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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니시 가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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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마니시 가즈오는 일본의 축구 선수, 지도자, 행정가이다. 1941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도쿄교육대학을 졸업하고, 1963년 도요 공업(후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입단하여 1969년 은퇴할 때까지 선수로 활동하며, 4번의 일본 사커 리그 우승과 3번의 천황배 우승을 경험했다. 1966년에는 일본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3경기에 출전했다. 은퇴 후에는 마쓰다/산프레체 히로시마의 감독과 단장을 역임하며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켰고, 일본 축구 협회에서 강화위원, 기술위원으로 활동하며 일본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FC 기후의 회장을 역임하며 구단 경영에 참여했으며, 기비 국제대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 축구계에서 제너럴 매니저의 지위를 확립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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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니시 가즈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가즈오 이마니시
원어 이름今西 和男
로마자 표기Imanishi Kazuo
출생일1941년 1월 12일
출생지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나카구 히라쓰카
신장174cm
체중72kg
선수 정보
포지션수비수
주발미상
유소년 클럽히로시마시립 후나이리 고등학교 (1956-1958)
도쿄 교육대학 (1959-1962)
클럽도요 공업 (1963-1969)
출장 및 득점 (클럽)42경기 0골
국가대표일본 (1966-1967)
국가대표 출장 및 득점3경기 0골
감독 정보
감독도요 공업 (Assistant, 1970-1971)
마쓰다 (1984-1992)
기비 국제대학 (2005-?)
수상 내역
도요 공업
일본 사커 리그우승 (1965)
우승 (1966)
우승 (1967)
우승 (1968)
준우승 (1969)
천황배우승 (1965)
준우승 (1966)
우승 (1967)
우승 (1969)
아시안 게임동메달 (1966 방콕)

2. 선수 경력

이마니시는 1941년 1월 12일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발이 빨랐던 그는 국태사 중학교에 진학해 운동부에 들어가려 했으나[13], 당시 축구부는 인원이 많아 입부하지 못했고 건강 문제도 있었다[13][14][15]. 후나이리 고등학교에 입학해 처음에는 유도부에 들어갔지만, 2학년 때 노무라 로쿠히코의 권유로 축구부에 입부했다[13][14][15]. 주로 왼쪽 풀백으로 뛰며 고교 선수권 대회에도 출전했다[14][18].

고교 시절 임시 코치였던 오자와 미치히로의 영향으로 도쿄 교육 대학(현 쓰쿠바 대학) 체육학부에 진학하여 축구부에 입부, 1학년 때부터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14][18][19]. 당시 대학에는 히로시마 출신 선수들이 많았으며[20], 데트마르 크라머에게 지도를 받기도 했다[12].

대학 졸업 후 1963년, 지역 클럽인 도요 공업(이후 ''마쓰다'')에 입단했다. 1965년 새롭게 출범한 일본 사커 리그(JSL)에 참가하여 풀백으로 활약하며 팀의 창단 초기 황금기를 이끌었다. 도요 공업은 1965년부터 1968년까지 리그 4연패를 달성했고, 1965년, 1967년, 1969년에는 천황배 우승을 차지했다[21]. 이마니시 개인은 1966년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1966년 12월에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방콕에서 열린 1966년 아시안 게임에 참가했다[3]. 12월 10일 인도와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으며, 대회 기간 동안 총 3경기에 출전했다[1].

1967년 무릎 인대 부상을 당했고, 이후 1969년 허리 부상까지 겹치면서 결국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18]. 리그 통산 기록은 42경기 출전이다.

2. 1. 클럽 경력

도쿄교육대학 졸업 후 1963년, 지역 클럽인 도요 공업(이후 ''마쓰다'')에 입단했다. 1965년 일본 사커 리그(JSL) 출범과 함께 도요 공업 소속으로 참가했다. 시모무라 유키오 감독 아래 오자와, 니와 요스케, 구와바라 히로유키 등과 강력한 풀백진을 구축했으며, 고조 데쓰다쓰, 구와바라 라쿠유키, 구와타 타카유키, 마쓰모토 이쿠오, 이시이 요시노부, 후나모토 고지 등 동료들과 함께 1965년부터 1968년까지 리그 4연패 달성에 크게 기여했다.[21] 또한 1965년, 1967년, 1969년 천황배 우승컵도 들어 올렸다. 1966년에는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1967년 무릎 인대 부상을 입었으나 당시 스포츠 의학 수준의 한계로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했고, 결국 1969년 허리 부상까지 겹치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18] 리그 통산 42경기에 출전했다.

