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도 (882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풍도(882년 ~ 954년)는 오대 십국 시대의 정치가로, 당나라 말기부터 후량, 후당, 후진, 요나라, 후한, 후주에 이르기까지 다섯 왕조에서 재상을 지냈다. 그는 '오조팔성십일군'이라는 칭호로 불리며, 여러 왕조를 섬긴 행적 때문에 긍정적, 부정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풍도는 활자 인쇄를 이용하여 유교 경전을 인쇄하도록 명령하여 인쇄술 발전에 기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풍도 (882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중국어 (번체) | 馮道 |
중국어 (간체) | 冯道 |
한어 병음 | Féng Dào |
출생 | 882년, 당나라 영주 경성 |
사망 | 954년 5월 21일 |
직업 | 재상 |
알려진 업적 | 인쇄 공정 개선 |
휘 | 道 |
자 | 가도 |
시호 | 영문懿왕 |
2. 생애
936년, 후진의 석경당(고조)은 요의 야율아골(요 태종)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후당을 멸망시켰다. 석경당은 요에 복속했고, 풍도는 이종가(말제)에게 좌천되었다가 후진에서 재상이 되었다. 요로 사신으로 파견된 풍도는 야율아골의 총애를 받았다.[12]
942년 석경당 사후 풍도는 좌천되었다.[15]
946년, 야율아골은 개봉을 함락하고 후진을 멸망시켰다. 풍도는 야율아골과 재회하여 다시 재상이 되었다. 요는 중원 지배를 시도했으나 주민들의 저항으로 철군했고, 풍도도 함께했다. 야율아골은 북쪽으로 돌아가던 중 병사했다.[17]
947년, 유지원이 후한을 건국하고 개봉에 입성했으나,[19] 948년 사망했다. 유승우가 뒤를 이었으나 숙청에 실패했다. 곽위는 951년 후주를 건국하고 개봉을 함락, 풍도는 다시 재상이 되었다.[22]
954년 곽위 사후 채영(후주 세종)이 즉위했다. 채영은 풍도의 간언을 듣지 않고 북한 정벌을 강행했고, 풍도는 은퇴하여 954년 4월 사망했다.[21]
2. 1. 초기 생애와 후당 건국
풍도는 882년 당 희종 때 경성(景城, 현재 허베이성 창저우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농민이자 학자였다. 풍도는 젊어서부터 덕이 있고 관대하며, 학문에 힘쓰고 글을 잘 쓰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는 가난한 옷이나 음식을 멸시하지 않았고, 부모를 봉양하고 가난하게 살기 위해 고된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류수광의 초청으로 유주(幽州, 현재 베이징)의 지방 정부에서 서기로 일했다.[1]911년, 당나라가 멸망하고 류수광이 연을 건국하여 황제가 되었을 때, 풍도는 류수광의 군사 고문이었다. 그해 류수광은 의무군(義武, 현재 허베이성 보정시)을 공격하려 했으나, 풍도는 시기가 좋지 않다며 반대했다. 이로 인해 류수광의 분노를 사 감옥에 갇혔지만, 다른 사람들의 중재로 목숨을 건지고 진으로 도망쳤다. 진에서는 황태자 이존욱의 측근 환관 군사 고문 장성예가 풍도를 진의 수도 태원의 장사(長史, 서기관)로 추천했다.[3]
이후 이존욱이 연(燕)을 공격하면서 풍도는 구출되었고, 이존욱이 건국한 후당을 섬기게 되었다.
