이 찰스 2세 군대를 격파한 전투로, 잉글랜드 내전의 사실상 종결을 의미한다. 크롬웰은 스코틀랜드에서 찰스 2세가 즉위하려 하자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던바 전투에서 승리한 후 우스터에서 찰스 2세의 잉글랜드 침공군을 포위 공격했다. 크롬웰의 승리로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고, 크롬웰은 보호국 체제를 수립하여 독재 권력을 행사했다. 이 전투는 잉글랜드 공화정 수립에 기여했으나, 이후 잉글랜드 왕정복고의 씨앗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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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우스터 전투
부분전앵글로-스코틀랜드 전쟁 (1650–1652), 스코틀랜드 내전
우스터 전투
"우스터 전투", 제임스 콜드웰의 판화 (1760년경 ~ 1770년경)
날짜1651년 9월 3일
장소잉글랜드, 우스터셔 주 우스터
결과의회파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의회파
교전 2왕당파 / 스코틀랜드 왕국
지휘관 및 지도자
의회파 지휘관올리버 크롬웰, 찰스 플리트우드, 존 램버트, 머서 소령
왕당파 지휘관찰스 2세, 더비 백작 제임스 스탠리, 슈루즈버리 백작 프랜시스 탈보트, 클리블랜드 백작 토마스 웬트워스, 에드워드 매시, 뉴어크 경 데이비드 레슬리
병력 규모
의회파 병력28,000명
왕당파 병력16,000명
사상자 및 피해
의회파 사상자700명 사망
왕당파 사상자3,000명 사망, 10,000명 포로

2. 배경

1649년 올리버 크롬웰을 비롯한 청교도(의회파)가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스코틀랜드 장로교(맹약파)는 국민맹약과 "엄숙한 동맹과 계약"의 이행을 조건으로 찰스 2세를 새로운 왕위에 앉히려 했다. 이를 우려한 크롬웰은 스코틀랜드에 침공하여 제3차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했다. 1650년 9월 3일, 크롬웰이 이끄는 잉글랜드 공화국군은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고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12월에는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를 함락시켰다. 일반 시민과 찰스 2세를 지지하는 스코틀랜드 왕당파의 이반 작전도 효과를 거두어 항복하는 장교가 속출했고, 중부 로랜드 지방은 잉글랜드의 손에 들어갔다.[2][3]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항복하지 않고 거점을 더 북쪽 하이랜드 지방으로 옮겼고, 1651년 1월 1일, 아가일 공작 아치볼드 캠벨이 찰스 2세의 즉위식을 거행하며 저항을 계속했다. 2월에는 크롬웰이 급병으로 후퇴함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다시 병력을 모았다. 크롬웰의 병세는 이후에도 회복과 재발을 반복했지만, 잉글랜드군은 토마스 해리슨이 랭커셔 병력을 중심으로 전선을 재정비하여 스코틀랜드 침공을 재개했고, 4월에는 글래스고를 공략했으며 6월에는 린리스고에서 스털링으로 이어지는 진군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투를 시작했다. 1651년 7월 20일 인버키딩 전투에서 승리하여 파이프를 장악했고, 포스 만의 제해권도 잉글랜드가 장악했다.[4][5]

2. 1. 잉글랜드 내전의 발발과 전개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스코틀랜드찰스 2세를 왕으로 추대하며 잉글랜드 공화국에 맞섰다. 올리버 크롬웰은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1650년 던바 전투에서 승리하고 에든버러를 함락시키는 등 잉글랜드군이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하이랜드 지방으로 거점을 옮겨 저항을 계속했고, 1651년 1월 1일 찰스 2세의 즉위식을 거행하며 세를 불렸다.[2][3]

크롬웰은 병세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군의 공세를 이어갔고, 1651년 7월 20일 인버키딩 전투에서 승리하여 파이프를 장악하고 포스 만의 제해권도 확보했다.[4][5]

1651년 7월 30일, 크롬웰은 퍼스로 진입하여 스코틀랜드군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찰스 2세는 잉글랜드 본국이 허술해진 틈을 타 남하할 것을 주장했고, 스코틀랜드군 사령관 데이비드 레즐리는 반대했지만 결국 7월 31일 찰스 2세와 함께 스털링을 떠나 남하를 시작했다. 8월 5일, 찰스 2세는 잉글랜드 국경을 넘어 8월 6일 잉글랜드 국왕을 선포했다.[5]

하지만 크롬웰과 잉글랜드 의회는 왕당파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찰스 플릿우드는 8월 7일 1만 4천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밴버리에서 왕당파의 무기를 몰수하는 등 대비했다. 크롬웰은 조지 멍크를 스코틀랜드에 남겨두고 본대를 남하시켜 존 램버트와 토머스 해리슨에게 찰스 2세 군대에 대항하게 했다.[6]

