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철 (1896년)
1. 개요
이원철(1896년)은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까지 천문학자, 기상학자, 교육자, 사회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수물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천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모교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 최초로 현대식 굴절망원경을 도입하는 등 천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문교부 기상국장, 초대 중앙관상대장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기상 업무의 기틀을 다졌으며, 한국기상학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또한 인하대학교 초대 학장,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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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기상학자 -
장동언
장동언은 서울대학교에서 대기과학 학위를 취득하고 기상연구관으로 공직에 입문하여 기상청 주요 보직을 거쳐 제16대 기상청 청장으로 임명된 대한민국의 기상학자이자 공무원이다. -
일제강점기의 과학자 -
리승기
리승기는 일제강점기에 비닐론 합성에 성공하고 해방 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장을 지냈으며, 북한으로 건너가 비날론 등 섬유 공업 발전에 기여하고 영변 원자력 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한 과학기술자이다. -
대한민국의 천문학자 -
장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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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천문학자 -
조경철
조경철은 '아폴로 박사'로 알려진 대한민국의 천문학자이자 과학 저술가로, 한국 천문학 대중화에 기여하고, 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과학계 발전에도 힘썼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소행성과 천문대에 이름이 명명되었다.
2. 생애
이원철은 1896년 경기도 양주군(현 남양주시 진접면)에서 태어났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아버지 이중억은 이원철이 6세 때 사망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보성중학교, 오성학교, 선린상업학교를 거쳐 1915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현 연세대학교 이과대학) 1회 입학생이 되었다. 1919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1월까지 모교의 전임강사로 재직했으며, 1921년 5월 30일부터는 허헌 등이 세운 오성강습소에서 수학, 이화학 과목을 가르치기도 했다.
1922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앨비언 칼리지(Albion College) 학부 4학년에 편입, 5개월 만에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해 6월 미시간 주립 대학교 천문학과에 입학하여 칼 루퍼스(Carl W. Rufus) 박사의 지도를 받으며 천문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1923년 9월 23일 종로중앙교회에서 수해 구제 모금을 할 때 1원을 기탁했다. 1923년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26년 6월 세페이드 변광성인 독수리자리 에타를 연구하여 한국인 최초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논문은‘Publications of the Observatory of the University of Michigan’에 게재되었고, 독수리자리 에타별은 ‘원철성(星)’이라는 별칭으로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 학력 |
|---|
| 1922년 앨비언 칼리지 학사 |
| 1923년 ~ 1926년 미시간대학교 천문학 전공 (이학 석·박사) |
1926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강사로 임용되었으며, 곧 교수로 승진하여 1938년까지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28년 한국 최초로 현대식 굴절망원경을 도입하여 천문학 교육과 연구 수준을 높였다. 연희전문학교 교수 재직 중, 경성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과학 강좌의 강사로 활동했다. 1935년 지도 교수였던 루퍼스 교수가 한국을 방문하여, 루퍼스의 《한국천문학사》(Astronomy in Korea) 저술을 도왔다.
일제 강점기에는 수양동우회 사건, 흥업구락부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등에 연루되어 두 차례나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1940년 창씨개명령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1942년 총독부가 그가 애지중지하던 망원경을 전시 물자로 징발해 갔다.
1945년 광복 후 미군정청 문교부 기상국장 겸 중앙관상대장과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중앙관상대장에 임명됐다. 인하공과대학 학장,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천문학계 발전에 기여했다.
2.1. 초기 생애와 학업 (1896-1922)
이원철은 1896년 경기도 양주군(현 남양주시 진접면)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중억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나 이원철이 6세 때 사망했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1908년 9월부터 1911년 2월까지 보성중학교를 다녔고, 1911년 2월 오성학교로 옮겨 1912년 3월 졸업하였다. 1912년 4월 선린상업학교에 진학하여 1914년 11월까지 다녔다. 1915년 4월 연희전문학교 수물과(현 연세대학교 이과대학) 1회 입학생이 되었다. 1919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1월까지 모교의 전임강사로 재직하며 교육 활동을 했다. 1921년 5월 30일부터는 허헌 등이 주도하여 세운 오성강습소에서 수학, 이화학 과목을 가르치기도 했다. 1922년, 더 깊은 학문 연구를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라 앨비언 칼리지(Albion College) 학부 4학년에 편입, 5개월 만에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2.2. 미국 유학 시절 (1922-1926)
1922년 1월 미국 미시간주에 있는 앨비언 칼리지(Albion college)에 학부 4학년생으로 편입, 5개월 만에 학사학위를 받았다. 1922년 6월에 미시간 주립 대학교 천문학과에 입학, 1910년대와 1930년대에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 와서 연희전문에서 천문학을 강의했던 칼 루퍼스(Carl W. Rufus) 박사의 지도를 받았다. 천문학 외에도 수학을 전공하였다.
1923년 9월 23일 종로중앙교회에서 서부지역 수해 구제 모금을 할 때 수재의연금 1원을 기탁했다.
