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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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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바 침공은 1811년 영국이 자바 섬을 점령한 사건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영국은 자바를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 침공을 결정했다. 영국은 해상 봉쇄와 상륙 작전을 통해 자바를 점령했고, 네덜란드 총독 얀 빌렘 얀센스는 항복했다. 자바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관리 하에 놓였고, 스탬퍼드 래플스가 부총독으로 임명되어 개혁을 추진했다. 1814년 런던 협정을 통해 자바는 네덜란드에 반환되었지만, 영국의 통치 기간 동안 좌측 통행과 같은 유산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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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침공 - [전쟁]에 관한 문서
자바 침공 (1811년)
칠린칭, 자바 섬에 상륙하는 영국군
칠린칭에 상륙하는 영국군
개요
분쟁나폴레옹 전쟁의 일부
날짜1811년 8월 4일 – 1811년 9월 18일
장소자바, 네덜란드령 동인도
결과영국의 승리
영토 변경영국의 자바 점령
교전 세력
교전국 1영국
[[파일:Flag of 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 (1801).svg|22px]] 동인도회사
교전국 2프랑스 제1제국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로버트 스탑포드
사무엘 오치뮤티
로버트 롤로 길레스피
지휘관 2얀 윌렘 얀센스
전력
전력 112,000명의 병사
25척의 군함
전력 2알 수 없음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1,000명
사상자 22,000명
관련 정보
캠페인 상자

2. 배경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수도인 바타비아, 배경에는 성채가 있다.


1780년 바타비아,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삽화


1811년 영국 동인도 회사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인도 총독 민토 경에게 자바 섬 점령을 제안했고, 민토 경은 이를 수락했다.[32]

2. 1. 네덜란드의 프랑스 종속

수년간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통치를 받았고, 이미 영국과 전쟁 중이었다. 1807년, 강경 친불파인 헤르만 빌럼 다엔델스가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에 취임했다. 1808년, 다엔델스는 프랑스 사나포선(privateer) 비르지니에 호(Virginie)를 타고 자바섬에 도착했고, 영국군의 포위 위협에 맞서 자바섬 무장을 강화하였다.[32] 특히 다엔델스는 바타비아 남쪽에 참호로 둘러싸인 코르넬리스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병원, 병영, 무기창, 군사대학을 신설하여 자바섬 방어를 향상시켰다.[32]

1810년, 홀란드 왕국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나폴레옹은 다엔델스를 대신할 총독으로 얀 빌럼 얀센스를 임명하였다. 얀센스는 케이프 식민지 총독을 역임한 적이 있었으며, 1806년 블라우버그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하여 항복하기도 했다. 얀센스는 조제프-프랑소와 라울 지휘하에 있던, 프리깃함 메두스 호, 프리깃함 님프 호, 자바섬 지원 명령을 받은 콜베트함(corvette) 사포(Sappho) 호로 구성된 프랑스 프리깃함 분대와 함께 갔다. 프랑스 경보병 부대 수백 명과 고위 프랑스 장교 몇 명이 함께 했다.[32] 1811년 4월, 이들은 무사히 자바섬에 도착하였다. 9월 2일, 프리깃함 분대는 수라바야에 도착하였고, 이때 32문의 소총을 장착한 영국 국적 프리깃함 HMS 부세팔루스 호가 미행하였다. 2일 후, 또다른 영국선박 HMS 바라쿠타가 함께 추적하였지만, 9월 8일 양측 간 접촉이 끊겼다. 4일 후, 메두스 호와 님프 호는 부세팔루스를 추격하였고, 다음날 추격으로부터 벗어나 양측간 접촉이 끊겼다. 1811년 12월 22일, 함대는 프랑스 브레스트로 돌아갔다.[32]

영국군은 향료 제도 침공을 통해 암본 섬과 몰루카 제도를 이미 점령하였다. 1809~1811년 모리셔스 원정에서, 영국군은 프랑스령 레위니옹과 모리셔스를 점거하였다. 영국 동인도회사 관료이자,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합병되었을 당시 말라카 내의 네덜란드인들의 정착지를 떠나야 했던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인도 총독 민토 군주에게, 자바는 물론 다른 네덜란드 식민지를 함락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민토 백작은 모리셔스 원정에서 이끌었던 거대한 병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으며, 직접 원정에 나서고자 제안하였다.[32]

2. 2. 영국의 동남아시아 진출 확대

수년간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통치를 받았고, 이미 영국과 전쟁 중이었다. 1807년, 강경 친불파인 헤르만 빌럼 다엔델스가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에 취임했다. 1808년, 다엔델스는 프랑스 사나포선(privateer) 비르지니에 호를 타고 자바섬에 도착했고, 영국군의 포위 위협에 맞서 자바섬 무장을 강화하였다.[32] 특히 다엔델스는 바타비아 남쪽에 참호로 둘러싸인 코르넬리스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병원, 병영, 무기창, 군사대학을 신설하여 자바섬 방어를 향상시켰다.[32]

