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티스트 오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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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바티스트 오드리는 프랑스의 화가로, 아버지이자 생 뤼크 아카데미 교장이었던 자크 오드리의 영향으로 미술 교육을 받았다. 그는 초상화가로 시작하여 정물화, 종교화, 사냥 장면을 주로 그렸으며, 보베 및 고블랭 태피스트리 제조소의 감독관으로도 활동하며 태피스트리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사냥 장면, 동물 묘사, 라 퐁텐 우화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 등이 있으며, 1740년대에는 코뿔소 클라라를 그린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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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바티스트 오드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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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일 | 1686년 3월 17일 |
| 사망일 | 1755년 4월 30일 |
| 사망 장소 | 보베 |
| 직업 | 화가, 태피스트리 디자이너 |
2. 생애
장바티스트 오드리는 초기에는 주로 초상화 작업에 집중했으나, 1715년경부터는 정물화, 특히 과일이나 동물을 묘사하는 작품과 예수의 탄생, 성 질, 동방 박사의 경배와 같은 종교적인 주제로 영역을 넓혔다.
장바티스트 오드리는 파리에서 화가이자 예술 중개인인 자크 오드리와 그의 아내 니콜 파피용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판화가 장바티스트 미셸 파피용의 친척이기도 했다.[1] 아버지 자크 오드리는 생 뤼크 아카데미 미술 학교의 교장이었으며, 오드리 역시 이 학교에 다녔다. 오드리는 처음에 초상화에 집중했으며, 1707년부터 1712년까지 니콜라 드 라르질리에르의 제자로 활동했다. 1708년 5월 21일, 22세의 나이로 두 형과 함께 졸업했다. 이듬해인 1709년, 그는 그림 수업을 가르쳤던 거울 제작자의 딸 마리-마게리트 프로아세와 결혼했다.[2]
오드리는 1714년 생 뤼크 아카데미의 조교수가 되었고, 1717년 7월 1일에는 교수가 되었다. 1719년에는 권위 있는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으며, 1743년에는 교수로 임명되었다. 초기에는 주로 초상화를 그렸으나, 1715년경부터 점차 과일이나 동물을 주제로 한 정물화 제작으로 옮겨갔으며, 예수의 탄생, 성 질, 동방 박사의 경배와 같은 종교적인 주제의 그림도 그렸다.
1720년대에 그는 왕립 보베 태피스트리 제조소의 소장 노엘-앙투안 드 메루로부터 의뢰를 받아, 당시 가장 상징적인 태피스트리 시리즈 중 하나가 된 '전원 오락'(Amusements Champêtres)의 디자인을 제작했다. 1734년에는 장바티스트 콜베르 아래에서 번성했던 보베 태피스트리 제조소의 재건 임무를 맡은 루이 파곤[6]에 의해 동료 베니에와 함께 미술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부를 쌓았다. 보베에서의 성공으로 1736년에는 고블랭 제조소의 감독관으로 임명되었고, 그의 작품은 이곳에서 태피스트리를 위한 밑그림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730년대 대부분 동안 태피스트리 디자인 제작에 집중했으며, 콩피에뉴 성을 위해 제작된 후 퐁텐블로 성에도 설치된 9개의 ''루이 15세의 사냥'' 시리즈(1733-46)가 유명하다.[7]
초상화가이자 세밀화가인 친구 장바티스트 마세를 통해 왕실 마구간 관리자인 베린겐 후작에게 소개되었고,[3] 1727년 그를 위해 한 쌍의 그림을 그렸다.[4] 이 인연을 통해 그는 '생 제르맹 숲에서 사슴을 사냥하는 루이 15세'(1730년 작)를 그리게 되었고, 이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사냥을 즐겼던 루이 15세를 위해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으며, 왕실 사냥 전담 화가로 임명되어[5] 사냥한 동물들을 그리는 역할을 맡았다. 오드리에게는 튈르리 궁전에 작업실이, 루브르 박물관에 아파트가 주어졌다.