2. 2. 후당 시대
923년, 이존욱은 후당 장종으로 즉위하여 풍도와 녹질(盧質)을 벼슬아치로 임명했다. 같은 해 장종이 후량을 정복하고 그 영토를 손에 넣은 후,[6] 풍도를 중서사인(中書舍人, 정부 입법 기관인 중서성(中書省)의 중간 관리) 겸 호부시랑(戶部侍郎)으로 임명했다. 얼마 후 풍도의 아버지가 사망하여 관직을 떠나 경성(景城)에서 상복을 입었다. 당시 풍도는 이미 명성이 높아 거란이 그를 사로잡기 위해 경성을 습격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후당 국경 방위군이 준비되어 있어 실행하지 않았다.[1] 경성에 있는 동안 기근이 발생하자, 풍도는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사람들을 돕고, 밭을 갈지 못하거나 게을리하는 사람이 있으면 직접 밭을 갈아주었다.[5]926년경, 장종은 풍도를 낙양(당시 수도)으로 다시 소환했다. 풍도가 변주(汴州, 현재 개봉, 하남성)에 도착했을 때, 후당은 장종에 대한 반란으로 혼란스러웠다. 장종의 양자 이사원이 주요 반란을 이끌었다. 변주 방어사 공순은 상황이 명확해질 때까지 풍도에게 변주에 머물 것을 권했으나, 풍도는 황제의 명을 받아 낙양으로 향했다.[5] 얼마 후 장종은 낙양에서 반란으로 살해되었고, 이사원이 낙양에 도착하여 명종으로 즉위했다.[7]
명종은 풍도의 능력과 미덕을 존중했다.[1] 명종은 문맹이었고, 주요 고문 안충휘는 글을 알았지만 학식이 부족하여, 안충휘는 황제에게 역사 및 문학 문제에 대해 자문할 학자들을 배치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것을 권했다. 명종은 단명전(端明殿)에 두 개의 벼슬아치 자리를 만들고 풍도와 조봉을 임명했다. 927년, 명종은 풍도와 최협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직책과 중서시랑(中書侍郎, 입법부 부처장) 칭호를 수여했다. (풍도의 임명은 수석 재상 인환이 이기를, 참모총장 공순이 최협을 추천한 것에 대한 타협이었다.)[7] 재상 재직 중 풍도는 명종에게 농민들의 어려움을 자주 지적했고, 명종은 풍도가 쓴 시들을 모아 시중들에게 읽게 했다.[8] 명종은 풍도에게 십평공(什平公) 작위를 내렸다.[1]
930년, 안충휘는 명종의 양자 이숭길(호국군(護國, 현재 운성, 산서성에 본부) 절도사(節度使))에게 원한을 품고, 이숭길의 부하 양언온(楊彥溫)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켜 호국 수도 혁중(河中)을 장악하게 하여 이숭길이 낙양으로 돌아오게 했다. 안충휘는 풍도와 조봉에게 이숭길 처벌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명종은 이를 거절했다. 같은 해 말, 명종과 안충휘가 맹지상(서천군(西川, 현재 성도, 사천성에 본부) 절도사)과 동장(동천군(東川, 현재 면양, 사천성에 본부) 절도사)의 반란 처리에 대해 논쟁했을 때, 안충휘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풍도는 안충휘의 사임을 막지 말 것을 다른 관리들에게 촉구했지만, 조봉은 안충휘를 설득하여 참모총장직에 남게 했다. (931년, 명종과 안충휘의 불화가 커져 명종이 안충휘를 강등 후 살해한 것을 보면 풍도의 판단이 옳았다.)[9]
933년, 명종이 중병에 걸리자 장남 이숭용은 황태자로 여겨졌으나, 관리들의 반대를 우려해 명종 사망 전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다 실패하고 죽임을 당했다. 일부 관리는 이숭용 직원들의 대량 처형을 건의했으나, 풍도와 풍운의 관대함 촉구로 대부분 유배되었다. 명종 사후 아들 이종후(송왕)가 민제로 즉위했고,[10] 풍도는 계속 재상으로 섬겼다.[1]
