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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베 아사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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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소베 아사이치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2·26 사건에 가담하여 사형된 인물이다. 그는 1905년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황도파 청년 장교 그룹의 중심 인물로 기타 잇키와 교류하며 육군사관학교 사건에 연루되어 정직되었고, 이후 2·26 사건을 계획하고 지휘했다. 사건 실패 후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옥중에서 쇼와 유신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담은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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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베 아사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보병 제80연대 부속 중위 시절의 이소베
이름이소베 아사이치
로마자 표기Isobe Asaichi
출생일1905년 4월 1일
출생지야마구치현 오쓰군
사망일1937년 8월 19일
사망지도쿄부 도쿄시
사망 원인총살형
묘소회향원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26년–1936년
최종 계급중위
참전2.26 사건
기타
주요 활동2.26 사건 주모자

2. 생애

이소베 아사이치는 1905년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기타 잇키와 교류하며 황도파 청년 장교 그룹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다 2·26 사건에 가담, 실행을 주도한 후 사형 선고를 받고 1937년에 총살당했다.

옥중에서 〈행동기〉, 〈옥중일기〉, 〈옥중수기〉 등을 남겼다. 1937년 1월경에는 이소베가 썼다는 〈옥중수기〉가 시중에 유통되었고, 같은 해 우익 측에서 출판, 배포하여 특별고등경찰에 여럿이 체포되었다.[21] 이 문서는 진위가 확실치 않으나, 전후 《문예》 1967년 3월호에 발표된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이소베의 형사 후 도쿄 육군 위수형무소 간수 히라이시 미쓰히사(平石光久)가 몰래 빼돌려 보관한 것으로, 〈행동기〉에는 아이자와 사건 이후의 회상이 씌어 있으며 〈옥중일기〉에는 공범 13명의 처형 직후인 1936년 7월 31일부터 8월 31일까지의 기록이 씌어 있다.

이소베는 이 수기에서 쇼와 유신의 정당성과 자신을 이해 못하는 세상·군부 수뇌·천황에 대한 매도와 비난을 길게 늘어놓았다. 자신을 "일본 제일의 충의자"로 칭하며 "지금의 일본인은 성근(性根)이 썩어 빠졌으니만큼 참된 충의를 이해 못한다", "정말이지 일본이라는 등신같은 나라에 정이 떨어진다"고 비판했다.

와타나베 조타로 교육총감이 살해 목표로 정해진 데 대하여 "와타나베는 동지 장교를 탄압했을 뿐 아니라 삼장관의 일인으로서 우리의 행동에 반대하여 탄압함직한 인물의 필두이다. 천황기관설의 군부에 있어서의 본존 격이다."라고 〈행동기〉에 썼다.

특히 〈옥중일기〉에는 쇼와 천황에 대한 질책이 씌어 있었다.

"일본도 러시아 꼴이 되었군요"라고 쇼와 천황이 측근에 말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이소베는 격노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유서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2011년 간수에게 맡긴 〈정기〉(正気)라고 이름 지어진 글이 발견·공개되었다.[22]

이소베와 기타 잇키 등은 메이지 유신 혁명 이래 일본은 "천황의 독재국가가 아니며" "중신의 독재국가조차 아닌"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민주국"이었으나, "지금의 일본은 중신과 재벌의 독재국가"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대의를 이해하지 못한 쇼와 천황을 옥중에서 "삼가 꾸짖"었다.[23]

기타 잇키, 무라나카 다카지, 니시다 미쓰기와 함께 총살될 때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지 않았다.[24]

2. 1. 출생과 성장

1905년(메이지 38년) 4월 1일 야마구치현 오쓰군 히시카이촌(현 나가토시) 가와하라에서 농부 겸 미장이인 이소베 니사부로(磯部仁三郎)의 삼남으로 출생했다. 고등소학교, 히로시마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예과를 거쳐 1926년(다이쇼 15년) 7월 육군사관학교(38기)를 졸업했다. 같은 해 10월 육군 보병소위에 임관하여 보병 제80연대에 배속되었다.

2. 2. 군 복무와 파벌 활동

히로시마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예과를 거쳐 1926년(다이쇼 15년) 7월 육군사관학교(38기)를 졸업했다. 같은 해 10월 육군 보병소위에 임관하여 보병 제80연대에 배속되었다.

1929년(쇼와 4년) 10월 육군 보병중위로 진급했다. 1932년(쇼와 7년) 6월 경리부 전과를 지원하여 육군경리학교에 입교, 1933년(쇼와 8년) 5월 졸업하고 주계로 전과하여 육군 이등주계(중위에 상당)에 임관했다. 같은 해 6월 근위보병 제4연대에 배속되었고, 1934년(쇼와 9년) 8월 육군 일등주계로 진급함과 동시에 야포병 제1연대 부로 이관되었다.

