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노헤 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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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치노헤 효에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아오모리현 히로사키 번 출신이다.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76년 소위로 임관하여 세이난 전쟁,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 참전했다. 1915년 대장으로 진급하고 육군 군사 훈련 감찰관을 역임했으며, 1920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학습원 원장, 메이지 신궁 궁사, 제국 재향군인회 회장을 지냈다. 1931년 사망했으며, 묘소는 다마 영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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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헤 효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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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이치노헤 효에 |
일본어 이름 | 一戸 兵衛 |
출생일 | 1855년 8월 2일 |
출생지 | 아오모리현 |
사망일 | 1931년 9월 2일 |
사망지 | 도쿄 |
군사 복무 | |
소속 | 일본 제국 |
군종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876년 - 1920년 |
최종 계급 | [[파일:帝國陸軍の階級―肩章―大将.svg|50px]] 대장 |
참전 | 세이난 전쟁 청일 전쟁 러일 전쟁 |
훈장 | 금치훈장 (2등, 3등, 4등) 욱일장 (1등) 서보장 (1등) |
경력 | |
이후 활동 | 학습원 원장 |
2. 생애
이치노헤 효에는 1855년 히로사키 번(현재의 아오모리현)에서 사무라이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본 제국 육군에서 여러 요직을 거친 인물이다.
1876년 보병 제2연대 소위로 임관한 후, 세이난 전쟁에서 부상을 입었으나 대위로 진급하며 초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봉천 전투에도 참전했다.
1907년 중장으로 진급한 뒤, 일본 제17사단, 일본 제4사단, 일본 제1사단장을 차례로 지냈다. 1915년 군사 최고 회의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장으로 진급, 육군 군사 훈련 감찰관으로 일본 제국 육군 최고위직 중 하나에 올랐다. 1920년 은퇴했다.
군 은퇴 후 1920년부터 학습원 원장을, 1924년부터 메이지 신궁의 궁사를 역임했다. 1926년 일본 재향군인회 회장직을 맡았다. 1931년 9월 2일 사망 후 도쿄도 후추시 다마 묘지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이치노헤 효에는 1855년 히로사키 번(현재의 아오모리현)에서 사무라이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도오기주쿠를 졸업하고 1874년 육군 사관 생도로 육군 병학료에 입학했다. 1876년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보병 제2연대 소위로 임관했다.[1] 1877년 세이난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으나, 그 공로로 같은 해 5월 대위로 진급했다. 1878년 2월 제1보병연대로 전출되었다. 1880년 5월 중위로 진급하여 육군 교도단 소대장을 맡았다. 1883년 6월 대위로 진급하여 보병 제8연대 중대장, 1885년 5월 보병 제10여단 참모, 1887년 11월 보병 제12연대 부속을 거쳐 1888년 2월 소좌로 진급했다.1889년 3월 히로시마 진대보병 제11연대대대장으로 옮겨, 1894년 청일 전쟁에 참전했다. 성환 전투에서 오시마 혼성 여단의 선봉을 지휘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같은 해 중령으로 진급하여 일본 제5사단 평양 전투에 대대장으로 참전했다. 1895년 3월 보병 제21연대장에 취임하여 같은 해 7월 전역에서 귀환했다. 같은 해 8월 다시 제5사단 부관으로 취임하고, 11월에는 유수 제4사단 참모장으로 옮겼다.