1810년, 홀란드 왕국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나폴레옹은 다엔델스를 대신할 총독으로 얀 빌럼 얀센스를 임명하였다. 얀센스는 케이프 식민지 총독을 역임한 적이 있었고, 1806년 블라우버그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하여 항복하기도 했다. 얀센스는 조제프-프랑소와 라울 지휘하에 있던, 프리깃함 메두스 호, 님프 호, 자바섬 지원 명령을 받은 콜베트함(corvette) 사포 호로 구성된 프랑스 프리깃함 분대와 함께 갔다. 프랑스 경보병 부대 수백 명과 고위 프랑스 장교 몇 명이 함께 했다.[32] 1811년 4월, 이들은 무사히 자바섬에 도착하였다. 9월 2일, 프리깃함 분대는 수라바야에 도착하였다. 이때 32문의 소총을 장착한 영국 국적 프리깃함 HMS 부세팔루스 호가 미행하였다. 2일 후, 또다른 영국선박 HMS 바라쿠타가 함께 추적하였지만, 9월 8일 양측 간 접촉이 끊겼다. 4일 후, 메두스 호와 님프 호는 부세팔루스를 추격하였고, 다음날 추격으로부터 벗어나 양측간 접촉이 끊겼다. 1811년 12월 22일, 함대는 프랑스 브레스트로 돌아갔다.[32]

영국군은 향료 제도 침공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 암본 섬과 몰루카 제도를 이미 점령하였다. 1809~1811년 모리셔스 원정에서, 영국군은 프랑스령 레위니옹과 모리셔스를 점거하였다. 영국 동인도회사 관료이자,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합병되었을 당시 말라카 내의 네덜란드인들의 정착지를 떠나야 했던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인도 총독 민토 경에게, 자바는 물론 다른 네덜란드 식민지를 함락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민토 백작은 모리셔스 원정에서 이끌었던 거대한 병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으며, 직접 원정에 나서고자 제안하였다.[32]

2. 3. 자바 섬의 전략적 중요성



네덜란드는 수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이미 영국과 전쟁 중이었다. 1807년, 친프랑스 성향이 강했던 헤르만 빌럼 다엔델스가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808년 프랑스 사략선 ''버지니''호를 타고 자바에 도착하여 영국의 위협에 대비해 섬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32] 다엔델스는 바타비아 남쪽에 참호로 둘러싸인 코르넬리스 요새를 건설하고, 병원, 병영, 무기창, 군사대학을 신설하여 자바섬 방어를 강화했다.[32]

1810년, 홀란드 왕국은 프랑스에 공식적으로 합병되었다. 나폴레옹은 다엔델스를 대신할 총독으로 얀 빌럼 얀센스를 임명하였다. 얀센스는 케이프 식민지 총독을 역임한 적이 있었고, 1806년 블라우버그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하여 항복하기도 했다. 얀센스는 조제프-프랑소와 라울 지휘하에 있던, 프리깃함 메두스 호, 님프 호, 자바섬 지원 명령을 받은 코르벳함 사포 호로 구성된 프랑스 프리깃함 분대와 함께 갔다. 프랑스 경보병 부대 수백 명과 고위 프랑스 장교 몇 명이 함께 했다.[32] 이들은 1811년 4월 무사히 자바섬에 도착하였다. 9월 2일, 프리깃함 분대는 수라바야에 도착하였고, 32문 소총을 장착한 영국 국적 프리깃함 HMS 부세팔루스 호가 미행하였다. 이틀 후, 또다른 영국선박 HMS 바라쿠타가 함께 추적하였지만, 9월 8일 양측 간 접촉이 끊겼다. 4일 후, 메두스 호와 님프 호는 부세팔루스를 추격하였고, 다음날 추격으로부터 벗어나 양측간 접촉이 끊겼다. 1811년 12월 22일, 함대는 프랑스 브레스트로 돌아갔다.[32]

영국군은 이미 점령한 암본 섬과 몰루카 제도를 포함한 네덜란드 식민지를 점령했고, 최근 모리셔스 원정에서 프랑스 식민지인 레위니옹과 일 드 프랑스(모리셔스)를 점령했다. 영국 동인도회사 관료이자,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합병되었을 당시 말라카 내의 네덜란드인들의 정착지를 떠나야 했던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인도 총독 민토 백작에게, 자바는 물론 다른 네덜란드 식민지도 함락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민토 백작은 모리셔스 원정에서 이끌었던 거대한 병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으며, 직접 원정에 나서고자 제안하였다.[32]

2. 4. 헤르만 빌럼 다엔델스와 얀 빌럼 얀센스

수년 동안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 영국과 전쟁 중이었다. 1807년, 강경 친프랑스파 헤르만 빌럼 다엔델스가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에 취임했다. 1808년, 다엔델스는 프랑스 사략선 비르지니에 호를 타고 자바섬에 도착했고, 영국군의 포위 위협에 맞서 자바섬 무장을 강화하였다.[32] 특히 다엔델스는 바타비아 남쪽에 참호로 둘러싸인 코르넬리스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병원, 병영, 무기창, 군사대학을 신설하여 자바섬 방어를 향상시켰다.[32]