1923년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26년 6월에 세페이드 변광성인 독수리자리 에타를 연구하여 이 별이 맥동변광성임을 정교한 분광학적 관측과 계산으로 밝혀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논문은‘Publications of the Observatory of the University of Michigan’에 게재되었다. 독수리자리 에타별은 이후 ‘원철성(星)’이라는 별칭으로 삼천리 등 언론에 의해 대서특필되었다.
| 학력 |
|---|
| 1922년 앨비언 칼리지 학사 |
| 1923년 ~ 1926년 미시간대학교 천문학 전공 (이학 석·박사) |
2.3. 교육 및 연구 활동 (1926-1945)
1926년 귀국하여 모교인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강사로 임용되었으며, 곧 교수로 승진하여 1938년까지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28년에는 한국 최초로 현대식 굴절망원경을 도입하여 천문학 교육과 연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연희전문학교 교수 재직 중, 경성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개설한 교양 강좌에도 참여하여 과학 강좌의 강사로 활동했다.
1935년 지도 교수였던 루퍼스(W. E. Rufus) 교수가 한국을 방문하여, 루퍼스의 한국 천문학 연구 보고서인 《한국천문학사》(Astronomy in Korea) 저술을 도왔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하며 수양동우회 사건, 흥업구락부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등에 연루되어 두 차례나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1940년 창씨개명령에도 굴하지 않았다. 1942년 총독부가 그가 애지중지하던 망원경을 전시 물자로 징발해 갔다.
2.4. 광복 이후 활동 (1945-1963)
1945년 광복 후 미군정청 문교부 기상국장 겸 중앙관상대장과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중앙관상대장에 임명됐다. 인하공과대학 학장,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천문학계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독수리자리 에타 별이 세페이드 변광성임을 밝혔다.
미군정 시기(1945-1948)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1948-1963)의 상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고.
2.4.1. 미군정 시기 (1945-1948)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연희전문학교 후생과장을 맡았다. 8월 17일 조선학술원 설립에 참여하여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9월 2일 미 군정 주둔 후, 미군정청 문교부 학무국 기상과장에 미군 대위 루카스 그라햄(Lucas Graham)이 임명되고, 이원철은 기상계장 겸 중앙기상대장직을 맡게 되었다. 9월 22일 경성측후소 업무를 인수인계받고, 10월 1일 인천 소재 중앙기상대를 접수하였다. 10월 2일 미군정에 관상대 복구 결정을 건의하여 승인받고, 조선총독부 기상대를 관상대로 개칭했다.
10월 15일 관상대의 부족한 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관상대 실습학교를 개설하여 중학교 이상 졸업자 35명을 선발, 천문학과 기상예보 과정을 가르치고 1946년 봄 1기생을 배출했다. 11월 16일 미군정청 문교부 학무국 기상과장이 되었으며, 중앙관상대장직을 겸직했다. 1945년 11월 연희전문학교 이학부에 기상과를 신설, 이학부장과 기상과장을 겸임했다.
1946년 4월 7일 미군정청 학무국 기상과가 문교부 기상국으로 승격되면서, 군정청 문교부 기상국장이 되었다. 동시에 중앙관상대장직을 겸하였다.
1947년 3월 관상대 직원 등을 중심으로 한국기상학회 창립에 참여,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당시 기록에 따르면 한국기상학회는 서울시 서대문구 송월동 1번지의 중앙관상대 내에 위치했으며, 회장은 이원철, 부회장은 서상문, 김진면이었다. 회원 수는 170명이었다.
1947년 9월 12일 재단법인 광동학원설립기성회의 초대 재단 이사로 선임되었다.
2.4.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8-1963)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문교부 산하 제1대 중앙관상대장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1961년 5월까지 중앙관상대장직을 맡으면서 기상기술원양성소를 설립하여 기상 요원을 훈련하고 현대적인 기상 관측 장비를 도입하는 등 대한민국의 기상 업무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었다. 이때 그는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전쟁 중에는 정상적인 기상 관측 업무가 수행될 수 있도록 노력했고, 전쟁 후에는 복구와 민간 항공기 기상 지원을 위해 김포국제공항측후소를 신설해 민간 항공기의 안전 운항에 기여하였다.
1952년부터 연희대학의 재단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했고, 연희대학과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대학 통합에 대학통합 합동위원으로 참여했다. 1953년 서울에서 휴전을 맞이하였다.
1954년 3월부터 1956년 12월까지 인하공과대학(현 인하대학교) 초대학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부터 1963년까지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었다. 1961년 5월부터 1962년 3월까지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을 역임하였다.
3. 사회 공헌
이원철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으며, 사후 그의 재산과 토지는 부인 김화순 여사에 의해 남양주 YMCA에 기부되어 사회에 환원되었다. 1976년 부인 김화순은 서울 갈월동 자택과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 금곡리 임야를 남양주 YMCA에 모두 기부하였다.
5. 경력
1926년 8월 31일 서울로 돌아와 모교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강사가 되고 곧 교수로 승진, 1938년까지 12년간 연희전문 수학물리과 교수 및 수학물리과 학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제자들을 길러냈다. 1928년에는 대학 구내에 한국 최초로 현대식 굴절망원경을 설치해 교육과 연구에 활용하도록 했고 이로 인해 연희전문 개교 당시부터 지속되어오던 천문학 강의가 더욱 내실 깊어질 수 있었다.
