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쿠라 다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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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타쿠라 다다시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관동군 참모, 제15군 참모 등을 역임했으며, 만주 사변과 2.26 사건에 연루되었다. 2.26 사건 당시 총격을 받았으나 생존했으며, 태평양 전쟁 중에는 미얀마 방면군 작전 과장, 제33군 참모장 등을 지냈다. 종전 후 공직에서 추방되었으며, 전후에는 사업가로 활동하며 버마 전역 전사자 유골 수집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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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쿠라 다다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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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가타쿠라 다다시 |
본명 | 가타쿠라 다다시 |
출생 | 1898년 5월 18일 |
사망 | 1991년 7월 23일 (향년 93세) |
출생지 | 일본 미야기현 |
군 경력 | |
복무 기간 | 1919년 - 1945년 |
최종 계급 | [[File:帝國陸軍の階級―襟章―少将.svg|35px]] 소장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제대 이후 | |
직업 | 기업인, 국제선린협회 이사장 |
2. 경력
1938년 (쇼와 13년) 3월, 보병 중좌로 진급하고, 같은 해 12월 1일, 관동군 제4과장으로 승진했다. 1939년 (쇼와 14년) 8월 1일에는 보병 제53연대장에 취임했고, 이듬해 3월 9일에 보병 대좌로 진급했다. 1940년 (쇼와 15년) 8월 30일 참모본부 부속으로 전속되었고, 같은 해 12월 4일부터 육군 보병 학교 연구부 주임을 맡았다.
1941년 7월 17일, 관동 방위군 참모로 취임했다. 1942년 9월 18일에는 제15군 참모, 1943년 3월 18일에는 미얀마 방면군 작전 과장으로 취임했다. 미얀마 방면군 작전 과장 시절, 무타구치 렌야 사령관이 강하게 추진한 임팔 작전에 대해, 방식에 위험이 많다고 판단하여 반대했다.
1944년 3월 1일,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4월 8일, 제33군 참모장이 되었다. 6월 15일에 육군 항공 총감부 근무를 거쳐 12월 26일부터 시모시즈 교도 비행 사단장, 1945년 4월 30일 제202사단장에 취임하여 다카사키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같은 해 12월에 소집해제되었다.
전후에는 상사(商事)를 경영하는 것 외에, 1958년 1월 23일에는 스바스 찬드라 보스 아카데미 설립에 관여했고, 1978년에 아카데미 회장으로 취임했다. 1991년 7월 23일에 사망했다.
2. 1. 초기 군 생활
센다이에서 육군 대좌 가타쿠라 고타로(片倉小太郎)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구마모토 중학교, 구마모토 육군 지방 유년학교, 육군 중앙 유년학교를 거쳐 1917년(다이쇼 6년) 12월에 육군사관학교 (제31기)에 입교했다. 1919년(다이쇼 8년) 5월에 졸업하고 사관후보생이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육군 보병소위로 임관하여 보병 제27연대에 배속되었다.1922년(다이쇼 11년) 12월에 보병 중위로 진급하여 육군대학교 (제40기)에 입교했고, 1928년 (쇼와 3년) 12월에 졸업했다. 1929년 (쇼와 4년) 3월에 보병 대위로 진급하여 보병 제27연대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1930년 (쇼와 5년) 8월, 관동군 참모부에 근무하게 되었고, 이듬해 10월부터 관동군 참모로 일했다. 1931년 (쇼와 6년) 9월에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가타쿠라는 젊은 참모로서 이시와라 간지가 주장하는 만몽 문제 해결안에 강한 영향을 받아 만주국을 통해 일본의 혁신을 추구하는 '만주파'의 일원이 되었다. 1932년 (쇼와 7년) 9월 8일, 혼조 시게루 중장,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 이시하라 등과 함께 쇼와 천황을 알현하고 오찬에 참석했다.
1932년 (쇼와 7년) 8월, 구루메의 제12사단 참모로 발령받았다. 당시 제12사단은 5·15 사건으로 군의 파쇼화를 비판하는 후쿠오카 닛닛 신문을 탄압했고, 가타쿠라도 신문사에 협박장을 보냈다. 신문사 폭파 소문에도 주필 기쿠타케 로쿠코는 "시골 신문을 없앤다고? 좋습니다.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언제든지 오십시오"라며 굽히지 않았다.