1810년, 홀란드 왕국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나폴레옹은 다엔델스를 대신할 총독으로 얀 빌럼 얀센스를 임명하였다. 얀센스는 케이프 식민지 총독을 역임한 적이 있었고, 1806년 블라우베르크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하여 항복하기도 했다. 얀센스는 조제프-프랑소와 라울 지휘하에 있던, 프리깃함 메두스 호, 님프 호, 자바섬 지원 명령을 받은 코르벳함 사포 호로 구성된 프랑스 프리깃함 분대와 함께 갔다. 프랑스 경보병 부대 수백 명과 고위 프랑스 장교 몇 명이 함께 했다.[32] 1811년 4월, 이들은 무사히 자바섬에 도착하였다. 9월 2일, 프리깃함 분대는 수라바야에 도착하였다. 이때 32문 소총을 장착한 영국 국적 프리깃함 HMS 부세팔루스 호가 미행하였다. 2일 후, 또다른 영국선박 HMS 바라쿠타 호가 함께 추적하였지만, 9월 8일 양측 간 접촉이 끊겼다. 4일 후, 메두스 호와 님프 호는 부세팔루스를 추격하였고, 다음날 추격으로부터 벗어나 양측간 접촉이 끊겼다. 1811년 12월 22일, 함대는 프랑스 브레스트로 돌아갔다.[32]

영국군은 향료 제도 침공을 통해 네덜란드령 동인도 암본 섬과 몰루카 제도를 이미 점령하였다. 1809~1811년 모리셔스 원정에서, 영국군은 프랑스령 레위니옹과 모리셔스를 점거하였다. 영국 동인도회사 관료이자,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합병되었을 당시 말라카 내의 네덜란드인들의 정착지를 떠나야 했던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인도 총독 민토 군주에게, 자바는 물론 다른 네덜란드 식민지를 함락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민토 백작은 모리셔스 원정에서 이끌었던 거대한 병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으며, 직접 원정에 나서고자 제안하였다.[32]

3. 영국군의 침공 준비

영국 해군은 자바섬 침공 이전부터 자바섬 연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811년 5월 23일, 프랜시스 드레이크 파견대가 수라바야 인근에서 네덜란드 포함 14척으로 구성된 소함대를 공격하여 9척을 나포했다.[35] 7월 30일에는 자바섬 북서부의 메락(Merak)이 공격받았고, 도시 방어 요새는 민덴과 레다 파견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같은 날, 프로크리스는 프랑스 국기를 단 네덜란드 포함 6척으로 구성된 소함대를 공격하여 5척을 나포하고 1척을 파괴했다.[33][38]

3. 1. 원정군 편성

영국군은 1811년 초 부제독 윌리엄 오브라이언 드러리의 지휘 아래, 그리고 1811년 3월 그의 사망 이후에는 윌리엄 로버트 브로우튼 준장의 지휘 아래 인도 기지에 집결했다.[34] 롤로 질레스피 대령이 지휘하는 제1사단은 36문 함선 에 탑승한 크리스토퍼 콜 대령의 호위를 받으며 4월 18일 마드라스를 출발했다. 이들은 5월 18일 페낭에 도착했고, 5월 21일에는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웨더럴 소장이 이끄는 제2사단이 캘커타를 떠났다. 제2사단은 38문 장착 함선 에 탑승한 플리트우드 펠류 대령의 호위를 받았다.[34] 두 사단은 함께 항해하여 6월 1일 말라카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74문 함선 에 탑승한 브로튼 준장의 호위를 받는 사무엘 오치머티 중장이 이끄는 벵골 분견대와 합류했다. 오치머티와 브로튼은 각각 육군과 해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34]

병력이 합쳐지면서 오치머티는 약 11,960명의 군인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이전에 질병으로 인해 약 1,200명이 감소한 수치였다. 질병으로 항해가 불가능한 인원은 말라카에 하선시켰고, 6월 11일 함대는 계속 항해했다. 여러 지점을 거쳐 6월 30일 인드라마유 해안에 도착했다.[35] 7월 31일, 범선 Procris영어를 지휘하던 마운셀 대령은 인드로마요 강 어귀에서 프랑스 포함 6척의 호위를 받는 40~50척의 프로아 선단을 발견했다. 출항하자마자 포함 5척을 연달아 나포했고, 6번째 함선은 폭파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호송대는 얕고 진흙투성이인 강을 따라 탈출했다.[36]

로버트 먼셀 대위가 1811년 7월 Indramayu 해안에서 프랑스 포선들을 나포하고 있다.


그곳에서 함대는 네덜란드군 배치에 관한 정보를 잠시 기다렸다. 해안 정찰을 위해 파견된 맥켄지 대령은 바타비아 동쪽 에 위치한 무방비 어촌 칠린칭을 상륙 지점으로 발견했다.[37] 8월 4일, 함대는 마란디 강에 정박했고, 오후 2시에 군대 상륙을 시작했다.[38] 방어군은 기습을 당했고, 프랑스-네덜란드 군이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도착하기까지 거의 6시간이 걸렸으며, 그동안 8,000명의 영국군이 상륙했다.[38][39] 선발대 간에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고, 프랑스-네덜란드 군은 격퇴되었다.[39]

3. 2. 정보 수집

영국군은 1811년 초 부제독 윌리엄 오브라이언 드러리 지휘 하에, 그리고 1811년 3월 드러리 사망 이후에는 해군준장 윌리엄 로버트 브로우튼 지휘 하에 인도 기지에 집결했다.[34] 롤로 질레스피 중령이 지휘하는 제1분함대는 크리스토퍼 콜 대령이 지휘하는 36문 포 HMS 캐롤라인의 호위를 받으며 4월 18일 마드라스를 떠나 5월 18일 페낭에 도착했다. 5월 21일에는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웨더럴 소장이 이끄는 제2분함대가 캘커타를 떠났는데, 이들은 플릿우드 펠류 대령이 지휘하는 38문 포 HMS 파에톤의 호위를 받았다.[34] 두 함대는 함께 항해하여 6월 1일에 말라카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벵골에서 온 사무엘 오치머티 경 중장이 이끌고 74문 포를 갖춘 HMS 일러스트리어스에 탑승한 해군 준장 브로튼의 호위를 받는 1개 분대와 접촉하였다. 오치머티와 브로튼은 각각 육군과 해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34] 병력이 합쳐지면서 오치머티는 약 11,960명의 군인을 지휘하였고, 이전 인원은 질병으로 약 1,200명이 감소되었다. 질병으로 출항 할 수 없는 인원은 말라카에 남겨졌고, 6월 11일 함대는 계속 항해하였다. 여러 지점을 거쳐 6월 30일 인드라마유를 출발하였다.[35]

