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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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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대량은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를 거치며 활약한 인물로, 수나라 말기에 반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친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당나라 건국에 기여하여 토문현 현령, 안주 지사, 광주 안무사 등을 역임하며, 돌궐족 항복을 이끌고 토욕혼 정벌에 참여하는 등 군사적, 행정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당 태종 이세민은 그의 충성심과 정직함을 칭찬하며, 태자 이치의 우위솔과 공부상서를 겸임하게 했다. 그는 또한 과거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장비를 잊지 않고 황제에게 그의 공을 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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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량
기본 정보
소릉에 있는 경령과 위하
소릉에 있는 경령과 위하
大亮 (Dàliàng, 대량)
시호襄 (Xiāng, 양)
작위武陽郡開國公 (Wǔyáng Jùn Kāiguó Gōng, 무양군 개국공)
시대당나라
생애
출생594년
사망645년
활동장군, 정치가
가문
성씨이(李)
출신조군(趙郡)
아버지李充節 (Lǐ Chōngjié, 이충절)
어머니廣平游氏 (Guǎngpíng Yóu Shì, 광평 유씨)
관직
주요 관직검교섬주자사(檢校陝州刺史)
병부상서(兵部尙書)
검교형부상서(檢校刑部尙書)
봉작무양군개국공(武陽郡開國公)
가족 관계
부인정씨(鄭氏)
자녀이안현(李安玄)

2. 수나라 시기

경양 출신으로, 수나라의 수도인 대흥(618년 이후 당나라의 수도가 된 장안)과 가까운 곳이었다. 그의 증조부인 이염(李琰)은 북위 시대에 탁지상서(度支尚書)를 지냈고,[2] 그의 아버지 이충절(李充節)은 수나라에서 지방 총관(總管)이었다. 이대량은 어린 나이부터 문무에 재능이 있었다. 617년, 그는 동쪽 수도인 낙양 인근에서 팽옥(龐玉) 장군 휘하에서 복무하다가 이밀 휘하의 반란군에게 패하여 포로로 잡혔다. 다른 100명이 넘는 포로들은 모두 처형되었지만, 이대량은 반란군 장수인 장필(張弼)에 의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는데, 장필은 그와 친분을 쌓았다.[3]

3. 당나라 시기

당나라가 건국된 618년, 이대량은 당 고조 이연에게 합류하여 당나라의 관료가 되었다. 그는 당 고조당 태종 두 황제 아래에서 여러 중요한 직책을 맡으며 활약했다.

고조 시기에는 토문현령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3], 이후 진주 총관부사마, 안주 자사 등을 역임하며 왕세충 토벌[4] 및 부공석의 난 진압[5] 등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부공석의 부하 장선안을 설득하여 항복시키는 과정에서 보여준 용기와 기지는 그의 능력을 잘 보여준다.[5] 또한 하사받은 궁녀들을 풀어주는 등 청렴하고 인정 많은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2][3] 이후 월주 도독으로 임명되었다.[3]

당 태종이 즉위한 후에도 이대량은 계속 중용되어 교주 도독, 호부상서(太府卿), 량주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6][3] 그는 황제의 사자가 아첨을 위해 매를 바치려 하자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로 강직했으며[3], 돌궐 유민 정착 문제에 대해 신중론을 제기하여 관철시키는 등[6][3] 국정 현안에 대한 식견을 보여주었다. 검남도 순찰사(巡省大使)로서는 부패를 척결하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3]

토욕혼 정벌(634-635년)에서는 하동도 행군총관으로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3][7], 이후 수도 장안의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임명되어 황궁 경비를 책임졌다. 641년에는 설연타의 침입을 받은 돌궐의 길리비 칸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어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8]

말년에는 우위대장군 직책과 함께 황태자 이치(훗날 당 고종)를 보좌하는 태자 우위솔(太子右衛率), 그리고 공부상서(工部尚書)를 겸임하며[1] 태종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태종은 "경이 근무하면 내가 밤에 편안히 잠들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3] 또한 과거 수나라 시절 자신을 구해준 장군 장비(張弼)를 잊지 않고 은혜를 갚아 주변의 칭송을 받았다.[3]