1933년 (쇼와 8년) 8월부터 참모 본부 제2부 제4과 제4반에서 근무했다. 육군성 및 참모 본부 막료의 좌장이 되어 '정치적 비상사태 발생에 대처하는 대책 요강'이라는 문서를 작성했는데, 이는 2·26 사건 대응의 기초가 되었다.[3] 이 문서는 군 주도의 강력한 정치 체제 확립을 목표로 했다고 가타쿠라는 훗날 증언했다.
1934년 (쇼와 9년) 8월, 보병 소좌로 진급하고, 같은 해 12월부터 육군 병기 본창 부속 겸 군무국 부속으로 대만 사무국에 배속 (사무관)되었다. 같은 해 11월 20일 육군사관학교 사건에서는 쓰지 마사노부 등과 함께 황도파에 속하는 무라나카 고지 대위 등을 체포하는데 관여했다. 가타쿠라는 나가타 데쓰잔 군무국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무라나카와 이소베 아사이치는 날조라며 쓰지와 가타쿠라를 무고죄로 고소했다.[4]
1935년 (쇼와 10년) 8월 12일 아이자와 사건 당시, 가타쿠라는 군무국장실 옆에서 집무 중이었고, 나가타 군무국장이 칼에 찔린 것을 목격했다. 가타쿠라는 나가타에게 40분간 인공호흡을 했지만, 나가타는 결국 사망했다.[5]
1936년 (쇼와 11년) 2월 26일, 2·26 사건이 발생하자, 가타쿠라는 아카사카 미쓰케에서 내려 육군성으로 들어갔다. 가와시마 요시유키 육군 대신과의 면회를 기다리던 중, 마사키 진자부로 대장과 이시하라 간지 대좌를 보고 반란군 가담을 직감했다. 그곳에서 이소베 아사이치에게 권총으로 왼쪽 머리를 저격당했다. 가타쿠라는 피를 흘리면서도 "칼을 거두어라. 천황 폐하의 명령 없이는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무슨 짓인가"라고 호통쳤고, 마사키가 "서로 피를 흘리는 것은 그만두자"라고 중재했다.[6] 가타쿠라는 야마자키 마사오 대위 등의 도움을 받아 마에다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졌다.[8] 가타쿠라가 육군 대신의 승용차를 사용한 것은 가와시마 육군 대신의 참내를 늦추려는 의도였다고 한다.[9]
1936년 (쇼와 11년) 8월, 육군성 군무국 군무과원으로 전속하고, 1937년 (쇼와 12년) 3월부터 관동군 참모로 임명되었다.
2. 2. 만주사변과 만주파
1930년 8월, 가타쿠라는 관동군 참모부에 근무하게 되었고, 이듬해 10월부터 관동군 참모로 일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발발에 관여했다. 가타쿠라 등 젊은 참모들은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 이시와라 간지 중좌 등의 류탸오호 사건 계획에 의한 만주사변의 음모를 사전에 알지 못했지만, 이시하라가 주장하는 만몽 문제 해결안에 강한 영향을 받아, 만주국을 기반으로 일본의 혁신을 촉구하는 '만주파'를 형성하게 되었다.[3]1932년 8월, 구루메의 제12사단 참모로 전출되었다. 이 시기, 제12사단은 5·15 사건으로 인한 군의 파쇼화를 비판하는 후쿠오카 닛닛 신문을 괴롭혔고, 가타쿠라도 신문사에 협박장을 보냈다. 신문사 폭격 소문도 있었지만, 주필 기쿠타케 로쿠코는 "시골 신문을 없앤다고? 좋습니다.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언제든지 오십시오"라고 속마음의 공포와 싸우면서 대결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1933년 8월부터 참모 본부 제2부 제4과 제4반에서 근무했다. 육군성 및 참모 본부 막료 좌장이 되어 '정치적 비상사태 발생에 대처하는 대책 요강'이라는 문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는 군인에 의한 정치적 비상사태 발생 시 대처를 정리한 것으로, 2·26 사건 대응책으로 이용되었다. 이 문서의 목적은, 황도파 등에 의한 쿠데타 진압을 이용하여 군 주도의 강력한 정치 체제를 확립하는 데 있었다고 나중에 가타쿠라는 증언했다.[3]
1934년 8월, 보병 소좌로 진급하고, 같은 해 12월부터 육군 병기 본창 부속 겸 군무국 부속으로 대만 사무국에 배속(사무관)되었다. 같은 해 11월 20일 육군사관학교 사건에서는 황도파에 속하는 무라나카 고지 대위, 이소베 아사이치 1등 주계 등을 체포하는데 관여했다.