7월 31일, ''Procris'' 범선을 지휘하던 마운셀 대령은 프로아 40~50척으로 이루어진 호송대를 발견했는데, 이 호송대는 인드로마요 강 어귀에서 프랑스 포함 6척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출항하여 포함 5척을 나포했고, 6번째 함선은 폭파되었다. 그러나 호송대는 얕고 진흙이 많은 강으로 탈출했다.[36] 그곳에서 함대는 네덜란드군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잠시 기다렸다. 해안 정찰 임무를 맡았던 맥켄지 중령은 바타비아 동쪽[37]의 무방비 어촌인 칠린칭을 상륙 지점으로 발견하였다.

4. 자바 섬 침공

영국 해군은 1811년 초부터 자바섬 연안에서 해상 봉쇄를 시작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파견대는 수라바야 해역에서 네덜란드 소함대를 공격하여 9척을 나포했고,[35] 메락의 도시 방어 요새를 파괴하기도 했다.[33]

윌리엄 오브라이언 드리 부제독과 윌리엄 로버트 브로턴 준장의 지휘 하에 영국군은 인도 기지에 집결했다.[34] 롤로 길레스피 대령과 프레데릭 오거스터스 웨더럴 소장이 이끄는 부대는 말라카에서 합류했고, 사무엘 오치머티 중장 지휘 하의 벵골 사단과 함께 원정군을 구성했다.[34]

1811년 8월 4일, 영국군은 바타비아 동쪽 12km에 위치한 칠리칭에 상륙하여[37] 프랑스-네덜란드 군을 격퇴하고,[39] 8월 8일 무방비 상태의 바타비아를 점령했다.[39][40]

바타비아 코르넬리스 요새 도표


얀센스는 바타비아에서 철수하여 코르넬리스 요새에 주둔했다.[39] 영국군은 코르넬리스 요새를 포위하고 8월 26일 기습 공격하여 함락시켰다.[40][45] 얀센스는 도주했지만, 영국군은 계속 진격하여 섬 내부의 적진을 격파했다.

영국 왕실 해군은 해안을 순찰하며 마두라 섬의 수메네프 요새를 점령하는 등 해안 도시들을 장악했다.[50][51] 9월 16일, 살라티가가 함락되고 얀센스는 영국군에게 격퇴당했다.[52] 결국 9월 18일, 얀센스는 항복했다.[50][52]

4. 1. 해상 봉쇄

영국 해군은 원정 이전부터 자바섬 연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811년 5월 23일, 프랜시스 드레이크 파견대가 수라바야 해역에서 네덜란드 포함 14척으로 구성된 소함대를 공격하여 9척을 나포하였다.[35] 7월 30일에는 자바섬 북서부의 메락을 공격하여 도시 방어 요새를 파괴하였는데, 이는 민덴(Minden)과 레다(Leda) 파견대의 활약이었다.[33] 같은 날, 프로크리스(Procris)는 프랑스 깃발을 내건 네덜란드 포함 6척으로 구성된 소함대를 공격하여 5척을 나포하고 1척을 파괴하였다.[38]

4. 2. 상륙 작전



영국군은 1811년 초 부제독 윌리엄 오브라이언 드리의 지휘 하에, 그리고 1811년 3월 그의 사망 이후에는 윌리엄 로버트 브로턴 준장의 지휘 하에 인도 기지에 집결했다.[34] 롤로 길레스피 대령의 지휘 하에 있는 제1사단은 36문의 HMS 캐롤라인에 탑승한 크리스토퍼 콜 대위의 호위를 받으며 4월 18일 마드라스를 출발했다. 그들은 5월 18일 페낭에 도착했고, 4월 21일 캘커타를 출발한 프레데릭 오거스터스 웨더럴 소장의 지휘 하에 38문의 HMS 파에톤에 탑승한 플리트우드 펠로우 대위의 호위를 받은 제2사단이 5월 21일 그들과 합류했다.[34] 두 사단은 함께 항해하여 6월 1일 말라카에 도착했고, 74문의 HMS 일러스트리어스에 탑승한 브로턴 준장의 호위를 받으며 사무엘 오치머티 중장의 지휘 하에 있는 벵골의 사단과 합류했다. 오치머티와 브로턴은 각각 원정군의 군사 및 해군 사령관이 되었다.[34]

이제 병력이 집결되자 오치머티는 약 11,960명의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이는 약 1,200명이 질병으로 인해 감소한 것이다. 여행하기에 너무 아픈 사람들은 말라카에 상륙시켰고, 6월 11일 함대는 계속 항해했다. 가는 길에 여러 지점에 들른 후, 병력은 6월 30일 Indramayu 해안에 도착했다.[35] 7월 31일 슬루프 ''Procris''를 지휘하는 먼셀 대위는 Indromayo 강 입구에서 6척의 프랑스 포선에 호위받는 40척 또는 50척의 프로아 선단을 발견했다. 보트를 발진시켜 프랑스 포선 5척을 신속하게 나포했고, 6번째 포선은 폭발했다. 그러나 그동안 선단은 얕고 진흙투성이인 강을 따라 도망쳤다.[36]