시즌클럽리그출장
1965도요 공업JSL 디비전 190
1966140
1967140
196850
196900
합계420



은퇴 후 1971년까지 도요 공업 축구부에서 수비 전문 코치로 활동했다. 이후 축구계를 잠시 떠나 마쓰다 본사에서 자동차 판매, 총무(복리후생, 사원 기숙사 관리) 등 사내 업무에 전념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5][8][18]

1982년, 마쓰다 SC(구 도요 공업 축구부)가 JSL 2부 리그 강등 위기에 처하자[5], 당시 총무부장이던 오자와 미치히로와 축구부장이던 요시노 토시오의 요청으로 축구계에 복귀했다.[8][22][23] 10년 넘게 현장을 떠나 있었기에 감독직 대신 부부장 겸 총감독으로 부임하여 팀 개혁을 이끌었다.[23] 당시 다른 팀들의 세미 프로화 흐름에 대응하기 위해 외국인 전문가 영입이 필수라고 판단,[22] 1984년 한스 오프트를 코치로 초빙했다. 자신은 감독직을 맡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제너럴 매니저(GM) 역할을 수행하며 현장 지휘는 오프트에게 맡기는 분업 체제를 구축했다.[2][8][22][23] 이마니시는 선수 스카우트, 육성, 팀 관리, 회사와의 교섭 등 GM 업무 전반을 담당했으며,[5] 오프트의 도움으로 네덜란드의 페예노르트나 아약스 암스테르담 등을 방문하여 선진 클럽 운영 시스템을 배웠다.[8] 또한 일본인 지도자 육성을 위해 오프트에게 코치를 배정하기도 했다.[5] 그의 직함은 코치, 감독, 총감독, 축구 부장 등으로 변경되었으나, 일관되게 GM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5]

1986년 팀을 JSL 1부로 복귀시켰지만, 1988년 다시 2부로 강등되면서 오프트와 함께 경질 압박을 받기도 했다.[5] 그러나 회사 측의 신임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클럽 운영을 맡게 되었고,[5] 오프트 퇴임 후 빌 포르케스 감독 체제에서 1991년 다시 1부 리그 복귀를 이뤄냈다.

J리그 출범 후 산프레체 히로시마로 팀명이 변경된 뒤에도 2002년까지 총감독, 강화부장, 이사 전무 등을 역임하며 GM직을 수행했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산프레체 히로시마 고문을 지냈으며, 이후 FC 기후로 자리를 옮겨 2007년부터 2009년까지 GM,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2. 2. 국가대표팀 경력

1966년 12월, 이마니시는 1966년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12월 10일, 방콕에서 열린 인도와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이 대회에서 총 3경기에 출전했으며,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1][3]

그는 1966년 한 해 동안 A매치 3경기에 출전하여 0골을 기록했다.

No.개최일개최 도시상대팀결과감독대회
1.1966년 12월 10일방콕인도○ 2-1나가누마 겐아시안 게임
2.1966년 12월 17일방콕태국○ 5-1아시안 게임
3.1966년 12월 18일방콕이란● 0-1아시안 게임


3. 지도자 및 경영자 경력

선수 은퇴 후, 이마니시는 잠시 축구계를 떠나 마쓰다의 사내 업무에 전념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5][8][18] 그러나 1982년, 친정팀인 마쓰다 SCJSL 2부 강등 위기에 처하자[5], 구단의 요청으로 축구계에 복귀하여[8][22][23] 부부장 겸 총감독을 맡았다. 그는 팀 재건을 위해 외국인 지도자 영입을 추진, 1984년 한스 오프트를 코치로 초빙하고 자신은 감독직을 수행하며 사실상의 제너럴 매니저(GM) 역할을 수행했다.[2][22][23][8] 이는 일본 축구계에서 GM 역할의 시초로 평가받으며, 이마니시는 '''일본 원조 제너럴 매니저'''로 불린다.[5] 그는 스카우팅, 선수 육성, 팀 매니지먼트, 구단 운영 전반에 걸쳐 활동하며[5] 선수 육성과 팀 운영 시스템 구축에 힘썼다.[8]

감독으로서는 두 차례(1984-1987, 1988-1992) 마쓰다 SC를 이끌며 팀을 JSL 1부 리그로 승격시키는(1986년, 1991년) 성과를 냈다.