934년, 민제의 수석 고문 풍운과 주홍조는 이숭길과 민제의 매제 석경당(하동군(河東, 현재 태원) 절도사)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일련의 전근 명령을 내렸다. 이숭길은 이를 함정으로 여겨 반란을 일으켰고, 황제군은 반란에 가담하여 이숭길은 낙양으로 접근했다. 민제는 도망쳤다. 이숭길의 낙양 진입 직전, 풍도는 비판받는 행동으로, 관리 노도(盧導)에게 이숭길 즉위 청원서 서명을 요청했으나 노도는 거부했다. 이후 명종의 부인 조태후의 칙령으로 민제는 폐위되고 이숭길이 황제가 되었다. (민제는 유배 중 살해되었다.)[11] 이숭길은 풍도를 명종의 무덤 관리인으로 임명했다.[1] 무덤 완성 후, 풍도는 광국군(匡國, 현재 위난, 섬서성에 본부) 절도사로 보내졌고, ''동중서문하평장사''(재상) 칭호는 명예직으로 유지했다.[11] 광국 수도 동주(同州)에서 풍도의 통치는 관대했다고 전해진다.[1] 935년, 이숭길은 풍도를 소환하여 삼공(三公) 중 하나인 사공(司空)으로 임명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궁정에서는 사공의 역할을 몰랐고, 재상 노문기는 제단 청소를 제안했으나, 풍도의 높은 지위를 고려하여 철회했다.[11]
2. 3. 후진 시대
936년, 이숭계(李崇凱)가 사천평로(天平, 현재 산둥성 태안)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시경당(石敬瑭)은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라고 의심하여 반기를 들었다. 요 태종(遼 太宗)의 지원을 받은 시경당은 후진(後晉)의 고조(高祖)로 즉위하여 이숭계가 보낸 후당(後唐) 군대를 격파하고 낙양(洛陽)으로 진격했다. 이숭계는 가족, 황태후 조씨와 함께 자살했고, 후진의 새 황제는 낙양에 입성했다. 같은 해, 풍도(馮道)에게 실권 없는 사공(司空) 칭호와 함께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문하시랑(門下侍郎, 문하성(門下省)의 차관) 칭호를 주어 다시 재상으로 임명했다.[12]938년, 고조는 요 황제를 "부황(父皇)", 자신을 "자황(子皇)"으로 칭하며, 술루평황태후(述律平皇后)에게도 존칭을 올렸다. 그는 풍도와 유욱(劉昫)을 요에 파견하여 황제와 황태후에게 존칭과 선물을 바쳤다.[13] 태종이 풍도를 구금할지도 모른다는 고조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풍도는 요의 지원을 받았기에 황제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했다. 태종은 고려 끝에 풍도가 후진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1]
939년, 고조는 술미시(樞密使)의 권한이 과도하다고 판단하여 폐지하고, 풍도를 중심으로 권한을 재상들에게 넘겼다.[1][14] 그는 사도(司徒, 삼공(三公) 중 하나), 시중(侍中, 문하성의 수장) 칭호를 받고 노국공(魯國公)에 봉해졌다.[1] 풍도가 병으로 사직을 청하자, 고조는 조카 정왕(鄭王) 시충귀(石重貴)를 보내 만류했고, 시충뢰(石重睿)를 통해 "돌아오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겠다"는 말을 전했다. 이후 풍도는 정부로 돌아와 재상직을 수행하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1][14] 당시 풍도와 이송(李崧)은 고조의 매부 두충위(杜重威)를 추천하여 황실 근위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후한(後漢)의 유지원(劉知元)을 몰아내 유지원의 원한을 샀다.[14]
시충뢰가 어려 고조는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 942년 고조가 병들자, 풍도를 불러 시충뢰를 데려오게 하고, 풍도에게 절을 하게 하고, 시충뢰를 풍도의 무릎에 앉히며 지지하여 후계자로 삼기를 암시했다. 그러나 고조가 곧 죽자, 풍도는 황실 근위대 장군 경언광(景延光)과 논의했다. 풍도와 경언광은 후진의 위태로운 상황을 고려하여 연장자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 기왕(岐王) 시충귀를 황제로 추대했다.[15] 시충귀는 풍도에게 태위(太尉, 삼공 중 하나)의 명예직을 수여하고 연국공(燕國公)에 봉했다.[1]
