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양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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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입헌양정회는 1923년 다나카 지가쿠에 의해 창설된 일본의 사회 운동 조직으로, 니치렌 불교와 팔굉일우 사상을 이념적 기반으로 삼았다. 1929년 정치 단체로 성격이 강화되어 중의원 진출을 목표로 했으나, 1940년 대정익찬회 참여를 거부하고 비판하다가 1942년 강제 해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재건되어 국회에 의석을 얻기도 했지만, 55년 체제 성립과 기성 정당들의 재편으로 세력이 약화되어 1983년 국정 선거 입후보가 중단되었다. 현재는 천황에게의 주권 봉환, 교육칙어 부활, 일본국헌법 폐기 등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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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헌양정회 | |
---|---|
기본 정보 | |
![]() | |
공용어 명칭 | 릿켄요세이카이 |
로마자 표기 | Ritken'yōseikai |
한글 표기 | 릿켄요세이카이 |
개요 | |
창립일 | 1923년 11월 3일 |
해산일 | 알려지지 않음 |
해산 이유 | 불명 |
후신 정당 | 없음 |
정치적 이념 및 입장 | 우익 |
본부 위치 | 일본 도쿄도 조후시 니시쓰쓰지가오카 2초메 28-4 |
2. 이념과 당명
다나카 지카쿠는 1903년(메이지 36년) 니치렌을 중심으로 "일본국은 우내(宇内)를 영적으로 통일해야 하는 천직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일본서기』 권제3 진무 천황 즉위전기의 구절(掩'''八紘'''而為宇)을 바탕으로 "팔굉일우"를 제창하고, "국립계단"의 설립을 주장했다. "양정"이라는 말도 "팔굉"을 가져온 구절과 같은 구절(下則弘皇孫'''養正'''之心)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나카 지카쿠는 "양정의 회홍(恢弘)"이라는 문화적 행동이 일본 국민의 사명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념은 이미 1913년(다이쇼 2년) 3월 11일 발행된 국주회 기관지 『국주신문』의 기사 「진무천황의 건국」에서 언급되었다.[1]
1923년 11월 3일 다나카 지카쿠가 입헌양정회를 창설하고 초대 총재가 되었다. 초기에는 사회 운동 조직 및 불교 조직의 성격을 띠었으나, 1929년 다나카 다쿠지가 총재가 되면서 정치 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3][4] 입헌양정회는 "중의원 다수석을 확보하여 합법적으로 천황의 대명을 받드는 국체주의 정치를 흥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3. 역사
55년 체제가 성립되자 점차 선거에서 멀어져 갔고, 1983년 제37회 총선거에서 오가와 지카라가 도쿄 11구에 입후보한 것을 끝으로 국정선거 입후보가 끊겼다. 현재는 천황에게 “주권봉환”, 교육칙어 부활, 일본국 헌법 폐기 등을 주장하고 있다.
3. 1. 중의원 진출과 좌절
입헌양정회는 중의원 다수 의석 확보를 통해 천황 중심의 국체주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1936년 제19회 총선거에 7명의 후보를 공천했으나 모두 낙선했다.[3][4] 그러나 같은 해 나가노 4구 보궐선거에서 다나카 고가 당선되어 제국의회에 첫 의석을 확보했다.[3][4] 1937년 제20회 총선거에서 다나카 고는 재선에 성공했고, 지방 의회와 농회에도 전성기에 100명이 넘는 의원들이 소속되어 일정한 세력을 확보했다.[3][4]
그러나 일련주의에 입각한 입헌양정회의 주장은 고노에 후미마로 등이 주도한 신체제운동과는 사상적으로 맞지 않았고, 1940년 대정익찬회 결성 당시 참여를 거부했다.[3][4] 신체제 운동과 대정익찬회에 대한 비판을 계속한 결과, 1942년 3월 17일 결사 불허 처분을 받고 강제 해산되었다.[3][4] 이는 다나카 고를 절대시하는 것이 군부 등이 주장하는 국체를 무시하는 사상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1942년 익찬선거에 다나카 고를 비롯한 회원 37명이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3][4]
3. 2. 전후 활동과 쇠퇴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인 1946년 3월 7일 재건되었다. 1947년 제23회 총선거에서 사이토 아키라가 후쿠시마 3구에서 당선되어 전전과 전후 모두 의석을 획득한 유일한 정당이 되었다.[3][4]
일본국헌법 시행 후인 1949년 제24회 총선거에서도 홋카이도 1구에서 우라구치 데쓰오가 당선되어 1석을 유지했다. 우라구치는 1950년 3월 8일 외무위원회에서 북방영토는 일본 고유의 영토인데 소련(러시아)에 의해 일본인 주민들이 쫓겨난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파괴활동방지법 수정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등 의정 활동을 펼쳤다.
