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윤임은 1487년에 태어나 1545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중종반정 공신으로 장경왕후의 오빠이며, 인종 즉위 후 좌찬성 등을 지냈다. 을사사화로 인해 유배 후 사사되었으나, 선조 때 신원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87년 출생 - 호조 우지쓰나
호조 우지쓰나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오다와라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간토 지방의 패권을 다졌으며, 토지 검사 실시 등 정책을 추진하고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재건 사업을 주도하다가 사망했다. - 1487년 출생 - 이스마일 1세
이스마일 1세는 사파비 왕조의 창시자이자 첫 번째 샤로, 키질바시 부족의 지지를 받아 사파비 제국을 건국하고 시아파를 국교로 선포했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는 등 격렬한 생애를 살았고 시와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아제르바이잔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 을사사화 관련자 - 이황
이황은 16세기 조선의 유학자로, 주자학을 발전시키고 영남학파를 형성했으며,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의 저서를 남기고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으며, 만년에 도산서당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다 문묘에 종사되었다. - 을사사화 관련자 - 윤원로
윤원로는 조선 중기 문정왕후의 친척이자 윤원형의 형으로, 급변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부침을 겪으며 윤임 등과의 갈등, 을사사화 연루, 동생 윤원형과의 정쟁 끝에 사사된 인물이다. - 1545년 사망 - 인순공주
인순공주는 조선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로, 명종의 친동생이지만 어린 나이에 요절하여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묻혔으며, 명종 때 명복을 빌던 사찰 혁파 상소가 있었다. - 1545년 사망 - 셰르 샤 수리
셰르 샤 수리는 파리드 칸이라는 본명으로 호랑이를 죽여 '셰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수르 왕조를 세우고 무굴 제국을 무너뜨린 인도의 통치자로, 화폐 개혁과 도로망 정비 등 다양한 개혁을 통해 인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윤임 | |
---|---|
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윤임 |
한자 이름 | 尹任 |
로마자 표기 | Yun Im |
본관 | 파평 윤씨 |
작위 | 파은군 |
생애 | |
출생 | 1487년 |
사망 | 1545년 |
활동 | |
직업 | 조선의 무신 조선의 정치인 |
주요 활동 | 을사사화 관련 인물 |
2. 생애
윤임(尹任)은 1487년(성종 18년) 7월 26일 경기도 파주군에서 파평 윤씨 윤여필(尹汝弼)과 박중선(朴仲善)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희왕후는 윤임의 증대고모 할머니였고,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 가계였다.
어려서부터 풍채가 좋고 위엄이 있었으며,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극진히 모셨다. 첩으로 기생 출신 매향을 두었는데, 임백령의 정인이었던 매향을 첩으로 삼아 임백령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1]
1506년 중종 반정에 가담하여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 3등 훈호를 받았다. 누이동생이 장경왕후가 되었으나 일찍 사망했고, 먼 일족인 문정왕후가 새 왕비가 되었다. 1512년(중종 6년) 무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523년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일본군과 싸우다가 패전하여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후 복직하여 병조참의, 승정원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인종이 왕세자 시절, 문정왕후가 명종을 낳자 중종은 명종을 총애하였다. 윤임은 병약한 세자를 염려하여 김안로와 함께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틈이 생겼다. 1544년(인종 1년) 중종 사후 인종이 즉위하자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가 되었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사망하면서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를 일으킨 윤원형 일파에 의해 제거되었다. 경상남도 남해로 유배가던 중 충청북도 충주에서 사약을 받고 향년 58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아들 3명도 함께 사형당하였다.
