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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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성왕후는 조선 인종의 왕비로, 반남 박씨 박용과 문소부부인 의성 김씨의 딸이다. 1524년 왕세자 이호(인종)와 혼인하여 세자빈이 되었고, 인종 즉위 후 왕비가 되었다. 인종 사후에는 공의왕대비가 되었으나 자녀는 없었다. 1577년 사망하기 전 선조에게 을사사화 관련자들의 신원을 요청하였고, 그 유언에 따라 신원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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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왕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존호 | 공의(恭懿) |
휘호 | 효순(孝順) |
시호 | 인성(仁聖) |
묘호 | 없음 |
능묘 | 효릉(孝陵) |
능묘 위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 |
생애 | |
출생일 (양력) | 1514년 10월 28일 |
출생일 (음력) | 정덕 9년 10월 1일 |
출생지 | 미상 |
사망일 (양력) | 1578년 1월 16일 |
사망일 (음력) | 만력 5년 11월 29일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금성부원군 박용 |
어머니 | 문소부부인 의성 김씨 |
배우자 | 인종 |
자녀 | 없음 |
가계 | |
본관 | 반남 박씨 |
왕비 책봉 | |
책봉일 (음력) | 가정 23년 11월 20일 (1544년 11월 28일) |
폐위 | 없음 |
왕대비 책봉 | |
책봉일 (음력) | 가정 24년 7월 6일 (1545년 8월 8일) |
별칭 |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 · 공의전(恭懿殿) |
2. 생애
1514년 반남 박씨 가문에서 박용과 그의 세 번째 부인 의성 김씨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박용은 첩에게서 두 아들을 두었지만, 직계 가족 중 사촌을 양자로 삼았다. 박씨는 증조모를 통해 이색의 고손녀이기도 했다.
1524년 10세의 나이로 9세의 왕세자 이호(훗날의 인종)와 혼인하여 세자빈이 되었다. 그해 여름, 아버지가 사망했다. 1544년 남편 인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고, 경복궁의 자선당에서 교태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1545년 인종이 사망하면서 왕대비가 되었고, 인종의 이복 동생이 명종으로 즉위했다. 인종과 인성왕후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1567년 명종마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의 이복 조카인 선조가 왕위를 이었다.
1578년 경복궁 교태전에서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2. 1. 탄생과 세자빈 책봉 (1514년 ~ 1524년)
1514년(중종 8년) 반남 박용과 그의 두번째 부인인 문소부부인 김씨의 딸로 태어났다. 1524년(중종 18년) 10세의 나이로 9세의 왕세자 이호(훗날의 인종)와 결혼하여 왕세자빈에 책봉되었다.[1] 당시 아버지 박용이 병을 앓았기 때문에 세자와 세자빈의 가례를 앞당기는 일과 관련해 중종실록의 사관이 이를 비판하였다. 세자빈 책봉 이후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에서 지냈으며 인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그해 여름, 그녀의 아버지가 사망했다.2. 2. 왕비와 왕대비 시절 (1544년 ~ 1545년)
1544년 인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고 경복궁 자선당에서 교태전(交泰殿)으로 처소를 옮겼다.[2] 1545년 인종이 승하하고 인종의 이복 동생인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대비가 되었다. 1547년 '''공의'''(恭懿)의 존호를 받아 공의왕대비가 되었다.[2]2. 3. 을사사화와 신원 요청 (1545년 ~ 1577년)
1577년(선조 10년) 11월 29일, 인성왕후는 경복궁 교태전에서 승하하였다. 인성왕후는 죽기 전에 을사사화 당시 피해를 입은 인종의 외숙부인 윤임을 비롯해 계림군과 기타 대윤들을 신원해 줄 것을 선조에게 호소하였다. 이로 인해 을사사화 때 훈신들의 공적이 삭제되고 화를 입은 자들이 대거 신원되었다.[3]인성왕후의 병이 위독해지자 선조는 명종이 한 일이라며 훈신 삭제를 거부했다. 그러자 인성왕후는 '견딜 수 없다'며 통곡했고, 선조는 사가에서 살고 싶다며 괴로워했다. 인성왕후는 죽어가면서 자신이 죄인이 되었다고 탄식했고, 선조가 훈신 삭제를 약속하자 눈을 감았다. 다음날 인성왕후는 선조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승하하였다.
乙巳年|을사년중국어(1545년)의 공신을 삭제하고, 윤임 · 계림군 등의 관작을 회복하라는 명을 내렸다.
