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굴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굴리는 전한 시대의 인물로, 탁군 태수를 거쳐 승상에 임명된 후 팽후에 봉해졌다. 무고의 난 당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으나, 이광리와 창읍왕 유박을 옹립하려는 모의를 했다는 혐의로 요참형에 처해졌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당시 전한 조정의 권력 다툼과 정치적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유굴리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90년 사망 - 유곤치
    유곤치는 전한 시대 중산나라의 왕으로, 기원전 54년 또는 기원전 53년에 즉위하여 기원전 44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유보가 중산왕이 되었다.
  • 기원전 90년 사망 - 유순 (장량후)
    한나라 황실 후손인 유순은 왕망의 권력 찬탈 시도에 연루되어 기원전 8년 역모죄로 처형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당시 정치적 혼란과 권력 투쟁의 희생을 보여준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 전한의 종실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전한의 종실 - 전한 무제
    전한의 제7대 황제인 전한 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며 유교 기반 중앙집권 강화, 흉노 정벌을 통한 영토 확장, 소금과 철의 전매제 등 경제 개혁을 추진하여 전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나, 과도한 군사 지출, 사치스러운 생활, 무고의 난 등 부정적인 면모도 보였다.

2. 생애

정화 2년(기원전 91년), 탁군태수를 지내다가 승상으로 승진하고 (澎侯)에 봉해졌다. 같은 해, 여태자가 무고의 난을 일으켰다. 유굴리는 여태자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으나, 정화 3년(기원전 90년) 사돈인 이광리창읍왕을 황태자로 세우려 했다는 모함을 받고 요참에 처해졌다.

2.1. 초기 생애

정화 2년(기원전 91년), 탁군태수를 지내다가 승상으로 승진하고 (澎侯)에 봉해졌다.

2.2. 무고의 난 진압

정화 2년(기원전 91년), 유굴리는 승상이 되었고 (澎侯)에 봉해졌다.

같은 해, 여태자가 무고의 난을 일으켰고, 여태자의 병력은 승상부에까지 다다랐다. 유굴리는 단신으로 도망쳤으나 승상의 인수를 잃어버렸고, 태자의 반란을 공표하지 못한 채 파발을 통해 감천궁에 있었던 무제에게 이를 알렸다. 무제는 장안의 성문을 걸어잠그고 반란군을 포위하여 물리칠 것을 명하였고, 유굴리는 진압군을 지휘하였다. 닷새에 걸친 싸움에 수만 명이 죽었으나 반란은 진압되었고, 여태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3. 이광리와의 모의와 죽음

정화 3년(기원전 90년), 유굴리의 사돈인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흉노 토벌을 위해 출진하기 전, 유굴리에게 자신의 누이동생의 아들인 창읍왕을 황태자로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유굴리는 이를 내심 원하고 있었기에 승낙하였다.

그러나 내자령 곽양(郭穰)이 무제에게 유굴리의 부인이 무제를 저주하고 있으며, 이광리와 함께 창읍왕을 황제로 세우려 한다고 모함하였다. 이로 인해 유굴리는 요참에 처해졌고, 처자식 또한 목이 베여 화양(華陽)의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

한편, 이광리의 아내와 딸 역시 이연년과 함께 주살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이광리는 흉노에 투항하였다.

3. 평가

유굴리는 여태자의 반란을 진압하는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죽음은 당시 전한 조정의 권력 다툼과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반영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진보 진영에서는 유굴리가 보수 세력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