시충귀는 고조가 요에 대해 취했던 겸손한 태도와는 달리, 요에 대해 더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특히 고조가 태종에게 "자(子)"와 "신(臣)"이라고 칭한 것과는 달리, 시충귀는 경언광의 주장을 받아들여 "손자(孫)"라고만 칭하고 "신(臣)"이라고는 칭하지 않았다. 즉, 개인적인 관계는 유지하면서 동시에 후진이 요의 속국이 아니라는 것을 부인한 것이다. 이송이 이러한 입장에 반대했지만, 풍도가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자, 시충귀는 고조의 죽음과 자신의 즉위를 알리는 태종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손자라고만 칭했다. 이는 태종을 불쾌하게 했고, 요의 승인 없이 즉위한 시충귀를 질책하는 답장을 보냈다. 944년 조연수(趙延壽)가 전쟁을 부추기고 태종이 성공하면 중원의 황제로 만들겠다고 약속하면서, 요의 후진 영토 침략이 반복되었다.[15][16] 우유부단한 재상으로 여겨진 풍도는 시충귀에 의해 광국(匡國)의 병마사로 좌천되었고, 시중 칭호는 명예직으로 유지했다.[16] 약 1년 후, 위승로(威勝, 현재 허난성 남양)로 전근되었고, 중서령(中書令, 중서성의 수장) 칭호를 명예직으로 받았다.[1]
2. 4. 요나라 시대
946년, 요나라 태종은 석중귀가 임명한 반요 군대의 사령관 두위(두충위에서 '충'자를 피휘하여 이름을 바꿈)를 패배시키고 항복시킨 후, 남쪽으로 진격하여 후진의 수도 개봉까지 이르렀고, 석중귀는 항복했다.[17] 947년, 요 태종은 국호를 “대요”라 선포하고 후진의 각 주(州)의 군사 절도사들을 개봉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위생(魏州)에 있던 풍도도 이에 응했다. 요 태종은 풍도와 이송 모두를 예우했다. 이송을 숙밀사로 삼았고, 풍도에게는 태부의 직무를 대행하게 하고, 비록 공식적으로 숙밀사는 아니었지만 그 직책에서 일하게 하고 중요한 일에 대해 자문을 구하게 했다.[18] 요 태종이 풍도에게 “천하의 백성을 구할 방법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풍도는 “지금은 부처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 해도 백성을 구할 수 없고 오직 황제만이 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말 덕분에 요 태종이 한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제했다고 여겨진다.[1] 요 태종이 반요 작전 계획에 참여했다고 비난한 후진 장군 유계훈은 풍도와 경양광이 그 배후에 있다고 비난하려 했으나, 요 태종은 풍도를 비난하는 것을 나무라고 유계훈을 요나라 북쪽 도시 황룡(현재 중국 길림성 장춘)으로 보냈다.[18]947년 봄, 요 태종은 백성에 대한 가혹한 약탈로 인해 수많은 한족의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매제 소한을 개봉에 남겨두고 자신은 후진의 재물과 주요 관리들을 데리고 요나라가 후진을 정복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본래 영토로 돌아갔다. 그는 도중에 죽었고, 요나라 장군들은 그의 조카인 예루완을 계승자로 지지했다.[18] 한편, 이러한 권력 공백 속에서 유지원은 새로운 후한을 선포하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소한이 개봉에서 물러난 후 빠르게 개봉에 입성하여 후진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다.[18][19]