램버트와 해리슨은 1651년 8월 13일 워링턴에서 찰스 2세 군세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Battle of Warrington Bridge|워링턴 브리지 전투영어). 8월 22일 찰스 2세는 우스터에 도착했지만, 런던 인근 도시에서의 왕당파 봉기가 실패했기 때문에 우스터에서 방비를 강화하며 왕당파의 결집을 기다렸다. 그러나 더비 백작 제임스 스탠리가 이끄는 왕당파 원군은 1651년 8월 25일 Battle of Wigan Lane|위건 레인 전투영어에서 잉글랜드군에게 대패했다. 찰스 2세는 랭커셔에서 병사 모집을 호소했지만, 적은 수만이 참가하여 왕당파는 잉글랜드에서 고립되었다.[7][8]

2. 2. 찰스 2세의 잉글랜드 침공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찰스 2세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스코틀랜드 동맹군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 침공을 시도했다. 스코틀랜드군 사령관 데이비드 레슬리는 왕당파 지지가 강한 스코틀랜드 내에서 전투를 벌이려 했으나, 찰스 2세는 잉글랜드에서의 전쟁을 고집했다.[5] 그는 올리버 크롬웰이 포스강 북쪽에서 작전하는 동안, 포스강 남쪽의 스코틀랜드 왕당파 군대가 런던으로 진격하여 잉글랜드 장로파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계산했다. 왕당파 군대는 질서정연하게 1주일 만에 150마일을 이동하여 8월 8일 펜리스와 켄들 사이에서 휴식을 취했다.[5]

그러나 크롬웰과 잉글랜드 국무회의는 왕당파의 움직임을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8월 7일, 민병대가 소집되었고, 찰스 플릿우드 중장은 밴버리에서 중부 지역 병력을, 런던 훈련부대는 1만 4천 명의 병력을 모았다. 크롬웰은 존 램버트 중장에게 기병대를 파견하여 침입자들을 괴롭히게 했고, 토마스 해리슨 소장은 뉴캐슬어폰타인에서 기병대를 선발했다. 8월 9일, 찰스 2세는 켄들에 있었고, 램버트는 후방에서, 해리슨은 머지강에서 그의 길을 막기 위해 진군했다. 8월 15일, 해리슨은 워링턴에서 찰스 2세의 선봉대보다 몇 시간 먼저 도착했고, 램버트도 합류하여 잉글랜드군은 런던 도로를 따라 후퇴했다.[6]

크롬웰은 조지 몽크에게 스코틀랜드에서의 전쟁을 계속하게 한 후, 7일 만에 타인 강에 도착하여 8월 19일 페리브리지에 진입했다. 8월 25일경, 리치필드와 코번트리 사이에서 대규모 전투가 예상되었지만, 찰스 2세는 세번 강 계곡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글로스터와 우스터를 근거지로 삼아 잉글랜드 국민 중 독립파 소수파에 대처하려 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군대에 맞서 싸웠다.[6]

찰스 2세는 8월 22일 우스터에 도착하여 5일 동안 군대를 휴식시키고 추가 작전을 준비하며 소수의 신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이 지연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7]

남쪽으로 행군하는 동안, 크롬웰은 로버트 릴번 대령 지휘하에 두 개의 기동 부대를 파견하여 더비 백작 지휘하의 랭커셔 왕당파와 싸우게 했다. 릴번은 8월 25일 위건 레인 전투에서 적의 랭커셔 분견대를 격파했다. 크롬웰은 에브셔로 이동했고, 8월 28일, 람버트 여단은 업턴어폰세번에서 세번 강을 기습적으로 건넜다. 업턴 전투에서 매시는 중상을 입었고, 플릿우드는 테임 강을 향해 진격하여 람버트와 합류했다. 왕당파는 1만 6천 명에 불과했고, 크롬웰은 2 대 1의 수적 우세를 확보했다.[8]

8월 30일, 크롬웰은 세번 강과 테임 강 합류 지점에 폰툰 다리 두 개를 건설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전투 시작을 연기했다. 이 지연으로 크롬웰은 9월 3일 공격을 개시할 수 있었는데, 이는 던바 전투 승리 1년 후였다.[8]