일찍부터 기타 잇키와 교류하며 황도파 청년장교 그룹의 중심인물로 알려졌다. 1934년 발생한 육군사관학교사건으로 무라나카 다카지 등과 반란을 꾀한 용의로 체포되었으나 이듬해 3월 정직, 4월 석방되었다. 이후 〈숙군에 관한 의견서〉를 집필, 배포하여 8월 면관되었다. 이에 따라 정칠위 반납을 명받아 대례기념장(쇼와)를 박탈당했다.[16]

이후 무라나카와 동거하며 반란 계획에 열중했다. 아이자와 사건 이후 헌병·경시청 경관이 둘의 주위를 경계·감시했다. 무라나카가 아이자와 사건 재판 투쟁을 중시한 '이론파'였다면 이소베는 '행동파'였다.

1936년(쇼와 11년) 2·26 사건에서 구리하라 야스히데 등과 계획·지휘에 참여했다. 수상 관저에서 총성이 울려 행동 개시를 안 순간에 대해 "어쨌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즐거웠다. 한번쯤은 해보는 게 좋다. 나는 한번 더 해보고 싶다. 그 쾌감은 아마도 인생 지상(至上)의 것이리라"고 회상했다.[17]

육상 관저 현관에서 통제파 가타쿠라 다다시를 발견, 권총을 발사한 후 권총을 발밑에 던지고 군도를 뽑았으나 그 자리에 있던 마사키 진자부로에게 회유되었다. 왼관자놀이를 다친 가타쿠라는 육상 전용차로 병원에 이송되어 처치를 받았다. 사건 후 신문에서 가타쿠라에게 "멍청아!" 하고 호통을 들어 기가 질려 권총을 떨군 것이라는 보도를 보고 "허리가 빠진 것은 결코 내가 아니다.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었다", "어째서 피스톨을 버렸느냐 어째서 군도를 빼었느냐 물어도 그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다.[17]

사이토 류는 육상 관저에 "가타쿠라도 살아 있다고 들었다. 나 혼자서라도 가서 죽여주마. 상황에 따라서는 군인회관 해행사까지 습격할 예정이라는 둥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격앙된 장교가 있었다고 회상했는데, 이 인물이 이소베로 추정된다.[18]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청년 장교들이 자결할 것인지 항복할 것인지 결정을 주저하는 와중 이소베는 "나는 도저히 죽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며 "자결할 때가 아니다. 산노 호텔에서 도주해 지나로 가자 싶어 시바 대위에게 도망가게 해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어떻게든 목숨을 붙들어 원수를 갚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이다"고 했다.[17]

사건 후 도쿄 육군 군법회의에서 7월 5일 1차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소베와 무라나카는 기타 잇키, 니시다 미쓰기 재판과의 관계상 7월 12일 처형된 다른 사형수와는 분리되었다. 1937년(쇼와 12년) 8월 19일 기타, 니시다, 무라나카 등과 총살형에 처해졌다.[19]

2. 3. 2·26 사건 가담과 처형

기타 잇키와 교류하며 황도파 청년 장교 그룹의 중심 인물로 알려졌던 이소베 아사이치는 1936년(쇼와 11년) 2·26 사건에 가담했다.[17] 구리하라 야스히데 등과 함께 계획 및 지휘를 맡았으며, 수상 관저에서 총성이 울리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즐거웠다. 한 번쯤은 해보는 게 좋다. 나는 한 번 더 해보고 싶다. 그 쾌감은 아마도 인생 최고의 것이리라"라고 회상했다.[17]

육군 대신 관저 현관에서 통제파가타쿠라 다다시를 발견하고 권총을 발사했으나, 마사키 진자부로에게 제지당했다. 이소베는 "허리가 빠진 것은 결코 내가 아니다.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었다"라며, "어째서 피스톨을 버렸느냐 어째서 군도를 빼었느냐 물어도 그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17]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소베는 "나는 도저히 죽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라며, "자결할 때가 아니다. 산노 호텔에서 도주해 지나로 가자 싶어 시바 대위에게 도망가게 해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어떻게든 목숨을 붙들어 원수를 갚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했다.[17]

사건 후, 도쿄 육군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19] 기타 잇키, 니시다 미쓰기, 무라나카 다카지와 함께 1937년(쇼와 12년) 8월 19일 총살형에 처해졌다.[19]

