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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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집은 남송의 승상 우윤문의 5세 손으로, 원나라 시기 학자이자 관료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몽골 제국과의 전란 속에서 어머니에게 《논어》, 《맹자》, 《좌전》을 배워 학문을 익혔다. 원 성종 대덕 원년에 대도로유학교수로 임명되어 강직함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원 문종 때 경정을 겸임하고 규장각시서학사를 지냈다. 그는 《황조경세대전》 편찬에 참여했으나, 《원조비사》 열람은 허락받지 못했다. 우집은 고려의 충선왕과 교류하기도 했으며, 몽골족 치하에서 옛 남송인으로서의 감성을 담은 시를 지어 '유림사걸'로 불렸다. 저서로는 《도원학고록》, 《도원류고》 등이 있으며, 사후 인수군공에 추봉되고 시호는 문정이다.
우집의 조상은 능주(陵州) 인수현(仁寿縣) 출신으로, 남송의 승상(丞相)이었던 우윤문의 5세 손이다.[2] 아버지 우급(虞汲)은 황문위(黄門尉) 관직을 지냈고, 남송이 멸망한 뒤 임천(臨川) 숭인(崇仁)으로 옮겨 살았다.[3] 우집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는데, 남송 말기 몽골 제국과의 전란으로 각지를 떠돌며 읽을 책이 없었으나, 어머니 양씨(楊氏)가 자신이 외우고 있던 《논어》, 《맹자》, 《좌전》을 우집에게 구술로 가르쳤다.[1] 세 살 무렵부터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아버지의 학우였던 오징에게서 배웠다.
우집은 서예에 뛰어나 진(晉) 시대 사람들의 풍미를 얻었고, 시를 잘 지어 류관, 황진, 알계사 등과 함께 '''유림사걸'''(儒林四傑)이라 불렸다.[6] 우집의 시는 정연한 골격을 갖추고 있어 당시(唐詩)를 모범으로 창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두보의 칠언율시에 주석을 붙인 《우주두율》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새로운 소재나 현실을 읊어내는 필력도 가지고 있었다.[7]
2. 생애
성종 대덕 원년(1297년) 대도에 이르러 대도로유학교수(大都路儒学教授)에 임명되었고, 강직함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누차 비서소감(秘書少監),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승진하였으며, 당시의 승상 바이주에게 유학자를 관리로 임용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원 인종(仁宗) 때(재위 1311년 ~ 1320년)에는 집현수찬(集贤修撰)을 맡았다. 고려에서 와서 연경에 머무르던 충선왕이 연경에 지은 도서관 만권당에 드나들며 충선왕이나 이제현과도 교류가 있었다.[4]
원 문종(文宗, 재위 1328년 ~ 1329년, 1329년 ~ 1332년)이 즉위하자 경정(経筵)[5]을 겸임하였으며, 규장각시서학사(奎章閣侍書學士)가 되었다. 당시 관중 땅에서 기근에 대한 상소를 올렸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당회요》(唐會要), 《송회요》(宋會要)를 모방한 《황조경세대전》(皇朝經世大典) 찬수의 총재로 임명되어 대규모 편찬사업을 주관하였으나, 《조종실록》(祖宗実録)을 편찬할 때에 《원조비사》(元朝秘史)를 열람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우집은 황제의 고문으로써 정치 현안에 대한 황제의 하문에 답해 간언을 올렸고 수용된 것도 많았지만, 성격이 강직하였기 때문에 정적도 많았고, 자주 관직에서 파면되기도 하였다.[1] 원 순제(順帝)가 즉위(1333년)하자 병을 칭하고 임천으로 돌아왔다. 지정 8년(1348년) 5월에 사망하였다. 향년 77세. 사후 인수군공(仁壽郡公)에 추봉되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학문
우집의 조상은 능주(陵州) 인수현(仁寿縣) 출신으로, 남송의 승상(丞相)이었던 우윤문의 5세 손이다.[2] 아버지 우급(虞汲)은 황문위(黄門尉) 관직을 지냈고, 남송이 멸망한 뒤 임천(臨川) 숭인(崇仁)으로 옮겨 살았다.[3] 우집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는데, 남송 말기 몽골 제국과의 전란으로 각지를 떠돌며 읽을 책이 없었으나, 어머니 양씨(楊氏)가 자신이 외우고 있던 《논어》, 《맹자》, 《좌전》을 우집에게 구술로 가르쳤다.[1] 세 살 무렵부터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아버지의 학우였던 오징에게서 배웠다.