연도소속클럽리그전컵 대회
순위경기승점승리무승부패배JSL컵천황배
1984JSL 2부마쓰다6위18187478강2회전
1985JSL 2부·서부준우승10125231회전4강
JSL 2부·상위1011352
1986-87JSL 1부7위222361151회전2회전
1988-89JSL 2부·서부5위14229418강1회전
JSL 2부·상위1414545
1989-90JSL 2부3위306720732회전8강
1990-91JSL 2부준우승307424248강2회전
1991-92JSL 1부6위22277694강8강



1992년 J리그 출범과 함께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총감독 겸 강화부장(후에 이사 겸임)으로 활동하며 팀의 초석을 다지고 1994년 스테이지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선수 육성과 지도자 양성에 힘썼으며, 특히 인성 교육을 강조했다.[6][8][9] 팀의 경영난 속에서도 유소년 육성을 통해 팀을 지탱했으며, 2002년 팀의 J2 강등 후 총감독직에서 물러나 2007년까지 고문으로 활동했다.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일본 축구 협회 강화위원회 및 기술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며 유소년 육성, 지도자 양성, 대표팀 지원 등에 기여했다. 특히 1997년 1998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중 감독 교체를 주도하여 일본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조호르 바루의 환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1].

또한 오이타 트리니타, 에히메 FC 등 신생 클럽의 J리그 진출 과정에 어드바이저로 참여하여[6][7]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했다. 2005년부터 FC 기후의 고문, GM, 사장을 역임하며 팀의 JFL 및 J2 승격을 이끌었으나[6][7], 경영난의 책임을 지고 2012년 사임했다[40]. 사임 후 개인 채무 보증 문제(1.5억)[43]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 외에도 기비 국제대학 교수 및 축구부 총감독(2005-2011)[44], 베로스크로노스 쓰노 하부조직 명예 교장 등을 맡으며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3. 1. 산프레체 히로시마

이마니시는 도쿄교육대학 졸업 후 1963년 지역 클럽인 도요 공업(이후 마쓰다)에 입단했다. 1965년 새롭게 출범한 일본 사커 리그에 참가했으며, 이 클럽은 1965년부터 1968년까지 4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천황배에서도 1965년, 1967년, 1969년 세 차례 우승했다. 그는 1969년에 은퇴하기 전까지 리그 42경기에 출전했고, 1966년에는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선수 은퇴 후, 이마니시는 1984년 니무라 테루오의 후임으로 마쓰다의 감독이 되었다. 당시 팀은 처음으로 2부 리그로 강등된 상태였다. 그는 1986년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켰으나, 1987년 감독직에서 사임했고 한스 오프트가 후임이 되었다. 1988년 팀이 다시 2부 리그로 강등되자, 이마니시는 다시 감독으로 복귀하여 1991년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킨 후 1992년에 사임했다.

1986년부터 프로화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으나, 모회사인 마쓰다는 경영 부진으로 J리그 참가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23][26]. 이마니시는 팀명에 기업명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을 활용하여 히로시마현 내 기업들에게 팀 출자를 설득했다. 1992년 J리그 창설과 함께 산프레체 히로시마가 발족하자, 이마니시는 이사 강화부장 겸 총감독(사실상의 GM)에 취임했다.