당시 궁인들은 대부분 을사원종공신의 친척들이었으므로, 인성왕후가 공신을 삭제하려는 것을 원망하여 선조에게 인성왕후의 병세가 심하지 않다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하루는 선조가 문안하고, ‘녹훈(錄勳)한 것은 선조(명종)의 중대한 일이므로 고치기 어렵습니다. 외정(外廷)의 의논을 따르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니, 인성왕후가 '견딜 수 없다(不堪)'고 하며, ‘국가의 큰 일을 어찌 미망인(未亡人)을 위해서 고치겠소.’ 하였다.
선조가 물러나려는데 인성왕후가 통곡하니, 선조는 자리에 앉아 괴로워하며, ‘녹봉을 받으며 편안히 살 수 있었는데 불행히 난처한 일을 만났다.’ 하였다.
인성왕후가 위독해져, ‘나는 지하(地下)에서도 죄명(罪名)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고 숨을 거두려 하자, 궁인이 선조에게 알렸으나 구할 수 없었다. 중전도 와서 함께 울었다.
선조가 인성왕후에게, ‘녹훈을 삭제할 것이니 안심하고 병을 조리하소서.’ 하니, 인성왕후는 기뻐하며 눈이 감겼다.
선조가 물러가자 다시 깨어나, ‘선조의 은혜에 보답할 바를 모르겠소.’ 하였다. 다음날 인성왕후는 승하하였다.
2. 4. 사망 (1577년)
1577년(선조 10년) 11월 29일, 경복궁 교태전에서 승하하였다. 인성왕후는 죽기 전에 을사사화 때 피해를 입은 인종의 외숙부 윤임을 비롯한 계림군 등 대윤들을 신원해줄 것을 선조에게 호소하였다. 이로 인해 을사사화 때 훈신들의 공적이 삭제되고 화를 입은 자들이 대거 신원되었다.[3]己亥|기해중국어년(1577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인성왕후의 병세가 위중했음에도 궁인들 대부분이 을사사화 원종공신의 친척들이었기에, 선조에게 왕후의 병세가 위중하지 않다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하루는 선조가 문안 인사를 드리고 뵙기를 청하자, 인성왕후는 '견딜 수 없다'고 하며 국가의 큰일을 미망인을 위해 가벼이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선조는 물러나와 왕후의 통곡 소리를 듣고 슬퍼하며, 자신이 사가에 있었다면 편안히 살았을 것이나 불행히도 왕위에 올라 난처한 일을 겪는다고 한탄하였다. 며칠 뒤, 인성왕후는 자신이 죽어서도 죄명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 탄식하며 승하하였다. 선조는 왕후에게 녹훈을 삭제할 것이니 안심하고 병을 조리하라 하였고, 왕후는 기뻐하며 눈을 감았다. 이후 인성왕후는 다시 깨어나 선조에게 감사를 표하고 다음날 승하하였다.[3]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조부 | 박치(朴䎩) | 1440년 ~ 1499년 | |
조모 | 창녕 성씨 | ? ~ ? | [4] |
외조부 | 김익겸(金益謙) | ? ~ ? | |
외조모 | 의령 남씨 | ? ~ ? | [5] |
아버지 | 금성부원군 박용 | 1468년 ~ 1524년 | |
어머니 | 문소부부인 의성 김씨 | 1490년 ~ 1550년 | |
남편 | 인종 | 1515년 ~ 1545년 | |
자녀 | 없음 |
4. 평가
(요약 및 참조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평가' 섹션에 들어갈 내용을 구성할 수 없습니다.)
5. 기타
인성왕후가 사망한 해인 1578년(선조 11년)에 선조는 인성왕후가 평소 투기하지 않는 성품을 지녔다고 칭찬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교서를 내렸다.[1]
"아아! 슬프다. 왕비가 평소에 투기하지 않는 어진 성품을 지녔으니,
종사(宗社)와 신민(臣民)들이 모두 복을 받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가?
생각건대 내가 부덕한 탓으로 아름다운 배필을 잃었으니,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어찌 다 표현하겠는가?
이에 유사(有司)로 하여금 상장(喪葬)에 관한 여러 가지 일을 상고하여 거행하게 하라."
聖性不妬 宗社臣民 皆以受福 豈意暴薨|성성부투 종사신민 개이수복 기의폭훙중국어
5. 1. 등장 작품
참조
[1]
서적
중종실록
1524-03-06
[2]
서적
명종실록
1547-09-21
[3]
서적
선조수정실록
1577-11-01
[4]
문서
영춘현감 성효원의 딸
[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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