1897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근위 제4연대 지휘관이 되었다. 이듬해 참모장으로 진급하여 일본 제6사단에 배속되었다. 1901년 5월 소장으로 진급하여 일본 제6사단 보병 제6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2. 2. 청일 전쟁 및 러일 전쟁
청일 전쟁에서 이치노헤는 1894년 7월 29일 성환 전투에서 오시마 혼성 여단의 선봉을 지휘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쳐 칭찬을 받았다. 이후 중령으로 일본 제5사단에서 대대장으로 평양 전투 (1894년 9월 15일)에 참전했다.[1] 청일 전쟁 당시 이치노헤는 후쿠시마 야스마사, 우에하라 유사쿠와 함께 선견대로 한반도에 도착했다. 항해 중 심한 풍랑으로 대대는 배멀미에 시달렸는데, 제5사단의 옛 동료 우에하라는 "이런 상태로 전쟁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험담했다. 이에 이치노헤는 분기하여 군도를 지팡이 삼아 부하들을 격려했지만, 선실로 돌아오자마자 구토했다는 일화가 있다. 조선 공사로부터 상륙 요청을 거부당하고 경성 입성도 막혔지만, 우에하라 등과 공모하여 해군 육전대와 교체하는 방식으로 입성에 성공했다. 경성까지의 길은 험난했고 선견대는 극도로 피폐해졌으나, 육전대보다 훨씬 큰 규모 덕분에 위안스카이는 경성에서 물러났다.1901년 5월, 이치노헤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일본 제6사단 보병 제6여단장에 임명되었다.[1] 러일 전쟁에서는 일본 제3군 참모로 복무하며 원수 오야마 이와오와 함께 봉천 전투에 참전했다.[1] 그의 명성을 알린 것은 여순 공방전이었다. 보병 제6여단장으로 참가한 그는 제1차 총공격에서 반룡산 동서 보루를 공격, 휘하의 오오우치 모리시즈 보병 제7연대장이 전사하는 격전 끝에 점령에 성공하며 일본군 중 유일하게 목표를 달성했다. 이어지는 제2차 총공격에서도 무명의 1보루(일본 측 호칭 "P보루")를 점령하는 공을 세워, 이 보루는 "이치노헤 보루"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이치노헤는 상급 사령부인 제3군 사령부의 작전 지도에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봉천 회전 후 제3군 참모장이 되어 작전 일지를 다시 읽고, 당시 사령부의 작전 지도가 타당했다고 술회했다.[4]
2. 3. 육군 최고위직 및 퇴역 후
이치노헤는 1915년 2월 군사 최고 회의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 대장이 되었다.[1] 1915년 12월, 육군 군사 훈련 감찰관으로서 일본 제국 육군 내 최고 세 직위 중 하나에 임명되어 1920년 6월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그 직을 수행했다.이후 1920년 5월부터 1922년 11월까지 학습원 원장을 역임했으며,[1] 1924년 8월에는 메이지 신궁 궁사에 취임했다. 1926년 2월부터 제국 재향군인회 회장도 겸임했다.[1] 그의 묘는 도쿄도 후추시에 있는 다마 묘지에 있다.
3. 청일 전쟁 참전 일화
청일 전쟁에서 이치노헤 효에는 선견대로서 후쿠시마 야스마사, 우에하라 유사쿠와 함께 한반도로 건너갔다. 항해 중 심한 풍랑으로 대대는 배멀미에 시달렸다. 제5사단의 옛 동료이자 친구인 우에하라는 "이런 상태로 전쟁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험담했고, 이에 이치노헤는 분기하여 창백한 얼굴로 군도를 지팡이 삼아 함내를 순시하며 부하들을 격려했다. 그러나 우에하라는 이치노헤가 선실로 돌아오자마자 구토했다고 회고한다.[2]
조선 공사는 이치노헤 부대의 상륙을 거부했고, 경성 입성도 거부당했다. 그러나 이치노헤는 우에하라 등과 공모하여 해군 육전대와 교체하는 방식으로 경성에 입성했다. 경성까지의 길은 험난했고 선견대는 극도로 소모되었지만, 육전대보다 훨씬 큰 규모 덕분에 위안스카이는 경성에서 물러났다.[2]
4. 여순 공방전에서의 용전
러일 전쟁 여순 공방전에서 보병 제6여단장으로 참전한 이치노헤 효에는 제1차 총공격에서 반룡산 동서 보루를 공격, 오오우치 모리시즈 보병 제7연대장이 전사하는 격전 끝에 점령했다. 이는 일본군 중 유일한 목표 점령이었다.
이어진 제2차 총공격에서도 무명의 1보루(일본 측 호칭 "P보루")를 점령하는 공을 세웠고, 이 보루는 그의 이름을 따 "이치노헤 보루"로 불리게 되었다.