이후에도 총선거에 후보를 계속 내보냈으나, 기성 정당들의 재편과 55년 체제 성립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1983년 제37회 총선거에서 오가와 지카라가 도쿄 11구에 입후보한 것을 마지막으로 국정 선거 입후보가 중단되었다.
4. 현재
현재는 천황에게 “주권 봉환”, 교육칙어 부활, 일본국 헌법 폐기 등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현행 일본국 헌법이 국민주권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5. 역대 선거 결과
입헌양정회는 중의원과 지방 의회 선거에 참여하여 의석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전성기에는 지방 의회와 농회에 100명이 넘는 의원들이 소속되어 있었다.[1] 1940년 대정익찬회 결성 당시 참여하지 않았고, 이후 신체제운동과 대정익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1942년 3월 17일 결사 불허 처분을 받고 해산되었다.[1]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재건되었으나, 55년 체제 성립 이후로는 국정 선거에서 의석을 얻지 못하고 있다.[1]
5. 1. 중의원
입헌양정회는 중의원 선거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여 의석 확보를 시도했다. 다음은 중의원 선거 결과이다.선거 | 당선/후보자 | 정수 | 비고 |
---|---|---|---|
(결성 시) | 0/- | 466 | |
제19회 총선 | 0/7 | 466 | |
제20회 총선 | 1/16 | 466 | 다나카 고 당선 |
제22회 총선 | 0/? | 468 | |
제23회 총선 | 1/7 | 466 | 사이토 아키라 당선 |
제24회 총선 | 1/5 | 466 | 우라구치 데쓰오 당선 |
제25회 총선 | 0/2? | 466 | |
제26회 총선 | 0/2 | 466 | |
제27회 총선 | 0/1 | 467 | |
제30회 총선 | 0/1 | 467 | |
제32회 총선 | 0/25 | 486 | |
제33회 총선 | 0/2 | 491 | |
제37회 총선 | 0/1? | 511 |
1936년 제19회 총선거에서는 7명의 후보를 공천했으나 전원 낙선했다. 같은 해 나가노 4구 보궐선거에서 다나카 고가 당선되어 의석을 획득했다.[1] 1937년 제20회 총선에서는 다나카 고가 재선되었다.[1]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1947년 제23회 총선거에서 사이토 아키라가 후쿠시마 3구에서 당선되었다.[1] 1949년 제24회 총선거에서는 홋카이도 1구에서 우라구치 데쓰오가 당선되어 1석을 획득했다.[1] 우라구치는 1950년 3월 8일 외무위원회에서 북방영토가 일본 고유의 영토인데 소련에 의해 일본인 주민들이 내쫓긴 것은 이상하다고 국회에서 질의했다.[1]
이후에도 총선거에 후보를 계속 내보냈으나, 기성정당들의 재편과 55년 체제 성립으로 인해 의석을 얻기 어려워졌다.[1] 1983년 제37회 총선거에서 오가와 지카라가 도쿄 제11구에 입후보한 것을 끝으로 국정선거 입후보가 중단되었다.[1]
5. 2. 참의원
일본국헌법일본어 시행 이후인 1949년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홋카이도 1구에서 우라구치 데쓰오가 당선되어 1석을 획득했다. 우라구치는 1950년 3월 8일 외무위원회에서 북방영토는 일본 고유의 영토인데 소련에 의해 일본인 주민들이 내쫓긴 것은 이상하다고 국회에서 질의했다. 또한 파괴활동방지법에 대해서는 원안에는 기권, 수정안에는 반대표를 던지는 등 의정활동을 했다.[1]이후에도 총선거에 후보를 계속 내보냈으나, 기성정당들의 재편이 진행되면서 의석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55년 체제가 성립하자 점차 선거에서 멀어졌고, 1983년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오가와 지카라가 도쿄도 제11구에 입후보한 것을 끝으로 국정선거 입후보가 끊겼다.[1]
선거 | 당선/후보자 | 비개선 | 정수 | 비고 |
---|---|---|---|---|
(결당시) | -/- | - | - | 참의원은 존재하지 않음 |
제1회 통상선거 | 0/? | 0 | 250 | 제1회만 전원 선거 |
제2회 통상선거 | 0/? | 0 | 250 | |
제13회 통상선거 | 0/1 | 0 | 252 | 도쿄도 선거구에 1명 (오가와 지카라) 옹립 |
참조
[1]
URL
https://warp.da.ndl.[...]
[2]
웹사이트
総務省の政治資金収支報告書
http://www.soumu.go.[...]
[3]
문서
大日本帝国憲法, 日本国憲法, 日本の国会議員, 日本自由党 (1945-1948), 日本社会党, 日本共産党, 第22回衆議院議員総選挙
[4]
문서
山本宣治, 日本共産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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