644년,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며 뤄양으로 떠나자 장안 부윤(長安留守)으로 임명되었으나[1], 곧 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까지 고구려 원정을 만류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로 나라를 걱정했으며[3], 그의 죽음을 들은 태종은 크게 슬퍼하며 3일간 조회를 중단하고 '의'(懿, 덕망이 높다는 의미)라는 시호를 내렸다. 평생 검소하게 살아 장례조차 간소하게 치렀으며, 생전에 돌본 많은 고아들이 친자식처럼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전해진다. 이대량은 태종이 묻힌 소릉에 함께 묻혔다.[3]

3. 1. 당 고조(이연) 시기

618년, 당 고조 이연당나라를 건국하자 이대량은 이에 합류하였다. 그는 기근과 산적의 피해가 극심했던 토문현(土門, 현재의 푸핑현 부근)의 현령으로 임명되었다. 이대량은 자신의 말을 팔아 가난한 백성을 구휼하고 농사를 장려했으며,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산적을 소탕하여 민생을 안정시켰다. 당시 진왕이었던 이세민(훗날 당 태종)이 이 지역을 지나다가 이대량의 선정을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아 그에게 말과 비단을 하사했다. 한번은 1,000명이 넘는 돌궐 군대가 침입했는데, 정면으로 막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대량은 홀로 말을 타고 적진으로 들어가 돌궐 지휘관을 만나 이해득실을 설명하며 설득에 성공했다. 그는 돌궐 군대가 항복하자 자신의 말을 잡아 잔치를 베풀고 자신은 걸어서 토문으로 돌아왔다. 이 소식을 들은 당 고조는 크게 기뻐하며 이대량을 진주(秦州)의 총관부사마(總管府司馬)로 승진시켰다.[3]

620년, 이대량은 수나라 말기 군벌 왕세충을 토벌하는 원정에 참여하여 왕세충의 조카 왕홍렬(王弘烈)이 지키던 샹양으로 진격했다. 그는 10개가 넘는 성을 함락시키고 왕세충의 장수 국대안(國大安)을 죽이는 전공을 세웠다.[4] 이러한 공으로 이연은 그를 안주(安州)의 자사(刺史)로 임명했다.[3]

623년, 이대량은 안무사(安撫使)로 임명되어 광주(廣州) 지역을 안정시키라는 명을 받았다. 임지로 가던 중 구강에 이르렀을 때 부공석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대량은 즉시 군대를 돌려 부공석의 부하 장수 장선안(張善安)이 지키고 있던 홍주(洪州)로 향했다. 간강을 사이에 두고 양군이 대치한 상황에서 이대량은 장선안과 대화를 시도하며 투항을 권유했다. 장선안은 부하들의 압박에 못 이겨 반란에 가담했으며, 항복하더라도 처벌받을까 두렵다고 털어놓았다. 이에 이대량은 "장 장군이 항복할 뜻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요."라고 말하며, 혼자 말을 타고 강을 건너가 장선안의 손을 잡고 진심을 보여주었다. 그의 용기와 신의에 감동한 장선안은 항복을 결심하고 10여 명의 기병만 데리고 이대량의 진영으로 왔다. 이대량은 기병들은 밖에 남겨두고 장선안만 막사 안으로 들여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기습적으로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장선안을 체포했다. 밖에 있던 기병들은 혼란에 빠져 도주했다.[5]

잠시 후 장선안의 부하들이 몰려와 장군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이대량은 장선안이 진심으로 항복을 원해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고 거짓 정보를 흘렸다. 장선안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속았다고 생각하고 뿔뿔이 흩어졌고, 이대량은 이들을 추격하여 상당수를 사로잡았다. 장선안은 장안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624년 2월, 이대량은 군대를 이끌고 부공석에게 포위된 유주(猷州, 현재의 쉬안청 부근)로 진격하여 부공석 군대를 격파하고 유주를 구원했다.[5] 부공석의 난이 평정된 후, 당 고조는 이대량의 공을 치하하며 수백 명의 궁녀를 하사했다. 그러나 이대량은 이들을 모두 풀어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2]

"너희 대부분은 좋은 집안 출신이고, 전쟁과 불행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어찌 내가 너희를 천한 노예로 대할 마음이 있겠는가!"

