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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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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풍개혁은 1080년(원풍 3년) 북송 신종 시기에 왕안석의 신법을 계승하여 1년 8개월에 걸쳐 단행된 관제 개혁이다. 당나라 율령 체제의 한계와 송나라 초기 관제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주요 내용으로는 재정 담당 부서인 삼사의 해체, 인사권 개혁, 재상직 개편, 기록관 제도의 간소화 및 직사본관 직권 회복 등이 있다. 개혁 이후 추밀원의 권한이 축소되었으며, 사마광 집권 시기에는 개혁의 일부 수정과 함께 언관직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원풍개혁은 남송 시대까지 재상 지위 안정에 영향을 미쳤으며, 고려 관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2. 역사적 배경

의 율령 체제 하에서는 삼성육부를 정점으로 하는 정밀하고 완성된 관제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현종 시기 이후 사회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여 현실과 이념 간의 괴리가 심해졌다. 이 괴리를 메우기 위해 설치된 임시 관직을 사직이라고 하며, 절도사나 전운사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사직은 율령으로 정해진 관직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율령은 점차 형식화되었다.

당의 멸망과 오대 사이에 그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 성립하여 중국을 통일했지만, 건국 초기 혼란을 우려하여 개국 공신들은 관제에 손을 대지 않았다.

북송 중기, 신종이 즉위하여 왕안석을 등용, 신법이라 불리는 정치 개혁을 통해 재정과 군사를 충실하게 하였다. 이에 고무된 신종은 1080년 (원풍 3년)에 관제 개혁에 착수, 1년 8개월에 걸쳐 완성했다.

2. 1. 당나라 율령 체제의 한계

2. 2. 송나라 초기 관제의 문제점

3. 주요 내용

왕안석1076년(희녕 9년) 재상직에서 물러났고 다음 해에는 정계에서도 은퇴했지만, 원풍개혁은 왕안석의 신법과 기본적인 노선을 같이 했다.

원풍개혁에서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삼사의 해체이다. 삼사는 재정을 담당하는 부서로 재정에 관한 거의 대부분의 권한을 가진 거대 관청이었다. 왕안석은 신법을 실시하면서 제치삼사조례사를 설치해 신진 관료를 모았으며, 삼사의 해체를 추진해 삼사가 가진 권한을 사농사·태부사·군기감·장작감·대리사·형부·공부 등의 다른 부서로 이관했고 삼사의 권한은 경제 사무로 한정했다. 이후 원풍개혁 때는 삼사의 권한을 호부로 모두 옮겨서 삼사는 완전히 해체됐다.

과거에는 인사권을 심관원, 유내전, 삼반원, 추밀원 등 네 기구가 서로 독립하여 행사했으며 각 기구는 차례대로 경조관(중상급 문관)·선인(하급 문관)·삼반사신(하급 무관)·대사신 이상 내신(중상급 무관)의 인사권을 담당했다. 1070년(희녕 3년) 심관원을 심관동원(審官東院)과 심관서원(審官西院)으로 분할하여 심관동원이 종래 심관원의 직권을 보유하고 추밀원의 인사권은 심관서원으로 이관했다. 두 기구의 인사권은 다시 원풍개혁이부로 옮겨졌다가 심관동원·심관서원·유내전·삼반원을 모두 이부 소속으로 한 뒤 각각 이부상서좌선·이부상서우선·이부시랑좌선·이부시랑우선으로 개명·개조했다. 이후 이들 기구는 이부사선사(吏部四選司)라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추밀원은 상급 문무관의 인사권의 일부를 유지했다.

희녕 연간에 진행된 개혁에 이어, 원풍 연간에는 재상직을 포함한 관제 개혁이 대대적으로 단행되었다. 왕안석1076년(희녕 9년) 재상직에서 물러났고 다음 해에는 정계에서도 은퇴했지만, 원풍개혁의 기본적인 노선은 왕안석의 신법과 연관성이 있었다.