1567년(명종 22년) 사면되고, 1577년(선조 10년) 신원, 복관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아들 윤흥신의 전공으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관상감사에 특별 증직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1487년(성종 18년) 7월 26일 경기도 파주군에서 파평 윤씨 영돈녕부사 파원부원군 윤여필(尹汝弼)과 적개정난익대공신 판돈령부사 평양군이며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박중선(朴仲善)의 딸 순천부부인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세조비 정희왕후는 증조할아버지 윤사균의 누이동생으로 증대고모 할머니였다. 고조부 윤번은 좌의정, 판중추부사를 지내고 파평부원군에 봉작되었으며 사후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다. 한편 종증조부 윤사흔은 후에 윤지임의 증조부가 되고, 윤원형, 윤원로 5형제와 문정왕후의 5대조가 된다. 고려 태사 윤신달의 18대손이며 문하시중 윤관의 14대손이다. 윤임의 집안은 무관 가계로 그의 삼촌인 윤여해(尹汝諧) 역시 무신이었다.
증조부 윤사균은 정난공신과 좌익공신으로 좌의정, 판공조사,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영평군에 봉작되었다. 할아버지 윤보(尹甫)는 공조참판을 지냈고 파릉군(坡陵君)에 봉해졌는데, 후일 손녀 장경왕후의 현달로 아버지 윤여필이 영돈녕부사에 제수되면서 증 영의정 파릉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삼촌 윤여해는 충청도수군절도사, 충청도병마절도사, 함경도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할머니 전주이씨는 효령대군 이보의 다섯째 아들인 영천군 이정(永川君 李定)의 딸로, 효령대군의 외5대손이 된다.
어머니 순천부부인 박씨는 적개공신, 정난공신, 익대공신으로 판돈녕부사 평양군을 지내고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박중선의 딸이다. 중종 반정 공신인 박원종은 그의 외삼촌이었고, 월산대군부인 승평부부인 박씨는 그의 큰 이모였으며, 예종의 차남 제안대군은 그의 이모부로, 작은 이모가 제안대군의 후처였다.
2. 2. 청소년기
그는 어려서부터 풍채가 좋고 위엄이 있었는데, 김상용이 쓴 신도비문에 의하면 그는 일찍부터 '모습이 준엄하고 기국이 쓸 만하였다'고 한다.[1]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 거처하는 곳에 위연을 설치하고 생시와 마찬가지로 모셨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손수 제철 음식을 올렸고 병이 들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다.[1]
그는 이보의 딸 여흥이씨와 결혼하였는데, 이보의 다른 딸은 후에 윤원개의 아내가 된다.[1] 집안 족보상 9촌 조카인 윤원개가 처제의 남편이 된 것이다. 윤원개의 여동생이 문정왕후이고, 윤원개의 다른 동생 윤원량의 딸이 윤임의 외조카 인종의 후궁이 된다.[1]
신도비문에 의하면 그는 여러 명의 첩을 두었는데,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 처첩이 비록 많았지만 교태를 부리거나 투기하는 여인이 없었다고 한다.[1] 그러나 첩 중 기생출신 매향은 임백령의 정인이었으나 자신의 첩으로 삼음으로서 그와 갈등하게 된다.[1]
2. 3. 중종반정과 관료 생활
누이동생 윤씨가 진성대군의 후궁이 되었다. 그 뒤 윤임은 충의위(忠義衛)에 입대해 있다가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출사, 여러 벼슬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승평부부인이 연산군에게 겁탈당하고 자결하자 외삼촌인 박원종, 사돈인 홍경주[5], 연산군에 의해 축출된 사림파 정치인 성희안, 유순정 등과 모의, 1506년(연산군 12년) 박원종, 홍경주 등과 같이 거병, 연산군을 몰아내는데 가담하였다.중종 반정이 성공한 이후 중종으로부터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 3등 훈호를 받았다. 이후 중종의 후궁으로 들어간 누이동생은 폐출된 단경왕후를 대신하여 왕비 장경왕후가 되었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은 지 얼마 후에 바로 사망했고, 먼 일족으로 9촌 조카가 새 왕비로 책봉되었다(문정왕후). 문정왕후의 친정아버지 윤지임은 그의 8촌 형이었다.[6]
1512년(중종 6년) 무과에 급제, 오위도총부도사, 사복시첨정을 지냈다. 1516년(중종 11년)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이 되었다가 관직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부정이 되었다며 사간원이 논박했으나 중종이 이를 듣지 않았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사복시정(正)이 되었다가 통정대부로 특별 승진하여 경원부사(慶源府使)로 부임하였다. 1520년 아버지 윤여필의 병세가 위중하자 해임되어 되돌아왔다. 그 뒤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였다. 중종은 그의 아버지 윤여필이 고령인 것을 감안하여 그가 원지의 외직으로 부임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부임하였다.
