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티스트 바가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바티스트 바가자는 부룬디의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1976년부터 1987년까지 부룬디 대통령을 역임했다. 투치족 출신으로, 벨기에에서 유학 후 부룬디 군에 입대하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집권 초기 부패 척결과 후투족의 상황 개선을 위한 개혁을 시도했으나, 일당 독재를 강화하고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여 많은 부룬디인들을 소외시켰다. 1987년 쿠데타로 실각한 후, 망명 생활을 거쳐 귀국하여 정당을 창당하고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2016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부룬디의 군인 - 미셸 미콤베로
미셸 미콤베로는 부룬디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후 일당 독재 체제를 수립하고 후투족에 대한 차별과 탄압을 자행하며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 부룬디의 군인 - 피에르 부요야
피에르 부요야는 투치족 출신 부룬디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두 차례의 쿠데타와 대통령 재임을 통해 부룬디 정치를 이끌었으며, 민정 이양 시도, 내전 종식 기여, 그리고 암살 혐의와 종신형 선고 등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 부룬디의 대통령 - 미셸 미콤베로
미셸 미콤베로는 부룬디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후 일당 독재 체제를 수립하고 후투족에 대한 차별과 탄압을 자행하며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 부룬디의 대통령 - 피에르 은쿠룬지자
피에르 은쿠룬지자는 부룬디의 정치인으로, 2005년부터 2020년 사망 시까지 부룬디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2015년 3선 도전으로 헌법 위반 논란과 반정부 시위를 야기했고, 2018년 헌법 개정을 통해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으나 2020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 - 헨리 7세
헨리 7세는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승리하여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후 튜더 왕조를 창시하고, 요크 가문과의 결혼을 통해 장미 전쟁을 종식시키며 왕권을 강화하고 잉글랜드의 안정과 번영에 기여한 인물이다. -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 - 피델 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의 혁명가이자 정치가로서, 쿠바 혁명 이후 47년간 최고 지도자로 군림하며 사회주의 체제 구축과 미국과의 대립을 심화시키는 등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장바티스트 바가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순서 | 2대 |
직책 | 부룬디 대통령 |
임기 시작 | 1976년 11월 1일 |
임기 종료 | 1987년 9월 3일 |
수상 | 에두아르 은잠비마나 (1976년~1978년) |
출생일 | 1946년 8월 29일 |
출생지 | 루안다우룬디 루토부 |
사망일 | 2016년 5월 4일 |
사망지 | 벨기에 브뤼셀 |
배우자 | 파우스타 바가자 |
자녀 | 4명 |
정치 | |
정당 | 민족진보연합 민족재생당 |
군 경력 | |
소속 | 부룬디 |
범죄 정보 | |
유죄 판결 | 전 대통령 피에르 부요야에 대한 음모 |
수감 장소 | 음팡가 교도소 (1997년) |
2. 생애
(내용 없음)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바가자는 1946년 8월 29일, 당시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루안다-우룬디의 부루리주 루투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투치족의 한 갈래인 히마족이었다.[2] 그는 부줌부라에 있는 가톨릭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독립한 부룬디 왕국의 군대에 입대했다. 1966년에는 벨기에로 유학을 떠나 1971년까지 브뤼셀의 왕립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했으며,[2] 사회학 학위를 취득했다.1972년 부룬디로 돌아왔다. 바가자는 미셸 미콤베로 대통령 시절 후투족을 대상으로 자행된 이키자 학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있으나, 정확히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1] 같은 해 5월, 그는 대위 계급으로 군수 물자를 담당하는 참모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주로 미콤베로와의 가족 관계 덕분이었으며, 숙청된 후투족 장교 마르탱 은다야호제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었다. 그해 11월에는 중령으로 진급하여 참모총장이 되었다. 1975년 5월에는 부룬디 최고 법원 산하 회계부의 일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2. 2. 독재