7월 30일, 크롬웰은 스털링에 남아 있던 스코틀랜드군과 결판을 내기 위해 퍼스로 진입했다. 찰스 2세는 잉글랜드 본국이 허술해지는 시점이라고 판단하고 데이비드 레즐리 경에게 남하를 촉구했다. 레즐리는 스코틀랜드에서의 저항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7월 31일 찰스 2세와 함께 스털링을 떠나 남하를 시작했다. 8월 5일, 찰스 2세는 잉글랜드 국경을 넘어 8월 6일에 잉글랜드 국왕을 선포했다.[5]

크롬웰과 의회는 왕당파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찰스 플릿우드는 8월 7일에 1만 4천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밴버리에 들어가 왕당파의 무기를 몰수했다. 크롬웰은 조지 멍크를 스코틀랜드에 남겨두고 본대를 남하시켜 존 램버트와 해리슨에게 찰스 2세의 군대에 대항하게 했다.[6]

램버트와 해리슨은 8월 13일 워링턴에서 찰스 2세의 군세를 막으려 했지만, 돌파당했다(워링턴 브리지 전투). 8월 22일, 찰스 2세는 우스터에 도착했지만, 런던 진군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우스터의 방비를 굳히면서 왕당파의 결집을 기다렸다. 그러나 더비 백작 제임스 스탠리는 8월 25일 위건 레인 전투에서 로버트 릴번에게 대패했다. 랭커셔에서는 찰스 2세가 병사 모집을 호소했지만, 적은 수만이 참가했고, 왕당파는 잉글랜드에서 고립되었다.[7], [8]

3. 우스터 전투

올리버 크롬웰


잉글랜드의 찰스 2세, 1653년경


올리버 크롬웰의 우스터 전투, 17세기 그림, 화가 미상


1651년 9월 3일, 올리버 크롬웰우스터에서 찰스 2세의 군대를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크롬웰은 조지 몽크에게 스코틀랜드 전쟁을 계속하게 한 후, 타인 강을 거쳐 페리브리지, 에브셔로 이동했다. 8월 28일, 람버트 여단은 업턴어폰세번에서 세번 강을 기습적으로 건넜고, 업턴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로써 왕당파의 통신선이 차단되었고, 크롬웰은 2 대 1의 수적 우세를 확보했다.[9]

찰스 2세는 8월 22일 우스터에 도착하여 5일 동안 군대를 휴식시켰으나,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우스터는 제1차 내전 내내 실용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충성스러운 도시'라는 칭호는 스튜어트 왕정 복고 시기에 보상을 요구하는 냉소적인 주장에서 비롯되었다.[9]

8월 30일, 크롬웰은 세번 강과 테임 강 합류 지점에 폰툰 다리 두 개를 건설하기 위해 전투 시작을 연기했다. 이로써 9월 3일, 던바 전투 승리 1주년에 공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9]

찰스 2세는 민중의 협력을 호소했지만, 대부분의 병력이 스코틀랜드 병사였기에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크롬웰은 3만 명 이상의 병력으로 우스터를 포위하고, 부대를 3개로 나누어 공격을 시작했다.

구분지휘관목표
북군로버트 릴번, 우스터셔의 머서뷰들리 다리 봉쇄, 우스터 증원 및 스코틀랜드 퇴로 차단 (직접 공격 X)
본대올리버 크롬웰, 존 램버트, 토머스 해리슨우스터 동쪽 레드 힐, 페티 숲, 엘버리 산 배치, 동쪽 도로 봉쇄 및 압박
남군찰스 플리트우드, 리처드 딘업턴 다리 돌파, 세번 강 도하, 남쪽 우회, 템 강 방어 우스터 수비대 대치



8월 28일, 남군은 업턴 전투에서 승리하여 세번 강 도하에 성공했지만, 뗏목 다리를 끌고 이동하여 도착이 늦어졌다. 크롬웰 본대는 남군과 공격 시점을 맞추기 위해 대기하며 뗏목 다리를 준비했다. 1651년 9월 3일, 크롬웰 본대와 남군은 일제히 우스터를 공격했다.[9]

3. 1. 전투의 경과

크롬웰은 신중하게 작전을 개시했다. 랭커셔 출신의 릴번과 워스터셔 기병대의 머서 대령은 워스터 북쪽 약 19.31km 지점에 위치한 보들리 다리를 확보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9] 플릿우드는 템 강을 건너 워스터 서쪽 교외인 세인트 존스를 공격해야 했다. 램버트가 워스터 동쪽 성벽을 포위할 군대의 동쪽 측면을 지휘하는 동안, 크롬웰은 도시 남쪽 성벽을 공격할 예정이었다.[9]

9월 3일 아침, 공격이 시작되어 의회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플릿우드는 폰툰 다리를 이용하여 템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리처드 딘 대령의 파위크 다리를 건너는 초기 시도는 왕당파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신모델군은 왕당파 군대를 워스터 방향으로 약 6.44km 길이의 반원을 그리며 후퇴시켰다.[9]