성종 대덕 원년(1297년) 대도에 이르러 대도로유학교수(大都路儒学教授)에 임명되었고, 강직함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누차 비서소감(秘書少監),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승진하였으며, 당시의 승상 바이주에게 유학자를 관리로 임용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2. 2. 관직 진출과 정치 활동
우집은 남송(南宋)의 승상(丞相)이었던 우윤문(虞允文)의 5세 손으로, 조상은 능주(陵州) 인수현(仁寿縣) 출신이다.[2] 아버지 우급(虞汲)은 황문위(黄門尉) 관직을 지냈고, 남송이 멸망한 뒤 임천(臨川) 숭인(崇仁)으로 옮겨 살았다.[3] 우집은 몽골 제국과의 전란으로 각지를 떠돌면서도 어머니 양씨(楊氏)에게서 《논어》(論語), 《맹자》(孟子), 《좌전》(左傳)을 배웠고, 세 살 때부터 독서를 시작하여 아버지의 학우였던 오징에게서 배웠다.
원 성종(成宗) 대덕 원년(1297년) 대도(大都)에 이르러 대도로유학교수(大都路儒学教授)에 임명되었고, 강직함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이후 비서소감(秘書少監),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승진하였으며, 당시의 승상 바이주에게 유학자를 관리로 임용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원 인종(仁宗) 때(재위 1311년 ~ 1320년)에는 집현수찬(集贤修撰)을 맡았다. 고려에서 와서 연경에 머무르던 충선왕이 연경에 지은 도서관 만권당에 드나들며 충선왕이나 이제현과도 교류가 있었다.[4]
원 문종(文宗, 재위 1328년 ~ 1329년, 1329년 ~ 1332년)이 즉위하자 경정(経筵)[5]을 겸임하였으며, 규장각시서학사(奎章閣侍書學士)가 되었다. 당시 관중 땅에서 기근에 대한 상소를 올렸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당회요》(唐會要), 《송회요》(宋會要)를 모방한 《황조경세대전》(皇朝經世大典) 찬수의 총재로 임명되어 대규모 편찬사업을 주관하였으나, 《조종실록》(祖宗実録)을 편찬할 때에 《원조비사》(元朝秘史)를 열람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우집은 황제의 고문으로써 정치 현안에 대한 황제의 하문에 답해 간언을 올렸고 수용된 것도 많았지만, 성격이 강직하였기 때문에 정적도 많았고, 자주 관직에서 파면되기도 하였다.[1] 원 순제(順帝)가 즉위(1333년)하자 병을 칭하고 임천으로 돌아왔다. 지정 8년(1348년) 5월에 사망하였다. 향년 77세. 사후 인수군공(仁壽郡公)에 추봉되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2. 3. 고려와의 교류
우집은 원 인종(仁宗) 때(재위 1311년 ~ 1320년) 고려에서 와서 연경에 머무르던 충선왕이 연경에 지은 도서관 만권당에 드나들며 충선왕이나 이제현과도 교류가 있었다.[4]
2. 4. 은퇴와 죽음
우집은 원 순제가 즉위한 1333년에 병을 칭하고 임천으로 돌아왔다.[4] 지정 8년(1348년) 5월에 사망하였는데, 향년 77세였다.[4][1] 사후 인수군공(仁壽郡公)에 추봉되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라 하였다.[4]
우집은 황제의 고문으로써 정치 현안에 대한 황제의 하문에 답해 간언을 올렸고 수용된 것도 많았지만,[4] 성격이 강직하였기 때문에 정적도 많았고, 자주 관직에서 파면되기도 하였다고 한다.[4]
3. 사상과 학문적 업적
4. 문학적 업적
그의 시는 몽골족의 원 왕조 치하를 살아가는 옛 남송인으로써의 감상을 담고 있으며, 알계사, 범정, 양재와 함께 원대 시단(詩壇)의 4대 대가의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다. 우집은 자신을 "한 조정의 늙은 관리"(漢廷老吏)라 불렀고,[8] 사람들은 그를 소암선생(邵庵先生)이라 불렀다.