이치노헤는 당초 상급 사령부인 제3군 사령부의 작전 지도에 회의적이었으나, 봉천 회전 이후 제3군 참모장이 되어 당시 작전 일지를 다시 읽고 사령부의 작전 지도가 타당했음을 인정했다고 전후 술회했다.[4]
5. 수상 내역
수여 내용 | 수여일 | 비고 |
---|---|---|
훈5등 쌍광욱일장 | 1885년 (메이지 18년) 4월 7일 | [18] |
대일본제국헌법 발포 기념장 | 1889년 (메이지 22년) 11월 29일 | [19] |
훈4등 서보장 | 1893년 (메이지 26년) 5월 26일 | [20] |
공4급 금계훈장 | 1895년 (메이지 28년) 10월 18일 | [5][21] |
욱일소수장 | 1895년 (메이지 28년) 10월 18일 | [5][21] |
메이지 27, 28년 종군기장 | 1895년 (메이지 28년) 11월 18일 | [5][22] |
훈3등 서보장 | 1899년 (메이지 32년) 5월 9일 | [23] |
훈2등 서보장 | 1905년 (메이지 38년) 11월 30일 | [24] |
공2급 금계훈장 | 1906년 (메이지 39년) 4월 1일 | [16][25] |
욱일중광장 | 1906년 (메이지 39년) 4월 1일 | [16][25] |
메이지 37, 38년 종군기장 | 1906년 (메이지 39년) 4월 1일 | [16][25] |
훈1등 서보장 | 1913년 (다이쇼 2년) 11월 28일 | [16] |
다이쇼 3, 4년 종군기장 | 1915년 (다이쇼 4년) 11월 7일 | [26] |
대례 기념장 | 1915년 (다이쇼 4년) 11월 10일 | [27] |
욱일대수장 | 1918년 (다이쇼 7년) 11월 29일 | [16] |
다이쇼 3년 내지 9년 전역 종군기장 | 1920년 (다이쇼 9년) 11월 1일 | [28] |
욱일동화대수장 | 1931년 (쇼와 6년) 9월 2일 | [17] |
1등 문호훈장 | 외국 훈장 착용 허가 |
6. 가족 관계
항목 | 내용 |
---|---|
양자 | 이치노헤 히로시 (구로바네번주 오제키 마스토쿠의 아들): 육군 소좌, 황족 부관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부관) |
손녀 | 오노데라 유리코: 번역가, 이치노헤 히로시의 딸, 오노데라 신 육군 소장의 아내 |
인척 | 나카타 시게하루: 종교가, 일본 호리네스 교단의 창설자, 아내의 사촌 나카타 치요의 삼남 |
7. 평가 및 비판
이치노헤는 처음에 상급 사령부인 제3군 사령부의 작전 지도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봉천 회전 이후 제3군 참모장이 되어 당시 작전 일지를 다시 읽고, 사령부의 작전 지도가 타당했음을 납득했다고 전후에 술회했다.[4]
7. 1. 긍정적 평가
이치노헤 효에가 러일 전쟁의 여순 공방전에서 보병 제6여단장으로 참전하여 무명을 세상에 알렸다. 제1차 총공격에서 반룡산 동서 보루를 공격, 휘하의 오오우치 모리시즈 보병 제7연대장이 전사하는 격전 끝에 점령에 성공했다. 이는 일본군 중 유일한 목표 점령이었다.이어진 제2차 총공격에서도 무명의 1보루(일본 측 호칭 "P보루")를 점령하는 공을 세웠고, 그 공로로 이 보루는 "이치노헤 보루"라고 불리게 되었다.[4]
참조
[1]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第5版
三省堂
[2]
뉴스
『東京朝日新聞』
1926-10-24
[3]
웹사이트
大正15年~ | 球場史 | 明治神宮野球場
http://www.jingu-sta[...]
[4]
간행물
歴史街道2011年11月号
2011-11
[5]
기타
陸軍大将一戸兵衛特旨叙位ノ件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6]
관보
『官報』第34号「叙任」
1883-08-0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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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2104号「叙任及辞令」
1890-07-0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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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3521号「叙任及辞令」
1895-03-2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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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4302号「叙任及辞令」
1897-11-0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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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5475号「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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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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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7028号「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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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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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7640号「叙任及辞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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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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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第2974号「叙任及辞令」
1893-05-31
[21]
관보
『官報』第3693号「叙任及辞令」
1895-10-19
[22]
관보
『官報』第3900号・付録「辞令」
1896-06-30
[23]
관보
『官報』第4754号「叙任及辞令」
1899-05-10
[24]
관보
『官報』第6727号「叙任及辞令」
1905-12-01
[25]
관보
『官報』号外「叙任及辞令」
1906-12-30
[26]
관보
『官報』第1127号「叙任及辞令」
1916-05-06
[27]
관보
『官報』第1310号・付録「辞令」
1916-12-13
[28]
관보
『官報』第2612号「叙任及辞令」
1921-04-1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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