그곳에서 함대는 네덜란드 군의 전력에 관한 정보를 기다렸다. 해안 정찰을 위해 파견된 맥켄지 대령은 바타비아 동쪽 12km에 위치한 무방비 어촌인 칠리칭을 상륙 지점으로 제안했다.[37] 함대는 8월 4일 마란디 강에 정박했고, 14:00에 병력 상륙을 시작했다.[38] 방어군은 기습을 당했고, 프랑스-네덜란드 군이 상륙에 반대하기 위해 도착하기까지 거의 6시간이 걸렸고, 그 동안 8,000명의 영국군이 상륙했다.[38][39] 선두 부대 간에 짧은 교전이 벌어졌고, 프랑스-네덜란드 군은 격퇴되었다.[39]

4. 3. 바타비아 점령

영국군의 상륙 성공 소식을 접한 얀센스는 8,000명에서 10,090명의 군대를 이끌고 바타비아에서 철수하여 코르넬리스 요새에 주둔했다.[39] 영국군은 바타비아로 진격하여 8월 8일에 도착했으나, 도시는 무방비 상태였다. 브로우튼과 오치머티가 사유 재산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도시는 길레스피 대령 휘하의 부대에 항복했다.[39][40] 영국군은 도시 일부가 불에 타고 커피, 설탕 등 상품이 가득한 많은 창고가 약탈되거나 물에 잠겨 전리품을 얻지 못하게 되자 실망했다.[41] 1811년 8월 9일, 로버트 스톱포드 소장이 도착하여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평가를 받은 브로톤 준장을 대신했다.[41][42] 스톱포드는 희망봉 사령관인 알버말 버티 소장을 대체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도착 후 드루리 제독의 사망과 자바 원정 계획을 알게 되자 그대로 원정을 계속했다.[40]

4. 4. 코르넬리스 요새 전투



코르넬리스 요새는 길이 약 1.61km, 너비 약 548.64m~약 731.52m의 요새였다. 벽과 보루에는 280문의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방어군은 네덜란드, 프랑스, 동인도 군대의 혼성 부대였다. 현지에서 모집된 동인도 부대는 충성심과 전투력이 의심스러웠지만, 셀레베스 출신의 용맹한 포병들이 있었다.[44] 발테프레덴을 점령한 영국군은 코르넬리스 요새를 포위하기 위한 이상적인 기지를 확보했다. 8월 14일, 영국군은 중포와 군수품을 수송하기 위해 숲과 후추 농장을 통과하는 길을 닦고 요새 북쪽에 포위망을 구축했다. 며칠 동안 요새와 영국 포대 사이에 포격전이 벌어졌으며, 영국 해병과 HMS ''니서스''의 선원들이 포병으로 활약했다.[44]

8월 22일 아침, 요새에서 출격한 부대가 영국 포대 3개를 일시적으로 점령했지만, 벵골 세포이와 제69 보병 연대의 활약으로 격퇴되었다.[43] 양측은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으며, 8월 23일에는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8월 24일에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다.[40][45] 탈영병의 도움으로 롤로 질레스피 장군은 요새 밖의 보루 2개를 기습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열병을 앓고 있던 질레스피는 쓰러졌지만, 곧 회복하여 세 번째 보루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장군 조프레가 포로로 잡혔다. 네덜란드 장교 홀스만 소령과 뮬러 소령은 보루의 탄약고를 폭파시키고 장렬히 전사했다.[46]

세 보루의 함락은 얀센스의 동인도 군대 사기를 크게 꺾었다. 많은 네덜란드 군인들도 탈영하여 프랑스 지휘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8월 25일 밤, 영국군은 요새를 기습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함락시켰다.[40][45] 영국군은 630명의 사상자를 냈다. 수비군은 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장교들의 피해만 완전히 기록되었다. 전사자 40명, 부상자 63명, 포로 230명이었으며, 포로 중에는 프랑스 장군 2명도 포함되었다.[46] 3명의 장군, 34명의 야전 장교, 70명의 대위, 150명의 부관급 장교를 포함하여 총 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45] 요새 안에서 1,000구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이후 추격전에서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45] 얀센스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보고르로 도주했지만, 영국군이 접근하자 그곳마저 포기해야 했다.[45]

코르넬리스 요새 함락 이후, 8월 27일까지 영국군의 총손실은 육군 141명 사망, 733명 부상, 13명 실종, 해군 15명 사망, 45명 부상, 3명 실종으로 총 156명 사망, 788명 부상, 16명 실종이었다.[45]

4. 5. 잔적 소탕

제독 얀센스는 영국군의 상륙을 막기보다는 질병과 열대 기후로 영국군이 약화되기를 기다렸다.[41] 그러나 영국군은 얀센스의 근거지로 진군하며 가는 곳마다 적진을 격파했다. 8월 10일 이후 벨테브레덴(Weltevreeden) 해군 기지와 네덜란드 군대가 영국군에게 함락되었다. 영국군의 전사자는 100명이 넘지 않았지만, 네덜란드 수비군의 사망자는 300명 이상이었다.[43] 한 전투에서는 얀센스의 프랑스 부하 중 한 명인 제독 알버티(Alberti)가 영국 군사들을 푸른색 군복을 입은 네덜란드 병사로 착각하여 사망하기도 했다. 8월 20일, 영국군은 프랑스-네덜란드 진지에서 600야드 떨어진 곳에 요새를 준비하기 시작했다.[42]