이 말을 전해 들은 이연은 그의 인품에 감탄하며 칭찬했지만, 다시 20명의 여인을 하사했다. 이후 이대량은 월주(越州)의 도독(都督)으로 임명되었다.[3]

3. 2. 당 태종(이세민) 시기

626년 당 태종 이세민이 즉위한 후, 이듬해 이대량은 교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임기를 마치면서 후임자들을 위해 자신이 쓴 책 수백 권을 남겼다. 이후 수도 장안으로 돌아와 호부상서(太府卿)로 일하다가, 제국 서쪽의 량주 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6] 629년, 황제의 사자가 량주에 와서 이대량이 가진 좋은 매를 보고 황제에게 선물로 바치라고 권했다. 이는 황제에게 아첨하려는 의도였으나, 이대량은 몰래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이를 비판했다.[3]

> 오래전에 사냥을 금지하셨는데, 사자가 매를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폐하의 뜻이라면 폐하 스스로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고, 사자 자신의 생각이라면 폐하께서 사람을 잘못 쓰신 것입니다.

태종은 이대량의 충성심과 정직함을 높이 평가하며 "경과 같은 신하가 있다면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고 답장을 보냈다. 또한 외국산 꽃병과 한나라 시대 순열이 쓴 역사서인 ''한기''를 하사했다.[3]

630년, 동돌궐의 일리크 카간이 사로잡히자 그의 부족민들이 오늘날의 하미시, 신장 위구르 자치구 부근인 이우 지역에 흩어졌다. 태종은 이대량을 서북도 안무대사(西北道安撫大使)로 임명하여 돌궐 추장들의 항복을 받아내도록 했다. 이대량은 추장들에게 식량, 옷감, 작위를 주어 황하 남쪽에 정착시키려 했으나, 이 계획에 반대하며 상소를 올렸다.[6]

> 외국인을 포섭하는 것보다 국내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중국은 나무의 줄기와 같고, 주변의 이민족(사방 오랑캐)은 가지나 잎과 같습니다. 중국의 자원을 이민족에게 주는 것은 뿌리를 뽑아 가지와 잎을 무성하게 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태종은 이대량의 조언을 받아들여 돌궐족을 당나라 국경 밖으로 이주시켰다.[3]

634년, 이대량은 검남도 순찰사(巡省大使)로 파견되어 부패를 척결하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3] 같은 해 말, 태종이 서쪽의 토욕혼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자 이대량은 하동도 행군총관으로 임명되어 대총관 이정의 지휘 아래 원정에 참여했다. 635년, 이정, 이대량, 설만균(薛萬均) 등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토욕혼의 주력군을 격파했다. 이대량은 서혼산(蜀渾山, 현재의 칭하이성 공화현 부근으로 추정) 전투에서 토욕혼 귀족 10여 명과 가축 5만여 마리를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웠다.[3] 토욕혼의 칸 모용복윤은 도망치다 사망했고, 그의 아들 모용순이 항복했다. 태종은 모용순을 칸으로 책봉하고 당나라 주력군은 철수시켰으나, 이대량은 병력 수천 명을 이끌고 남아 모용순을 지원했다. 하지만 모용순은 내부의 반발로 몇 달 후 암살당했다.[7] 이 원정의 공으로 이대량은 황제로부터 시녀 150명을 포함한 많은 상을 받았지만, 모두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3]

이후 이대량은 수도 장안의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임명되었다. 641년 겨울, 당나라에 복속하여 오르도스 만곡에 정착했던 돌궐의 길리비 칸이 설연타의 진주 칸에게 공격받자, 태종은 이대량 등을 파견하여 이세적 총사령관의 지휘 아래 길리비 칸을 지원하게 했다. 몇 달 뒤 당나라 군대는 설연타군에 큰 승리를 거두었고, 설연타군은 물러갔다.[8]

643년 5월, 태종이 아들 이치(훗날 당 고종)를 황태자로 책봉하자, 이대량은 기존의 우위대장군 직책을 유지하면서 태자 우위솔(太子右衛率)을 겸임하게 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공부상서(工部尚書)까지 겸임하여 세 개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황제와 태자의 궁궐을 지키는 임무에 더욱 힘썼으며, 군사들이 근무를 설 때는 밤새 잠을 자지 않고 똑바로 앉아 감독하기도 했다.[1] 태종은 "경이 근무하면 내가 밤에 편히 잠들 수 있다"고 말하며 그를 신뢰했다. 당시 재상이었던 방현령 역시 이대량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한나라의 명신 왕릉주발에 비견하기도 했다.[3]

