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여대
1. 개요
유여대는 평안북도 의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목사로, 교육을 통한 계몽 운동에 헌신했다. 1898년 개신교에 입교 후 일신학교와 양실학원을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시작했으며,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의주 지역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양실학교를 재건하고 목회 활동을 하다가 신의주로 이주하여 사망했으며, 저서로 《위인기담》과 《토무식》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본관 | 평산 유씨 |
|---|---|
| 생년월일 | 1319년 |
| 몰년월일 | 1396년 |
| 자 | 성로(誠老) |
| 시호 | 문정(文靖) |
| 주요 관직 | 문하시중 영의정부사 |
|---|
| 배우자 | 정부인 경주 김씨 |
|---|---|
| 부 | 유천우 |
| 모 | 밀양 박씨 |
2.1. 초기 생애 및 교육 활동 (1878년 ~ 1919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한학을 익혀 서당 훈장으로 일하던 중 1898년 선교사를 통해 개신교에 입교했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랬듯이 교육을 통한 계몽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의주에 일신학교(日新學校)와 여학교인 양실학원(養實學院)을 세워 교육 사업에 종사했다. 1915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2.2. 3.1 운동 참여와 투옥 (1919년)
1919년 2월 선천군의 양전백 집에서 이승훈을 만나 다음 달에 있을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기로 했다. 그는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수 있도록 도장을 이명룡에게 맡기고 당일 경성부에서 열린 낭독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양실학교를 중심으로 의주 지역의 만세 운동을 조직했다. 정명채, 김두칠 등 의주의 기독교인들과 미리 뜻을 나누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한 뒤, 탑골공원에서의 거사와 비슷한 시각에 군중을 모아 선언서를 낭독했다가 곧바로 피검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2.3. 출옥 후 활동과 사망 (1919년 ~ 1937년)
출옥 후에는 의주로 돌아가 양실학교를 재건하고 목회 활동을 하다가 신의주로 이주한 후 사망했다.
계몽 운동과 교육 사업, 문맹 퇴치 운동에 꾸준한 관심을 보였다. 저서로는 위인전집 《위인기담》(1934)과 기초 상식 교육서 《토무식》(1935) 등이 있다.
3. 저서
일종의 위인전 모음인 《위인기담(偉人奇談)》(1934)과 기초 상식 교육서인 《면무식(免無識)》(1935) 등이 남아있다. 유여대는 계몽 운동과 교육 사업, 문맹 퇴치 운동에 끈질긴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그의 저서에 잘 반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