1523년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침략한 일본군과 싸우다가 패전하여,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곧 삭탈관직당하고 그해 7월 경기도 화량(花梁)에 병사(兵士)로 충군되기도 하였다. 뒤에 복직하여 남양부사가 되고, 1526년 중추부첨지사를 거쳐 병조참의가 되었다. 1528년(중종 22년) 본부인 여주이씨가 세상을 떠나 1529년 2월 고양군 남면 향동에 장사지내고, 병마절도사 곽한(郭翰)의 딸과 재혼하였다.
그 뒤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전출되었다가 병조참의, 승정원좌부승지를 거쳐 1531년 3월 우승지가 되고, 그해 4월 경상좌도 병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2. 4. 소윤과의 갈등과 을사사화
일찍이 인종이 왕세자로 있을 때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명종을 낳자 중종은 이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생모도 일찍 여읜데다 병약하였고, 윤임은 그것을 염려하였다. 김안로가 정권을 잡았을 때 윤임은 김안로와 함께 동궁(인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틈이 생겼다. 그 후 윤원형 일파는 윤임이 경원대군(명종)을 해치려 한다는 말을 퍼뜨려 모함했으며, 윤임은 또 윤원형 형제가 인종을 해치려 한다는 설을 조작하여 대윤과 소윤간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중종은 불문율에 부치기로 하고 이들의 갈등을 중재하였으나, 대윤과 소윤의 알력은 가라앉지 않고 계속되었다.1544년(인종 1년)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윤임은 형조 판서를 거쳐 파은군에 봉작되고,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이어 윤원로, 윤원형을 파직, 조정에서 축출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자녀 없이 죽으면서 경원대군을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신도비문에 의하면, 당시 그는 경원대군의 즉위를 앞장서서 지지했다 하며, '형이 죽으면 아우가 대신한다는 의리를 받들어 조정에 맨 먼저 아뢰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인심이 비로소 일이 정해져서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기를 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했으므로 문정왕후가 대신 정사를 돌보았다. 곧이어 그는 판돈녕부사 겸 훈련원사(判敦寧府事 兼 知訓鍊院事) 로 전임되었고, 이에 크게 세력을 얻은 윤원형은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을 제거하였다. 이때 사림파인 유관과 유인숙 역시 그의 당으로 몰아 제거하였다.
2. 5. 사후
1545년 8월 이기 등의 탄핵으로 유배령을 받고 경상남도 남해로 유배가던 중 8월 28일 사사령(賜死令)이 떨어진다. 8월 30일 배소로 가던 중 충청북도 충주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58세였다. 당시 성인이던 그의 아들 흥인(興仁)·흥의(興義)·흥례(興禮) 등 3명도 함께 사형당하였다. 장남 윤흥인은 무과에 급제하여 정랑, 첨정을 지냈고, 윤흥의는 생원이었으며 윤흥례는 당시 선공감감역이었다.그의 다른 누이는 계성군(성종의 서자)의 양자가 된 계림군의 생모로, 이 인연으로 그가 계림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들 중 윤흥신과, 나이 어린 서자들, 장남 윤흥인의 세 아들만은 유모와 하인들에 의해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밖에 그의 손자로 윤흥인의 아들 윤호는 중종의 외손녀사위라는 이유로 화를 모면하였다.
숙부 윤여해도 연좌되어 유배당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윤여필은 80세 넘은 고령이고 장경왕후의 친정아버지라는 이유로 처벌은 면하였다. 또한 장남 윤흥인은 그와 같이 사형당했지만 중종과 경빈박씨의 딸 혜정옹주의 사위인 윤호 역시 옹주의 사위라는 이유로 화를 모면하였다. 이때 기적적으로 피신한 아들들 중 윤흥신은 후에 임진왜란 당시 참전했다가 전사한다.
