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직 (문신)
1. 개요
이명직은 1865년에 태어나 1915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한산 이씨이며, 탁지부 주사, 규장각 직학사 등을 역임했다. 갑오개혁 이후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민원식을 등용하여 위생 개혁을 추진하는 등 개화적인 면모를 보였다. 고종 퇴위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수원 동탄에서 계몽 운동을 펼치며 해외 유학을 독려했다. 일제의 감시를 받다 1915년 일본인에게 독살되었으며, 그의 아들 이철규 역시 고종의 죽음에 항거하다 일제에 의해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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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865년 출생 -
러디어드 키플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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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출생 -
워런 G. 하딩
워런 G. 하딩은 오하이오주 출신으로 신문 편집인, 정치인을 거쳐 제29대 미국 대통령을 역임했으나, 재임 기간 중 측근들의 부패와 건강 악화로 사망하고, 역사적으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
과거 급제자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과거 급제자 -
정여립
정여립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비판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대동계를 결성했으나 반란 혐의로 자결했으며, 기축옥사로 동서인 갈등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2. 약력
2.1. 간략 정보
이명직(李命稙)은 1865년(고종 2)에 태어나 1915년에 사망한 조선 근대의 문신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공문서상에 '이명식'으로도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공무원들이 한자 직(稙)자를 식(植)자로 잘못 인식하여 한글 토지대장에 '식'으로 기재했기 때문이다. 탁지부주사, 규장각직학사 등을 역임했다.
2.2. 생애
2.2.1. 출생과 가계
이명직은 고종 2년인 1865년 1월 11일 조선 한성부 종로 계동 80번지에서 이승태(李承台)와 청주 한씨(淸州 韓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고려말의 학자 이색의 후손으로, 이색의 차남 인재공의 17대손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이명직(李命稙)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된 후 조선의 마지막 진사시인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으로 입격한 후 탁지아문 주사로 관직에 들었다. 1906년 9월 18일 종2품 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에 임명되었다.
1887년 부인 전주 최씨(全州 崔氏)와의 사이에서 구한말 금광국 기수를 지냈고 일제병탄 이후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 면장을 지내다 1916년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면 문성리의 금방산일대에 금광면허를 받고 문성금광을 운영했던 아들 이철규(李喆珪)를 생산하였다.
2.2.2. 관직 생활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의금부도사와 혜민원주사(惠民院主事)를 지낸 승태(承台)의 아들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된 후 조선의 마지막 진사시인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에 진사 3등(三等)으로 입격한 뒤 관직에 올라 1895년 2월 19일 탁지아문(度支衙門) 본위 주사(主事)와 사복장이 되었다. 고종실록과 일성록에 의하면 1896년 보은군수를 시작으로 밀양군수, 백천군수서리 겸 연안군수 등 외직을 거친 이후 1904년 10월 종2품 내장원경(內藏院卿) 겸 전선사 부제조와 액정서(掖庭署)의 욕석집사로 발탁되었다.
1906년(고종 9년) 6월 협잡으로 경무청에 체포된 민원식이 조선 거리의 비위생적인 점을 지적하고 방역과 소독 활동, 도로 포장 등의 활동을 건의하자 내부 서기(內部 書記)로 천거하여 2달만에 위생과장이 되도록 하여 8월에 일본인, 독일인, 영국인 의사들을 초청하여 경성부의 동대문과 종로 일대에서 무료 진료를 실시하고, 참석자에게 구충제를 나눠주는 보건, 위생을 홍보하는 위생환등회의 개최를 성사시켰다. 이어 1906년 9월 18일 종2품 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에 임명되었다.
1907년(광무 10년)에 종1품 숭정대부 궁내부특진관(崇政大夫 宮內府特進官) 칙임관1등에 임명되었다. 1907년 고종 퇴위를 막으려다 고종퇴위와 함께 축출되어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에 칩거하며 젊은 지식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해외유학을 독려하다 1915년 호랑이 사냥꾼으로 위장하여 사랑채에 장기간 유숙하던 일본인에게 독살되었다.
