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굴리
1. 개요
유굴리는 전한 시대의 인물로, 탁군 태수를 거쳐 승상에 임명된 후 팽후에 봉해졌다. 무고의 난 당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으나, 이광리와 창읍왕 유박을 옹립하려는 모의를 했다는 혐의로 요참형에 처해졌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당시 전한 조정의 권력 다툼과 정치적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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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90년 사망 -
유곤치
유곤치는 전한 시대 중산나라의 왕으로, 기원전 54년 또는 기원전 53년에 즉위하여 기원전 44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유보가 중산왕이 되었다. -
기원전 90년 사망 -
유순 (장량후)
한나라 황실 후손인 유순은 왕망의 권력 찬탈 시도에 연루되어 기원전 8년 역모죄로 처형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당시 정치적 혼란과 권력 투쟁의 희생을 보여준다. -
역사에 관한 -
광서제
광서제는 도광제의 손자이자 순친왕 혁현의 아들로, 1875년 청나라의 황제가 되었으며, 서태후의 섭정 아래 무술변법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유폐된 채 사망했다. -
역사에 관한 -
2013년
2013년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 교황 사임, 북한 핵실험, 용산 개발 사업 부도, 윤창중 사건, 스노든 폭로, 김연아 우승, 방탄소년단 데뷔, 넬슨 만델라 사망 등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사건들이 발생한 해이다. -
중국에 관한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중국에 관한 -
카자흐인
카자흐인은 15세기 카자흐 칸국 건국 이후 명칭이 사용된 튀르크계 중앙아시아 북부 유목민족으로, "자유로운 자"를 뜻하는 카자흐라는 명칭은 권위에 저항하는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에서 유래했으며, 카자흐 초원을 중심으로 실크로드 무역을 통해 번성했고, 유목 생활과 튀르크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현재 여러 국가에 디아스포라가 거주하고 있다.
2. 생애
정화 2년(기원전 91년), 탁군태수를 지내다가 승상으로 승진하고 팽후(澎侯)에 봉해졌다. 같은 해, 여태자가 무고의 난을 일으켰다. 유굴리는 여태자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으나, 정화 3년(기원전 90년) 사돈인 이광리와 창읍왕을 황태자로 세우려 했다는 모함을 받고 요참에 처해졌다.
2.2. 무고의 난 진압
정화 2년(기원전 91년), 유굴리는 승상이 되었고 팽후(澎侯)에 봉해졌다.
같은 해, 여태자가 무고의 난을 일으켰고, 여태자의 병력은 승상부에까지 다다랐다. 유굴리는 단신으로 도망쳤으나 승상의 인수를 잃어버렸고, 태자의 반란을 공표하지 못한 채 파발을 통해 감천궁에 있었던 무제에게 이를 알렸다. 무제는 장안의 성문을 걸어잠그고 반란군을 포위하여 물리칠 것을 명하였고, 유굴리는 진압군을 지휘하였다. 닷새에 걸친 싸움에 수만 명이 죽었으나 반란은 진압되었고, 여태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3. 이광리와의 모의와 죽음
정화 3년(기원전 90년), 유굴리의 사돈인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가 흉노 토벌을 위해 출진하기 전, 유굴리에게 자신의 누이동생의 아들인 창읍왕을 황태자로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유굴리는 이를 내심 원하고 있었기에 승낙하였다.
그러나 내자령 곽양(郭穰)이 무제에게 유굴리의 부인이 무제를 저주하고 있으며, 이광리와 함께 창읍왕을 황제로 세우려 한다고 모함하였다. 이로 인해 유굴리는 요참에 처해졌고, 처자식 또한 목이 베여 화양(華陽)의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
한편, 이광리의 아내와 딸 역시 이연년과 함께 주살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이광리는 흉노에 투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