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영 (19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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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기영은 1903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정치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중동중학고등과를 졸업하고 중국, 시베리아, 일본, 미국 등에서 유학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제2차 세계 대전에는 미군으로 참전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워싱턴 구미의원부 위원을 역임했다.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 외무부 차관보, 체신부 장관, 서울특별시장을 지냈으며, 국민의당, 신민당, 민중당 등에서 활동했다. 독립운동 공로로 건국포장을 받았으며, 198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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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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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3년 10월 20일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학력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경력
정치 경력
기타

2.1. 생애 초기

1903년 10월 20일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서 태어났다. 영월공립보통학교, 춘천농업학교, 중동중학고등과를 졸업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시베리아로 가 상해 임시정부의 시베리아 기관인 한인군사위원회(韓人軍事委員會)의 위원이 되었다.

1920년 일본과 싸우려면 먼저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주오 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했다. 주오대학 경제과 입학 후에도 일본 관헌의 감시를 받게 되자 "조국이 일본의 통치를 받는 한 일본에 머무를 수 없고, 미국으로 건너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주오대학 재학 중 두 번이나 여권을 신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그러나 미국으로 가겠다는 집념을 굽히지 않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1924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 중, 안창호, 김구의 권유를 받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학업에 전념하며 이승만, 서재필 등의 거처에 출입하였다. 미국 버클리대학 정치학부를 졸업하고, 인디애나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1930년 수료하였다.

2.2. 독립운동

1920년 일본과 싸우려면 차라리 먼저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유학 중, 주오 대학 재학 중 두 번이나 여권을 신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그러나 미국으로 가겠다는 집념을 굽히지 않고 우선 상하이로 건너갔다.

1924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 중, 안창호, 김구의 권유를 받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건너간 그는 학업에 전념하며 이승만, 서재필 등의 거처에 출입하였다.

1931년~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재 워싱턴 구미위원부 위원을 역임했다. 이후 미군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팽팽하게 나뉘자 그는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77년 독립운동 공로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2.3. 정치 활동

1948년 단독정부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팽팽하게 나뉘자 그는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강원 영월)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12월 7일~12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 연합 총회에 대한민국의 유엔승인을 위한 홍보사절로서 장면(단장), 김활란, 조병옥, 정일형, 전규홍, 김우평, 김준구와 함께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하였다.

1949년 2월 4일 ~ 1949년 6월 13일 외무부 차관보를 역임했으며, 1949년 ~ 1952년 체신부 장관을 지냈다. 1960년에는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10월 9일 국민의당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67년 신민당 중앙당 지도위원을 지냈으며, 같은 해 3월 윤보선의 대통령후보 선거사무장에 선출되었다.

1971년 1월 국민당 사무총장이 되었으나, 3월 24일 대통령 후보자 지명에 반발하여 국민당을 탈당하였다. 1972년 4월 민중당 총재가 되었다.

3. 저서

* 《우익 정당의 단합론》
* 《우익 정당의 갈 길》

4.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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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선거 종류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48년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무소속12,375표 (31.66%)1위당선초선
1954년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무소속3,041표 (15.29%)4위낙선
1960년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무소속10,383표 (24.89%)2위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