영국 왕실 해군 함선들은 해안을 계속 순찰하며 기습 공격을 가했다. 9월 4일에는 프랑스 40문 프리깃함 ''메두즈''와 ''님프''가 수라바야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이들은 36문 HMS 부세팔루스와 18문 HMS ''Barracouta''에게 쫓겼으나, ''Barracouta''는 연락이 끊겼다.[47][48] HMS 부세팔루스는 9월 12일까지 단독으로 추격했고, 프랑스 프리깃함들이 방향을 바꿔 따라잡으려 했다. HMS 부세팔루스의 지휘관 찰스 펠리 선장은 방향을 돌려 추격하는 프랑스 함들을 모래톱 위로 유인하려 했지만, 위험을 감지한 프랑스 함들은 추격을 포기하고 유럽으로 돌아갔다.[49][50]

8월 31일, 프리깃함 HMS 후사르, HMS 파에톤, HMS 시르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슬루프 HMS ''Dasher''의 병력이 마두라 섬의 수메네프 요새와 마을을 점령했다.[50] 마두라 섬의 나머지 지역과 주변 섬들은 곧바로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51] 9월 4일, 얀센스가 시레본에 있을 것으로 의심한 영국군은 HMS 라이온, HMS 니수스, HMS ''President'', HMS 포에베, HMS 헤스퍼에서 상륙하여 수비 병력을 즉시 항복시켰다. 얀센스의 참모였던 자멜 장군은 수메네프 함락과 함께 체포되었다.[50][51] 9월 12일, HMS 니수스와 HMS 포에베가 타갈(Taggal) 마을과 요새 해안에 도착하자, 이들 역시 항복했다.[52]

해군이 해안 도시를 점령하는 동안, 육군은 섬 내부로 진격했다. 9월 3일, 얀센스는 프라앙 웨도노 왕자가 이끄는 1,200명의 기병과 기타 자바 민병대의 지원을 받았다. 9월 16일, 살라티가가 영국에 함락되었다.[52] 같은 날, 얀센스는 새뮤얼 깁스 대령 휘하의 영국군을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원주민 민병대가 네덜란드 장교들을 살해했다.[53] 정예 부대를 크게 잃은 얀센스는 이틀 뒤인 9월 18일에 항복했다.[50][52]

5. 영국의 통치 (1811-1816)

1810년, 에드워드 터커(Edward Tucker) 대위가 이끄는 군대에 암보이나, 하루쿠, 사파루아, 나소라우트, 부루, 마니파, 마나도, 코팡, 아메낭, 케마르, 트왕우, 테르나테가 항복했다. 한편, 크리스토퍼 콜(Christopher Cole) 대위는 반다 제도를 점령하여 말루쿠 제도 내 네덜란드령 정복을 완료하였다.[54] 이로써 자바는 동양에서 영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마지막 주요 식민지가 되었으며, 자바의 함락은 이 해역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간 전쟁의 종식을 알렸다.[50][54]

5. 1. 래플스의 개혁 정치

스탬퍼드 래플스가 자바 부총독으로 임명되었다.[55][56] 그는 네덜란드 행정 방식을 종식시키고 토지 소유 제도를 자유화했으며 무역을 확대했다.

영국은 1814년 런던 협약에 따라 자바와 기타 동인도령을 새롭게 독립한 네덜란드 연합 왕국에 반환했다. 영국 점령의 지속적인 유산 중 하나는 도로 규칙이었는데, 영국은 차량 통행이 좌측으로 이루어지도록 규정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유지되고 있다.

5. 2. 세포이 반란 시도와 진압

1815년 욕야카르타에 주둔한 벵골 세포이 연대는 수라카르타 궁정의 힌두교 의식과 프람바난, 보로부두르 자바 사원의 영광에 영감을 받아 영국에 대한 반란을 계획했다. 이 계획은 수난의 도움을 받아 꾸며졌으며, 세포이들은 모든 영국 장교를 살해하고 유럽 세력을 전복하며 벵골 행정부를 섬 전체에 세울 계획을 세웠으나 결국 결실을 보지 못했다.[27][28] 스탬퍼드 래플스 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힌두교도들은 [자바]에서 그들의 고대 종교와 믿음의 유물을 발견하고 매우 만족한 것으로 보이며, 자신들이 매우 편안함을 느끼는 나라를 싫어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세포이들은 항상 자바가 브라마의 땅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은 이것이 그들의 신들이 기뻐하는 나라이며, 그들의 성서에 묘사된 나라이며, 신들의 거처였다면 이상하게 변했을 힌두스탄이 아니라 그들의 신성한 책에 묘사된 나라이며, 브라마의 땅이 이교도의 손에 남아있는 것은 죄악이고 수치라고 말하곤 했다.|스탬퍼드 래플스 경영어