이 무렵 이대량은 거리에서 우연히 수나라 말기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장군 장비(張弼)를 만났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장비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주려 했으나 장비는 사양했다. 이대량은 태종에게 장비에게 입은 은혜를 이야기했고, 태종은 장비를 장작승(將作丞)에서 대주자사로 승진시켰다. 이 일로 이대량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 인물로 칭송받았다.[3]

644년 11월,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며 뤄양으로 떠나자, 이대량은 방현령의 지휘 아래 장안 부윤(長安留守)으로 임명되어 수도의 방비를 맡았다.[1]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대량은 병에 걸렸다. 태종은 이 소식을 듣고 직접 약을 준비하여 역참을 통해 급히 보냈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임종 직전, 이대량은 태종에게 상소를 올려 고구려 원정을 중단하고 장안 지역의 안정에 힘쓸 것을 간언했다.[3] (태종의 첫 고구려 원정은 645년에 실패로 끝났다.)

이대량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태종은 크게 슬퍼하며 3일 동안 조회를 중단했다. 그에게는 '의'(懿, 덕망이 높다는 의미)라는 시호와 함께 여러 관직이 추증되었다. 이대량은 평생 검소하게 살았기에 장례를 치를 때 집에 값비싼 물건이 없어 쌀과 옷감만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는 생전에 자식이 없는 친척들의 장례를 치러주고 많은 고아를 돌보았는데, 그가 키운 고아 중 15명은 친자식처럼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식에 참여했다. 이대량은 태종이 훗날 묻히게 될 소릉에 배장(陪葬)되었다.[3]

4. 사망과 평가

이세민은 이대량을 매우 신임하여 "경이 근무하면, 내가 밤에 편안히 잠들 수 있소."라고 말하곤 했다.[1] 재상 방현령 역시 이대량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덕망 높았던 한나라 시대의 신하 왕릉과 주발에 비견했다.[3]

이대량은 과거 수나라 시절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장군 장비를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재산을 모두 주려 했으나 장비는 거절했다. 이대량은 이세민에게 장비에게 진 빚을 이야기했고, 황제는 장비를 장작승에서 대주의 사령관으로 승진시켰다. 이 일로 이대량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 인물로 칭송받았다.[3]

644년 11월, 이세민이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며 낙양으로 떠날 때, 이대량을 장안 부윤으로 임명했다. 당시 부윤이었던 방현령은 이대량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지휘 아래 두었다.[1]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대량은 병에 걸렸다. 이세민은 이 소식을 듣고 직접 약을 준비하여 역참을 통해 보냈지만, 이대량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임종 직전, 이대량은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고구려 원정을 포기하고 장안 지역을 잘 다스리는 데 집중할 것을 간언했다.[3] (이세민은 이 조언을 듣지 않았고, 645년에 시작된 고구려 원정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대량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이세민은 크게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고, 조회를 3일 동안 중단했다. 이대량에게는 '덕망이 높다'는 의미의 懿|의중국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여러 관직이 추증되었다. 그는 평생 검소하게 살았기 때문에 사망 당시 집에는 장례에 쓸 만한 귀한 물건이 없었고, 쌀과 옷감만으로 장례를 치렀다. 오히려 그는 자식이 없는 친척들의 장례를 치러주느라 많은 돈을 썼다. 또한 많은 고아들을 돌보아 길렀는데, 그가 죽자 15명의 아이들이 마치 친자식처럼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를 치렀다. 이대량은 황제의 능인 소릉에 함께 묻혔다.[3]

5. 이대량과 관련된 인물

이대량의 증조부 이연(伊琰)은 북위(北魏)에서 도지상서(道支尚書)를 지냈고, 아버지 이충계(充節)는 수나라에서 총관(總管)을 역임했다. 이대량은 617년 수나라 장군 방옥(龐玉) 휘하에서 낙양(洛陽) 근처에서 복무하던 중 이밀이 이끄는 반군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때 반군 장군 장비(張弼)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고, 이후 장비와 친구가 되었다.