회화 아카데미 고문 M. 헐츠의 의뢰로 은식기, 과일, 사냥감을 결합한 정물화를 제작하여 1737년 파리 살롱에 전시했다. 오드리는 작품 가격으로 10 피스톨을 제시했으나, 헐츠는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여 25 피스톨을 지불했다. 또한 루이 파곤의 방브와 퐁트네오로즈 자택을 아라베스크, 꽃, 새 그림으로 장식했다.[6] 오드리는 풍경화 제작 속도를 높이기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하기도 했으나, 원근법과 명암 효과가 부정확하다는 이유로 사용을 중단했다. 그는 뛰어난 동물화와 사냥 장면으로 유명했지만, 초상화, 역사화, 풍경화, 과일과 꽃 그림 등 다양한 장르를 다루었으며, 단색의 그리자유 기법, 청색지 드로잉, 파스텔 사용, 에칭 제작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했다. 종종 희귀한 새 표본을 받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주요 후원자 중 한 명인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2세는 오드리에게 두 쌍의 그림('두 마리 사슴이 수사슴 싸움을 지켜보는 모습'과 '암사슴 가족'; '멧돼지 사냥'과 '늑대 사냥', 1734년 인도)을 의뢰했다.[9] 그는 나중에 루이 15세의 동물원에 있던 대형 동물 그림 연작(원래 왕의 외과 의사 프랑수아 지고 드 라 페로니를 통해 의뢰되었으나[10] 그의 사망 후 판매 가능해짐)과, 1741년 유럽에 도착하여 17년간 유럽 순회 공연을 한 코뿔소 클라라의 실물 크기 그림(1749년 작)을 구입했다.[11] 이 작품들은 현재 슈베린의 주립 슈베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드리는 표트르 대제와 덴마크 국왕의 초빙 제의를 거절하고 프랑스에 머물렀으며, 많은 조수를 둔 큰 작업실을 운영했다. 말년에 파곤이 다니엘-샤를 트뤼데인으로 교체되면서 일부 직책을 잃었다. 이후 두 차례 뇌졸중을 겪었으며, 두 번째 발작 후 마비 증세를 보이다가 보베에서 사망했다. 그는 보베의 생토마 교회에 묻혔으나, 1795년 교회가 철거되면서 묘비명은 소실되었다가 후에 발견되어 생테티엔 교회로 옮겨졌다.
3. 주요 작품
1720년대에는 왕립 보베 태피스트리 제조소의 의뢰를 받아 '전원 유희'(전원 오락) 시리즈 디자인을 제작했으며, 이는 당대 가장 중요한 태피스트리 시리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2] 이후 루이 15세의 후원을 받으며 명성을 얻었는데, 특히 왕의 사냥 장면에 대한 열정을 반영한 '생 제르맹 숲에서 사슴을 사냥하는 루이 15세'(1730)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그는 왕실 사냥 전담 화가로 임명되어[5] 사냥감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을 다수 제작했다.
오드리는 보베 태피스트리 제조소의 재건에 기여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1736년 고블랭 제조소의 감독관 임명으로 이어졌다. 이곳에서 그는 유명한 '사냥 시리즈'(1733-46)를 포함한 여러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제작했다.[7] 그는 또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2세와 같은 중요한 후원자들의 의뢰를 받아 동물화와 사냥 장면을 그렸으며,[9] 특히 베르사유의 왕실 동물원에 있던 동물들을 그린 대형 그림들과 유럽 전역에서 유명했던 코뿔소 클라라를 그린 작품은 주목할 만하다.[11]
그의 작품 세계는 매우 다양하여, 초상화, 역사화, 풍경화, 정물화, 동물화 외에도 단색으로 그린 그리자유, 파스텔화, 에칭 등 여러 기법을 활용했다.
3. 1. 대표작


4. 작품의 특징 및 영향
장바티스트 오드리는 처음에는 초상화가로 활동했으며, 1707년부터 1712년까지 니콜라 드 라르질리에르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는 1708년 5월 21일 생 뤼크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714년에는 이 아카데미의 조교수, 1717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1719년에는 권위 있는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1743년에는 교수로 임명되었다.[2]
초상화 제작 이후, 오드리는 점차 과일이나 동물을 그린 정물화로 영역을 넓혔다. 또한 예수의 탄생, 성 질, 동방 박사의 경배와 같은 종교적인 주제의 그림도 제작했다. 1715년경부터는 동물화에 집중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사냥개나 사냥 장면을 주요 주제로 삼았다.
1720년대에는 왕립 보베 태피스트리 제조소의 소장 노엘-앙투안 드 메루의 의뢰로 '전원 유희'(또는 '전원 오락')라는 태피스트리 시리즈 디자인을 제작했는데, 이는 당대 가장 상징적인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친구 장바티스트 마세를 통해 왕실 마구간의 세습 관리자인 베린겐 후작에게 소개된 후,[3] 1727년 한 쌍의 그림을 그렸고,[4] 플랑드르 양식의 풍경화도 그렸다. 이 인연은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생 제르맹 숲에서 사슴을 사냥하는 루이 15세'(1730)를 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사냥을 즐겼던 루이 15세를 위해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고, 왕실 사냥의 공식 화가로 임명되어[5] 사냥감의 모습을 그리는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 오드리는 튈르리에 작업실을, 루브르 박물관에 거처를 마련하기도 했다.