술루황태후는 요 세종의 즉위에 반대하여 군대를 보냈다. 요 세종은 그녀의 군대를 물리치고 가택 연금했다. 그러나 이 전투 중에 그는 풍도와 다른 전 후진 재상 이송, 하녕이 남아 있던 항주(현재 허베이성 석가장)에 예루마다를 남겨두었다. 예루마다는 부패하고 잔혹했으며 한족 병사들에게도 가혹한 제약을 가하여 불만을 샀다. 요 세종이 후진 관리들에게 요 태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계속 북쪽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백재용이 이끄는 한족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항주에서의 전투 중에, 이구의 촉구에 따라 풍도, 이송, 하녕은 직접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나섰고, 이것이 한족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으며, 결국 예루마다를 패배시키고 남은 거란 병사들과 함께 도망치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풍도에게 성덕군의 군사 절도사 자리를 제안했지만, 풍도는 거절하고 군인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지적했고, 백재용이 대리 군사 절도사 자리를 차지하고 후한에 귀순했다.[19]
2. 5. 후한 시대
947년, 유지원이 후한을 건국하고 수도 개봉으로 입성했으나, 이듬해 948년에 사망했다.[19] 유지원의 아들 유승우(인종)가 뒤를 이었으며, 유승우에게는 소봉길, 양빈, 사홍조, 곽위 등의 신하와 장군들이 있었다. 유지원은 사망 당시 이들에게 두충위를 엄중히 감시하라는 지시를 남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네 사람은 유지원의 명령이라 공표하며 두충위를 처형했다.[19]이러한 상황은 후한의 신하가 된 이수진에게 큰 불안감을 주었다. 948년 봄, 이수진은 호국 군사절도사 직책에서 반란을 일으켜 진왕(秦王)을 자칭하며, 왕경충과 조사완과 연합했다. 고위 관리들은 곽위에게 황실 친위대를 이끌고 이수진을 토벌하도록 결정했다. 곽위는 출발 전 풍도를 찾아 의견을 구했고, 풍도는 곽위가 지휘할 황실 친위대를 오랫동안 이끌어 온 이수진과의 친분을 제거하기 위해 국고의 부담에 관계없이 큰 보상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곽위는 이를 받아들여 황실 친위대 내에서 인기를 얻었고, 이로 인해 이수진이 친위대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20] 그 후 곽위는 949년에 이수진을 패퇴시켰고, 이수진은 자살했다. 왕경충 또한 이후 자살했고, 조사완은 처음에는 후한군에 항복했지만 마음을 바꿔 후한군에 의해 사살되어 세 차례의 반란이 종식되었다.[20]
950년, 풍도는 자신의 가계와 경력, 그리고 후대 왕조에서 그와 그의 가족에게 내려진 영예에 대해 논한 "장락노자술(長樂老自述)"이라는 자전적 글을 썼다.[1]
같은 해 겨울, 인종은 양빈, 사홍조, 곽위와 재상 왕장이 권력을 쥐고 혼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했던 것에 분노하여 양빈, 사홍조, 왕장을 죽였다. 당시 북쪽 원정 중이어서 개봉에 없던 곽위는 화를 면했지만, 인종은 여전히 그의 가족과 곽위군 감찰관 왕준을 죽였다. 그 후 곽위는 반란을 일으켜 개봉으로 향했고, 인종이 직접 지휘하는 황실 군대를 물리쳤다. 인종은 도망쳤다가 도주 중 살해되었다. 곽위가 그 후 수도에 입성했을 때, 풍도는 곽위에게 절하지 않았지만 곽위의 절을 받아들였고, 차분하게 "이번에 자네가 시중(侍中)으로서 한 일은 쉽지 않았네."라고 말했다.[22]
곽위는 이후 신하들을 이끌고 유지원의 부인 이황태후를 알현했고, 이황태후는 유지원이 아들로 입양했던 유지원의 조카 유운을 황제로 삼도록 명령했다. 그녀는 풍도와 왕도, 조상교를 운녕의 수도인 서주로 보내 유운을 수도로 호송하여 즉위하게 했다.[22]
그러나 곽위의 장군들은 수도를 함락시킨 것에 대한 처벌을 두려워하여 또 다른 유씨 황족을 황제로 지지하는 것에 크게 반대했다. 그들은 찬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곽위를 황제로 지지했다. 곽위는 이를 받아들였고 개봉으로 돌아와 이황태후의 저항을 완화시키는 한편, 장교 곽충을 보내 유운의 호송대를 가로막았다. 곽충이 도착하자 유운의 호송군을 장악하고 곽위의 명령을 전달하여 풍도를 수도로 소환하고 유운을 조상교와 왕도에게 맡겨 사실상 유운을 가택 연금 상태에 놓았다.[22] 이후 951년 봄, 곽위는 새로운 후주의 태조(太祖)로 즉위했다.[23]