래플스 경은 이 반란이 궁극적으로 자바에서 힌두교를 재건하고 유럽 세력을 몰아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왕자 [파쿠부와나 4세]와 세포이 사이의 친밀함은 그가 그들의 종교 예배, 즉 힌두교 의식에 참석하고, 그의 가문에 보존되어 온 그 예배의 여러 우상들을 그들에게 돕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공모자들은 자신의 조상 종교에 대한 왕자의 편애를 이용하여 그를 위대한 라마의 후손으로 부르며 그를 아첨했고, 유럽 지방을 다시 힌두 세력 아래 두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중한 계획이 세워졌다. 이 계획이 성공했다면, 자바인들 스스로 힌두교로 거의 즉각적이고 일반적인 개종으로 이어졌을 것이다.|스탬퍼드 래플스 경영어

수라카르타의 수난은 힌두 세포이들에게 열렬한 관심을 보였고, 수세기 동안 숭배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자바 우상에게 기도하는 벵골인들과 함께 푸자에 참석했다. 그는 또한 그들이 자신의 궁정에 참여하고, 자신의 시설을 예배와 훈련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수라카르타에서 수난은 즉시 세포이들의 접근에 응답하여 궁정 소장품에서 힌두교 이미지를 빌려주고, 조각상을 장식하고 그들이 배치된 가트(플랫폼)에 불을 밝히기 위한 돈을 제공했다. 그는 또한 요새 안에서 여러 의식에 참석했는데, 보통 혼자서 평범한 자바인처럼 옷을 입었지만, 때로는 마차를 타고 도착했을 때 가족 구성원들과 동반하기도 했다(Carey 1977:302). 그 대가로, 수난은 주요 세포이 공모자들을 자신의 궁정으로 환영하여, 크라톤의 궁술 연습을 위해 마련된 장소인 란딩간에서 저녁에 그들과 함께 앉아 인도의 방식과 관습에 대해 심문하고 그들의 체조 시범을 보았다(Carey 1977:303, 317 note 61). 세포이들은 또한 그에게 벵골의 역사, 인도 주둔 영국군의 강세와 그곳에서의 승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파랑(영국인)의 힘이 전적으로 그들의 영국-인도 군대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영어

6. 네덜란드의 복귀와 유산

스탬퍼드 래플스는 네덜란드 행정 방식을 끝내고 토지소유권 체계를 자유화하였으며 교역을 확장하였다.[55][56]

1814년 런던 협약에 따라 영국은 자바와 다른 동인도령을 새롭게 독립한 네덜란드 연합왕국에 반환했다. 영국 점령의 지속적인 유산 중 하나는 도로 규칙인데, 영국은 차량 통행이 좌측으로 이루어지도록 규정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유지되고 있다.

7. 전투 서열

1811년 8월 9일, 로버트 스톱포드 해군 소장이 자바 침공을 위해 지휘한 함대는 자바 해안 주변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으며,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42]

해군소장(Rear-Admiral) 스톱포드의 선단
함선 등급 해군 지휘관 비고
style="text-align:left;"|3급 전열함74
로버트 스토포드 해군 소장
제임스 존슨 대령
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3급 전열함74--윌리엄 로버트 브로턴 제독
로버트 페스팅 대령
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3급 전열함74--에드워드 왈리스 호어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3급 전열함64--헨리 히스콧 대령style="text-align:left;"|
HMS 악바르5급 전열함44--헨리 드러리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8--필립 비버 대령style="text-align:left;"|
HMS 프레지던트5급 전열함38--새뮤얼 워렌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8--제임스 쿠츠 크로퍼드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8--플리트우드 펠로우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6--조지 세이어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6--크리스토퍼 콜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6--조지 엘리엇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6--제임스 힐리어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6--찰스 펠리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6--윌리엄 존스 라이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2--헨리 폴크스 에젤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2--존 에드검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2--조지 해리스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브리그-슬루프18--로버트 먼셀 사령관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브리그-슬루프18--윌리엄 피츠윌리엄 오웬 사령관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십-슬루프18--바링턴 레이놀즈 사령관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슬루프18--헨더슨 베인 사령관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브리그-슬루프18--헨리 존 피치 사령관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슬루프18--베네딕투스 마우드 켈리 사령관style="text-align:left;"|
HMS 사마랑슬루프18--조셉 드러리 사령관style="text-align:left;"|



왕립 해군 함선 외에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존 헤이즈 제독의 지휘 하에 Ariel영어, Aurora영어, Mornington영어, Nautilus영어, Psyche영어, Thetis영어, Vestal영어 등의 함선을 제공했다. 여기에 수송선과 작전 중 노획한 함선까지 포함하면 스톱포드 제독은 거의 100척에 달하는 함선을 지휘했다.[42]

영국 육군은 제22 경 드라군, 제14 보병 연대, 제59 보병 연대, 제69 보병 연대, 제78 보병 연대, 제89 보병 연대, 제102 보병 연대 소속 12,000명의 병사로 구성되었다. 해군은 해병대 병력을 제공했고, 동인도 회사는 마드라스 토착 보병 연대와 벵골 토착 보병 연대를 파견하여 전체 병력의 절반을 차지했다. 사무엘 아치머티 장군이 총지휘를 맡았고, 롤로 길레스피 소장이 야전 지휘를 담당했다.[41]