1935년 8월 12일 아이자와 사건 발생 당시, 가타쿠라는 군무국장실 옆에서 집무 중이었고, "큰일이다" "국장이 당했다"라는 소리를 듣고 바로 국장실로 향해 칼이 폐를 관통하고 있는 나가타 데쓰잔을 목격했다. 가타쿠라는 나가타에게 올라타 40분 정도 인공 호흡을 했지만, 나가타는 결국 사망했다.[5]
1936년 2월 26일, 2·26 사건 발생 당시, 가타쿠라는 이소베 아사이치에게 왼쪽 머리 부분을 권총으로 총격받았다. 가타쿠라는 피를 흘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칼을 거두어라. 천황 폐하의 명령 없이는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무슨 짓인가"라고 호통쳤고, 마사키 진자부로가 "서로 피를 흘리는 것은 그만두자"라고 중재했다.[6] 동료와 야마자키 마사오 대위의 도움을 받은 가타쿠라는 "할 거면 천황 폐하의 명령으로 해라"라고 외치면서[7], 근처 육군성 승용차에 옮겨져 마에다 병원에서 탄알 제거 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졌다.[8]
1936년 8월, 육군성 군무국 군무과원으로 전속되었고, 1937년 3월부터 관동군 참모로 임명되었다. 1938년 3월, 보병 중좌로 진급했고, 같은 해 12월 1일, 관동군 제4과장으로 승진했다.
2. 3. 참모본부와 2.26 사건
1933년 8월부터 참모본부 제2부 제4과 제4반에 근무했다. 이 시기에 육군성, 참모본부 막료의 좌장이 되어 '정치적 비상 사변 발발에 대처하는 대책요강'이라는 문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는 군인에 의한 정치적 비상 사태가 일어났을 때의 대처를 정리한 것으로, 실제로 나중에 일어난 2.26 사건에 대한 대응은 이 문서가 베이스가 되었다고 한다.[3] 이 문서의 목적은 황도파 등에 의한 쿠데타 진압을 이용해서, 군 주도의 강력한 정치체제를 확립하는 점에 있었다고 나중에 가타쿠라는 증언했다.1936년 2월 26일, 2.26 사건 당시 육군성 현관에서 반란군 장교 이소베 아사이치 전 일등주계로부터 총격을 당했다. 가타쿠라는 마에다 병원으로 옮겨져 탄알 제거 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졌다.[8]
2.26 사건의 원인은 1934년 11월 20일에 일어난 소위 '육군사관학교 사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관학교 사건은 무라나카 다카지 대위와 이소베 일등 주계, 니시다 미쓰기 예비역 소위 등이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무라나카와 이소베 두 명은 정직, 사관생도 5명이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것은 쓰지 마사노부의 음모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가타쿠라도 쓰지와 한패가 되었다고도 하고, 나가타 데쓰잔 군무국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사건 적발 뒤에 이소베는 가타쿠라와 쓰지의 공모에 의해서 만들어진 날조라고 하여 두 사람을 무고죄로 고소했다. 신인물 왕래사 역사독본 '미공개 사진으로 보는 2.26 사건'에서 나온 인터뷰에서는 가타쿠라 본인은 공동 음모, 나가타 지시설을 부정했다.[4]
이 고소는 군법회의에서 각하되었지만, 2.26 사건에서 이소베는 음모설을 믿고 가타쿠라를 습격해 복수를 했다. 사관학교 사건이 황도파 청년 장교의 결속을 강하게 만들었고, 1935년 8월 12일의 아이자와 사건이나 2.26 사건을 일으키게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2. 4. 태평양 전쟁 시기
1941년 7월 17일, 관동 방위군 참모로 취임했다. 1942년 9월 18일에는 제15군 참모, 1943년 3월 18일에는 미얀마 방면군 작전 과장으로 취임했다.미얀마 방면군 작전과장 시절, 제15군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의 강한 의향으로 우호 작전이 계획되었다. 가타쿠라는 이나다 마사즈미 남방군 총참모 부장 등과 함께 적이 공세를 기도했을 경우에 역진공을 걸어 공세 방어를 실시하는 생각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무타구치의 방식은 위험이 많다고 판단하여 반대 입장이었다. 1943년 9월 11일, 12일에 싱가포르에서 남방군 주최의 각 군 참모장 회동이 개최되었을 때, 예하의 제15군에서 제출된 우호 작전안이 무타구치의 안과 동일한 내용이었을 때에는 "수차례 남방군·미얀마 방면군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작전안을 수정하려 하지 않는 15군의 태도는 명령 위반이다"라고 강한 비판을 했다. 그러나, 가타쿠라와 같은 비판의 목소리는 무타구치에 대한 배려로 인해 원안의 포기로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이니치 신문에 따르면 가타쿠라는 마지막까지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1944년 3월에 작전은 실행되었고, 7월에 중지되었다. 작전 중은 물론, 작전 후에 제15군은 괴멸적인 손해를 입었다.[10]
1944년 3월 1일에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4월 8일, 제33군 참모장이 되었다. 6월 15일에 육군 항공 총감부 근무를 거쳐서 12월 26일부터 시모시즈 교도 비행 사단장, 1945년 4월 30일, 제202사단장으로 취임했다. 다카사키에서 종전을 맞이했고, 12월에 소집해제되었다.