총감독으로서 이마니시는 "일류 축구 선수이기 전에, 일류 사회인이 되어라", "축구만 하는 인간이 되지 마라"는 철학을 강조하며[4] 젊은 선수들의 인성 교육과 사회성 함양을 중요시했다[10]. 그는 훗날 일본 대표팀 선수가 된 모리야스 하지메 등 무명 선수를 발굴하고[6][8][9], 코바야시 신지나 마츠다 히로시 같은 지도자를 육성했다[6][8][9]. 또한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던 카자마 야히로를 팀 리더로 설득해 영입했으며, 노정윤, 이반 하셰크 등 우수한 외국인 선수와 스튜어트 벅스터 감독 등을 영입했다. 후지타 공업에서 다카기 다쿠야를 영입하는 등 팀 강화를 주도하여 J리그 창설 2년차인 1994년 파이널 스테이지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주목받지 못했던 팀의 우승은 큰 놀라움을 주었고[27], 팀 강화의 전권을 쥐고 팀을 성공으로 이끈 이마니시는 언론에서 "제너럴 매니저"로 불리며 큰 주목을 받았다. 1994년 『Sports Graphic Number』[28]와 사진 주간지 『FLASH』 등에서 그를 제너럴 매니저로 소개하면서, 일본 축구계에 이 용어가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일본 원조 제너럴 매니저'로 평가받는다[5]. 이마니시가 기틀을 마련한 산프레체 히로시마 아카데미는[4] 일본 유수의 육성 조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1996년경부터 J리그 버블 붕괴로 히로시마는 경영 부진에 빠졌다. 이마니시는 팀 존속을 위해 다카기 타쿠야와 모리야스 하지메 등 주력 선수를 방출하고, 다른 팀에서 전력 외로 분류된 선수를 저렴하게 영입하는 등 비용 절감 노력을 기울이는 동시에 젊은 선수 육성을 통해 경영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감독 선임 시에는 선수 육성에 능한 외국인 감독을 선택하고, 차세대 지도자 양성을 위해 일본인 코치를 함께 두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 시기 이마니시는 J리그 신규 참가를 목표로 하던 오이타 트리니타에히메 FC의 창설 과정에 어드바이저로 참여하여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하고, 출전 기회가 적은 히로시마 선수를 임대 보내기도 했다[6][7].

2002년, 감독 선임 실패, 외국인 선수 영입 부진, 주력 선수들의 부상으로 인한 전력 약화 등이 겹치면서 팀은 J2리그로 강등되었다. 이마니시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즌 종료 후 총감독직에서 사임했다. 2003년부터는 히로시마의 고문(제너럴 어드바이저)으로 취임했으며, 동시에 히로시마 시내 축구 전용 경기장 건설을 목표로 하는 "경기장 추진 프로젝트"의 사무국장을 맡아 히로시마 시민 구장 부지 등을 후보지로 검토하며 프로젝트를 추진했으나, 최종적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는 2007년 1월 31일자로 히로시마 고문직에서 퇴임했다.

3. 2. 일본 축구 협회

1994년, 신설된 일본 축구 협회 강화위원회의 위원장직을 제안받았으나[5], "히로시마를 떠날 수 없다"는 이유로 고사하고[5] 부위원장에 취임했다[29]. 그는 유소년 선수 육성, 지도자 양성 시스템 확충, 올림픽 대표팀 및 A대표팀 지원 등에 힘썼다.

1996년, 일본 대표팀 감독 교체 시기가 되자 가토 히사시 강화위원장을 비롯한 강화위원회는 당시 감독이던 가모 슈 대신 넬시뉴를 새로운 감독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나가누마 겐 회장을 비롯한 협회 집행부는 가모 감독의 연임을 결정했다. 이미 차기 감독으로 내정되어 협상을 진행 중이던 넬시뉴는 협회의 갑작스러운 결정 번복에 대해 "썩은 귤"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 혼란으로 인해 가토 위원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강화위원이 사임했지만, 이마니시는 유일하게 위원직을 유지했다[29][30].

1997년, 1998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일본 대표팀이 부진에 빠지자, 이마니시는 가모 감독을 경질하고 오카다 다케시 수석 코치를 감독으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31]. 나가누마 회장 역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받아들여 가모 감독을 경질하고 오카다 감독을 임명했다. 오카다 감독 체제 하에서 일본은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으며(조호르 바루의 환희 참조), 이 결정적인 순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마니시는 일본 축구의 월드컵 첫 진출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후 강화위원회는 개편을 통해 권한이 축소되고 기술위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30], 이마니시는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2002년 FIFA 월드컵 개최가 끝난 것을 계기로 기술위원직에서 물러났다[32].