연희전문 수물과 교수로 활동하면서 경성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개설한 교양강좌에도 참여, 그 중 과학 강좌의 강사로 참여했다. 그는 YMCA 이사로도 활동했다.
1935년 그의 지도교수였던 루퍼스(W. E. Rufus) 교수가 조선을 방문, 루퍼스의 조선의 역대 천문학 관련 보고서 한국천문학사(Astronomy in Korea)의 저술에 도움을 주었다.
대표적인 반일인사이기도 했던 이원철 박사는 백낙준, 최현배 교수와 함께 수양동우회 사건, 흥업구락부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교수직을 두 번이나 박탈당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령이 내려졌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1928년 연희전문 졸업앨범에는 이원철은 연희전문학교에 소장하던 한 망원경 앞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사진이 실려있다. 하지만 그가 애지중지하던 이 망원경은 1942년 총독부가 전시물자로 징발 해가고 말았다.
1938년 5월 연희전문학교 학감이 되었으나 1938년 9월 사퇴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나서, 연희전문학교 후생과장이 되었다. 8월 17일 조선학술원의 설립에 참여하고 학술원 상임위원의 한 사람으로 피선됐다. 1945년 9월 2일에 미 군정 주둔 후, 미군정청 문교부 학무국 기상과장에 미군 대위 루카스 그라햄(Lucas Graham)이 임명되고 그가 군정청 학무국 기상과 기상계장(氣象係長) 겸 중앙기상대장직을 맡게 되었다. 9월 22일 경성측후소 업무를 인수인계받고 10월 1일 인천 소재 중앙기상대를 접수하였다. 10월 2일 미군정에 관상대 복구 결정을 건의하여 승인받고 조선총독부 기상대를 관상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10월 15일 관상대의 부족한 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관상대 실습학교를 개설하여 중학교 이상 졸업자 35명을 선발하여 천문학과 기상예보 과정을 이수시키고 46년 봄 1기생을 배출했다. 11월 16일 미군정청 문교부 학무국 기상과장이 되었으며, 중앙관상대장직을 겸직했다. 1945년 11월 연희전문학교 이학부에 기상과를 신설되자, 연희전문 이학부장과 기상과장도 겸임했다.
미군정청 학무국 기상과가 기구개편으로 1946년 4월 7일부터 문교부 기상국으로 승격되면서 군정청 문교부 기상국장이 되었다. 미군정청 기상국장이 되면서 다시 중앙관상대장직을 겸하였다.
1947년 3월 관상대 직원 등을 중심으로 한국기상학회의 설립, 조직에 참여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한국기상학회는 서울시 서대문구 송월동 1번지의 중앙관상대 내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회장은 이원철, 부회장은 서상문, 김진면이 맡고 있었다. 회원수는 170명에 달했다.
1947년 9월 12일 재단법인 광동학원설립기성회의 초대 재단 이사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문교부 산하 제1대 중앙관상대장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1961년 5월까지 중앙관상대장직을 맡으면서 그는 기상기술원양성소를 설립하여 기상요원을 훈련해 내고 현대적인 기상관측 장비를 들여오는 등 대한민국 기상업무를 본궤도에 올려 놓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자 피난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었다. 이때 그는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전쟁 중에는 정상적인 기상관측업무가 정상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노력했고, 전쟁 후에는 복구와 민간항공기 기상 지원을 위해 김포국제공항측후소를 신설해 민간항공기 안전운항에 기여했다.
1952년부터 연희대학의 재단 이사에 선임되어 활동했고, 연희대학과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대학 통합에 대학통합 합동위원으로 참여했다. 1953년 서울에서 휴전을 맞이하였다.
| 연도 | 경력 |
|---|---|
| 1926년 | 연희전문학교 강사(수학물리과) |
| 1926년 ~ 1938년 | 연희전문학교 교수(수학물리과), 연희전문학교 수학물리과 학과장 |
| 1945년 11월 ~ 1946년 4월 | 군정청 학무국 기상과장(氣象科長) 겸 중앙관상대 대장 |
| 1946년 4월 ~ 1948년 | 미 군정청 문교부 기상국장 겸 중앙관상대 대장 |
| 1947년 ~ | 한국기상학회 초대회장 |
| 1948년 8월 ~ 1961년 5월 | 문교부 산하 국립중앙관상대 초대대장 |
| 1954년 3월 ~ 1956년 12월 | 인하공과대학 초대학장 |
| 1952년 | 연희대학 재단 이사 |
| 1960년 ~ 1963년 |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 1961년 5월 ~ 1962년 3월 |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 |
6. 상훈
7. 가계
이원철에게는 족보에 실리지 않은 동생이 1명 더 있었다. 이 동생 이원장(李源藏)은 1944년 1월 11일 경성부 동대문구 돈암동 471-74번지에서 사망했으며, 유족으로는 딸 1명과 친형으로 그의 이름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