왕당파는 파위크 초원 주변의 모든 생울타리에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크롬웰은 플릿우드를 돕기 위해 세번 강 폰툰 다리를 건너 의회파 증원군을 이끌었다. 워스터 대성당 탑 위에 있던 찰스 2세는 의회파 군대의 노출된 동쪽 측면을 공격할 기회를 포착했다. 찰스 2세는 두 차례의 돌격을 명령했다. 북동쪽 돌격은 해밀턴 공이 지휘했고, 남동쪽 돌격은 찰스 2세가 직접 이끌었다. 데이비드 레슬리가 지휘하는 왕당파 기병대는 돌격을 지원하지 않았다. 크롬웰은 세번 강 폰툰 다리를 건너 세 개의 여단을 이끌고 측면을 강화했다.[10]

램버트가 지휘하는 의회파는 수적 우세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시간 동안 후퇴했지만, 크롬웰의 증원군 합류 후 상황을 역전시켜 왕당파를 도시 쪽으로 몰아붙였다. 왕당파의 후퇴는 궤멸로 변했다. 에식스 민병대가 포트 로열을 점령하고 왕당파 대포를 워스터를 향해 발사하면서 왕당파의 저항은 무너졌다.[10]

도시에 들어온 찰스 2세는 군대를 규합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클리블랜드 백작과 케어리스 소령 등이 이끄는 왕당파 기병대의 돌격은 찰스 2세가 세인트 마틴 게이트를 통해 탈출할 시간을 벌어주었다.[10]

어둠이 짙어지면서 도시는 세 방향에서 공격받았고, 정규군과 민병대는 용감하게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탈출한 수천 명의 왕당파는 릴번과 머서, 또는 요크셔와 랭커셔의 모든 도로를 감시하는 민병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시골 사람들조차 수많은 포로를 잡아왔고, 왕당파 장교와 병사들은 저항할 힘을 잃었다.[10]

3. 2. 전투의 결과

1853년 존 에버렛 밀레이스(John Everett Millais)가 그린 유화 ''1651년의 추방된 왕당파''는 우스터 전투 후 도망치는 왕당파를 젊은 청교도 여성이 나무 속에 숨겨주는 모습을 묘사했다.


크롬웰의 승리 후 보고서 일부가 새겨진, 영국 우스터 시드버리 게이트(Sidbury Gate) 부근의 명판: "내가 아는 한, 이것은 하늘의 축복입니다".


우스터 전투에서 의회파가 승리하면서 잉글랜드 내전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전투 중 약 3,000명이 사망하고, 1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11] 더비 백작은 처형되었고, 다른 영국 포로들은 신모델군에 강제 징집되어 아일랜드로 보내졌다. 약 8,000명의 스코틀랜드 포로들은 계약 노동자로 일하거나 펜 지역 배수 작업을 위해 뉴잉글랜드, 버뮤다, 서인도 제도로 추방되었다. 약 1,200명의 "스코틀랜드 포로"는 런던으로 압송되었고, 토틸 필즈 등 임시 수용소에서 질병과 기아로 사망했다. 반면 의회군 사상자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찰스 2세는 보스코벨 하우스 부지의 오크 나무에 숨는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며 탈출했다. 그는 영국 남부 해안에서 쇼어햄을 통해 프랑스로 피신했다.[12] 올리버 크롬웰은 9월 4일 하원 의장 윌리엄 렌솔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러한 자비의 규모는 제 생각을 넘어섭니다. 제가 아는 한, 이것은 하늘의 축복입니다."라고 말했다. 크롬웰은 이 승리를 신이 내린 가장 큰 은총으로 여겼으며, "하늘의 축복"이라는 표현은 왕당파 군대를 궤멸시키고 잉글랜드 내전을 종식시킨 이 전투를 상징하게 되었다.

의회군 민병대는 일주일 안에 귀가했다. 크롬웰은 잔존 의회에 보낸 편지에서 "당신의 새로 모집된 부대는 훌륭한 공을 세웠으므로 매우 높은 평가와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라고 칭찬했다. 휴 피터스는 민병대에게 "우스터에서 영국의 슬픔이 시작되었고, 행복하게 끝났다"는 작별 설교를 했는데, 이는 1642년 9월 23일 파위크 브리지 전투를 언급한 것이다. 한편, 찰스 2세는 우스터 직물업자 조합에 군복을 주문했지만 453.15GBP를 지불하지 못했다. 2008년 6월 찰스 왕세자가 357년 된 빚(이자 제외 약 47500GBP)을 대신 갚았다.