2. 6. 후주 시대
후주 태조 곽위가 즉위한 직후, 풍도는 중서령(中書令)으로 임명되어 다시 재상으로 복귀했다.[23]같은 해 말, 후한 고조의 이복동생인 무용연초(慕容彦超) 장군이 후주에 항복했다가 태녕군(泰寧, 현재 산둥성(山東省) 지닝시(濟寧) 위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952년 초 무용연초가 패배하여 자살하자, 태조는 그의 군사들을 모두 죽일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궁중 학자인 두의(竇儀)가 풍도와 동료 재상 판지(范質)를 만나 태녕군 병사들은 무용연초에게 강제로 싸움에 끌려들었을 뿐이라고 태조에게 설득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태조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태조는 태녕군 병사들을 사면했다.[23]
같은 해, 궁중 학자 서태부(許台符)는 948년 이수진(李守貞)의 반란에 가담하려 했다는 거짓 혐의로 이송(李嵩)과 그의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갈연우(葛延遇)와 이정(李澄)[20]을 처형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풍도는 왕조가 바뀌고 그동안 여러 차례 대사면이 있었으므로 기소를 진행해서는 안 된다고 의견을 냈다. 그러나 동료 재상 왕준(王峻)은 이송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서태부의 열정에 감명받아 갈연우와 이정의 처형을 건의했다. 태조는 그들의 처형을 명령했다.[21]
953년, 태조는 왕준의 권력이 너무 커지고 그의 행동이 너무 거만해졌다고 판단했다. 왕준은 태조의 양자이자 후주 시종(世宗)인 국용(郭榮)이 수도 카이펑시(開封)으로 와서 태조에게 조공하는 것을 막으려 했는데, 이는 국용의 권력이 자신에게서 멀어질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태조는 풍도와 다른 재상들과 상의한 후 왕준을 의원면직시켰다. 왕준이 은퇴하고 죽은 후, 국용은 수도에 머물 수 있게 되었고 이후 권력 중심에 남게 되었다.[21]
태조는 954년에 죽고 국용(시종제)이 계승했다.[21] 시종제가 즉위한 직후, 태조의 장례식도 치르기 전에, 이운(李雲)의 친부인 유민(劉旻, 본명 유충(劉崇))이 태조가 후주를 선포한 직후 타이위안시(太原)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후한의 정통 후계자임을 선포했다. 후한의 계승을 주장했지만, 역사적으로는 북한으로 알려진 그의 국가였다.[23] 유민은 요의 지원을 받아 후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중원을 장악하려 했다. 시종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민을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풍도를 비롯한 많은 신하들은 새로운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끄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이는 사관들에 의해 기록된 시종제와 풍도 사이의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21]
이러한 대화의 분위기는 시종제를 불쾌하게 했지만, 재상 왕포(王溥)는 시종제의 직접 출정 의견에 동의했고, 시종제는 결국 직접 출정했다. 시종제가 출정 준비를 마치자, 태조의 관을 황릉으로 운구하고 매장을 감독할 임무를 풍도에게 맡겼다. 시종제는 북한군을 크게 격파했지만, 풍도는 시종제가 개선하기 전에 죽었다.[21]
3. 오조팔성십일군(五朝八姓十一君)
풍도는 자신이 섬겼던 군주들을 “'''오조팔성십일군(五朝八姓十一君)'''”이라고 칭했다.