3. 3. FC 기후

2005년, 당시 도카이 2부 리그에 있던 FC 기후의 고문으로 취임했다. 이는 1999년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잠시 재적했던 모리야마 야스유키가 이마니시에게 고향에서 클럽을 키우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이후 FC 기후에 입단한 모리야마의 요청을 이마니시가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졌다. 그는 어드바이저로서 팀의 도카이 1부 리그 승격(2006년)과 JFL 승격(2007년)을 지원했다.

2007년 2월 1일부터는 FC 기후의 제너럴 매니저(GM)로 정식 취임하여[6][7], 경영 개선 노력 등을 통해 같은 해 팀의 J2리그 참가를 이끌어냈다. J2 승격 후에는 기후의 사장도 겸임하며 J리그 승격 전에 발생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마니시가 어드바이저로 참여했을 때부터 FC 기후는 경영이 불안정했고, 그는 경영 안정화를 위해 힘썼다[6]. 2010년에는 핫토리 준이치에게 GM직을 넘기고 사장 업무에 집중했다[36].

하지만 경영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J리그 클럽 라이선스 제도 도입을 앞두고 자금 부족 가능성이 커지면서 2012년 J리그는 FC 기후를 '예산 관리 단체'로 지정했다. 이로 인해 기후의 최대 주주인 기후현의 후루타 하지메 지사[37]기후시의 호소에 시게미쓰 시장[38]으로부터 이마니시의 경영 책임을 묻는 상황까지 이르렀다[39].

결국 2012년 8월 말, 자금 부족 문제가 해결되어 클럽 존속이 가능해지자, 핫토리 GM과 함께 경영 책임을 지고 사장직에서 물러났다[40]. 이후 잠시 고문직을 유지했으나[41] 2013년 3월에 퇴임했다[42]. 사장 시절 개인적으로 보증했던 1.5억의 채무는 그대로 남았으며, J리그 측의 요구로 관계자 패스조차 받지 못해 경기장에서 일반 관람석에서 경기를 지켜봐야 했다[43]. 2016년 시점에도 이러한 갈등의 여파가 남아, FC 기후 관계자가 이마니시가 참석하는 행사에 참여하려 하면 기후현청에서 제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43].

4. 평가 및 영향

일본에서 제너럴 매니저의 지위를 확립시킨 인물로, 축구계에서는 일본 원조 제너럴 매니저라고도 불린다.[5]

마쓰다/산프레체 히로시마 F.C에서 팀을 만드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오이타 트리니타, 에히메 FC, FC 기후가 J리그 진출을 목표로 할 때 어드바이저로 참여하기도 했다.[6][7]

선수 육성에도 성과를 거두어, 모리야스 하지메, 쿠보 류히코 등 무명 선수를 발굴했고, 코바야시 신지나 마츠다 히로시 같은 지도자를 육성했다.[6][8][9] 이마니시가 체계를 갖춘 산프레체 히로시마 아카데미는[4] 2012년 기준으로 일본 내에서 손꼽히는 유소년 육성 시스템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젊은 선수들에게 "일류 축구 선수이기 전에, 일류 사회인이 되어라"[4], "축구만 하는 인간이 되지 마라"[4]고 강조하며 사회인으로서의 성장을 엄격하게 요구했다.[10] 이렇게 육성된 히로시마 출신 선수와 지도자들은 이후 J리그 여러 클럽에서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11]

선수로서뿐만 아니라 총감독, GM, 일본 축구 협회 간부로서 일본 축구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2]

참조

[1] 웹사이트 Japan National Football Team Database https://web.archive.[...]
[2] 뉴스 日本代表を作った男たち 東京スポーツ 2008-02-06
[3] 뉴스 今西 和男 http://www.japanfoot[...]
[4] 웹사이트 Jリーグニュース vol.12 http://www.j-league.[...] Jリーグ 2012-06-23
[5] 간행물 GM考察求む、辣腕マネージャー 双葉社 2007-01-09
[6] 웹사이트 【FC岐阜】今西和男が広島でやり残したこと http://sportiva.shue[...] Sportiva 2012-06-23
[7] 문서 GM論
[8] 문서 今西インタビュー
[9] 웹사이트 記者コラム「見た 聞いた 思った」、優れた指導者の条件 http://blog.nikkansp[...] ニッカンスポーツ 2012-06-23
[10] 웹사이트 恩師・今西和男さん http://blog.yoshida-[...] 吉田安孝がサンフレッチェ広島を斬る 2012-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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