을사사화와 중종, 명종조의 권신들의 권력농단에 대해 그에게도 책임이 있느냐 없느냐는 논란이 되었다. 퇴계 이황(李滉)은 "사직(社稷)에 대한 죄가 없지 않다"며 역시 비판하였으나, 이이는 "임은 죄가 없다"고 하여 평가가 엇갈리기도 했다. 고인의 유해는 고양군 남면 향동동 손좌건향의 언덕에 매장된 본처 여흥이씨와 함께 합장되었다.
묘는 다른 곳에 매장했다가 복권 후 1590년(선조 23년) 윤임과 전부인 여흥이씨 묘를 이장하면서 윤임을 가운데 묻고 부인을 좌·우에 함께 묻었다. 경기도 고양군 남면 향동리(현,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239-7번지)에 있다. 1567년(명종 22년) 그의 자손들은 사면(赦免)되고, 선조 즉위 후 1570년에는 윤임의 두 아들이 복권되고 적몰된 가산을 돌려받았다. 1577년(선조 10년)에 신원, 복관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아들 윤흥신이 전사하면서 전공으로 증 병조참의로 추증되었고, 그도 추은(推恩)으로 후에 다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관상감사에 특별 증직되었다.
1589년(선조 22) 후처인 현풍곽씨가 아들 윤흥신의 임지인 서산군에서 사망하자 그해 8월 남면 향동의 오좌자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1590년(선조 23) 10월 윤임과 전부인의 묘를 어머니 순천부부인 박씨 묘 아래로 천장하면서 그를 가운데에 묻고 부인은 좌우에 매장하였다. 그의 묘소 위에는 어머니 순천부부인 순천박씨의 묘소가 있고, 그의 묘소 아래에는 모친의 몸종의 묘가 있다.[8] 아들보다 오래 살았다는 어머니 순천 박씨 묘가 몸종 묘와 함께 있다. 평생을 수족같이 따랐던 정성이 지극하여 후손들이 특별히 몸종 사후 위 아래로 매장했다고 한다.[8] 드문 묘제라 한다.[8]
후에 임진왜란에 참여한 아들 윤흥신(尹興信)이 공을 세우고 전사하여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증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므로, 원종공신의 아버지에게는 1계급 특진되는 전례에 따라 윤임에게도 관작이 추증되어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 관상감사에 추증된 것이다. 1606년(선조 36년) 8월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최립이 글을 짓고, 김현성이 글씨를, 김상용이 전서를 찬하였다. 뒤에 파은군(坡恩君)에 추봉되었다.
3. 가족 관계
아버지 | 파원부원군 윤여필(尹汝弼, 1466년 ~ 1555년)[11] |
---|---|
어머니 | 순천부부인 순천 박씨(順天府夫人 順天 朴氏, ? ~ 1498) - 박중선의 딸 |
누나 | 윤씨(1485 ~ ?) |
매형 | 덕풍군 이이(德豊君 李恞) -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서자 |
누이 | 팔계군 이정(八溪君 李浄)의 부인 |
여동생 | 윤천덕(尹千德, 1488 ~ ?) |
매제 | 강릉 김씨 김혼(金渾) |
여동생 |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 ~ 1515) |
매제 | 조선 11대 국왕 중종 |
여동생 | 고양부정 이억손(高陽副正 李億孫)의 처 |
이복 여동생 | 이옥춘(李玉春, 1518 ~ ?) |
매제 | 방웅(方雄) |
정부인 | 증 정경부인 여주 이씨(? - 1528년), 첨추 이보(李俌)의 딸 |