원풍개혁에서는 외형상 당나라의 삼성육부를 모델로 했으나, 삼성의 장관인 중서령, 상서령, 시중은 실제로 임명되지 않는 공석으로 두었다. 대신 부장관인 상서좌복야가 문하시랑을 겸임하고, 상서우복야가 중서시랑을 겸임하여 이 두 명이 재상이 되었다. 또한 좌우상서승과 상서복야를 겸임하지 않는 문하시랑·중서시랑 등 네 명을 부재상격인 집정으로 삼았다. 이로써 정원이 확정되지 않았던 동중서문하평장사, 참지정사를 대신해 여섯 명의 재집관(宰執官) 체제를 확립하여 국정을 운영했다.

신종 사후 재상이 된 사마광은 개혁의 기본 방침을 계승하면서도 일부 수정을 가했다. 어사대·간관 등 언관직의 권한을 강화하여 본래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게 된 문하성의 기능을 일부 계승했다. 한편, 재상과 언관의 충돌을 막기 위해 재상의 인사권을 강화했다. 그 결과 재상이 정책을 실시할 때마다 언관이 이를 비판하여 재상이 실각하는 사태가 줄어들어 남송 때까지 재상의 지위가 안정될 수 있었다. 이는 재상의 임명권을 가진 황제의 권한 강화로도 이어졌다.

왕안석이 1076년(희녕 9년) 재상직에서 물러난 뒤 본격적으로 시작된 원풍개혁은 기록관 제도를 간소화하고 직사본관의 권한을 회복하여 유명무실했던 관직 체계를 정비했다.

개혁 이전에는 기록관은 그 사람의 과거 성적 등에 따라 몇 개의 코스로 나뉘어져 있었고, 같은 계위에 4~5개의 기록관이 병립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같은 계제(階梯)에 네다섯 개의 기록관이 병립하여 과거 성적에 따라 임명되는 관직이 달랐다. 예를 들어 어떤 문관은 종5품이 되고, 과거 성적이 우수하면 태상소경의 자리에 올랐고, 좋지 않으면 광록경이 되었다.

하지만 원풍개혁 이후에는 출신과 성적에 관계없이 하나의 관직에만 임명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출신·과거 성적에 관계없이 중산대부로 일원화되었다. 그리고 광록경·태상소경과 같은 직사본관도 대응하는 차견(이 경우 순서대로 "판광록사사"·"동판태상례원사")과 통합되어, 기존 율령에 규정된 직무와 권한을 회복했다.

이때의 개혁은 문관 계열에만 이루어져서 무관이나 기술관료들은 종래의 이름뿐인 내사직(궁중에서 황제를 보필하는 령외관직)을 무계·기술관계로서 유용했다. 북송 휘종 때인 정화 연간에 무계·기술관계의 일원화가 이루어졌다. 즉, "무덕대부"와 같은 새로운 무계·기술관계로 일원화되었다.

추밀원은 율령에는 없던 기관으로 폐지가 검토되었지만 존속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인사권이 축소되는 등 권한이 줄어들었다.

3. 1. 삼사 해체

왕안석1076년(희녕 9년) 재상직에서 물러났고 다음 해에는 정계에서도 은퇴했지만, 원풍개혁은 왕안석의 신법과 기본적인 노선을 같이 했다.

원풍개혁에서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삼사의 해체이다. 삼사는 재정을 담당하는 부서로 재정에 관한 거의 대부분의 권한을 가진 거대 관청이었다. 왕안석은 신법을 실시하면서 제치삼사조례사를 설치해 신진 관료를 모았으며, 삼사의 해체를 추진해 삼사가 가진 권한을 사농사·태부사·군기감·장작감·대리사·형부·공부 등의 다른 부서로 이관했고 삼사의 권한은 경제 사무로 한정했다. 이후 원풍개혁 때는 삼사의 권한을 호부로 모두 옮겨서 삼사는 완전히 해체됐다.

3. 2. 인사권 개혁

과거에는 인사권을 심관원, 유내전, 삼반원, 추밀원 등 네 기구가 서로 독립하여 행사했으며 각 기구는 차례대로 경조관(중상급 문관)·선인(하급 문관)·삼반사신(하급 무관)·대사신 이상 내신(중상급 무관)의 인사권을 담당했다. 1070년(희녕 3년) 심관원을 심관동원(審官東院)과 심관서원(審官西院)으로 분할하여 심관동원이 종래 심관원의 직권을 보유하고 추밀원의 인사권은 심관서원으로 이관했다. 두 기구의 인사권은 다시 원풍개혁이부로 옮겨졌다가 심관동원·심관서원·유내전·삼반원을 모두 이부 소속으로 한 뒤 각각 이부상서좌선·이부상서우선·이부시랑좌선·이부시랑우선으로 개명·개조했다. 이후 이들 기구는 이부사선사(吏部四選司)라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추밀원은 상급 문무관의 인사권의 일부를 유지했다.