7. 1. 영국군

1811년 8월 9일, 로버트 스톱포드 해군 소장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는 자바 침공을 위해 다음과 같은 함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42] 이 함대는 자바 해안 주변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해군소장(Rear-Admiral) 스톱포드의 선단
함선 등급 해군 지휘관 비고
style="text-align:left;"|3급 전열함74로버트 스토포드 해군 소장
제임스 존슨 대령
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3급 전열함74--윌리엄 로버트 브로턴 제독
로버트 페스팅 대령
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3급 전열함74--에드워드 왈리스 호어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3급 전열함64--헨리 히스콧 대령style="text-align:left;"|
HMS 악바르5급 전열함44--헨리 드러리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8--필립 비버 대령style="text-align:left;"|
HMS 프레지던트5급 전열함38--새뮤얼 워렌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8--제임스 쿠츠 크로퍼드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8--플리트우드 펠로우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6--조지 세이어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6--크리스토퍼 콜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6--조지 엘리엇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6--제임스 힐리어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6--찰스 펠리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6--윌리엄 존스 라이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2--헨리 폴크스 에젤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2--존 에드검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5급 전열함32--조지 해리스 대령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브리그-슬루프18--로버트 먼셀 사령관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브리그-슬루프18--윌리엄 피츠윌리엄 오웬 사령관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십-슬루프18--바링턴 레이놀즈 사령관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슬루프18--헨더슨 베인 사령관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브리그-슬루프18--헨리 존 피치 사령관style="text-align:left;"|
style="text-align:left;"|슬루프18--베네딕투스 마우드 켈리 사령관style="text-align:left;"|
HMS 사마랑슬루프18--조셉 드러리 사령관style="text-align:left;"|
왕립 해군 함선 외에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존 헤이즈 제독의 지휘 하에 여러 척의 함선을 제공했다. 동인도 회사 소속 함선에는 아리엘, , 모닝턴, 노틸러스, 프시케, 테티스, 그리고 베스탈이 포함되었다.
수송선과 캠페인이 진행되면서 노획된 몇 척의 포격을 추가하면, 스토포드는 거의 백 척의 함선을 지휘하게 되었다.[42]
영국 육군 병력에는 제22 경 드라군, 제14 보병 연대, 제59 보병 연대, 제69 보병 연대, 제78 보병 연대, 제89 보병 연대, 그리고 제102 보병 연대의 병사 12,000명이 포함되었다. 해군은 해병대 병력을 제공했다. 동인도 회사는 마드라스 토착 보병 연대와 벵골 토착 보병 연대의 여러 연대를 제공했으며, 전체 병력의 절반은 동인도 회사 소속 인도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사무엘 아치머티 장군이 전체 지휘관이었지만, 그는 야전 지휘를 롤로 길레스피 소장에게 위임했다.[41]


참조

[1] 논문 The Anglo-Dutch Dispute in the East, 1814–1824 https://www.jstor.or[...] 1950
[2] 서적 Dreams of Empire
[3]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4]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5]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6] 웹사이트 Captain Robert Maunsell capturing French gunboats off Java, July 1811 https://www.rmg.co.u[...] 2022-02-27
[7]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8] 서적 The Victory of Seapower
[9]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10] 서적 The Victory of Seapower
[11] 서적 Dreams of Empire
[12]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13] 웹사이트 nationalarchives site http://yourarchives.[...] 2010-01-28
[14] 서적 Dreams of Empire
[15]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16] 서적 Dreams of Empire
[17]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18] 서적 The Victory of Seapower
[19]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20] 서적 The Victory of Seapower
[21]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22]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23] 서적 Dreams of Empire
[24] 서적 The Victory of Seapower
[25] 간행물 Southeast Asia: A Historical Encyclopedia, from Angkor Wat to East Timor ABC-CLIO 2004
[26] 간행물 British India - From Queen Elizabeth To Lord Reading 1926
[27] 논문 The Kolkata (Calcutta) Stone and the Bicentennial of the British Interregnum in Java, 1811 – 1816 https://www.academia[...] 2016-Summer
[28] 웹사이트 Into a new era the British interregnum, 1812-1816 https://brill.com/do[...]
[29] 뉴스 Masa Penjajahan Inggris di Indonesia https://www.kompas.c[...] Kompas.com 2021-08-24
[30] 문서 여기서 말하는 바타비아는 인도네시아에 수립된 도시 바타비아가 아니라, 네덜란드 저지대에 살았던 게르만의 한 부족인 바타비(Batavi)인들을 의미한다.
[31] 문서 작전 수립 당시에는 계획에 없었으나 실제 전투나 순찰에 임하여서 즉석에서 설정된 표적
[32] 서적 Dreams of Empire
[33]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34]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35]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36] 웹인용 Captain Robert Maunsell capturing French gunboats off Java, July 1811 https://www.rmg.co.u[...] 2022-02-27
[37]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38] 서적 The Victory of Seapower
[39]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40] 서적 The Victory of Seapower
[41] 서적 Dreams of Empire
[42]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43] 웹인용 nationalarchives site http://yourarchives.[...] 2022-08-19
[44] 서적 Dreams of Empire
[45]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46] 서적 Dreams of Empire
[47]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48] 서적 The Victory of Seapower
[49]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50] 서적 The Victory of Seapower
[51]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52] 서적 The Naval History of Great Britain
[53] 서적 Dreams of Empire
[54] 서적 The Victory of Seapower
[55] 서적 Southeast Asia: A Historical Encyclopedia, from Angkor Wat to East Timor ABC-CLIO 2004
[56] 서적 British India - From Queen Elizabeth To Lord Reading READ BOOKS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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