우집의 저서로는 《도원학고록》(道園學古錄) 50권, 《도원류고》(道園類稿) 50권, 《도원유고》(道園遺稿) 6권, 《평요기》(平猺記) 등이 있었다. 청(清) 말기 ~ 민국 초기의 정치인 주조모(朱祖謀)가 《강촌총서》(彊村叢書)에서 우집의 시를 모아 《도원악부》(道園樂府) 한 권으로 엮었으며, 이후 왕정(王颋)이 점교(点校)한 《우집전집》(虞集全集)이 2007년 텐진 고적출판사(天津古籍出版社)에서 출판되었다.조맹부(趙孟頫) 「중강첩장도(重江畳嶂図)」에 제하다 석자(昔者) 장강(長江) 험(険) 옛날 장강은 험하고 능생(能生) 백발애(白髪哀) 능히 백발의 슬픔을 낳았네 백년(百年) 경제(経済) 진(盡) 백 년의 경제는 다하고 일일(一日) 화도(畫圖) 개(開) 하루 그림이 열리네 승사(僧寺) 의희(依稀) 재(在) 승사는 의지하며 희미하게 있네 어주(漁舟) 호탕(浩蕩) 회(回) 어선은 호탕하게 돌아가네 소조(蕭條) 수근수(数根樹) 쓸쓸한 몇 그루의 나무 시유(時有) 해조(海潮) 래(來) 때로 해조가 오네
4. 1. 작품
우집은 서예에 뛰어나 진(晉) 시대 사람들의 풍미를 얻었고, 시를 잘 지어 류관, 황진, 알계사 등과 함께 '''유림사걸'''(儒林四傑)이라 불렸다.[6] 우집의 시는 정연한 골격을 갖추고 있어 당시(唐詩)를 모범으로 창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두보의 칠언율시에 주석을 붙인 《우주두율》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새로운 소재나 현실을 읊어내는 필력도 가지고 있었다.[7]
그의 시는 몽골족의 원 왕조 치하를 살아가는 옛 남송인으로써의 감상을 담고 있으며, 알계사, 범정, 양재와 함께 원대 시단(詩壇)의 4대 대가의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다. 우집은 자신을 "한 조정의 늙은 관리"(漢廷老吏)라 불렀고,[8] 사람들은 그를 소암선생(邵庵先生)이라 불렀다.
우집의 저서로는 《도원학고록》(道園學古錄) 50권, 《도원류고》(道園類稿) 50권, 《도원유고》(道園遺稿) 6권, 《평요기》(平猺記) 등이 있었다. 청(清) 말기 ~ 민국 초기의 정치인 주조모(朱祖謀)가 《강촌총서》(彊村叢書)에서 우집의 시를 모아 《도원악부》(道園樂府) 한 권으로 엮었으며, 이후 왕정(王颋)이 점교(点校)한 《우집전집》(虞集全集)이 2007년 텐진 고적출판사(天津古籍出版社)에서 출판되었다.
조맹부(趙孟頫) 「중강첩장도(重江畳嶂図)」에 제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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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자(昔者) 장강(長江) 험(険) | 옛날 장강은 험하고 |
능생(能生) 백발애(白髪哀) | 능히 백발의 슬픔을 낳았네 |
백년(百年) 경제(経済) 진(盡) | 백 년의 경제는 다하고 |
일일(一日) 화도(畫圖) 개(開) | 하루 그림이 열리네 |
승사(僧寺) 의희(依稀) 재(在) | 승사는 의지하며 희미하게 있네 |
어주(漁舟) 호탕(浩蕩) 회(回) | 어선은 호탕하게 돌아가네 |
소조(蕭條) 수근수(数根樹) | 쓸쓸한 몇 그루의 나무 |
시유(時有) 해조(海潮) 래(來) | 때로 해조가 오네 |
5. 평가
참조
[1]
서적
元明詩概説
岩波書店
[2]
문서
지금의 중국 쓰촨 성(四川省)이다.
[3]
문서
지금의 장시 성(江西省)이다.
[4]
역사서
고려사
[5]
문서
황제에게 강의하는 직책.
[6]
역사서
원사
[7]
서적
元明詩概説
岩波書店
[8]
문서
송렴(宋濂) 《류시제문집》(柳待制文集) 서언(序言) "天曆以來,海內之所宗者,唯雍虞公伯生、豫章揭公曼碩、烏傷黃公晉卿及公(柳貫)四人而已。識者以為名言", 송화(宋犖) 《만당설시》(漫堂說詩) "元初襲金源派,以好問為大宗,其後則稱虞、楊、範、揭". 심덕잠(沈德潛) 《설시취어》(說詩晬語) "虞、楊、範、揭四家詩品相敵。中又以漢廷老吏為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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