2. 5. 전후 활동
가타쿠라는 1945년 12월 소집해제되어 군에서 물러났다.전후에는 상사(商事)를 경영하였고, 1958년 1월 23일 스바스 찬드라 보스 아카데미 설립에 관여했으며, 1978년 아카데미 회장에 취임했다. 구 만주국 관계자로 구성된 국제선린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버마 전역에서 전사한 일본 육군 병사들의 유골 수집에 힘썼다. 1979년 나카다 세이이치와의 인터뷰를 통해 '정치적 비상사태 발생에 대처하는 대책 요강'의 상세 내용과 2.26 사건 당시의 경험을 밝히고 저술을 남겼다.[12]
1989년 찰스 휠러가 내레이션을 맡은 TV 다큐멘터리 미니시리즈 《전쟁으로 가는 길》에 출연, 1931년 당시 관동군 장교로서의 자신을 재현했다.
1991년 7월 23일 급성 심부전으로 도쿄도 메구로구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장례식은 유텐지에서 거행되었다.[12]
3. 2.26 사건
2·26 사건 당시 가타쿠라 다다시는 육군성 앞에서 이소베 아사이치 전 일등 주계에게 총격을 받았다. 이는 1934년 11월 20일에 일어난 이른바 '육군사관학교 사건' 때문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사건은 무라나카 다카지 대위, 이소베 일등 주계, 니시다 미쓰기 예비역 소위 등이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무라나카와 이소베는 정직, 사관생도 5명이 퇴학 처분을 받은 사건이다. 쓰지 마사노부의 음모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가타쿠라가 쓰지와 한패였다거나 나가타 데쓰잔 군무국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사건 적발 후 이소베는 가타쿠라와 쓰지의 공모로 날조된 사건이라며 두 사람을 무고죄로 고소했다. 신인물 왕래사 역사독본 '미공개 사진으로 보는 2.26 사건' 인터뷰에서 가타쿠라 본인은 공동 음모설과 나가타 지시설을 모두 부정했다.
이 고소는 군법회의에서 각하되었으나, 2·26 사건에서 이소베는 음모설을 믿고 가타쿠라를 습격하여 복수했다. 육군사관학교 사건은 황도파 청년장교들의 결속을 강화했고, 1935년 8월 12일 아이자와 사건과 2·26 사건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4. 가족 관계
참조
[1]
웹사이트
Katakura Tadashi
http://kotobank.jp/w[...]
Kōdansha
2014-04-22
[2]
서적
目撃者が語る昭和史 第4巻 2.26事件 青年将校の蹶起から鎮圧、処刑まで
新人物往来社
[3]
서적
盗聴 二・二六事件
文藝春秋社
2007
[4]
문서
「未公開写真に見る2・26事件」
[5]
서적
日本人はなぜ戦争へと向かったのか 外交・陸軍編
新潮文庫
[6]
문서
[7]
문서
盗聴 二・二六事件
[8]
문서
盗聴 二・二六事件
[9]
서적
昭和史の軍人たち (文春学藝ライブラリー)
文藝春秋
[10]
간행물
日本の戦争指導におけるビルマ戦線—インパール作戦を中心に—
http://www.nids.go.j[...]
防衛研究所
2002
[11]
서적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日比谷政経会
1949
[12]
뉴스
片倉衷氏 死去=元陸軍少将
毎日新聞
1991-07-24
[13]
간행물
官報
1942-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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