오조(五朝) | 팔성(八姓) | 십일군(十一君) |
---|---|---|
후당, 후진, 요(연운십육주 할양 및 후진 멸망 시에는 거란. 유지원(劉知遠)과의 항쟁이 일어난 947년부터 요), 후한, 후주 | 후당의 이존서(이씨·주야씨), 그의 양자인 이사원(본성 불명), 그의 양자인 이종가(본성 왕씨)의 3개의 이씨, 후진의 석씨, 요의 열려씨, 후한의 유씨, 후주의 곽위와 그의 양자 채영의 곽씨, 채씨 | 후당 4대(장종 이존서, 명종 이사원, 민제 이종후, 말제 이종가), 후진 2대(고조 석경당, 출제 석중귀), 요(거란) 1대(태종 열려덕광), 후한 2대(고조 유지원, 은제 유승우), 후주 2대(태조 곽위, 세종 채영) |
4. 인쇄술 발전에 기여
932년, 풍도는 유교 경전을 활자 인쇄로 인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목판 인쇄 발명 후 약 1세기 만의 일로, 풍도는 인쇄 과정을 크게 개선하고 이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24] 이 프로젝트는 953년에 완료되어 인쇄판이 후주 태조에게 봉헌되었다.[21]
풍도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서구에서 근대 인쇄술의 발명자로 여겨지는 것처럼, 중국에서 근대 인쇄술의 발명자로 일반적으로 여겨진다. 주석이 포함된 유교 경전의 첫 번째 표준판은 932년에서 953년 사이에 시안에서 130권으로 출판되었다. 개선된 인쇄 기술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가장 오래된 한국 서적은 950년에 인쇄되었다.
풍도와 그의 동료들이 중국 인쇄술에 기여한 업적은 구텐베르크가 유럽에서 한 일과 비교될 수 있다. 구텐베르크 이전에도 인쇄술은 존재했지만, 국가 문화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풍도의 경전 인쇄는 송나라 르네상스를 가져온 힘으로 평가받는다.[25] 풍도가 사용한 텍스트는 당나라 재상 정탄(鄭潭)이 장안에 새기도록 명령한 텍스트에서 비롯되었다.[1]
남송(南宋)의 엽몽득(葉夢得)은 馮도가 목판 인쇄를 시작했다는 설을 부정하며, 단지 국자감(國子監)에서 오경(五經) 출판을 담당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풍도보다 200년 전 당나라 시대부터 불교 경전의 목판 인쇄는 이미 시작되었기에, 풍도가 인쇄술의 창시자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26]
5. 평가
오대십국 시대는 황제와 왕조가 빈번하게 교체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풍도는 후량을 제외한 오대 왕조(후당, 후진, 후한, 후주)와 거란족의 요나라를 섬기며 20년 동안 재상으로 재임했다. 그는 스스로 "'''오조팔성십일군(五朝八姓十一君)'''"을 섬겼다고 칭했는데, 이는 다섯 왕조, 여덟 성씨, 열한 명의 군주를 의미한다.[26]
구분 | 내용 |
---|---|
오조(五朝) | 후당, 후진, 요(947년부터), 후한, 후주 |
팔성(八姓) | 이(李)씨 셋(후당 이존서, 이사원, 이종가), 석(石)씨(후진), 열려(耶律)씨(요), 유(劉)씨(후한), 곽(郭)씨와 채(柴)씨(후주) |
십일군(十一君) | 후당 4명(장종 이존서, 명종 이사원, 민제 이종후, 말제 이종가), 후진 2명(고조 석경당, 출제 석중귀), 요 1명(태종 야율덕광), 후한 2명(고조 유지원, 은제 유승우), 후주 2명(태조 곽위, 세종 채영) |
오대 무인 황제들과 북방 요 황제들은 백성에 대한 연민이 부족하여 폭주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풍도는 이들을 간언하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예를 들어 요의 야율요골이 개봉에 들어와 한족을 학살하려 할 때, 풍도는 "지금 부처가 나타나도 백성을 구할 수 없고, 오직 황제만이 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 학살을 막았다.[26]
하지만 풍도의 처세는 후대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말년에 "장락노(長樂老)"라는 호를 짓고 자신의 공적을 스스로 자랑하는 등 자기 과시적인 면모를 보인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풍도 자신도 고관 지위에 오래 있으면서 군주를 위해 천하를 평정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겼다고 한다.[26]