장남 | 윤흥인(尹興仁, 1516 ~ ?) |
며느리 | 순흥 안씨 - 판관(判官) 증 찬성(贈 贊成) 안세형(安世亨)의 딸 |
손자 | 윤경, 윤호, 윤발(尹 玉+發, 윤흥례에게 출계) |
손녀, 손녀사위 | 윤씨 & 심광보, 윤씨 & 임응우 |
차남 | 윤흥의(尹興義, 1519 ~ ?) |
며느리 | 청주 한씨 - 부사 한경종(韓景琮)의 딸 |
손녀, 손녀사위 | 윤씨 & 이견용, 윤씨 & 구사민 |
3남 | 윤흥례(尹興禮) |
며느리 | 남원 양씨 - 현감(縣監) 양윤온(梁允溫)의 딸 |
손자 | 윤발 (생부 윤흥인) |
장녀 | 윤거물(尹巨勿, 1521 ~ ?) |
사위 | 성주 이씨 이덕응(李德應) |
차녀 | 윤정숙(尹貞淑, 1526 ~ ?) |
사위 | 광주 이씨 이홍윤(李洪胤) |
계부인 | 증 정경부인 현풍 곽씨(1517년 - 1589년, 병마절도사 곽한(郭翰)의 딸) |
4남 | 윤흥지(尹興智, 1536 ~ ?) |
며느리 | 반남 박씨 - 만호(萬戶) 박세홍(朴世弘)의 딸 |
손자 | 윤침 |
5남 | 윤흥신(尹興信, 1540 ~ ?) |
며느리 | 평산 신씨 - 별좌(別坐) 신효성(申孝誠)의 딸 |
손자 | 윤성(尹珹) 윤서 |
6남 | 윤흥충(尹興忠, 1545 ~ ?) |
며느리 | 전주 이씨 - 영원감(永原監) 이의수(李義壽)의 딸 |
측실 | 김옥(金玉) - 양민 출신 |
7남(서자) | 윤흥효(尹興孝, 1538 ~ ?) |
서손자 | 윤종 |
첩 | 매향(梅香) - 기생 출신 |
8남(서자) | 윤흥제(尹興悌, 1540 ~ ?) |
서손자 | 윤상 |
첩 | 종이(終伊) - 매부 덕풍군의 노비 출신 |
측실 | 덕남(德南) - 노비 출신 |
3녀(서녀) | 윤수환(尹守環, 1543 ~ ?) |
사위 | 김현량(金賢良) |
4. 평가와 비판
최립이 지은 신도비문에 의하면 '옷차림은 검소하고 악을 미워하고 선을 선양하는 것으로 집안을 이끌었으며, 거문고와 책을 두어 마치 문인 학사의 거처 같았다' 한다.[8] 또한 무인임에도 힘자랑을 함부로 하지 않고 선비들을 우대하였고 한미한 친족을 인으로 보살폈다고 한다.
윤임 자신이 청렴하였고, 사림인 유관, 유인숙 등과도 친하게 지낸 덕에 훈척이었음에도 특별히 선조 즉위 후 복관될 수 있었다. 그러나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율곡 이이는 그가 '죄가 없다.'고 하였고 퇴계 이황은 그가 '사직에 대해 죄가 없지 않다.'고 평가하였다.
5. 관련 작품
다음은 윤임과 관련된 작품들이다.
5. 1. 드라마
참조
[1]
웹사이트
Yun Im
http://100.naver.com[...]
[2]
논문
윤임 (尹任) Yun Im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11-29
[3]
웹사이트
乙巳の士禍
https://kotobank.jp/[...]
[4]
간행물
同禍錄
[5]
문서
딸이 진성대군(후일의 중종)의 소실이었다.
[6]
문서
8촌은 1971년 가정의례준칙 제정 이후 현재에도 법적 친족으로 간주된다.
[7]
웹인용
윤임
https://archive.toda[...]
2012-07-23
[8]
웹사이트
http://search.nate.c[...]
[9]
문서
중종실록 52권, 중종 19년 10월 27일 무오 1번째기사 1524년 명 가정(嘉靖) 3년 헌부가 정원의 파직을 청하고, 이현령의 일이 온편치 못함을 아뢰다
[10]
문서
중종실록 53권, 중종 20년 2월 9일 무술 1번째기사 1525년 명 가정(嘉靖) 4년 헌부에서 법사를 무시한 이보를 파직하고 중죄로 다스릴 것을 건의하다
[11]
문서
80세 이상의 고령이라 귀양은 면하였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