3. 옥중 수기

아라카와구 미나미센주 회향원에 있는 이소베 아사이치의 묘


이소베 아사이치는 옥중에서 〈행동기〉, 〈옥중일기〉, 〈옥중수기〉 등을 썼다. 1937년(쇼와 12년) 1월경에는 이소베가 썼다는 〈옥중수기〉가 시중에 돌아다녔으며, 같은 해 우익 쪽에서 출판, 반포하여 특별고등경찰에 여럿이 체포되기도 했다.[21]

이 문서는 진위가 확실치 않으나, 전후 《문예》 1967년 3월호에 발표된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이소베의 사형 집행 후 도쿄 육군 위수형무소 간수 히라이시 미쓰히사(平石光久)가 몰래 빼돌려 보관한 것이다. 〈행동기〉에는 아이자와 사건 이후의 회상이, 〈옥중일기〉에는 공범 13명의 처형 직후인 (쇼와) 11년 7월 31일부터 8월 31일까지의 기록이 씌어 있다.

유서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나, 2011년 간수에게 맡긴 〈정기〉(正気)라는 글이 발견·공개되었다.[22]

3. 1. 쇼와 유신에 대한 인식

이소베는 옥중에서 〈행동기〉, 〈옥중일기〉, 〈옥중수기〉 등을 저술했다. 이 수기들에서 이소베는 쇼와 유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군부 수뇌부, 천황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자신을 "일본 제일의 충의자"라고 칭하며 "지금의 일본인은 성근(性根)이 썩어 빠졌으니만큼 참된 충의를 이해 못한다", "정말이지 일본이라는 등신같은 나라에 정이 떨어진다"고 비판했다.[21]

와타나베 조타로 교육총감이 살해 목표가 된 것에 대해 "와타나베는 동지 장교를 탄압했을 뿐 아니라 삼장관의 일인으로서 우리의 행동에 반대하여 탄압함직한 인물의 필두이다. 천황기관설의 군부에 있어서의 본존 격이다."라고 〈행동기〉에 썼다.

특히 〈옥중일기〉에는 쇼와 천황에 대한 질책이 있었다.[21]

"일본도 러시아 꼴이 되었군요"라고 쇼와 천황이 측근에 말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이소베는 격노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21]

이소베와 기타 잇키 등이 생각하기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 혁명 이래 "천황의 독재국가가 아니며" "중신의 독재국가조차 아닌"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민주국"이었건만 "지금의 일본은 중신과 재벌의 독재국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대의를 이해 못한 쇼와 천황을 옥중에서 "삼가 꾸짖"었다.[23]

이소베는 기타, 무라나카, 니시다와 함께 총살 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지 않았다.[24]

3. 2. 쇼와 천황에 대한 비판

이소베는 옥중 수기에서 쇼와 유신의 정당성과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군부 수뇌, 쇼와 천황에 대한 매도와 비판을 길게 늘어놓았다. 자신을 "일본 제일의 충의자"라고 칭하며 "지금의 일본인은 근성이 썩어 빠졌으니만큼 참된 충의를 이해 못한다", "정말이지 일본이라는 등신같은 나라에 정이 떨어진다"고 비판했다.[21]

특히 〈옥중일기〉에는 쇼와 천황에 대한 질책이 씌어 있었다.[10]

"일본도 러시아 꼴이 되었군요"라고 쇼와 천황이 측근에게 말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이소베는 격노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11]

이소베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민주국"이었으나, "지금의 일본은 중신과 재벌의 독재국가"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대의를 이해하지 못한 쇼와 천황을 옥중에서 "삼가 꾸짖"었다고 한다.[12]

기타, 무라나카, 니시다와 함께 총살 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지 않았다.[13]

3. 3. 와타나베 조타로 암살 이유

이소베는 와타나베 조타로 교육총감이 살해 목표로 정해진 이유에 대해 〈행동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와타나베는 동지 장교를 탄압했을 뿐 아니라 삼장관의 일인으로서 우리의 행동에 반대하여 탄압함직한 인물의 필두이다. 천황기관설의 군부에 있어서의 본존 격이다."[21]

4. 사후 평가와 영향

미시마 유키오는 이소베의 〈옥중일기〉를 높이 평가하며, 이소베의 수기가 게재된 《문예》 1967년 3월호에 〈"도의적 혁명"의 이론――이소베 일등주계의 유서에 대하여〉[14]를 실었다. 미시마의 말년 작품 《영령의 소리》에는 이소베의 수기 발췌가 포함되어 있다. 한편으로 살해된 사이토 마코토의 친척 아리마 요리치카는 피해자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미시마를 비판했다.

5. 대중문화 속 묘사

다음은 이소베 아사이치를 연기한 배우와 작품 목록이다.