2.2.3. 민원식 천거와 위생 개혁
1906년(고종 9년) 6월 협잡으로 경무청에 체포된 민원식이 조선 거리의 비위생적인 점을 지적하고 방역과 소독 활동, 도로 포장 등의 활동을 건의하자 내부 서기(內部 書記)로 천거하여 2달만에 위생과장이 되도록 하였다. 8월에 일본인, 독일인, 영국인 의사들을 초청하여 경성부의 동대문과 종로 일대에서 무료 진료를 실시하고, 참석자에게 구충제를 나눠주는 보건, 위생을 홍보하는 위생환등회의 개최를 성사시켰다. 이어 1906년 9월 18일 종2품 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에 임명되었다.
2.2.4. 계몽 운동과 죽음
1907년 고종 퇴위를 막으려다 실패하고 고종과 함께 축출된 후, 수원 동탄 돌머루(석우리)에 은거하며 노작 홍사용, 월탄 박종화, 빙허 현진건 등 백조파 문인들과 토월회 회원들에게 한학과 고전 학문을 가르치며 세상의 문물 전파와 세상 격변을 갈파하였다. 사발통문을 띄워 전국 방방곡곡의 식견 있는 인사들의 집안에 똑똑한 자식 있으면 해외로 공부하러 보내는 길이 나라를 찾는 길이라고 독려 전파하였다.
한산이씨 세보에는 1865년 1월 11일에 출생하여 1915년 9월 7일에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에 항거하는 계몽운동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와 친일파는 1915년 일본인 암살자를 호랑이 사냥꾼으로 위장하여 사랑채에 장기간 유숙하게 하여 이명직을 독살하였다. 이어 4년 뒤 고종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며 극열히 저항하던, 금광국 기수를 지낸 아들 이철규(李喆珪)도 일제에 의해 참살당했다.
외국의 신식 문물을 배워와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경기 기흥 신갈에 있던 이명직의 묘를 이장할 때 후손과 묘역 꾼 중의 모개비(우두머리)에 의하면 이명직의 신체는 구척장신이라 하였다. 성우 이명직 선생의 쌍학이 선명하게 보이는 당상관 흉배를 한 관복을 입은 전신사진이 그분의 아드님 이철규 금광국 기수의 사진과 함께 전해지고 있어 진사에 입격하고 주사로 관직에 들었으나 과거제가 폐지된 상황으로 인하여 더는 과거에 임할 수 없어 본인의 능력만으로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을 사진으로 후손에 전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박맹수가 집필한 이명직(李明稙)에 대한 기록은 동명이인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승대(承大)의 아들이다. 1893년(고종 30) 4월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관직에 올라 같은 해 6월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1904년 10월 내장원경(內藏院卿)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다시 효혜전향관(孝惠殿享官)을 겸하였다. 1907년에는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고, 다시 장례원부경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4월에는 재차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다."의 내용 중에서 "1904년 10월 내장원경(內藏院卿)이 되었고"와 "같은 해 4월에는 재차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다."는 성우 이명직 선생의 관직을 두 이명직을 한사람으로 잘못 본 집필오기로 추측된다.
3. 사회 활동
1907년 고종 퇴위를 막으려다 실패하고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돌머루(석우리)에 은거하며 조카 홍사용과 그의 친구 정백, 박종화, 현진건 등 백조파 문인들과 토월회 회원들에게 한학과 고전 학문을 가르쳤다. 나라가 망할 것을 예측하고, 똑똑한 자식이 있으면 해외로 유학을 보내라고 전국 각지의 식견 있는 인사들에게 독려하였다. 외국 신문물을 배워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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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부 : 이원효/필재 (李源孝/弼在, 첨정)
* 조모 : 경주 정씨 (慶州 鄭氏)
* 부 : 이승태 (李承台, 혜민원 주사)
* 모 : 여주 이씨 (驪州 李氏), 청주 한씨 (淸州 韓氏)
* 부인 : 전주 최씨 (全州 崔氏)
* 자 : 이철규 (李喆珪, 농상공부금광국기수)
* 자부 : 영일 정씨 (迎日 鄭氏), 밀양 박씨 (密陽 朴氏)
* 손자 : 이성구 (李成求,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
* 손자 : 이용구 (李容求, 유한양행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