1976년 11월 1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미셸 미콤베로 대통령을 축출했다.[1]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30명으로 구성된 최고 혁명 위원회라는 군사 정권을 수립했으며, 1976년 11월 10일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2]집권 초기, 바가자는 부패 척결과 미콤베로 정권 하에서 탄압받았던 후투족의 상황 개선을 목표로 하는 완만한 개혁을 추진했다. 세금 및 행정 개혁을 단행했으며,[2] "매일 오전 7시 30분에 출근했다"고 알려질 정도로 성실하게 업무에 임하여 직업 윤리에 대한 존경을 받기도 했다.[2] 일부 후투족 난민들의 귀환을 허용하고,[2] 첫 내각에 후투족 장관 2명을 임명하는 등[1] 후투족에게 일부 정부 직책을 부여했다.[2] 1977년에는 부룬디의 봉건제적 토지 제도였던 ''Ubugererwa''를 폐지하고 ''ikori'' 인두세를 폐지했으며,[2] 일부 투치족 소유의 토지를 후투족 농민에게 이전하기도 했다.[2] 이러한 조치들은 후투족 사이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공식적으로 바가자는 민족에 대한 언급을 금지하고 모든 국민을 '부룬디인' 또는 더 넓게는 '아프리카인'으로 칭하며 국가의 민족적 긴장을 해결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연구원 나이젤 와트는 이러한 움직임이 투치족 엘리트의 지속적인 지배를 위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바가자는 투치족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위를 유지하도록 했으며,[2] 실제로 바가자 통치 기간 동안 경제 및 교육에서 후투족의 소외가 증가했다. 이것은 급진적인 후투족 해방당(PALIPEHUTU) 정당과 무장 단체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바가자 집권 시기에는 소규모 자본주의 농업의 출현을 허용하기 위한 경제 현대화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이는 현재 부룬디 에너지 인프라의 기반을 형성하는 두 개의 새로운 수력 발전 댐 건설을 포함했다.[2] 그는 또한 도로 건설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식수 공급을 확대했으며, 탕가니카 호에 항구를 개발했다. 그의 인프라 투자는 커피, 차, 설탕에 의존하게 된 부룬디의 수출 경제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1] 국제적으로 바가자는 다양한 정치 세력 사이에서 성공적으로 관계를 조율하여 서방 진영, 동구권, 중국, 그리고 아랍 세계로부터 경제 원조를 확보했다.[1][2] 그는 대규모 콩고 이민자 공동체를 부룬디에서 추방했는데, 이는 그들이 스스로 떠나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루어졌다.
바가자 정권은 1981년에 새로운 국가 헌법을 도입하여, 그가 자신의 리더십 하에 재조직한 민족 진보 연합(UPRONA) 하에서 부룬디를 일당 독재로 굳혔다. 1984년 부룬디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전국 득표율의 99.6%를 얻어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3] 선거 후 바가자는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 부룬디 가톨릭 교회에 대한 군사 작전을 조직했다.[2] 정권이 점차 탄압적으로 변함에 따라 교회는 더욱 표적이 되었다. 외국 선교사들이 추방되었고, 대중과 교육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바가자는 가톨릭 미디어와 교회 예배를 금지하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문해 교육 센터를 폐쇄하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국유화하고, 교회 인물들의 체포와 고문을 명령했다. 그는 기테가 대성당을 포함하여 87개의 교회를 폐쇄하라고 명령했다.[2] 개신교 미디어도 표적이 되었다. 그는 또한 술집 영업을 제한하고 부룬디인들이 전통적인 약혼 및 애도 의식에 쓸 수 있는 시간과 돈을 공식적으로 제한하는 것과 같은 다른 "괴짜스러운" 정책을 시행하려고 했다.[1] 밥 크루거는 이러한 정책이 궁극적으로 너무 많은 부룬디인들을 소외시켜 바가자의 축출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는데,[1] 이는 와트도 공유하는 견해이다.