=== 영화 ===


  • 야마가타 이사오 (반란, 1954년)
  • 미키모토 신스케 (중신과 청년장교 육해군 유혈사, 1958년)
  • 사토 케이 (총살, 1964년, 역할 이름은 이소노 아사지)
  • 타무라 타카히로 (연, 1967년)
  • 쓰루타 고지 (일본암살비록, 1969년)
  • 타케나카 나오토 (226, 1989년)


=== 드라마 ===

  • 무라노 타케노리 (2·26 사건의 아내들, 1976년)
  • 오이데 슌 (쇼와 성장 마쓰모토 사건에의 접근, 1984년)
  • 와카마쓰 다케시 (열정 2.26에서 사랑은 죽었다, 1991년, 이소무라 아사이치 명의)
  • 치바 테쓰야 (그때 역사는 움직였다, NHK, 2000년 2월 21일 방송, 14일 방송)

5. 1. 영화


  • 야마가타 이사오 (반란, 1954년, 신 사부리)
  • 미키모토 신스케 (중신과 청년장교 육해군 유혈사, 1958년, 도이 미치요시)
  • 사토 케이 (총살, 1964년, 고바야시 쓰네오) (역할 이름은 이소노 아사지)
  • 타무라 타카히로 (연, 1967년)
  • 쓰루타 고지 (일본암살비록, 1969년, 나카지마 사다오)
  • 사노 시로 (《악덕의 영화》, 1988년, 지소지 아키오)
  • 타케나카 나오토 (226, 1989년, 고샤 히데오)

5. 2. 드라마


  • 무라노 타케노리의 "2·26 사건의 아내들"(1976)
  • 오이데 슌의 "쇼와 성장 마쓰모토 사건에의 접근"(1984, 무라야마 신지 제작)
  • 와카마쓰 다케시의 "열정 2.26에서 사랑은 죽었다"(1991) (이소무라 아사이치 명의)
  • 치바 테쓰야의 "그때 역사는 움직였다"(NHK, 2월 21일 방송, 14일 방송)

6. 참고 문헌


  • 사사키 지로 『한 혁신장교의 반생과 이소베 아사이치』 (후요쇼보, 1980년)
  • 야마자키 구니키 『이소베 아사이치와 2·26 사건』 (가와데쇼보신샤, 1989년)
  • 마쓰모토 겐이치 『미시마 유키오2·26 사건』 (분게이슌주, 분슌신쇼, 2005년 11월)
  • 하마다 마사히코 『신들의 군대―미시마 유키오, 혹은 국제 금융자본의 어둠』 (산고칸, 2000년)

참조

[1] 웹사이트 Isobe Asaichi http://kotobank.jp/w[...] Kōdansha 2014-04-10
[2] 웹사이트 Isobe Asaichi http://kotobank.jp/w[...] Hitachi 2014-04-10
[3]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第5版 三省堂
[4] 간행물 官報 1935年10月18日 四六六-四六七頁 https://dl.ndl.go.jp[...]
[5] 서적 二・二六事件 獄中手記・遺書 河出書房新社
[6] 서적 二・二六事件―青年将校の意識と心理
[7] 뉴스 北、西田、村中、磯部の死刑執行 東京朝日新聞 1936-08-20
[8] 문서 『勇猛・悲壮 辞世の句150 戦国武将・帝国軍人…日本男児が遺した最期の言葉!』
[9] 뉴스 軍首脳部を誹謗、怪文書頒布の一味を送局 東京朝日新聞 1936-08-29
[10] 문서
[11] 뉴스 「二・二六」将校の遺書、新たに発見 事件から75年 朝日新聞 2011-02-26
[12] 서적 三島由紀夫の二・二六事件 文藝春秋
[13] 서적 二・二六事件「昭和維新」の思想と行動 中央公論
[14] 서적 文化防衛論 筑摩書房
[15]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第5版 三省堂
[16] 간행물 官報 1935年10月18日 四六六-四六七頁 https://dl.ndl.go.jp[...]
[17] 서적 二・二六事件 獄中手記・遺書 河出書房新社
[18] 서적 二・二六事件―青年将校の意識と心理
[19] 뉴스 北、西田、村中、磯部の死刑執行 東京朝日新聞 1936-08-20
[20] 문서 『勇猛・悲壮 辞世の句150 戦国武将・帝国軍人…日本男児が遺した最期の言葉!』
[21] 뉴스 軍首脳部を誹謗、怪文書頒布の一味を送局 東京朝日新聞 1936-08-29
[22] 뉴스 「二・二六」将校の遺書、新たに発見 事件から75年 朝日新聞 2011-02-26
[23] 서적 三島由紀夫の二・二六事件 文藝春秋
[24] 서적 二・二六事件「昭和維新」の思想と行動 中央公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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