3. 3. 재상직 개편

희녕 연간에 진행된 개혁에 이어, 원풍 연간에는 재상직을 포함한 관제 개혁이 대대적으로 단행되었다. 왕안석1076년(희녕 9년) 재상직에서 물러났고 다음 해에는 정계에서도 은퇴했지만, 원풍개혁의 기본적인 노선은 왕안석의 신법과 연관성이 있었다.

원풍개혁에서는 외형상 당나라의 삼성육부를 모델로 했으나, 삼성의 장관인 중서령, 상서령, 시중은 실제로 임명되지 않는 공석으로 두었다. 대신 부장관인 상서좌복야가 문하시랑을 겸임하고, 상서우복야가 중서시랑을 겸임하여 이 두 명이 재상이 되었다. 또한 좌우상서승과 상서복야를 겸임하지 않는 문하시랑·중서시랑 등 네 명을 부재상격인 집정으로 삼았다. 이로써 정원이 확정되지 않았던 동중서문하평장사, 참지정사를 대신해 여섯 명의 재집관(宰執官) 체제를 확립하여 국정을 운영했다.

신종 사후 재상이 된 사마광은 개혁의 기본 방침을 계승하면서도 일부 수정을 가했다. 어사대·간관 등 언관직의 권한을 강화하여 본래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게 된 문하성의 기능을 일부 계승했다. 한편, 재상과 언관의 충돌을 막기 위해 재상의 인사권을 강화했다. 그 결과 재상이 정책을 실시할 때마다 언관이 이를 비판하여 재상이 실각하는 사태가 줄어들어 남송 때까지 재상의 지위가 안정될 수 있었다. 이는 재상의 임명권을 가진 황제의 권한 강화로도 이어졌다.

3. 4. 기록관 일원화 및 직사본관 직권 회복

왕안석이 1076년(희녕 9년) 재상직에서 물러난 뒤 본격적으로 시작된 원풍개혁은 기록관 제도를 간소화하고 직사본관의 권한을 회복하여 유명무실했던 관직 체계를 정비했다.

개혁 이전에는 기록관은 그 사람의 과거 성적 등에 따라 몇 개의 코스로 나뉘어져 있었고, 같은 계위에 4~5개의 기록관이 병립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같은 계제(階梯)에 네다섯 개의 기록관이 병립하여 과거 성적에 따라 임명되는 관직이 달랐다. 예를 들어 어떤 문관은 종5품이 되고, 과거 성적이 우수하면 태상소경의 자리에 올랐고, 좋지 않으면 광록경이 되었다.

하지만 원풍개혁 이후에는 출신과 성적에 관계없이 하나의 관직에만 임명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출신·과거 성적에 관계없이 중산대부로 일원화되었다. 그리고 광록경·태상소경과 같은 직사본관도 대응하는 차견(이 경우 순서대로 "판광록사사"·"동판태상례원사")과 통합되어, 기존 율령에 규정된 직무와 권한을 회복했다.

이때의 개혁은 문관 계열에만 이루어져서 무관이나 기술관료들은 종래의 이름뿐인 내사직(궁중에서 황제를 보필하는 령외관직)을 무계·기술관계로서 유용했다. 북송 휘종 때인 정화 연간에 무계·기술관계의 일원화가 이루어졌다. 즉, "무덕대부"와 같은 새로운 무계·기술관계로 일원화되었다.

3. 5. 추밀원의 변화

추밀원은 율령에는 없던 기관으로 폐지가 검토되었지만 존속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인사권이 축소되는 등 권한이 줄어들었다.

4. 원풍개혁 이후의 변화

4. 1. 사마광 집권 시기의 변화

4. 2. 신구당쟁 격화

4. 3. 남송 시기의 영향

5. 한국사와의 관련성

5. 1. 고려 관제와의 비교

5. 2. 사료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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