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웅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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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웅거는 전한 초기의 인물로, 백석후를 거쳐 교동왕에 봉해졌다. 기원전 164년, 제나라가 분할되면서 교동나라의 왕이 되었으나, 한 번도 입조하지 않았다. 전한 경제 시대에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하여 제효왕을 공격했으나, 난이 진압된 후 처형되었다. 교동나라는 폐지되었다가, 훗날 한 무제가 된 유철이 교동왕으로 봉해지면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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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웅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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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웅거 (용릉대후) | |
![]() | |
개인 정보 | |
성씨 | 유(劉) |
이름 | 웅거(雄渠) |
작위 | 용릉대후(容陵戴侯) |
생몰년 | 기원전 71년 ~ 기원전 48년 |
아버지 | 조경왕 유건(趙敬王 劉建) |
어머니 | 왕후가 아니다. |
형제 | 조회왕 유창(趙懷王 劉昌) 고후절후 유충(高侯節侯 劉充) 유순(劉順) |
자녀 | 유보(劉普) 유수(劉受) 유상(劉商) 유광(劉匡) 유회(劉恢) |
시대 | 전한 |
2. 생애
전한 시대의 인물로, 제북왕 유흥거의 아들이다.[2][3][4][7] 아버지 사후 처음에는 백석후(白石侯)에 봉해졌다가,[2] 기원전 164년에 새로 세워진 교동나라의 왕이 되었다.[5][4][7] 전한 경제 시대에 일어난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하여 다른 제후왕들과 함께 제나라를 공격했으나,[6] 난이 진압되면서 결국 죄를 인정하고 죽음을 맞이했다.[6][4][5][7] 그의 사후 교동나라는 잠시 폐지되었다가 유철이 왕위를 이으면서 다시 세워졌다.[8]
2. 1. 초기 생애와 제후왕 즉위
문제 4년(기원전 176년), 제북왕 유흥거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자살한 다음 해에, 문제는 유웅거와 그의 형제들을 열후로 봉하여 유웅거는 백석후(白石侯)가 되었다.[2][3][4][7]문제 16년(기원전 164년), 전년에 제문왕 유칙이 후사 없이 죽어 폐지되었던 제나라를 일곱으로 나누었다. 이때 문제는 제도혜왕의 아들들과 성양공왕을 왕으로 봉했는데, 유웅거는 교동군을 받아 새로 세워진 교동나라의 왕이 되었다.[5][4][7] 교동나라의 서울은 즉묵(卽墨)에 두었으며,[5] 교동왕 유웅거는 재위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수도 장안에 입조하지 않았다.[5]
2. 2. 오초칠국의 난과 최후
전한 경제 시대에 조조를 중심으로 조정에서 제후왕들의 영지를 줄이려는 정책을 추진하자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6] 오왕 유비는 교서왕 유앙을 설득하여 반란을 모의했고, 유앙은 과거 제나라에 속했던 왕들 중 성양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에 사람을 보내 함께 거병할 것을 권유했다.[6] 교동왕 유웅거도 이 제안을 받아들여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했다.[6]처음에는 반란에 동참하기로 했던 제효왕 유장려가 입장을 바꾸자, 유웅거는 교서왕 유앙, 치천왕 유현, 제남왕 유벽광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의 수도 임치를 공격하여 제효왕을 포위했다.[6] 그러나 반란의 핵심 세력이었던 초나라와 오나라 군대가 조정의 진압군에게 패배하고, 난포와 조양이 이끄는 구원군이 제나라 방면으로 진격해오자 포위를 풀고 각자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6]
이후 교서왕 유앙이 조정의 명령에 따라 자결하자, 유웅거 역시 복주(伏誅, 죄를 인정하고 죽음을 받음)되었다.[6][4][5][7] 유웅거가 죽은 뒤 교동나라는 폐지되어 한나라의 교동군으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네 살이었던 경제의 아들 유철이 새로운 교동왕으로 책봉되면서 교동나라는 다시 세워졌다.[8]
참조
[1]
문서
한서 제후왕표
[2]
서적
사기 (역사서)
[3]
서적
한서
[4]
서적
한서 (위와 같음)
[5]
서적
사기 (전게서)
[6]
서적
한서 (전게서)
[7]
서적
한서 (위와 같음)
[8]
서적
한서 (위와 같음)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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