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37년 4월 30일에 치러졌다. 하야시 센주로 내각은 국회에서 예산안 통과 후 주요 정당 약화를 위해 중의원 해산을 명령했고, 이는 국민적 반발을 사 '먹튀 해산'으로 불렸다. 선거 결과, 입헌민정당이 179석, 입헌정우회가 175석을 얻었으며, 사회대중당이 약진하여 36석을 확보했다. 이 선거로 하야시 내각은 총사퇴했으며, 이후 중의원 의원 임기 연장 및 대정익찬회에 의한 정치 통제가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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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선거 - 1937년 소련 총선 1937년 소련 총선은 1936년 헌법에 따라 최고 소비에트 의원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되었으나, 단일 후보 체제로 변경되어 소련 공산당이 압도적인 의석을 차지하며 스탈린 체제를 공고화했다.
1937년 3월 - 제9회 아카데미상 1937년에 개최된 제9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는 《위대한 지그펠드》가 작품상을, 프랭크 카프라가 감독상을, 폴 무니와 루이즈 라이너가 각각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앤서니 에드버스》가 4개 부문에서 최다 수상했다.
1937년 4월 - 게르니카 폭격 게르니카 폭격은 1937년 스페인 내전 중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이 프랑코 국민파를 지원하여 게르니카를 폭격, 도시의 75%를 파괴하고 많은 시민 사상자를 낸 사건으로,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다.
1937년 2월 2일, 하야시 센주로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하야시 내각이 발족했다. 하야시 내각은 쇼와회를 내각 내 여당으로, 국민동맹 등을 내각 외부 협력 세력으로 삼았다. 같은 해 2월 15일에 재개된 제70회 제국 의회에서, 하야시 내각은 중요 법안 심의를 지연시키는 민정당과 정우회 양대 정당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37년(쇼와 12년)도 예산안이 통과되자마자, 하야시 내각은 의회 내 여당 세력 확대를 기대하며 중의원 해산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 해산은 예산 성립 직후에 이루어졌고 뚜렷한 명분이 부족하여 '먹튀 해산'(食い逃げ解散|구이 니게 가이산일본어)으로 불리며 국민적 반발을 샀다. 선거 결과, 하야시 내각을 지지했던 쇼와회와 국민동맹은 모두 의석을 잃어 여당 세력은 여러 정파와 무소속을 합쳐도 40석 전후로 부진했다. 반면, 민정당도 의석을 잃었으나 정우회와 함께 양대 정당으로서의 우위는 유지했다. 특히 사회대중당이 크게 약진하여 무산정당으로서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제3당의 지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하야시 내각은 5월 31일 총사퇴했다.
한편, 이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은 1941년(쇼와 16년) 고노에 내각 하에서 통과된 중의원 의원 임기 연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임기가 1년 연장되는 특례를 적용받았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5년 동안 의원직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 임기 연장은 대정익찬회가 일본 정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조치였다. 대정익찬회는 사실상 일본의 모든 정당을 대체하며 정치 체제를 장악해 나갔고, 이 의원들의 임기 만료 후 치러진 다음 총선거는 '''익찬 선거'''로 불리게 된다. 이 임기 연장 조치는 1947년 일본국 헌법 시행으로 폐지되었고, 중의원 의원의 임기는 다시 4년으로 돌아갔다.
1937년 2월, 하야시 센주로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하야시 내각이 출범하였다. 하야시 내각은 취임 직후 예산안을 통과시키자마자, 주요 정당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중의원 해산을 단행했다. 이러한 조치는 정당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로부터도 강한 반발을 샀으며, 당시 '食い逃げ解散|구이니게 가이산일본어'(먹튀 해산)이라는 비판적인 이름으로 불렸다.
3. 2. 해산일
1937년 2월, 하야시 센주로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취임 직후 국회에서 예산안을 통과시킨 하야시 내각은 1937년 3월 31일, 주요 정당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의원 해산을 단행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해산은 주요 정당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큰 반발을 샀으며, '먹튀 해산'(食い逃げ解散|구이 니게 가이산jpn)이라는 비판적인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선거 결과, 하야시 내각의 기대와 달리 여당 세력인 쇼와회와 국민동맹은 의석 확보에 실패하며 부진했다. 반면 민정당과 정우회 양대 정당의 의회 내 우위 구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사회대중당의 약진으로, 무산 정당으로서는 일본 헌정 사상 최초로 제3당의 지위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하야시 내각은 1937년 5월 31일 총사퇴했다.
이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의 임기는 본래 4년이었으나, 1941년 고노에 내각 하에서 통과된 중의원 의원 임기 연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특례로 임기가 1년 연장되어 총 5년 동안 의원직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 정치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통합한 대정익찬회가 결성되면서 기존의 정당들은 사실상 소멸하였고, 일본의 정당 정치는 종말을 맞이했다. 임기가 만료된 후에는 대정익찬회가 선거를 주도하는, 소위 '익찬 선거'로 불리는 1942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치러졌다.
참조
[1]
서적
The International Almanac of Electoral History
Macmillan
[2]
웹사이트
The 20th House of Representatives election
http://go2senkyo.com[...]
2014-02-16
[3]
서적
The International Almanac of Electoral History
Macmillan
[4]
서적
『議会制度百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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