6. 이대량이 활약한 주요 지역

수나라의 수도였던 장안과 가까운 징양현 출신이다. 젊은 시절에는 동경 낙양 근처에서 방옥(龐玉) 장군 휘하에서 복무했다.

618년 당나라 건국에 참여한 후, 기근과 산적의 피해가 심했던 토문현(土門, 현재의 푸핑현 부근)의 현령으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가난한 이들을 구휼하고 농사를 장려했으며, 직접 병사를 이끌고 산적을 소탕했다. 또한, 1,000명이 넘는 돌궐 군대가 침입했을 때 홀로 적진으로 가 그들을 설득하여 항복시키는 용기와 지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진주의 총관부사마(總管府司馬)로 승진했다.[3]

620년에는 군벌 왕세충 토벌에 참여하여 샹양으로 진군했고, 10개 이상의 도시를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4] 이후 안주의 지사로 임명되었다.[3] 623년에는 안무사(安撫使)로서 광주로 파견되었고, 도중에 구강에서 부공석의 반란 소식을 듣고 홍주로 가서 부공석의 장수 장선안(張善安)을 설득하여 사로잡았다.[5] 다음 해에는 군대를 이끌고 부공석에게 포위된 유주(猷州, 현재의 쉬안청 부근)를 구원했다.[5] 부공석의 난이 진압된 후에는 월주의 도독(都督)으로 부임하여 활동했다.[3]

7. 이대량의 대외 정책

630년, 동돌궐의 일리크 카간이 당나라에 패배하고 사로잡히자, 그의 지배하에 있던 돌궐 부족들은 오늘날의 하미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인근 이우 지역으로 흩어졌다. 태종 이세민은 이대량을 서북도(西北道|서북도중국어) 안무대사로 임명하여 돌궐 추장들의 항복을 받아내는 임무를 맡겼다. 당시 태종은 항복한 돌궐 추장들에게 식량, 옷감, 작위를 제공하고 황하 남쪽 지역에 재정착시키려 했으나, 이대량은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6] 그는 상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외국인을 포섭하는 것보다 국내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중국은 나무의 줄기와 같고, 사방 오랑캐는 가지와 잎과 같습니다. 중국의 자원을 사방 오랑캐에게 주는 것은 나무 뿌리를 뽑아 가지와 잎을 살찌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태종은 이대량의 조언을 받아들여 돌궐족을 당나라 국경 밖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3]

634년 말, 태종은 서쪽의 토욕혼을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이대량은 하동도의 행군총관으로 임명되어 대총관 이정의 지휘 아래 참전했다. 635년, 이정, 이대량, 설만균(薛萬均|설만균중국어) 등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토욕혼의 주력군을 격파했다. 이 과정에서 이대량은 서혼산 전투에서 토욕혼 귀족 10여 명과 가축 5만 마리 이상을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웠다.[3] 토욕혼의 칸 모용복윤은 도주 중 사망했고, 그의 아들 모용순이 당나라에 항복했다. 태종은 모용순을 새로운 칸으로 책봉하고 당나라 주력군을 철수시켰으나, 이대량은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잠시 남아 모용순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모용순은 내부 반발로 인해 몇 달 후 암살되었다.[7]

641년 겨울, 설연타의 진주 칸이 오르도스 만곡 지역에 정착해 있던 당나라의 봉신, 돌궐 길리비 칸을 공격했다. 당시 수도 장안의 우위대장군이었던 이대량은 이세적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지원군에 합류하여 파견되었다. 몇 달 간의 전투 끝에 당나라 군대는 설연타 군대에 큰 타격을 입혔고, 설연타군은 결국 자신들의 영토로 후퇴했다.[8]

644년 11월,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며 낙양으로 떠나자, 이대량은 장안 부윤으로 임명되어 수도 방위를 맡게 되었다.[1]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세가 위독해졌다. 임종 직전, 이대량은 태종에게 상소를 올려 고구려 원정을 중단하고 내치, 특히 장안 지역의 안정에 집중할 것을 간언했다.[3] (고구려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Xin Tang Shu
[3] 서적 Jiu Tang Shu
[4] 서적 Zizhi Tongjian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Zizhi Tongjian
[7] 서적 Zizhi Tongjian
[8] 서적 Zizhi Tong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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