"장락노"라는 호는 "오래 즐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풍도의 고향인 "장락군 신도현"(현재 허베이성 형수시(衡水市)기주구(冀州區))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26]
5. 1. 긍정적 평가
이탁오(李卓吾)는 "맹자(孟子)는 '사직을 중히 여기고 군주를 가볍게 여긴다'라고 말했다. 풍도는 이를 구현하여 백성을 평안하게 했다"라며 극찬했다. 다만 "이는 오대와 같은 시대이기 때문에 허용되는 것이며, 다른 시대의 변절자가 이것을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고도 말했다.[26]하지만 풍도 덕분에 목숨을 구한 백성은 많았고, 긴급 상황의 재상으로서 그 공적은 어느 정도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26]
풍도는 목판 인쇄술의 창시자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으나, 남송(南宋)의 엽몽득(葉夢得)은 저서 『석림연어(石林燕語)』에서 "세상에서는 풍도가 목판 인쇄를 시작했다고 말하지만, 잘못이다. 국자감(國子監)에서 오경(五經)의 출판을 풍도가 했다는 것뿐이다"라며 이 설을 부정했다.[26]
5. 2. 부정적 평가
주자학적 관점에서는 풍도를 매국노, 변절자로 보았으며, 사마광 또한 “정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며 통렬하게 비판했다.[26] 풍도가 “'''오조팔성십일군(五朝八姓十一君)'''”을 섬긴 사실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26]『구오대사(舊五代史)』 권 126 본전에 나오는 “사신왈(史臣曰)”에는 “하물며 한 여자가 두 남편을 섬기는 것은 사람의 불행이다”라며 사마광과 같은 비판이 이미 풍도에게 가해지고 있다.[26]
오양수(歐陽脩)의 『신오대사(新五代史)』 권 54의 “렴치 없는 자(無廉恥漢)”라는 풍도에 대한 평가 또한 사마광의 비판과 일치하여 후세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26]
풍도가 요(遼)의 황제를 “부처님 이상”이라고 아부한 것 역시 비판받고 있다.[26]
6. 관련 사적 및 저술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Old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2]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Zizhi Tongjian
[5]
서적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6]
서적
Zizhi Tongjian
[7]
서적
Zizhi Tongjian
[8]
서적
Zizhi Tongjian
[9]
서적
Zizhi Tongjian
[10]
서적
Zizhi Tongjian
[11]
서적
Zizhi Tongjian
[12]
서적
Zizhi Tongjian
[13]
서적
Zizhi Tongjian
[14]
서적
Zizhi Tongjian
[15]
서적
Zizhi Tongjian
[16]
서적
Zizhi Tongjian
[17]
서적
Zizhi Tongjian
[18]
서적
Zizhi Tongjian
[19]
서적
Zizhi Tongjian
[20]
서적
Zizhi Tongjian
[21]
서적
Zizhi Tongjian
[22]
서적
Zizhi Tongjian
[23]
서적
Zizhi Tongjian
[24]
서적
The Invention of Printing in China and Its Spread Westward
http://worldcat.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1925
[25]
서적
The Invention of Printing in China and Its Spread Westward
http://worldcat.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1925
[26]
서적
中国明末のメディア革命
刀水書房
2009
[27]
서적
구오대사
[28]
서적
구오대사
0954-04-17
[29]
웹사이트
대만 중앙연구원 중국력(中國曆) ↔ 서력(西曆) 변환기
http://sinocal.sinic[...]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