이 전투는 크롬웰이 전선에서 군대를 이끈 마지막 전투였다. 그의 지휘 아래 제3차 잉글랜드 내전이 종결되었고,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크롬웰의 뉴 모델 군에 대항할 군사력은 사라졌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찰스 2세와 함께 남하한 병사 중 레즐리(Leslie)를 포함한 6,000명 이상이 포로가 되어 군사력이 거의 소멸되었다. 1652년까지 아가일 후작(Argyll)이 항복하면서 스코틀랜드는 거의 정복되었다. 1653년 하이랜드 지방에서 왕당파 귀족들의 무장 봉기()가 있었지만 1654년 진압되었다. 크롬웰은 군사적 명성을 바탕으로 보호국이라는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찰스 2세는 왕당파의 도움으로 평민으로 변장하여 6주간의 도피 끝에 프랑스로 탈출했다(). 이로 인해 대륙에서 왕당파의 활동이 이어졌고, 크롬웰 사후 잉글랜드 왕정 복고의 싹을 남겼다.

4. 전투 분석

크롬웰의 전투 계획은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각 부대에 특정 목표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랭커셔 출신 로버트 릴번 대령과 워스터셔 기병대의 머서 소령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보들리 다리를 확보해야 했다. 램버트와 플릿우드는 템 강을 건너 워스터 서쪽 교외인 세인트 존스를 공격해야 했다. 크롬웰 자신과 주력군은 도시를 직접 공격해야 했다.[1]

이 계획은 그대로 실행되었으며, 세당 전투의 원형이 되었다.[1] C.F. 앳킨슨과 독일 비평가 프리츠 회니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의 영국 내전에 관한 기사에서, 영국 군사 역사가 존 윌리엄 포티스큐 경이 제기한 것과 같은 견해를 제시했다. 워스터 전투는 외형 이상으로 세당 전투와 닮았다. 두 전투 모두 "무장한 국민들", 즉 투쟁에 진심을 다한 시민 병사들이 최선을 다해 싸우고 행군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다. 그러한 병사들이 있었기에 장군은 군대의 두 부분 사이에 깊은 강을 두거나, 승리를 확신하고 나머지 병력으로 승리할 것을 확신하며, 사전에 파견대를 보내 승리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추격이 불필요한 드문 승리 중 하나였다.[1]

5. 영향

우스터 전투는 잉글랜드 내전의 마지막 주요 전투였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잉글랜드 공화국이 확고해졌다.

5. 1. 찰스 2세의 망명과 왕정복고의 씨앗

찰스 2세는 포위망 속에서 적에게 완전히 섬멸되고, 그의 신변에 1000GBP의 현상금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평민으로 변장하거나 더비 백작의 도움 등 왕당파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약 6주간의 도피 생활 끝에 프랑스로 탈출했다.[12] 이로 인해 대륙에서도 왕당파의 활동이 계속되었고, 크롬웰 사후에 일어나는 잉글랜드 왕정 복고의 씨앗을 남기게 되었다.[12]

6. 역사적 평가 및 유산

우스터 전투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존 애덤스토머스 제퍼슨은 1786년 4월 초에 우스터 전투가 벌어졌던 포트 로열 언덕을 방문했다. 존 애덤스는 그곳 사람들이 전투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실망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즉흥 연설을 했다.

"워스터 주민들은 너무 무지하고 무관심해서 흥분한 나머지 '영국인들이 자유를 위해 싸운 땅을 이렇게 빨리 잊는단 말인가? 이웃과 자녀들에게 이곳이 성지이며, 여러분의 교회가 서 있는 땅보다 훨씬 더 신성한 땅이라고 말해주게. 온 영국이 매년 이 언덕에 순례를 와야 한다네'라고 물었습니다."

6. 1. 유적지 및 기념물



1786년 4월 초, 존 애덤스토머스 제퍼슨은 우스터 전투가 벌어졌던 포트 로열 언덕을 방문했다. 존 애덤스는 그곳 사람들이 전투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것에 실망하여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실망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즉흥 연설을 했다.

"워스터 주민들은 너무 무지하고 무관심해서 흥분한 나머지 '영국인들이 자유를 위해 싸운 땅을 이렇게 빨리 잊는단 말인가? 이웃과 자녀들에게 이곳이 성지이며, 여러분의 교회가 서 있는 땅보다 훨씬 더 신성한 땅이라고 말해주게. 온 영국이 매년 이 언덕에 순례를 와야 한다네'라고 물었습니다."

참조

[1] harvard The Crowning Mercy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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