2. 3. 실각과 민주 정치 참여
1987년 9월, 바가자가 캐나다의 퀘벡을 방문 중일 때 피에르 부요야 소령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정권에서 축출되었다. 부요야는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1] 바가자는 이웃 나라 우간다로 망명했다가, 이후 리비아로 건너가 1993년까지 머물렀다.[4]그는 1993년 부룬디 입법 선거를 통해 후투족이 권력을 잡는 것에 반대했으며, 부룬디 최초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인 멜키오르 은다다예에 대한 쿠데타 시도에서 주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데타 세력은 은다다예 대통령을 살해했지만 정권 장악에는 실패했고, 권력은 다시 민간 정부로 돌아갔다.[5] 바가자 본인은 쿠데타 연루 사실을 부인했다.[1][6]
쿠데타 시도가 실패한 후, 바가자는 부룬디로 돌아와 국가 재건을 위한 정당(PARENA)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다.[10] PARENA는 투치족 중심의 극단주의 정당으로 평가받았다.[2] 그는 전직 국가 원수 자격으로 부룬디 상원의 종신 상원의원이었다.[7][8] 당시 바가자는 부룬디 민주주의 전선(FRODEBU)과 같은 후투족 정치 세력과의 권력 분점 합의에 반대하는 등 극단적인 견해를 보였으며, 나중에는 부룬디를 "투치랜드"와 "후투랜드"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1997년 1월 18일, 바가자는 당시 대통령이던 부요야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위해 무기를 모았다는 혐의로 가택 연금되었다. 2개월 뒤 가택 연금은 징역형으로 바뀌었으나, 곧 풀려났다.[9] 이후 그는 부룬디 내전 종식을 위한 평화 회담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와 PARENA는 후투족 반군과의 권력 분점 합의 이행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고, 이로 인해 정부는 2002년 11월부터 2003년 5월까지 바가자를 가택 연금하고 PARENA의 활동을 금지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바가자의 급진적인 지지자들이 "정의와 자유 연합 전선"이라는 반군 단체를 조직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PARENA가 새로 구성된 연립 정부에 참여하면서 긴장은 다소 완화되었다. 바가자는 2010년 대통령 선거에 PARENA 후보로 나섰지만, 당시 야당 연합이 선거를 보이콧하면서 함께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2014년 3월, 그는 PARENA 대표직에서 물러났고, 제논 님보나가 후임 대표가 되었다. 그는 부룬디 상원에서 주요 야당 지도자로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2015년 선거에 대한 야당의 보이콧에도 동참했다. 2015년 선거를 전후하여 부룬디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하자, 바가자는 생존해 있는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함께 국제 사회의 개입을 촉구하기도 했다.
3. 사망
2016년 5월 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4][15] 유족으로는 아내 파우스타와 4명의 딸이 있다.[13]
4. 평가
1976년 11월, 미셸 미콤베로 대통령을 무혈 쿠데타로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했다.[12] 그는 군사 독재 기구인 '''최고 혁명 평의회'''를 설립하고 스스로 의장이자 국가 원수로서 사실상의 독재 체제를 구축했으며, 같은 해 11월 2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투치족만을 우대하는 정책과 부패 문제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1987년 피에르 부요야가 일으킨 쿠데타로 실각하여 국외로 추방되었다. 추방 이후에도 정치 활동을 이어가, 기존 소속 정당인 민족 진보 연합(UPRONA)을 떠나 1994년 민족 부흥당(PARENA)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다.
참조
[1]
뉴스
Jean-Baptiste Bagaza, Deposed Leader of a Troubled Burundi, Is Dead at 69
https://www.nytimes.[...]
2016-05-04
[2]
뉴스
Jean-Baptiste Bagaza, ousted Burundian president, dies at 69
https://www.washingt[...]
2021-05-19
[3]
뉴스
Rule by Minority Persists in Burundi
https://www.nytimes.[...]
2016-11-12
[4]
웹사이트
Former Burundi president dies in Belgium
http://www.africanew[...]
2016-11-12
[5]
뉴스
Leader of Burundi Reportedly Killed in a Coup by an Ethnic Rival
https://www.nytimes.[...]
2019-11-07
[6]
뉴스
Burundi's President Killed in Coup
1993-11
[7]
웹사이트
POST TRANSITION SENATORS' LIST
http://www.senat.bi/[...]
2016-11-12
[8]
웹사이트
The Senate composition
http://www.senat.bi/[...]
2016-11-12
[9]
웹사이트
Burundi: Fear of ill-treatment / fear of torture
https://www.amnesty.[...]
1997-03-19
[10]
웹사이트
Burundi pays final tribute to former president Bagaza
http://www.africanew[...]
2016-11-12
[11]
뉴스
Jean-Baptiste Bagaza, ousted Burundian president, dies at 69
https://www.washingt[...]
ワシントンポスト
2016-08-05
[12]
뉴스
新大統領にバガザ中佐 ブルンジ
朝日新聞
1976-11-12
[13]
뉴스
Jean-Baptiste Bagaza, Deposed Leader of a Troubled Burundi, Is Dead at 69
https://www.nytimes.[...]
2016-05-04
[14]
뉴스
Jean-Baptiste Bagaza, ousted Burundian president, dies at 69
https://www.washingt[...]
2021-05-19
[15]
웹인용
Burundi pays final tribute to former president Bagaza
http://www.africanew[...]
2016-11-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