정물화 분야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회화 아카데미 고문 M. 헐츠는 오드리에게 은식기, 과일, 사냥감을 결합한 정물화를 의뢰했는데, 이 작품은 1737년 파리 살롱에 전시되었다. 오드리는 작품 가격으로 10 피스톨(당시 화폐 단위)을 제시했으나, 헐츠는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25 피스톨을 지불했다. 또한 루이 15세의 의뢰로 '뷔페'라는 작품을 제작하여 왕이 아끼던 사냥 별장인 쇼아시 성에 배치하기도 했다(1743년 살롱 전시).
오드리는 태피스트리 디자인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헐츠의 추천으로 재정가 루이 파곤(1680-1744)을 알게 되었고,[6] 그의 방브와 퐁트네오로즈 저택을 아라베스크, 꽃, 새 그림으로 장식했다. 파곤은 침체된 보베 태피스트리 제조소를 되살리는 임무를 오드리에게 맡겼고(1734년), 오드리는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부를 축적했다. 보베에서의 성공은 1736년 고블랭 제조소 감독관 임명으로 이어졌고, 이곳에서 그의 작품들은 태피스트리 밑그림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730년대에는 태피스트리 디자인 제작에 집중하여, 콩피에뉴 성을 위해 제작된 9개의 '사냥 시리즈'(1733-46)가 유명하다.[7]
오드리는 풍경화 제작 속도를 높이기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원근법이나 빛과 그림자 효과가 정확히 표현되지 않는 점을 발견하고 사용을 중단했다. 그는 동물화와 사냥 장면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초상화, 역사화, 풍경화, 과일과 꽃 그림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다. 또한 단색으로 그리는 그리자유 기법, 청색지에 그림 그리기, 파스텔 사용, 에칭 제작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했다. 때로는 희귀한 새를 구해 그림의 소재로 삼기도 했다.
그의 명성은 프랑스를 넘어 해외에도 알려졌다.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2세는 주요 후원자 중 한 명으로, 오드리에게 여러 쌍의 동물 그림을 의뢰했으며('두 마리의 사슴이 두 마리의 수사슴의 싸움을 지켜보는 모습', '암사슴 가족', '멧돼지 사냥', '늑대 사냥' 등),[9] 루이 15세의 동물원에 있던 대형 동물 그림 연작도 구입했다. 이 동물 그림들은 원래 프랑스 왕을 위해 그려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왕의 외과의사 프랑수아 지고 드 라 페로니를 통해 제작 의뢰가 이루어졌고 그의 사후 판매가 가능해졌다.[10] 크리스티안 루드비히 2세는 당시 유럽 전역에서 큰 관심을 끌었던 클라라를 실물 크기로 그린 오드리의 그림도 구입했다.[11] 이 작품들은 현재 슈베린에 소장되어 있다. 오드리는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와 덴마크 왕으로부터 초빙 제안을 받았으나, 프랑스에 남아 자신의 작업실을 운영하는 것을 선호했다.
후대에 오드리의 작품은 재평가받았으며, 특히 1982년부터 1983년까지 파리 그랑 팔레와 미국에서 열린 할 N. 오퍼먼 기획의 전시회는 이 프랑스 화가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참조
[1]
문서
Bryan,1886-9
[2]
문서
Often incorrectly stated to be Froissié.
[3]
문서
Jean-Louis Beringhen had been ''premier écuyer'' to [[Henry IV of France|Henri IV]], and the post had descended in the family.
[4]
문서
Sold in his posthumous sale, Paris, 2 July 1770.
[5]
서적
Birmingham Museum of Art : guide to the collection
Birmingham Museum of Art
[6]
웹사이트
Catalogue des livres de feu M. Fagon, Conseiller d'Etat ordinaire, et au Conseil royal, intendant des finances. Dont la vente se fera en détail au plus offrant dernier enchérisseur Mercredi 5 Août 1744. & jours suivans, depuis deux heures de relevée jusqu'au soir en son Hôtel, ruë neuve des Petits-Champs
http://elec.enc.sorb[...]
elec.enc.sorbonne.fr
2011-10-11
[7]
간행물
The Genesis of the 'Chasses Royales'
The Burlington Magazine
1970-04
[8]
웹사이트
José de Rozas y Meléndez de la Cueva, 1st Count of Castelblanco - The Collection - Museo Nacional del Prado
https://www.museodel[...]
2020-06-08
[9]
문서
Frank, in {{harvnb|Morton|2007|p=32}}.
[10]
문서
Bailey, in {{harvnb|Morton|2007|pp=16–17}}.
[11]
문서
Frank, in {{harvnb|Morton|2007|p=37}}.
[12]
문서
Bryan,18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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